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왜 화엄조사들은 불교 수행법의 하나로 보현행원을 정립하는데 실패했는가?
어떤 가르침이 수행법으로 정립되기 위해서는 정해진 의례가 필요합니다. 즉, 그 가르침을 담을 수 있고 구현할 수 있는 반복적 틀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보현행원은 우리가 일반 불교 수행에서 보는 그런 구체적 틀이 없습니다. 보현행원이 좋기는 좋은데, 보현행원을 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닦아야 하는가를 물을 때, 마땅히 알려줄 지침이 없는 것입니다.
예컨대 예경제불은 어떻게 닦는 것이며, 칭찬여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구체적 틀이 없는 것입니다. 독경이라면 경을 읽으면 되고, 염불이라면 부처님 명호를 부르며, 참선이라면 가부좌를 틀고 앉으면 되는데, 부처님을 공경하고 찬탄하라고 하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막막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과거 화엄학자들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입니다.그래서 무던히도 명확한 행원 수행의 틀을 만들이 위해 노력했던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가령 균여대사의 보현십원가도 하나의 사례입니다. 구체적 행원 수행법의 정립이 어려우니 대사께서는 노래를 지어 노래로써 보현행원을 수행하게 하신 것은 아닌가 저는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보현행원 자체가 생명의 노래이기 때문에 노래로 행원 수행을 하는 것도 좋은 방편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 대표적인 예로 송나라 화엄승 진수 정원(1011-1088)의 '보현행원수증의'를 들 수 있습니다. 수증의란 불교 사상과 이론을 많은 대중이 생활 속에서 되새기고 그것은 생활 속에 체현하여 자기 생활을 바꾸어 가도록 하는 신앙 의례라고 합니다.
그래서 진수 정원은 통서연기(通敍緣起), 권수이익(勸修利益), 단좌사유(端坐思惟) 등의 열 가지 차례에 의해 행원을 닦아 나가게 합니다. 그리고 비로자나불을 상징하는 불상과 단(檀)을 차려 놓고 화엄경에 나오는 법좌인 7처 9회의 법회를 표현하는 그림을 걸어 두고, 그 앞에서 향과 꽃, 등불을 밝혀 공양하고 경문 독송 및 발원을 함으로써 자신의 생활 속에 깃든 작은 잘못에서부터 진리에 어긋난 모든 버릇을 고쳐 없애 끝내 화엄이 말하는 행원의 세계에 들어라가고 합니다.
이 수행법은 제가 볼 때 매우 정교합니다. 진수 정원이 굉장히 신경 쓰서 고안한 방법인 것입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어쩐지 현실적이지 못합니다. 경에 나오는 행원 열 가지도 어찌 보면 번잡(?)스러운데, 다시 열 가지 차례를 만들고 그 하나 하나를 익혀야 하며 거기다 관법까지 익혀야 하니 말입니다. 그런 이유로 정교한 수증의가 보편적 행원 수행법으로 인정 받지 못하고 끝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보현행원은 왜 화엄 수행법으로 정립되는데 실패했을까요? 단지 이런 이유에서일 뿐일까요?
수행으로서의 보현행원이 성립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제가 보기에는 보현행원의 무 실체성(無實體性)에 기인합니다.
보현행원은 실체(?)가 없습니다. 딱히 무엇을 보현행이라 하는지 구체적으로 집어서 말할 만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실체가 없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전부, 모든 것이라는 것. 둘째는 무아상(無我相), 즉 나라는 아상이 없는 것입니다.
먼저 '실체가 없다' 는 말은 '모든 것'이란 말도 됩니다. 즉, 일부가 아니라 전체이기 때문에 실체가 없는 것입니다.
가령 무예의 고수는 특별한 무기나 기예만이 무예가 아닙니다. 평범한 행 하나 하나, 일상의 도구 하나하나가 모두 고수에게는 필살의 무기가 되는 것입니다. 전부가 무기입니다.
또 부처님 시대의 명의 기바 이야기에서 보듯, 명의의 눈에는 약초 아닌 풀이 없는 것입니다. 산하대지의 모든 풀이 모두 병을 낫게 하는 약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딱히 명약이란 것이 없습니다.
또한 부자는 굳이 통장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세상 돈이 전부 자기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통령도 특별한 신분증이 필요없습니다. 나라 안팎이 모두 알기 때문입니다. 빈 의자가 만인을 앉힐 수 있는 것도, 비었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실체가 거기에 없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이 곳곳에 나투실 수 있는 것도, 관세음보살님이 천수천안으로 중생이 부르면 언제든 달려가실 수 있는 것도, 부처님 보살님이 실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상이 있고 실체가 있다면 무애한 나툼이 가능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듯 보현행이 실체가 없다는 것은 어찌 보면 수행을 포함한 모든 행, 모든 삶이 보현행원이란 말도 됩니다. 그러므로 행원에서는 딱히 수행과 삶의 구별이 없습니다. 일상 삶이 바로 수행이 되는 것입니다.
선에서 그렇게 주장하는, 그리고 수행의 가장 높은 형태인 행주좌와 어묵동정의 수행이 보현행원에서는 초보자도 이룩되는 것입니다. 행원의 무실체성 때문에 굳이 삶에서 수행을 짓지 않아도, 그리고 삶과 수행을 구분하지 않아도 수행이 바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깊은 뜻을 알지 못하는 무지(?)로 인해 이런 무실체성이야말로 일반인들이 보현행원을 수행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결과가 초래된 것은 참 아리러닉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또한 실체가 없음은 나라는 것이 없음을 뜻하는데, 이러한 행원의 무아상(無我相)성이야말로 행원이 수행으로 정립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라고 저는 봅니다.
무릇 하나의 수행이 수행으로 정립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틀을 가져야 합니다. 일정한 틀이란 수행으로서의 카리스마, 상(相)을 가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령 주력 수행이라 하면 주력만이 갖는 특유의 카리스마가 있습니다. 참선도 염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수행들은 그런 틀을 중심으로 막강한 설득력과 집중력을 발휘합니다. 그러므로 일반인들은, 이러한 틀을 중심으로 밖으로만 향하는 자기 마음을 모으고 흩어지는 자신을 추려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이러한 일은 수행으로 각광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현행원은 그러한 틀, 그러한 상이 없습니다. 즉, 금강경에 나오는 대로 무아상(無我相)인 것입니다. 많은 대승 경전들이 무아, 또는 무아상을 가르치는데, 그러나 그런 것은 가르침으로만 머물며 실지로는 오히려 아상을 만들어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령 절을 많이 하면 '절을 잘 하는 아상(?)'이 만들어집니다. 참선도 염불 명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수행을 하면 할수록 수행이란 상이 더 확실히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도를 이뤘다는 것도, 깨쳤다는 것도 사실은 아상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상이 생기는 현상입니다. 이룬 도가 있고 깨친 바가 있다면 그것은 벌써 상이요 주객의 분리입니다. 그러니 이룰 도가 없고 깨친 바가 없는 경지를 많은 수행자들이 갈망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보현행원은 그런 것이 없습니다. 보현행원을 하면 할수록 나라는 실체(我相)가 없어집니다. 오직 온 세상 가득한 부처님만 남습니다. 그러니 수행이란 상이 만들어지지를 못합니다. 그러므로 행원에는 수행이란 게 아예 존재할 수가 없게 됩니다. 이 말은 반대로, 행원을 수행적 측면에서 접하는 경우, 무엇을 가지고 보현행원 수행이라 하는지 알 수가 없게 되는 결과를 가져 옵니다.
이 부분은 보현행원에 발심한 많은 분들이 만나는 딜레마인데, 이러한 딜레마가 보현행원의 진실로 뛰어남에 기인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상이 클수록 수행으로 각광받고, 아상이 사라질수록 수행으로서의 가치(?)는 사실 상 없어지는 것입니다.
마치 '대한민국 국민'이라 할 때 국민의 실체성이 없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서울사는 사람', 또는 '어느 동에 사는 사람'이라 하면 좀더 구체적으로 다가 오나 '대한민국' 혹은 '인류', 이렇게 말하면 뭐가 뭔지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울사람, 어디 사는 사람', 이렇게 구체화시키면 이해는 쉽고 이해관계에서 구체적 이익을 얻기는 쉬우나, 그만큼 차별과 대립은 피할 수 없습니다.
전체적 관점에서는 어디까지나 대한민국 국민, 또는 인류 차원에서 접근해야 좀더 보편적이고 평등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이익은 전체적 관점으로 접근하면 그만큼 멀어집니다. 그러니 우리는 말은 인류애를 외치지만 실상은 개별적 차별화에 좀더 관심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지로 보현행원을 하다 보면, 두 가지 중요한 현상이 나타납니다. 첫째, 나라는 것(我相)이 저절로 사라집니다. 둘째, 온 세상이 부처님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이 말은 결국 '주객(主客)의 소멸'입니다. 즉, 세상을 대립하게 하고 갈등하게 만드는 주관과 객관의 이분법이 소멸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부처님으로 가득 차게 된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부처가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가 부처가 되기에 너와 나의 구별과 대립이 사라지며, 아상이란 것이 있을 수가 없게 됩니다. 주관과 객관이 '부처님'이란 단어 속에서 소멸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보현행원을 하면 할수록 무엇이 보현행원만의 특성인지 알 수 없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세상 모든 것, 모든 일, 모든 존재가 보현행원이기 때문입니다. 삶도 보현행원, 진리도 보현행원, 번뇌도 보현행원, 깨달음도 보현행원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니 딱히 무엇을 집어 이것만이 보현행원이다! 라고 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특정 수행에서도 마찬가지인데, 보현행자는 절을 해도 보현행원, 참선을 해도 보현행원의 자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일체 만물을 공경하고 찬탄하는 그 마음으로 가득 찬 자리에서 절이 나오고 염불이, 참선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행원만의 특성인데, 이런 이유로 보현행원은 불교의 모든 수행법과 원융 회통하게 됩니다(나중에 설명드릴 예정임).
행원의 무아성! 저절로 소멸되는 수행의 상(修行相)이, 보현행원 수행자들이 만나는 가장 큰 딜레마이며, 또한 행원을 하나의 틀을 갖춘 수행으로 정립하는데 실패한 결정적 원인으로 저는 생각합니다.
실지로 가장 보현행원적으로 살아 가셨던 역사 상의 원효성사나 균여 대사, 그리고 근래엔 광덕스님의 경우, 나라는 것은 일체 잊고 오직 중생만을 위해 사신 분들입니다. 수행자의 본분인 수행마저 포기(?)하시고, 오직 중생만을 위한 삶을 걸어가신 분들로 문자 그대로 무아의 삶을 사셨기에, 원효성사나 균여대사같은 경우는 법을 이은 제자가 전무하며, 광덕스님 역시 잊혀진(?) 수행자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 한국 불교의 현실이라면 너무 심한 말씀이 될까요?
*註
1.보현행원을 하면 부처님으로 가득차게 된다는 것은, 행원품이 '이 세상은 수많은 부처님이 계신다'는 믿음(信)으로 시작되는 근거가 됩니다. 그리고 세상 모두가 부처로 변한다는 것은, 나와 부처 사이에 티끌만한 간격도 없다는 말도 됩니다.
이것은 수행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인데, 어떤 수행을 해도 나와 부처 사이에 간격이 없어야 합니다. 불교 수행은 그런 것을 강조합니다.
가령 염불을 해도 염불하는 내가 따로 있고 염불 듣는 부처님이 따로 있다, 고 생각하고 염불하면 여법한 염불이 되지 못합니다. 나와 부처님이 혼연일체가 되어야 참다운 염불입니다. 참선도 독경도 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에 반해 기독교의 수행은 창조자와 피조물의 구분이 확연히 있습니다. 피조물은 결코 창조주와 하나 될 수 없습니다. 주객이 끝까지 분리되는 것입니다.
2.주객이 사라진다는 것은 현대 양자물리학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양자물리학의 관점에서는 이 세상은 실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관찰자가 관찰할 때 객관적 세계가 비로소 전개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눈앞의 보이는 산, 강물들이 우리가 관찰하기 전에는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양자역학의 논리입니다.
이것은 아인슈타인도 이해를 하지 못한 부분인데, 아인슈타인은 이 세상은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실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관찰하지도 않았는데 우주는 어째서 실존하는 것일까요? 나중엔 언급이 되겠지만, 그것은 이 세상이 우리 혼자 사는 세계가 아니라, 수많은 중생들의 연기적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3.화엄은 언제나 모든 사물, 사항을 통째로, 전일적(全一的) 관점에서 보게 합니다. 이것은 화엄의 세계에서는 주객의 분리가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주객의 분리가 없기에 언제나 세상은 진실 그대로 보여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볼 수 있는 지혜를 불교에서는 '반야'라 합니다. 즉, 화엄관(華嚴觀)을 가지면 반야는 저절로 따라오는(?) 것입니다.이렇게 보면 결국 화엄관=반야안입니다.
화엄경이 '부처님으로 가득찬 경전', 또는 '부처님밖에 없는 경전'이라는 것은 이 세상의 대립이 소멸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즉, 화엄의 세상은 주객의 분리가 없는 세상이란 것입니다. 존재하는 분은 오직 한 분, 부처님뿐이며 존재하는 세상도 부처님 세상뿐입니다. 그것은화엄의 세계가 진리 그 자체라는것을 뜻합니다.
4.보현행원 수행 중에 만나는 무실체성은 보현행자가 극복해야 할 중요한 고비 중의 하나입니다. 이 고비를 넘겨야 진정한 행원의 광활한 세계를 만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