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1. 18. 20:39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나를 흙이나 걸레처럼 아낌없이 쓰련다 / 일엽스님
‘수덕사의 여승’ 일엽(一葉, 1896∼1971) 스님은 신학문을 섭렵한 문인이자 선각자로, 출가 후에는 만공 선사의 법맥을 이은 선승으로 칭송 받았던 인물이다.
1896년 평남 용강군 삼화면 덕동리에서 5남매 중 맏딸로 태어난 스님은 부친이 목사인 까닭에 어려서부터 기독교계 학교를 다니며 자연스럽게 신학문을 접했다. 그러나 1907년 갑작스런 어린 동생의 죽음은 이후 스님의 파란만장한 삶을 예고했다. 12세의 어린 나이에 동생의 죽음을 접한 스님은 그 통탄의 심정을 글로 옮겼고, 이것이 한국문학상 신시의 효시로 불리는 ‘동생의 죽음’이었다.
그러나 불행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14세 되던 해 스님의 어머니마저 세상을 등졌고, 남은 동생들도 차례로 단명(短命)하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어린 나이에 가족들의 잇단 죽음이라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던 스님은 이후 서울로 상경, 이화학당에 입학하며 학업을 이어나갔다. 이후 동경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스님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여성 잡지를 통해 신여성운동론을 전개했다. 특히 화가 나혜석과 더불어 ‘자유연애론’과 ‘신정조론’을 외치며 개화기 신여성운동을 주도했다.
그러던 스님이 불가(佛家)에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백성욱 박사와의 만남 이후부터다. 독일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와 당시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던 백 박사와의 만남은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고리타분하게만 여겼던 불교 속에 그녀가 그토록 오랫동안 꿈꿔왔던 자유와 평등의 세계가 있었음을 깨달았다.
1928년 스님의 나이 33세 되던 해, 불문에 들어선 스님은 수행에 있어서도 남달랐다. 만공 스님의 지도편달로 오후불식, 장좌불와는 물론 목숨을 건 구도행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몇 해가 흘러 마침내 스님은 ‘고인(古人)의 속임수에 헤매고 고뇌한 이 예로부터 그 얼마인가. 큰 웃음 한소리에 설리(雪裏)에 도화(桃花)가 만발하여 산과 들이 붉었네.’라는 오도송을 부를 수 있었다.
스님은 이후 중생제도와 비구니 스님의 위상을 회복하는 일에 앞장섰다. 특히 스님은 『어느 수도인의 회상』, 『청춘을 불사르고』 등 숱한 저술을 통해 불교에 대한 세간의 관심을 크게 불러일으켰으며 당시 이렇다 할 비구니 수행처 하나 변변치 않았던 한국불교에 비구니총림원을 추진하는 등 후학 비구니들을 위한 일에도 앞장섰다.
그렇게 시대의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무의 뿔처럼 한 평생을 꿋꿋이 살았던 일엽 스님은 1971년 1월 28일 세수 76세, 법랍 43세로 입적했다.
▷목사의 맏딸로 태어나서 대학교육까지 받았다면 자타가 인정하는 ‘신여성’인데 어떻게 불교와 인연이 됐나요?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참고자료
일엽스님 어록 “나는 이 몸이나 이 혼의 의존이 아닌 불출구(不出口)의 나다. 두려울 것은 없다. 우주가 무장을 하고 대든다 해도 나를 이길 수 있는 인간은 그 생기기 이전에 있었다. 천당과 지옥은 상대적인 것, 설사 지옥에 가서라도 내 마음을 내가 부리면 이에서 독립하여 초월할 수 있다.”
“누굴 믿으나 극치를 이루면 각(覺)이 되어 구원을 얻게 된다. 백척간두의 낭떠러지에서는 나를 생각지 말아야 한다. 나를 던짐으로써 모든 것을 완전히 잊는 무아의 경지가 불심이 아니겠는가. 우선 인력(人力)으로 못할 일이 현금적(現今的)으로 이루어질 때 믿음이 는다. 믿음의 성장이 정신력이고 정신력이 바로 삶의 바탕이며 인간의 본체인 것이다.”
“내가 할 도리라면 나를 흙이나 걸레처럼 아낌없이 쓰련다. 흙은 아무리 써도 단단해지고 걸레는 더러운 것을 훔쳐내므로 그 자리는 언제나 깨끗하게 남아있다.”
찬탄과 공경 “한 잎사귀 조각배가 험한 바다 헤쳐가서 고해를 다 건너 피안에 다달았네. 돌아가고 오는 것이 사바세계의 일이니 언제나 중생을 제도하여 부처의 은혜를 갚으리.” (전 조계종 종정 청담 스님)
“날을 맞도록 보고 싶고 밤이 다하도록 보고 싶고 일생이 다하도록 보고 싶었던 것이 대해노니 한 마디 할 것 없소. 이것이 일엽 스님의 본래 면목이로다. 필경에 여(如)하오. 무(無)…” (전 망월사 주지 춘성 스님)
“청춘이 모두 꿈임을 홀연히 깨닫고 바른 생각 굳건히 지켜 자기 사(事)를 밝히셨네. 만 가지 인연을 한꺼번에 쉬어 스스로 태평을 찾으니 한 잎사귀 봄 광명, 눈(眼) 가운데 살았네.”(덕숭총림 방장 원담 스님)
습관적인 만남은 진정한 만남이 아니다. 그것은 시장 바닥에서 스치고 지나감이나 다를 바 없다. 좋은 만남에는 향기로운 여운이 감돌아야 한다. 그 향기로운 여운으로 인해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함께 공존할 수 있다. 사람이 향기로운 여운을 지니려면 주어진 시간을 값없는 일에 낭비해서는 안 된다. 쉬지 않고 자신의 삶을 가꾸어야 한다. 그래야 만날 때마다 새로운 향기를 주고받을 수 있다.
- 법정의《아름다운 마무리》중에서 -
어느 부인의 9일간 천국 만들기
어느 날, 한 부인이 가정생활을 비관하며 간절히 빌었습니다. “하느님! 빨리 천국에 가고 싶어요. 정말 힘들어요" 그때 갑자기 하느님이 나타나 말했습니다. “살기 힘들지? 네 마음을 이해한다. 이제 소원을 들어줄 텐데 그 전에 몇 가지 내 말대로 해보겠니?" 그 부인이 “예!” 하자 하느님이 말했습니다.
“얘야! 집안이 지저분한 것 같은데 네가 죽은 후 마지막 정리를 잘하고 갔다는 말을 듣도록 집안청소 좀 할래?” 그 후 며칠 동안 그녀는 열심히 집안 청소를 했습니다. 3일 후, 하느님이 다시 와서 말했습니다.
“얘야! 애들이 맘에 걸리지?
네가 죽은후 애들이 엄마가 우리를 정말 사랑했다고 느끼게 3일 동안 최대한 사랑을 주어볼래? 그 후 3일 동안 그녀는 애들을 사랑으로 품어주고 정성스럽게 요리를 만들어주었습니다.
다시 3일 후, 하느님이 말했습니다.
“이제 갈 때가 됐다. 마지막 부탁 하나 하자! 너 남편 때문에 상처 많이 받고 미웠지?
그래도 장례식 때 ‘참 좋은 아내였는데'라는 말이 나오게
3일동안 남편에게 최대한 친절하게 대해줘 봐라.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천국에 빨리 가고 싶어 그녀는 3일동안 최대한 남편에게 친절을 베풀어주었습니다.
다시 3일 후, 하느님이 말했습니다.
“이제 천국으로 가자! 그런데 그 전에 네 집을 한번 돌아보려무나! 그래서 집을 돌아보니까 깨끗한 집에서 오랜만에 애들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고,
남편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있었 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까 천국으로 떠나고 싶지 않았고, 결혼후 처음으로 “내 집이 천국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인이 말했습니다. “하느님! 갑자기 이 행복이 어디서 왔죠?"
하느님이 말했습니다. “지난 9일 동안 네가 만든 거야!" 그때 부인이 말했습니다 "정말이요? 그러면 이제부터 여기서 천국을 만들어 가며 살아볼래요!"
‘9일 동안 천국 만들기’의 기적은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가능합니다. 희생의 길은 행복으로 가는 밝은 길입니다. 희생의 짐을 지면 인생의 짐이 가벼워집니다.
나 너를 위해 모든 것을 걸 때 너 나를 위해 모든 것을 겁니다.
희생은 부담스럽지만 그 부담을 각오할 때 행복의 신비가 찾아옵니다.
'자기 몰입의 신비주의자'는 되지 말아야 하지만 ' 희생의 신비를 아는 자'는 되어야 합니다.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삽니다. 더 나아가 죽이고자 하면 죽고, 살리고자 하면 삽니다. 이 역설의 진리를 잘 소화하는 소화력이 있을 때 행복의 키가 부쩍 자라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출처 : 국민일보 불타는 명품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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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A Little Peace / Nicole Flie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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