윤달 생전예수재기도

2009. 11. 17. 19:24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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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살아생전에 스스로 자기 갈 길을 닦는다는 윤달생전예수재기도 입재가 있습니다.


자식이 없다거나, 있어도 천하에 불효자이거나, 저 멀리 외국에 나가 살거나,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부모님 돌아가셔도 자기 믿는다는 종교에 가서 찬송 몇 번 부르면 끝나버리고 49재가 뭔지, 백재가 뭔지, 일년 소상과 3년 탈상이 뭔지, 제사가 뭔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후안무치한 자식며느리를 둔 분들이 행하는 의식이 바로 윤달에 행해지는 것이 생전예수재인 것입니다.


한국불교 조계종단에 이렇게 부동산이 많은 이유가 고찰에 가게 되면 흔히 볼 수 있는 공덕비들이 있을 것입니다.


바로 그 공덕비의 주인공들이 이런 분들로 자기 죽어 제사 지낼 후손이 없는 분들이 살아생전에 자기 지어먹던 논과 밭을 위토답이라 하여 부처님 전에 시주하고 절에서는 거기서 나오는 일년 소득으로 사찰 경제에 보탬이 되면서 위토답 주인의 제사상을 차리는 경비로 삼아 제사를 올려주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그 어려운 숭유억불의 속에서도 불교의 기운은 끊어지지 않고 살아 숨 쉬고 지금에 이르렀건만, “사자신중충”이라 백수의 왕 사자가 죽어서 꼼작도 않고 있어도 하이에나나 독수리가 덤벼들지 못하다가 사자 몸에서 나오는 벌레들이 사자의 위엄을 갉아먹기 시작하면 까마귀 떼가 날아들고 하이에나가 덤벼든다고 하듯이 요즘 승가나 우리 사회는 모두가 이 현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엊그제 가평 현리에서 일어난 이등병의 총기 사고를 보십시오.

이 시대 여야정치인들의 어리석음과 한 치도 다르지 않습니다.

잠깐의 한 순간을 이겨내지 못한 어리석음은 남과 자기를 결국에는 죽음에 몰아넣고 살아 있는 가족들에겐 지울 수 없는 상처만을 남기고 말았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성적만 좋아 대학교만 잘 들어가면 다 되는 이 시대의 풍조로 인해 만들어진 인성교육의 부재로 인과법의 허물어짐이 이와 같은 현상과 결과들을 양산해내고 있는 것입니다.


보험금을 노리고 자식은 자식대로 부모는 부모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남편은 남편대로 인과법이 허물어지면서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아내가 남편을 남편이 아내를 서로 이용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죽여서 자기의 욕심을 채우려는 서슴치 않는 이 현상들이 바로 지옥세계요, 아귀도의 모습일 것입니다.


이러한 원인들이 사실은 인과법이 무너지고 허물어지면서 삶의 지혜는 까마득히 멀어져버리고 눈앞의 이익만을 급급해하는 인간들의 욕구가 빗어내는 이 시대의 지옥일 것 입니다.


우선은 공부가 중요하다 할지 모르나, 예전 어른들은 다 “지 먹을 것 제가 가지고 태어난다고” 했습니다.


개천에 용 나기 어렵듯이 이 시대엔 그런 말들이 맞지 않을지 모르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자식의 인성을 지켜주는 것이 더 시급한 문제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가평의 총기사고와 총체적으로 섞어가고 있는 이 시대를 바로 가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입니다.


성당도 많고 교회도 많고 절도 많고 매 주일마다 성경 책펴들고 있고, 경전을 독송하고 무릎이 닳도록 절하고 기도하건만, 왜 이렇게 이 시대는 암울해지는가를 우리는 고민해봐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원인은 단 하나 인과법이 허물어졌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여기에 명심을 하고 자기의 삶에 인과에 걸릴 것을 사려보며 “불낙인과의 도리와 불매인과”의(전백장 후백장 고사) 도리를 들으며 이러한 시대적 어려움과 앞으로 내 자식들이 겪을 시대적인 혼란을 극복하는 참 지혜를 찾아 배워 가슴에 새겨 고난을 극복하고 뜻하는 모든 소구소원들이 성취할 수 있도록 해주는 기도법을 그것도 윤달에 더욱 의미 있는 지장기도 법을 중심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장경의 견문이익품에 보게되면,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현재와 미래의 세상에서 백천만억의 여러 가지 일들을 이루고자 하면 지장보살의 형상 앞에서 귀의하고, 예배하고 공양하고 찬탄할 지니라, 이리하면 여러 가지 소원이나 구하는 바가 모두 성취되느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기도에는 자력과 타력이 있습니다.

자력은 스스로의 힘에 의해 깨달음을 얻어 윤회를 벗어나 종국에는 부처에 이르는 자력신앙, 자력수행의 길이 있습니다만, 보통의 중생은 근기가 하열하고 나약하기에 바로 타력수행이자 타력신앙인 “나무아미타불” 이라는 타력신앙인 미타수행법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잘 나갈 때는 그토록 당당하고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던 사람들도 시련이 닥쳐오고 고난이 앞을 가로막으면 스스로 무기력해지고 자포자기해지면서 얼굴에 광채가 나고 당당하던 모습도 간데없이 초췌해지고 얼굴엔 어두운 그늘과 수심만 가득함을 볼 수 있습니다.


이리되는 이유는 心相에 그늘이 짐으로서 나타나는 현상인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는 어찌할 것인가,

전번에 말씀드렸던 사람처럼 주머니에 청산가리를 넣고 다니며 고뇌를 할 것인가, 아니면 심심치 않게 보이는 가족 모두와 함께 죽을 극단적인 어리석음을 행동에 옮길 것인가로 고뇌하는 억장이 무너지는 죄업장을 짓는 고민으로 시달릴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죽기보다 어려운 현실을 떠올리며 간절한 기도와 다겁생래 알게 모르게 뿌려온 죄 업장들을 참회를 통한 불보살님의 자비로움을 체득하는 순간을 이루게 되면 참회의 눈물과 복받치는 희열의 눈물이 함께 하는 순간에 그토록 어려웠던 모든 일들이 순순히 풀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타력수행이자 타력신앙이라 해도 엄밀히 말하면 이 또한 자력인 것입니다.

간절하고 또 간절함이 함께하는 한 녹이지 못할 업이 없고 이루지 못할 성취가 없는 것입니다.

기도의 성취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중도에 포기한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처신입니까?

그만큼 자신의 업이 지중함을 깨달아 더 분발해야하거늘 불보살님들의 가피력을 의심하는 어리석음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다만, 자신의 업이 지중하여 그 성취가 늦어지는 것일 뿐인 것입니다.

하지만, 어려움 속에서 고뇌만하고 기도를 하지 않는다거나, 기도를 하는 척은 해도 끊임없이 “과연 이렇게 기도해 가지고 될까?” 의심을 가지고 기도를 하는 이들을 종종 볼 수 가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기도 중간에 스스로 포기를 하거나, 기도를 마친다 해도 자기에게 닥친 업을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받는 경우를 허다히 보게 됩니다.


여러분, 기도는 불보살님들에게 귀의하여, 예배하고, 간절한 기도의 마음, 참회의 마음을 공양하고, 불보살님들의 덕을 찬탄하고 나도 이와 같이 살아갈 수 있도록 지극하고도 간절한 원을 세우기 시작했을 때, 우리의 소원을 성취되는 것입니다.

본인은 물론 자식들에게도 이러한 기도법을 알려주고 가족 모두가 나름대로 틈나는 대로 이러한 기도의 기운이 충만해지고 인과법이 살아나는 가족들이 된다면 그 집안에 어찌 어려움이 있을 것이며 설사, 숙세의 업으로 어려움이 있다 쳐도 일념으로 기도를 함께한다면 숙세의 업도 녹아들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들의 신행 생활이 자력을 바탕으로 한 타력수행을 해 간다면 항상 불보살님들의 명훈가피력은 그 집안과 함께해갈 것입니다.


이러한 명훈 가피력은 그 누가 해주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고 스스로 찾아가는 것임을 명심하시 바랍니다.

성불하십시오. 

 

 

 

 

한 채의 집을 짓듯이 삶을 짓는다/도종환 

 

 

유리하다고 교만하지 말고
불리하다고 비굴하지 말라

무엇을 들었다고 쉽게 행동하지 말고
그것이 사실인지 깊이 생각하여
이치가 명확할 때 과감히 행동하라

눈처럼 냉정하고, 불처럼 뜨거워라
태산같은 자부심을 갖고
누운 풀처럼 자기를 낮추어라.

교만하지 않으면서도 당당한 삶
비굴하지 않으면서도 겸손한 삶

역경이 닥쳤을 때든
그것을 극복했을 때든

늘 평상심으로 살아가는 삶
유연하되 원칙을 잃지 않는 삶

어려울 때마다 근본으로 돌아가
거기서 다시 시작하는 삶
그렇게 살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