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경보현행원품]제1장2-3과거 보현행원 해석의 문제점

2009. 11. 17. 20:47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화엄경·보현행원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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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과거 보현행원 해석의 문제점

 


보현행원이 화엄 수행의 정수임에도 불구하고 수행으로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지금까지 기껏(?) '착한 일' 하는 정도의 윤리 수준으로만 머무르는데에는

몇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뛰어난 중국 화엄 조사들마저 그 중요성은 인정했으나

수행으로서의 보현행원의 정립을 놓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다음은 제가 생각하는 과거 보현행원 해석의 문제점들입니다.



첫째, 보현행이 무엇인지 그 내용 자체를 몰랐다


앞서도 말씀드렸듯, 60화엄, 80 화엄만으로는 보현행원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를 제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인데,

화엄을 해석하는데도 보현행원을 알고 모르고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보현행원을 알고 화엄경을 보면, 화엄경은 처음부터 보현행원이요

경 전체가 보현행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행원의 내용을 모르고 화엄경은 대하면,

화엄경 전체가 보현행원을 설한 것인지를 알기가 어렵습니다.


화엄경은 처음부터 수많은 대중들의 부처님 공경, 찬탄, 공양, 등으로 시작됩니다.

또한 화엄의 방대한 설법이 설해지는 것도, 보리도량에 참석한 여러 대중들이

부처님의 경계, 부처님의 세계가 어떠한 것인지 궁금하여

부처님께 말씀해 주시도록 청법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 전개되는 모든 말씀이 모두 보현행원의 연속입니다.

경 전체가 보현행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보현행원을 모르면 아니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법계에 살고 있는 생명의 원리는 보이지 않고,

법계의 구성인 하드웨어만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중국 화엄승들이 거의 모두 범했던  우이기도 합니다.


40 화엄이 나오기 전까지는 무엇이 보현행인지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경전에는 '보현행을 하라'고 나오지만,

그리고 비록 화엄승들이 보현행원을 강조하고는 있지만,

무엇이 보현행인지를 말하지 못하니

보현행 자체가 구름잡는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부처행을 하라' 라고 이야기할 때, 무엇이 부처행인지 딱 잡아

구체적으로 말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40 화엄에 열 가지 보현행이 명확하게 나오니까 말하기가 쉽지,

부처님이 하시는 행을 열 가지로 요약해 보라고 누가 문제를 낸다면,

답변을 내기가 무척 어려울 것입니다.



이런 고민은 화엄경 자체에서도 보이는데,

보현행, 또는 부처님 행을 열 가지로 구체화할 때 품마다 내용이 다른 것은

이런 이유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이런 문제점은, 보현행원품이 보완된 40 화엄이 나옴으로써 해결이 됩니다.



둘째, 40 화엄 이후에도 보현행원의 이해에 문제가 있었다



비록 구체적 열 가지 행원을 담은 40 화엄이 나왔지만,

그 이후에도 보현행원의 해석은 결정적 실수를 합니다.

그것은 우주의 근본 원리를 담은 보현행원을,

단지 '좋은 일'하는 정도의 '선행'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광활한 행원의 가르침을 제한적으로 가둬 놓은 것입니다.


이것은 보현행원의 부처되는 인(成佛因)을 모르고,

행원의 성불의 과(成佛果)만  보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즉, 행원이 성불로 이끄는 행임은 간과하고, 행원을 성불한 뒤 나오는

부처의 행으로만 생각한 것입니다(보현행원의 정통 해석 참조)


물론 중국 화엄종의 정통 해석은 인행으로서의 보현행원을 인정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론 측면이었지 실지 수행 측면에까지 끌어내리지를 못합니다.

이것은 참 아이러니한 사실인데,

이론을 설명할 땐 행원의 성불(成佛) 인행(因行)으로서의 가치를 중시하였지만

막상 구체적 수행을 말할 땐 묵묵부답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부처로 만들어 주는 성불인으로서의 행원,

즉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행원의 이론적 원리를 소홀히 했기에

결국 보현행원은 맹행(盲行)이 되고 맙니다.

그냥 좋은 일 하자!는 수준에서 끝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도 이어져, 보현행원이라 하면 불교 수행의 하나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착한 일 하는 정도로만 알고 계시는 분이 허다합니다.

불교 단체에 '보현행원'이란 이름이 들어간 곳을 보면 여실히 들어나는데,

그 곳은 보현행원의 이론이나 수행적 측면을 닦는 곳이 아니라

자선 단체의 이름을 그렇게 붙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결과,  불교의 전통 수행법으로서의 행원에 대한 가치는 평가절하되게 됩니다.

그리하여 보현행은 부처가 되면 자연히 나오는 행, 따라서 부처되기 전,

범부 중생의 입장에서는 굳이 닦을 필요가 없는 행으로 간주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끝은 '보현행원은 부처되는 수행법이 아니라 부처된 후에

살아가야할 교과서적 윤리'로 폄하되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셋째,우주적 가르침인 보현행원을 불교적 안목에서만 해석하려 했다.


보현행원은 사실 불교를 뛰어넘은(?) 가르침입니다.

나중에 다시 자세히 언급이 되겠지만,

보현행원의 원리는 불교의 테두리를 뛰어넘은, 전 우주적(universal)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불교적 안목으로만 해석하려 하는데서,

그래서 불교적 테두리에 가둬 놓는데서 행원의 비극(?)이 시작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종교 중에서 우주의 진리에 가장 가까운 가르침이 불교입니다.

그러나 불교 자체가 우주의 진리 그 자체는 아닙니다.

진정한 진리는 불교마저도 뛰어넘는 곳에 있습니다.

그러니 금강경에서도 불법이 불법이 아니다(佛法者 卽非佛法)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이론이라도 그 이론의 틀에 메여 있으면

100 % 정확한 진실은 보기 어려운 법입니다.

그러니 강을 건너고 나면 뗏목도 버리고 진리를 설하는 그 틀 자체도 버리는 것입니다.


섬기고 공양하는 보현행원의 가르침은, 전 우주적 가르침입니다.

깨달음, 수행, 해탈 등등 이런 개념을 뛰어넘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기존 불교의 개념으로 분석하는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가령 불교를 깨달음의 종교라 정의해 놓으면 화엄이나 보현행원은 불교가 아닙니다.

그것은 화엄이나 보현행원은 깨달음 너머의 세계를 말하는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화엄의 세계에는 깨달음이 이미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화엄의 초점은 그렇게 넘치는 깨달음을 어떻게 활용하느냐,

또는 이미 이루어진 깨달음을 현실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꽃피우느냐 하는데 맞춰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이 보현행원입니다.



그러니 깨달음을 이룩하는데 초점을 맞춘 눈으로는

이러한 광활한 화엄의 사상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깨달음을 실생활에서 꽃피우는 방법인 보현행원은

그 분들의 안목에서는 수행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 분들의 생각으로는, 수행이란 깨달음을 얻기 위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이미 넘치는 깨달음을 쓰는 방법이 보현행원이라고 하니,

이러한 개념을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 도 없겠지요.

이것은 화엄경이 성립될 때도 화엄경 편찬자들이 만났던 어려움인 듯합니다.

왜냐하면 화엄경에는

화엄을 알아 듣을 수 없는 분들의 이야기가 특별히 언급이 되기 때문입니다.


가령 자비가 없거나 선정에만 머물기 좋아하는 분들은

화엄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또 중생을 섭수하거나  

공덕을 찬탄하지 않는 분들도 화엄을 이해하실 수 없다고 합니다.

이를 현수 법장은 화엄경을 이해하고 수지할 수 없는 사람들을

다섯 종류로 나누어 다시 설명하십니다.

즉 보리심을 잊고 아무리 수행을 잘 해 보아야 소용이 없으며,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며 타인에 대한 자비심 없이

오직 자신만의 깨침과 해탈을 추구하는 분들은 화엄을 들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불교를 뛰어넘는 세상을 이야기하는 보현행원을

오로지 깨달음의 불교, 해탈을 구하는 불교의 수준으로 해석하려 한 것은

과거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범하고 있는 잘못입니다.

그런 안목으로는 결코 보현행원의 진실을 보실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도 수행자가 불교학자들 사이에서

보현행원을 불교 수행의 한 방법으로 보지 않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註

1.과거 동아시아에서 보현행원이란 단어는

모든 대승 보살도의 총칭이었덤 면이 강합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무엇이 보현행인지 딱 잘라 정의내리기 힘든 것이

일반 추세였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화엄종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아시아 불교 전반의 문제로 보입니다.

이런 경향이 40 화엄이 나옴으로써 십대행원으로 귀결되게 됩니다.

 
仙境 캐슬파인

    ★*…

    仙境 캐슬파인 봄비 머금은 매지구름 한 조각 떠있는 天上天壇(천상천단) 들머리 지나 구불구불 曲徑通幽處(곡경통유처) 농익은 春山野(춘산야)는 碧紗(벽사)천 두르고 群芳隨(군방수) 내음의 沁芳(심방)앞 堯汀花(요정화서) 신선이 휘갑쳐 놓은 蓬萊仙境(봉래선경)이 여기로구나 너는 보았는가 어릴적 뛰놀던 山·山·山 너는 들었는가 솔잎바람에 고향노래를 아버지 손잡고 뒷동산 오르면 온통 野花(야화)밭 화사함을 그리고 쌩그레 떠오르는 고운 얼굴 여기에 고향의 진정한 사랑이 머문다. * 素描詩抄(소묘시초)는 자연과 사람에게서 느끼는

    소박한 감성을 담아내어 스포츠와 문화를 접목한 것이다.

    [詩語 풀이]

    蓬萊仙境 : 신선이 사는 봉래산 曲徑通幽處 : 구불구불한 길 너머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 碧紗 : 푸른 비단 群芳隨 : 명산에서 처음 돋아난 풀들과 여러 가지 희귀한 나무의 진액을 섞어 만든 향료. ㆍ沁芳 : 꽃향기 스며들다 堯汀花 : 들꽃 만발한 물가


 

 

    화암사에서/보경화


      화암사 대웅전의 부처는 
      아무 말 없는데 
      무슨 설법 들으려고 
      저 산들은 풀빛 옷 깨끗이 갈아입고 
      그 앞에 나지막이 부복해 있는가. 

      겹겹의 산에 
      밀려나 앉은 동해가 
      법당을 나서는 내게 선뜻 
      눈 맞추며 일어서지만 
      나는 전해 줄 말이 없네. 

      내 온몸이 귀가 되어도 
      듣지 못한 말 
      반짝이는 나뭇잎들은 알아들은 게지 
      아름답게 가고 흐뭇하게 오는 길이 
      저리도 다소곳한 걸 보면 

      어지러운 내 심정이 
      풀빛으로 물들 수 있다면 
      부복해 있는 산들의 맨 뒤쯤이면 어떠랴 
      귀만 있는 산이어도 좋겠네.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신평리 473번지에 위치한 금강산 화암사. 
금강산 일만이천봉, 팔만구암자 가운데 남쪽에서 시작되는
 첫 봉우리(신성봉) 아래 첫 암자
 
늦게 핀 사랑 (Too Late) Violin Instrument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