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1. 24. 12:25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당신이 주인공입니다
의존이라고 하면 어디에 의지해서 살아가려고 하는 것이죠.
자족이라고 하면 자기 스스로 만족하면서 사는게 자족입니다.
얼마전에 어느 서울시내를 지나가는데요.
어떤 노점하는 할머니가 내가 지나가는데 막 뛰어오시더라구요.
그래서 나를 쫓아오느냐? 그러니까 그렇다 그래요.
왜 그러냐? 그랬더니 불교TV에서 봤는데 방송에서 의존하면 안된다고 그러드래요.
자기 아들이 결혼을 하는데 약간 아내될 사람에게 의지하는 것 같다고.
그래서 그 사람하고 결혼하면 경제적인 도움은 좀 받을 것 같은데
바람직한 대상은 아닌 것 같다고 그거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지나가는데 묻더라구요.
갈 길은 바쁘고 그래서 '아이구 의존하면 안돼요 그러나 잘 상의해서 하세요'
돌아오면서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그분한테는 절실하더라구요.
그래서 방송에 들었던 거는 평소에 거기에 대해서 생각이 많이 있었으니까 기억에 남은 거거든요.
그런데 쉽게 뿌리칠려니 힘도 들것같고...
그러다가 어떻게 보니까 방송에서 말하던 사람이 지나가니 다시 한번 물어봐야 되겠다
이러구 쫓아오신 것 같아요.
이게 갈등입니다. 자족적으로 사느냐? 의존해서 사느냐?
이게 아주 중요한 문제거든요.
우리가 일상생활속에서 이 의존도가 상당히 높습니다.
그래서 의존에 상당히 심각한 걸 중독이라 그럽니다.
그래서 알콜에 의존도가 높으면 그걸 알콜중독이라 그러고요
컴퓨터게임 같은데 의존도가 높으면 게임중독이라 그러잖아요.
또 도박이나 이런 데 자꾸 의존하게 되면 도박중독이라 그러고..,
일단 중독이 되면 자기를 어떻게 조절할 수 없는 경지까지 가는거죠.
의존이라는건 바라는 마음인데요.바라는 마음이 없으면 불만이 없습니다.
미워하는 마음도 의존이고 또 못마땅해 생각하는것도 의존이고
무서워하는 것도 의존이고...이걸 깊게 들어가보면 전부가 의존심입니다.
스스로 보고 스스로 해결하고 스스로 만족하지않고 어디에 의지해서 할려 그러는거죠.
그래서 여기저기 자꾸 헤매고 다니는 것도 의존이에요.
어디가면 더 좋은 게 없겠나. 아! 어디가니까 경치가 참 좋더라.
경치 좋으면 경치가 좋지 내가 좋은게 아니잖아요.
그리고 자꾸 사진찍을려 막 애쓰는 것도 그것도 의존이에요.
역시 나무라든지 돌이라든지 그건 나무고 스스로 돌이지
카메라에 담는다고 그래서 그게 달라지는게 없거든요.
사진 무리하게 찍다가 뒤를 잘못보고 찍다가 떨어져서 죽는 사람도 있어요.
그러면 그건 보이니까 죽는게 보이니까 알지만
우리 정신적으로는 스스로도 지금 떨어져 죽는데 모르고 죽는거에요. 의존이 하도 깊으니까.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매사가 다 그래요.
요즘 세대간의 갈등도 따지고 보면 의존입니다.한번 아침에 버스타고 나가는데요 한 65세쯤 된 할아버지인데 이분이 밀지마 밀지마 이래요.
아침시간인데 약간 차가 복잡하니까 어떤 젊은 여자분이 아마 밀었던 가봐요.
여자분은 뒤에서 뭐라냐면 '왜 반말하세요'이러더라구요.이게 문화충돌입니다.
할아버지는 어릴때부터 도덕교육을 받고 자라신 분입니다.도덕세대에요.
그러니까 차가 복잡하든지 뭐해도 그렇게 밀면서 허둥지둥하면 안된다,
남에게 피해를 주면 안된다.이런 도덕의식이 강하니까.
자신도 모르게 밀지마 밀지마 한거에요.당연한거 아닙니까?
이 젊은 사람은 왜 처음보는 사람한테 반말하느냐 이겁니다
이거는 반말이라고 하는 것은 반말 들을 의무가 없거든요.이건 인권입니다.인권은 법률이죠.
여기서 기성세대가 그냥 당해버리는거에요.
도덕과 법률이 충돌할 때 도덕이 지게 되어있어요.
노인분들이나 기성세대가 이 법률적 무장이 약하거든요.관습적 도덕에서 살아요
그러니까 왜 반말하느냐 그럴때 대응을 못하더라구요
겨우 변명한다는게 반말을 하고 싶어서 게 아니라 말하다보니 그래됐어요 어쩔거에요.이러더라구요
그게 해명이 됩니까? 당한거에요 그노인이!
밀지말라는 도덕적 가르침은 간데없고 인권문제에 휘말리게 되어있다구.지금!
밑의 세대로 내려갈수록 시민사회의 계약의식에 의해서 법률이 우선이에요.
법률에서 보호하는 것이 인권이거든요.이게 충돌이에요
그래서 젊은 사람들도 이게 법에 정당하냐 정당하지않느냐? 이걸 따지지!
이렇게 해석되는거냐 안되는거냐 이건 안따지거든요.
그럼 법에 의지해서 나의 권리를 취할려고 그러고 도덕적인 권위로써 자기존재를 확인할려고 그러고.
양쪽부분 전부 다 의존이거든요.
조금 넓게 생각하면 복잡할 때 조금 밀릴 수도 있죠.
그걸 그렇게 불만스럽게 생각할 것도 없잖아요. 그렇지않습니까?
또 말하다보면 반말할 수도 있죠.
밀지마밀지마했다고 그걸 반말이라고 그렇게 민감하게 따질 필요도 없는거 아니에요
이게 전부가 어디에 의존해서 어디에 의지해서 자기의 의미를 찾고 자기존재를 확인할려고하는
그런 의존심이 드러나니까 스스로 자족이 안되는거죠.
그리고 이런게 굉장히 많습니다.
어떤 분이 책에 글을 실었는데요.
아이를 데리고 시내에 나가서 자기가 돈을 내서 아이과자를 사서 준거에요.주고 집에 왔단 말이죠.
와가지고 뭐 볼일을 보다가 아이에게 사준 과자가
어떻게 보니까 먹음직스럽게 보여요 그래서 뜯어서 먹었대요.아버지가!
그러니까 아이가 딱 항의하는거에요. 아버지 왜 내과자인데 내 허락도 없이 자셨어요?
이게 뭡니까 이 충돌이 어떤 충돌이겠어요. 그러면 그 아이가 잘못일까요.아버지가 잘못일까요.
그런데 아버지는 순간 당황한거에요. 아버지가 왜 당황했을까요 이 부분에 준비가 없거든요.
여기 아버지들도 많이 계신 것 같은데요. 아이가 그러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그런데 아이입장에서 보면 그게 옳은거에요.
자 아버지가 돈을 내서 내몫으로 과자를 사줬다고 하자 그건 인정한다 이거에요.
일단 사줬으면 내껀데 내 과자를 아버지가 자실때에는 나의 허락을 받고 자셔야지.
허락도 없이 왜 자시냐? 이게 인권이고 이게 법률 아닙니까?
그런데 도덕으로는 아니거든요.
도덕적으로 보면 그 아들이라고 하는 존재자체가 부모에 의해서 부모한테서 나와서
아들 몸뚱이까지 전부 부모에 의해서 태생된 것이죠.
그리고 과자가 아버지 돈으로 다 마련된거라 말이에요.
그러니까 아버지는 충분히 그 과자를 자실 수 있고 엄격히 따지면 그 과자도 아버지과자고
아들도 부모아들이고 또 가족이라 그러는게 하나의 공동체라 그냥 일체를 형성하는 공간이다.
그리고 부모가 하신 것에 대해서 그렇게 하나하나 이의를 제기하고 이러면은
부모의 깊은 뜻을 모르는 것이고 부모의 은혜를 조금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건 당연한 것이다.
이게 도덕이거든요. 그런데 그 아이가 도덕을 모르는 거에요.법률만 아는거에요.
도덕과 법률의 충돌이 심각합니다.그런데 부딪히면 도덕이 지게 되어있다구요.
그래서 기성세대가 준비없이 이런 법률세대를 맞이하니까 당황하게 되는거죠.
결혼문제도 그렇고 결혼은 인권이거든요.
도덕적으로는 개입할 수 있어도 인권적으로는 부모가 개입할 수가 없거든요.
자기권리에요.자기가 누구를 선택하든지 하는 것은! 그렇잖아요.
반말도 반말은 나이많다그래서 반말을 들어야 한다는 의무규정은 법률에 없습니다.그렇지않습니까?
그래서 편리한 대로 또 익숙한 대로 의존을 해요.
연세 드신분은 도덕적 관습이 익숙하니까 항상 거기에 의존하구요.
젊은 사람들은 법률적 인권이 익숙하니까 거기에 의존해서...항상 이렇게 의존이 강하다 보니까
편리한 대로만 가는거에요 반성없이! 이게 의존이거든요.
그래서 생활 속에 이런 바른 지혜가 없고 의존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이 많기때문에
가다보면 부딪치고 가다보면 한계가 오는 것이 굉장히 심각합니다.
어떤 분은 또 그런 얘기를 하더라구요.
아들하고 손자하고 외국에 가서 오랫동안 살다가 왔는데 잠시동안 머문대요.
머무는데 집안에서 냉장고를 두개를 쓴다고 그럽니다.
자기가 쓰는 냉장고가 하나 있고 아들하고 아들의 아들 손자하고 쓰는 냉장고가 있다는 거에요.
그런데 이분도 마찬가지로 얘기를 하더라구요.
손자가 먹는 과자가 어떻게 할아버지되면 왜 과자를 자꾸 자시는지 그걸 모르겠다고
과자문제로 조손이 충돌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그래서 과자를 좀 먹었는데 아이가 왜 먹었느냐고 할아버지! 내꺼를 왜 먹었느냐고 항의하더래요.
그런데 중간에서 그 아들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할아버지편을 들어야 겠습니까
즉 자기 아버지 편을 들어야 되l겠습니까?자기 아버지편을 들어야ehl겠습니까?
주시해본 거에요 저 아이가 뭐라고 하는가!그렇지않습니까.
그러니까 아들이 뭐라 그러냐면 아버지한테 그러더래요.
아버지 왜 아이의 과자를 뺏어 먹습니까? 이러더래요. 그 소리를 듣고 굉장히 충격을 받은거에요.
손자가 뭐 세대차이나는거는 그거는 당연하다 그러지만
자기 아들인데 자기 심정하고는 전혀 다른 얘기를 한겁니다. 뺏어먹느냐고.
그러면 당신이 뺏어먹었냐? 아니라는 거에요.그럼 어떻게해서 자셨느냐?물어보니까.
나는 손자한테 용돈도 주고 손자한테 과자도 사주고 그게 뭐냐?
가족이라는 것이다. 가족은 서로 주고 받는 것이다. 가족은 서로 함께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그 과자를 먹은 것은 손자껏를 뺏어먹은 게 아니라
할아버지와 손자가 함께 정을 나누는 표현으로 먹은 거다.
정을 나누는 표현으로 먹은 것이지 뺏어먹은 게 아니다.
식구라는게 뭐냐. 손자라는게 뭐냐.
손자껄 할아버지가 먹을 수 있고 할아버지껄 손자가 먹을 수 있고.이게 가족이고 이게 정이 아니냐.
정을 나누는 뜻으로 먹었는데 아들은 그걸 이해를 못하고 뺏어먹은 걸로 보더라.
이게 굉장히 심각한 차이 거든요.인식의 차이가!
그러면 할아버지가 그 과자 하나를 왜 자셨겠는가 이거에요.
남의 아이같으면 진자 자셨겠는가! 남의 아이 과자는 안자시죠.
이걸 중간에서 아들며느리가 이해를 해야되는데 이해를 못하고 아이세대로 넘어가는 겁니다.
누구의 잘못인지 모르죠.
그런 감정의 교육을 제대로 시행하지못한 할아버지의 잘못인지
그걸 배우지 못한 아들의 잘못인지 모르지만은
이게 중간세대가 지금 허약하게 어린이 세대로 넘어가뻐렸어요.
여기서 뭐냐하면 가족이란 의식이 없어진거에요.
정을 나누고 함게 하고 하는 이런 가족의식이 아주 희박해지고 지금 붕괴되고 있다 이걸 의미하거든요.
그래서 가정내에서도 권리를 찾게 되었다는거에요.
이건 내과자인데 할아버지가 왜 자셨습니까.
자기 과자는 자기가 지킬 의무도 있고 자기가 먹을 권리도 있잖아요. 의무와 권리.
이게 아주 달라진거죠.
그래서 자꾸 이게 자기 편한쪽으로만 의존을 합니다 이렇게.
그래서 그 할아버지의 절망스럽고 원망스러운 표정의 하소연이 잊혀지지를 않아요까
아이들이 어떻게 애비의 심정을 그렇게 모르나 가족의 의미를 어째 저렇게 모르나
단순히 저의 아들의 과자먹는 것만 생각했지
가족도 모르고 애비의 마음도 모른다 참 살맛이 안난다.이런 얘기를 하더라구요.
그래서 도덕은 점점 약해지고 옛날에는 도덕 사회였는데요.지금은 법률사회다.
전부 법률이 보호하는건 권리이거든요.그래서 권리로만 나아갈려 그러니까
거기에 대해서 여러가지 붕괴도 되고 해체도 되고 충돌이 자꾸 일어나는게 사실입니다.
그러면 이법률로써 보호되는 권리가 어느정도까지 이게 보장이 되겠는가.
절대 그거 가지고 행복할 수가 없거든요. 절대 행복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이것은 자꾸 어딘가에 의존하게 되는데
맥주에 의존하고 과자에 의존하고 세력에 의존하고..의존하게 되는데
이 의존만 가지고는 금방 한계가 오고 허무가 오거든요.
그럼 그게 뭐냐?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자족. 자족력이 생겨야 됩니다.
자족할 수 있는 힘이 생겨야됩니다.
맥주를 안마시면 어떠냐? 과자를 안먹으면 어떠냐? 혼자 있으면 어떠냐?둘이 있으면 어떠냐?
여기에 진정한 자유도 있고 기쁨도 있거든요.
요즘 말만하면 행복하세요.그래요. 인류! 모든 인류가 행복하기를 기원합니다.
여러분 세계인류가 행복해지는 세월이 온다고 생각하십니까?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 이러잖아요.
그럼 세계 인류가 다 행복할 수 있는 세월이 온다고 생각하세요.
그건 불가능합니다.세계가 인류가 다 행복한 세월은 없어요.
그럼 세계인류가 다 행복해야 할 이유는 뭔가요? 왜 행복해야되나요?
행복해야할 이유가 뭐가 있어요!
그러니까 이게 행복 행복 그러니까 행복의존증이 자꾸 확대되어가지고 행복을 잃어버려요.
그래서 행복하기위해서는 행복을 버려뻐려야 됩니다.
행복 뭐 할려고 바래요. 행복을 바래는순간에 나의 행복은 없다
아니 행복이 뭐길래 행복이 뭔데 자꾸 행복에 의존하느냐 행복을 갈구하느냐 이거죠.
그래서 갈구하게 되면 의존이거든요.
자꾸 목마르게 구해요 목마르게 구한다는건 현재 없는거죠.
이게 아주 문제에요. 여기 불교적 처방이 있습니다.
갈구하는한 존재하지 않는다(求不得苦).
갈구하는 마음에서 벗어나라.거기에 풍요가 있다 이거죠.
갈구하는 한 넉넉함은 없습니다
그런데 왜 갈구하느냐?
현재 나에게 무엇이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갈구합니다.
그러니까 갈구하기전에 봐라!
보면 벌써 이루어져 있다.
이게 불교에요.
보지도 않고 눈감고 귀막고 생각으로만 구하지말아라.이거지.
귀를 열고 눈을 열고 듣고 봐라 그러면 이미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 있다.
이게 불교의 해탈이고 이게 불교의 자족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습관적으로 끊임없이 구합니다.
여기서는 여기를 안보고 딴걸 또 구해요
딴데가서는 또 그걸 안구하고 딴걸 또 구하고 또 구하고...
그래서 맨날 떠돌이, 나그네만 되지 정착을 못하거든요.
꽃을 보면 꽃 딱 보면 거기서 무궁무진한 신비의 세계를 볼 수가 있는데
아 이꽃 작년엔 이꽃보다 더 좋은게 있었다.이렇게 그냥 지나가버려요.
이꽃말고 다른거는 더 예쁘지.
그래서 다른 꽃을 생각하는 동안에 이건 사라져버려요.이건 의미가 없어요.
이렇게 된다 말이죠.그래서 자족으로 이제 나아가는 것이 아주 근본인데
자족이 되려면 지혜로 돌아가야 되거든요.
지혜로 돌아가서 실상을 바로 볼때 아! 이세상에는 부족한 게 없다.
그래요. 모기가 부족한게 뭐 있느냐 파리가 부족한게 뭐있느냐
새가 부족한게 뭐있고 고양이가 부족한게 뭐 있냐 또 사람이 부족한게 뭐 있냐.
길면 긴것대로 부족한게 없고 짧으면 짧은 것대로 부족한게 없고
하루를 살면 하루를 사는대로 부족한게 없고 백년을 살면 백년을 사는대로 부족한게 없다.
다만 우리 생각이 만족할 줄 모를 뿐이다
생각이 만족할 줄을 모를뿐이지 실제에 있어서는 하나도 부족한게 없다는거죠.
그래서 만족할 줄 아는 하늘을 도솔천이라 그러는데요 그 도솔천을 번역을 해서 지족천이라 그럽니다.
만족할 줄 아는 하늘이다!지족천!
그런데 이 만족을 안다라는 것은 지혜로 돌아갈때 만족을 알거든요.없는 것만 구하는게 생각입니다.
그런데 지혜는 있는걸 바로 보는게 지혜거든요.있는 걸 바로 볼때 구할게 없다.
죽음이 뭔데 죽음을 싫어하느냐. 삶이 뭔데 삶에 집착하느냐.
싫어하고 좋아하기전에 먼저 보면 끝난다는 거죠.
보아라! 그래서 보라는 말을 그전에 보면
아주 강조하기위해서 볼간자 또는 볼관자를
두번 써서 간간(看看)관관(觀觀)하라 이랬어요.
보아라 이거죠. 간간관관!
그래가지고 아주 꿰뚫어지게 봐라 철안관하라. 쇠눈으로 보라. 쇠가 아주 단단하지않습니까.
동안관하라.동으로 된 눈으로 보라. 아주 철과 동 금속과 같은 눈으로 보라는 거죠.꿰뚫어서.
또 묘안이라고도 했습니다. 미묘한 눈으로 봐라.본다는거 아주 재미있어요
보면 보인다 생각하면 안보인다.
보는 훈련이 바로 이게 명상입니다.
얼마전에 서울에 계신분들이 저기 프랑스의 틱낫한 스님이라고 계신 수행도량이 있잖습니까
거기 가면 일년에 한번씩 자두축제를 한다 그래요.거기서 자두꽃이 필때 축제를 하는데요.
자두나무를 1200주를 심었대요. 30년전에 심으셨답니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심었느냐 하면
그 주변에 있는 어린이들을 전부 불러서 한사람앞에 한그루씩 심도록 했대요.
30년이 되니까 이제 굉장히 컸고, 그 아이들도 또 어른이 되었고 그래서 의미가 깊다
이런게 아주 중요한 의미입니다.
아이들 손으로 나무를 왜 심게 했겠는가 이게 중요한 거거든요.
그런데 그 자두꽃이 피었을때 축제를 하는데
온 사람들보고 뭐라 그러냐면 자두꽃을 보라.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분은 자두꽃에서 관세음보살을 만날 수 있고
서가모니불을 부르는 사람은 자두꽃에서 서가모니불을 만날 수 있다
지장보살을 부르는 사람은 자두꽃에서 지장보살을 볼수 있고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사람은 자두꽃에서 어머니를 볼 수있고
애인을 그리워하는 사람은 자두꽃에서 애인을 볼 수있고
고향을 그리워하는 사람은 이 자두꽃을 바라볼 때 고향을 볼수 있고..
하여튼 내가 보고싶은 모든 것을 이 자두꽃을 보는 순간에 다 볼 수있다.
우리가 깊이 보면 하나의 풀잎에서 온갖 걸 다본다.
인간의 머리카락 하나에서 온 세상을 다 볼 수있구요.
말한마디에서 모든 것을 다 느낄 수 있구요.
그래서 어느 곳에서나 부족감이 없이 자족감을 느낄 수 있는 세계 이게 도의 세계입니다
자족이 도입니다.지혜가 바로 자족입니다.도가 바로 자족입니다.
그런데 자족하지 못하고 의존하게되면 영원히 돌고돌아서
하나에 의존하면 또 바로 둘에 또 의존하고
둘에 의존하게되면 셋에 또 의존하고...
이걸 윤회라 그러죠. 끊임없이 수레바퀴가 돌듯이 끝이 없다는거죠.
그래서 자족해지려면 어떻게 해야되느냐?
바라는 마음에 앞서서 내가 해야됩니다. 내가 해야 자족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습관적으로 하지는 않고 바라는 마음이 있거든요.
그다음에는 깊이 관찰을 해야되어요.자신이하고 자신이 관찰하고..
그러면 저절로 충족감이 생기죠.
사람들을 가만히 만나보면 자기가 뭘 안하는 사람일수록 의존도가 더 많구요.
의존도가 많을 수록 불만이 더 많더라구요.그렇잖아요.
그래서 내가 해서 다른 사람에게 공헌을 하는 사람 베푸는 사람은 오히려 불만이 없습니다.
그런데 받는 사람은 불만이 많습니다.
이걸 그냥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받는 사람은 불만이 없어야 되잖습니까.받았기때문에.
그런데 실제는 아니에요.
받는 훈련이 자꾸 되면 의존이 습관화되어가지고 점점 더 의존하게되어서 점점 부족한게 많이 생기거든요.
그런데 주는 입장에서는 오히려 불만이 없어요.
그러니까 자족을 할려면 본인이 자꾸 하는 것
본인의 능력을 자꾸 키워서 본인의 영역을 자꾸 넓혀 가는것 그게 첫번째이고요
두번째는 그냥 하지만 하지말고 늘 관찰하는 훈련.
내가 지금 하는게 뭐냐.꽃이 뭐냐.사람이 뭐냐.삶이 뭐냐.
그래서 이렇게 되면 어느 순간에 눈이 열린다.말이죠.
풀 한포기에서도 모든 것이 다보이고
바람 한줄기에서도 모든 것이 다 느껴지고...
그런 것을 미묘안이라 그래요.미묘한 눈이 있다.
그래서 이 눈을 뜨고 보면 부족한게 하나도 없다는 거죠.
다만 그것을 발견하지 못해서 부족하게 생각할 뿐이지
실제로는 부족한게 전혀 없다.이런 것을 불교에서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생각과 지혜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자족이라고 하는것은 지혜에서 생기는 것이구요.
의존이라 하는것은 생각에서 생기는 것이다.
생각은 감정이거든요. 감정은 감각하고 추구하는 마음인데요.
감각적으로 보는거죠. 실상을 보지않고...
오랫동안 사용한 비유중에 그런게 있습니다.
검은 밧줄과 뱀! 이런 비유가 있거든요.
검은 실을 가지고 밧줄을 만들었어요.
이걸 또아리를 틀어서 사리사리 서려서 밤에 딱 놔두었는데
그걸 밧줄로 보지않고 뱀으로 봤다 말이에요.
그러면 밧줄을 뱀으로 본게 그게 생각입니다.그게 감각이에요.
그리고 밧줄을 밧줄로 보면 그게 한걸음 더 들어간거죠.그게 생사죠.
그런데 밧줄도 아니고 실이잖아요 실로 보면 그게 불생불멸 그게 지혜에요.
그래서 이걸 뱀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밧줄로 보는 사람도 있고, 실로 보는 사람도 있다.
또 밧줄도 실이 사람에게 수공이 들어가가지고 만들어진거잖아요.
이걸 의타기성이라고 의지해서 생긴거지.실의 본래 모습은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나고 죽고 나고 죽고 하는 것은 밧줄과 같은 것이고
나되 나는 것이 아니고 죽되 죽는 것이 아닌 것은 실과 같은 거에요.
그리고 죽느냐 사느냐 괴로우냐 즐거우냐 성공이냐 실패냐
이 희로애락에 항상 골몰하는 것은 그 밧줄도 못보고 그걸 뱀으로 본겁니다.
희로애락의 애착과 공포 두려움 이런 것은 생각이 만들어낸 뱀이다.
그건 밧줄도 아니고 뱀이다.이거죠.(변계소집성)
더 깊게보면 밧줄도 아니고 실이에요.(원성실성)
그래서 우리가 태어나고 죽고 태어나고 죽고 하는 걸 더 깊게보면 불생불멸이다
그래서 반야바라밀은 불생불멸인데 불생불멸은 뭐냐?
능제일체고! 바로보는 순간에 능히 일체고를 다 제거한다.이거에요.
요즘에는 그런것도 있더라구요.
저 행사에 보면 여름인데도 얼음조각을 만들어서 행사를 하더라구요.
학도 만들고 거북이도 만들고 그런데 딱 보면 야! 저 학이 멋있다.
그게 학이 아니고 사실 얼음이거든요. 또 얼음이 아니고 사실 물이거든요.
그런데 저걸 얼음조각을 조각되어진 모양! 학이면 학으로 보느냐! 얼음으로 보느냐! 물로 보느냐!
뭘로 봐야 되겠습니까?
분명히 멋지게 조각하면 분명히 학이죠.
그런데 사실은 얼음이거든요.얼음이 뭐요? 물이다 이말이에요냐
그런니까 물로 딱 볼때
저 학의 모양이 언제 없어지나
저게 다른 사람의 학보다 더 잘생겼나 못생겼나
저 학이 더 높으냐 낮으냐
그 학으로 일어나는 모든 고통은 다 없어지고요.
저 얼음이 얼마나 오래 갈까 어떨까 이걸 물로 보는 순간에 얼음이 있고 없고는 다 없어지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지혜로 돌아가서 보면
그냥 한순간은 한순간대로 스스로 만족하고 두순간은 두순간대로 만족하고
있으면 있는 모습으로 만족하고 없으면 없는 모습으로 만족하고
이 세상에 부족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니까
만족을 구할 것이 아니라 부족한 것이 없는 걸 봐라.
이게 자족의 비결이죠.
죽는 것이 뭐가 부족하냐 사는것이 뭐가 부족하냐 있는게 뭐가 부족하냐 없는게 뭐가 부족하냐!
그래서 만족을 구하지 말고 부족함이 없는 걸 봐라.
이게 아주 그 정안묘법인데요. 맑은 눈으로 보면 미묘한 법이다.
그러면 늘 자족해요.그런걸 해탈이라 그러고 그걸 도인이라 그럽니다.
그래서 이세상에 어떤 사람들이 제일 위험한 사람들인가?
사실 몸이 아프고 배가 고프고 이런 사람들은 별로 위험하지 않아요.
몸 아픈 사람이 무슨 큰 사고를 치겠어요. 배고픈 사람은 밥주면 해결될 수 있거든요.
그런데 몸도 건강하고 배도 안고픈데
허구헌날 이 머리에 불만을 가지고 사고를 일으키는 사람들!
이게 제일 위험한 사람이고 불쌍한 사람들이에요.
그냥 불만을 느끼면서 온갖 일을 저질르니까
공기도 나쁘게 만들고 물도 나쁘게 만들고 사람도 괴롭히고
쓸데없이 전쟁을 자꾸 기획하고 쓸데없이 사람에게 불안을 자꾸 조성하고
그래서 불만을 가지고 있는한 경제가 아무리 발달해도 만족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가장 시급하게 구제해야할 우선순위가
마음속으로부터 불만을 없애는 것이다.
최대의 재난이 재난중의 재난이 불만을 가지고 있는게 최대의 재난이에요.
아버지가 불만을 느끼면 어떻게 되어요.
아버지가 불행하고 아버지가 불행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온 아버지 주위의 사람이 다 아주 시끄럽거든요.
어머니가 불만을 느끼고 살면 어떻게 됩니까?
어머니 자체가 지금 불안하고 어머니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다 괴롭거든요.
그런데 그건 한 가정내에 속한다 그러지만
세계의 아주 엄청난 강대국의 지도자들이 불만을 느껴서
허구헌날 전쟁이나 생각하고 하면 세계가 지금 다 재난에 빠지는 거에요.
뭘 가르치는 사람들이 마음에 불만이 있어서
이 불만의 종자를 학생들에 자꾸 학생들에 퍼뜨리면 이게 어마어마한거거든요.
그러니까 무엇보다도 모든 사람들의 생각속에
불만을 없애주는 노력이 가장 중요한 노력이고 그게 가장 시급한 노력이라는 걸 알 수가 있어요.
그리고 얼마전에 어떤 젊은 스님을 하나 만났는데요.
말끝에 젊은 스님보고 나이가 젊으니까 인생이 긴줄로 알더라구요.
젊을 때에는 다그렇게 알거든요.인생이 제법 긴 줄 알아요.
천만의 말씀이에요.
나도 어릴때 젊을 때에는 인생이 긴줄 알았거든요.
그래서 얼마나 살 것 같으냐? 물어봤어요.
그러니까 백살쯤 살 것 같대요.욕심도 많아요.
그럼 백살을 어떻게 살래? 물어보니까
50쯤 되어서 도인돼가지고 도인으로 50년 살고 싶다고.
그래서 도인이 뭔데? 그러니까 대답 잘 못하더라구요.
그런데 도인될려고 마음먹으면 영원히 도인 안되거든요.
도인이 뭔데 도인을 될려고 합니까? 이게 도인 의존병이에요.
행복이 뭔데 행복을 구합니까?
평화가 뭔데 평화를 구해요?
건강이 뭔데 건강을 구합니까?
구하는 것 모두 잘못된 생각이에요.
구하지 말고 있는 걸 써라!
상좌면 상좌노릇 잘하고 사람이면 사람 노릇 잘하면 되지
도인 왜 되어요. 지금 있는 그대로 옳은 짓하면 되지
도인이 될 허무맹랑한 생각을 하고 있으니 아주 싹수가 노래요.
그래서 그러니까 그런 거는 차마 말할 수 없고 이해도 안되고
그래서 도인이 뭐냐? 라고 묻기만 했어요.
그럼 그 질문을 옳게 새겼으면 아 도인이란 이런 것이로구나!
구하는게 없는게 도인이기 때문에 도인을 구하는 한 영원히 도인은 안된다.
이걸 철저히 깨달아야 될텐데 언제 그런 세월이 올른지는 모르겠어요.
높은 사람이 뭔데 높은 사람을 구합니까?
도대체 평화가 뭔데 평화를 구해요?
평화를 구하는 한 서로 서로 구하니까 평화는 없죠.
왜 그렇게 행복을 구해요?
왜 그렇게 사랑을 구해요?
사랑이 뭔데 그렇게 사랑를 구하고
아름다움이 뭔데 그렇게 아름다움을 구하고
그 구하는 마음 하나가 모든 불행을 만드는 원흉이에요.
그래서
구하지말고 봐라. 이거에요. 보면 보인다.
그러면 어느 순간에서나 의존하지않고 스스로 만족한 삶을 이루게 된다.이말이죠.
그래서 그렇게 만족한 삶을 이룰 수 있도록 원을 세워서
항상 스스로 노력하고 스스로 관찰하는 그런 정진이 필요합니다.
울리지 않는 종은 종이 아니며
부르지 않는 노래는 노래가 아니며
말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 하만 스타인 -
울리지 않는 종을 누가 종이라 하고 부르지 않는 노래를 그 누가 들어줄까요
우리들은 여러가지 나름대로의 이유와 변명으로 종을 침묵시키고 노래 부르지 않으며, 사랑을 가둬둡니다.
때로는 신중함이라는 이유로, 때로는 망설임이라는 이유등으로 말이죠.
이유와 변명으로 주저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물론 정말 신중해야 할 일이 있고 스스로 몇번이고 생각하고 생각해야 할일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별일도 아닌것을 국가 흥망과 관련된 일처럼 고민하고
국가의 흥망이 걸린일을 별일 아닌것 처럼 언행하는 경우도 많은것 같습니다.
사랑한다면 말하십시요.
말하고 거부당하면 당할 창피함을 걱정하는 것보다 나의 마음에 나 스스로가 솔직한 것이
사랑하는것보다 더 행복하기도 합니다.
여행을 가고 싶다면 떠나십시요.
이러저런 이유를 들이대며 여행을 떠나는것 보다
떠나지 못함을 강조하는 모습이 저에게는 참으로 의아한 모습입니다.
여행을 떠나고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한가하고 두려움이 없어서 그런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한다면 사랑하십시요.
말하고 싶다면 말하십시요.
여행을 떠나고 싶다면 떠나싶시요.
당신을 울리지 않는 종으로 녹슬게 하지 마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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