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1. 20. 12:06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당신이 주인공입니다
오늘 말씀드리고자하는 내용은
'고향나그네의 고향찾은 삶' 이런 내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해탈이 고향이다.열반이 고향이다.극락이 고향이다.이런 말씀을 드렸거든요.
그러면 그 고향을 찾았을 때의 느낌, 고향을 찾았을 때의 삶이 어떤 것인가?
경에서는 설명을 하고 있는 데요.
그런 것을 비유로밖에는 설명을 못하니까. 주로 비유로 이야기를 합니다.
첫째는 인간문제인데요.인간이라는 말은 불교용어로 말하면 사회라는 말입니다.
천상,인간,지옥,아귀,축생,수라 이렇게 나누거든요.
인간이라는게 재미있어요. 사람이 모여사는 공간 그걸 인간이라고 그래요.
사람이 모여사는 공간이다.이게 사회죠.사회문제 그게 인간문제죠.
둘째는 인생문제인데요.
그럼 인간문제라는 거는 뭐냐?
사람과 사람끼리 모여서 살다 보면 빈부와 상하가 생기는 데요.
뭐든지 지식도 많이 가지고 적게 가진 사람이 있고요,
재산도 많이 가지고 적게 가진 사람이 있고요.
하여튼 뭐든지 많이 가지고 적게 가지고 빈곤과 부강 이거 항상 있게 마련이에요.
당장 먹을게 없어서 가난한 것도 있지만 저사람에 비해서 내가 가난하다. 이게 빈부격차 아닙니까.
이런 것은 혼자 살면 문제가 없거든요.
또 누가 윗자리에 있느냐 아랫자리에 있느냐? 이 상하 누가 더 높으냐 누가 낮으냐?
이게 보통문제가 아니에요.
朝廷 莫如爵 鄕堂 莫如齒 輔世長民 莫如德(조정막여작 향당막여치 보세장민막여덕)
정부에서는 지위가 높은게 최고라는 거에요.나이도 필요없어요.
고향에 가면 나이 많은게 최고에요. 이게 다 상하관계가 이루어지거든요.
세상을 돕고 백성을 돕는 것은 덕이 제일이다. 옛날부터 그걸 생각했던 거예요.
관직에 들어가면 뭐니뭐니해도 아무리 젊어도 직위 높은 것보다 더 중요한게 없거든요.
가령 아들이 장교고 아버지가 사병이면 어떻게 되겠어요.아들이 높은 거예요.
집에 돌아가면 부자지만 군에서는 장교와 사병 이런거에요.
이런 상하관계가 반드시 형성이 되거든요. 이게 어쩔 수 없는 거에요.
빈부상하라는 것은 사람속에 피할 수 없는 환경입니다.
그다음에 한평생 태어나서 죽는게 인생문제인데요.인생문제라는 건 생노병사죠.
이 세상에 태어나서부터 늙고 아프고 죽고 이게 멸할 길이 없는 겁니다.
이게 인간문제와 인생문제입니다.
이거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이거죠.그럼 여기서 기쁨을 얻어야 되는데
그 기쁨을 얻는 방법이 뭐냐? 석가모니부처님이 얻은 방법이 있는데 그게 깨달음이에요.
그럼
이세상에 어떤 걸로도 빈부,상하에서 오는 고통을 완전히 면할 수가 있는가?
이세상에 어떤 걸로도 생노병사의 고난을 완전히 면할 수가 있는가?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오직 깨달음을 통해서 그런 인간문제, 인생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방법입니다.
그럼 깨달음이라고 하는게 뭐냐?
법화경에서는 화택에서 나오는 걸로 비유하고 있는데요.
이세상이 전부 불타는 집과 같다.삼계가 화택이다.
삼계는 중생이 사는 세계거든요.그런데 화택이다.불에 타고 있다라는 거죠
무슨 불에 타느냐?
무상의 불,덧없는 불이 계속 타니까 젊은사람도 금방 늙고 늙은사람 죽고,있던 것도 없어지고
무상의 불이 계속 타는 거에요.그러니까 이것이 생멸법,변혁법이에요.
생겼다가 사라지고 변하고 바뀌고 그러니까 여기서 항상 괴로움이 따르는 거에요.
무엇을 얻어놓아도 완전한게 없고 금방 또 바뀌고 또 바뀌고 바뀌고.
불속에 다 들어있는게 우리 중생이라는 거죠.
불타는 집속에 있으면 아무리 어떤 구석으로 피한다든지,아무리 어떤 곳으로 자리를 잡아도
불길을 면할 수가 없다 이거죠.
그러면 그 불타는 집에서 불길을 면하는 방법은 무엇이냐?
불타는 집에서 나오는 거죠.화택에서 나오는 거.나오지않으면 불길을 면할수가 없거든요.
그러니까 이세상에 깨닫지않으면 생노병사라든지 빈부고하의 고통을 면할 길이 없다.
이게 다 무상한 변혁법이니까 그걸 이야기하는거에요.
화택에 있는 사람은 그 화택에서 나오지않는한 지금 당장 불길이 몸에 오지않는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금방 불길이 내몸에 다가온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에요.
그리고 이세상을 고해라 그러지않습니까?
생사가 고해라그러고, 세상이 고해, 고통바다라 그러잖아요.
그러니가 바다에 있는한 아무리 일시적으로 물결이 잔잔하다고 하더라도
그 파도를 피할 길이 없고 바다에서 빠지지않기가 어렵다는 거죠
그래서 바다에 있는 사람은 저 피안으로 바다가 아닌 저언덕으로 저피안으로 나가야된다
그래서 바다속에 있는 사람이 안전하기를 바라는 것은 그건 기대할 수 없다는 거죠.
그럼 이 바다에 있는 건 뭐냐?
역시 우리 인간속에서 생노병사의 과정을 겪어가는 사람을 바다로 비유한 것이구요.
피안으로 나아가는 것을 깨달음으로 비유한거에요.
그러니까 우리 인간들은 이세상에서 이몸그대로 건강하십시요,만수무강하십시요! 이래요.
어법도 틀렸다 그럽니다.이말이!
명령어를 하다로 고칠 수가 없다는 거에요. 그런게 하십시요.건강하십시요.
이게 명령어인데 형용사 하다는 명령어가 안되는 거거든요.
문법도 틀리게 그냥듣기좋은 말이니까 막 쓰는게요.그렇잖아요.
행복하게 사십시요 이말은 좋지만 행복하십시요는 이거는 어법에 안맞는 거에요.
하다가 명령어가 될 수 없거든요. 그래서 말이 되는지 안되는지 구분도 않고
그냥 막 듣기좋은 말을 서로 하다보니까!
행복하십시요.오래사십시요.건강하십시요,부자되십시요,출세하십시요!
이건 전부 바다속에서 영원히 기쁨을 누리자는 그런 생각이고
불타는 집에서 지금 늙어가고 있는데 늙지말라는 거거든요.
인생문제는 생노병사의 문제인데
생노병사가 지금 시시각각으로 펼쳐지고 있는데 만수무강하라는 얘기는
이게 분명히 거짓말이죠.이거는!
거짓말인줄 알고 하고 거짓말인 줄 알고 들으면서
하는 사람도 거기에 마취되어가지고 즐겁고 듣는 사람도 즐거워요.
왜 아파도 잠시 마취제를 놓으면 아픈줄 모르잖습니까.
팍삭 늙었는데도 하나도 안늙었네요 그러면 순간 마취가 일어나는거에요.
그러니까 말하는 사람도 마취가 되어요. 하나도 안늙었네요 말을 해놓거든요.
역시 안늙은 것처럼 보이는 수도 있어요.그런데 그게 전부 거짓말이거든요.다 거짓말이에요
그리고 만수무강하라는 얘기에 속아서 정말 만수무강할줄 알면 그건 아주 잘못된거고.
영원히 건강하라는 말 속아서... 영원히 건강할 수가 없는거죠.
그러니까 바다에 들어가서 파도길을 가라는거나 빠지지않기를 바라는 것은 그건 힘든거다.
피안으로 나가야되어요.저언덕으로.튼튼한 육지로 나아가야된다말이죠.그게 깨달음이에요.
그리고 무명과 대명이라는 말이 있는데
무명이라는 얘기는 역시 이것도 비유에서 나온 얘기인데요.
밝음이 없다라는 거에요.어두운 공간이에요.무명이!
그게 어두운 공간에 있는 한
아무리 후레쉬불을 갖다비춘다,
등불을 비춘다고 뭐 하더라도 역시 어두움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거에요.
그러면 어떻게 어두움에서 벗어나느냐?
대명이 떠야되어요.대명!
큰 해가.해가 그 공간을 비추게 되면 등불도 필요없구요.전등도 필요없고 그냥 밝은 거에요.
그래서 어둠속에서는 어둠을 피할 길이 없다.
그 어둠을 피하는 길은 해가 떠서 전세상을 밝힐때 어둠은 없다라는 겁니다.
그 어둠이라는게 생노병사 빈부상하 이런 인간문제 인생문제이고
큰해가 뜨는게 그게 깨달음입니다.
그리고 빈두루존자우타얀왕설법경이라는 경이 있는데
빈두라존자가 우타얀왕에게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라고.
어떤 사람이 넓은 들판을 걸어가고 있는데
사나운 코끼리가 뒤에서 따라왔습니다.
코끼리를 피한다고 막 도망을 가다보니까 웅덩이를 만났습니다.
그 웅덩이를 보니까 큰 등나무줄기가 위에서부터 밑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그 등나무줄기를 타고 웅덩이 밑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밑으로 내려가다보니까 제일 밑바닥에는 독사가 입을 벌리고 있었습니다.
위에는 코끼리가 또 쳐다보고 있었습니다.오직 매달려 있는건 등나무 줄기였습니다. 급박하잖아요.
그런데 조금있다보니까 하얀쥐하고 검은쥐가 양쪽에서 그 등나무줄기를 자꾸 쪼아대며먹고 있었습니다.
또 쪼금있다보니까 작은 뱀네마리가 번갈아 가면서 여기서저기서 입을 내밀고 있었습니다.
또 조금있다보니까 벌이 몇마리가 와서 꿀을 내입에 한방울씩 떨어뜨리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렇게 위급한 상황이지만 꿀을 한방울 두방울 빨아먹을때에는 즐거웠다 이거에요.
그런데 이 사람의 상황 이게 뭘 의미하는거냐?
넓은 벌판은 이 세상에다 비유한 겁니다.
뒤에 따라오는 무서운 코끼리는 세월에다가 비유한겁니다. 세월에 밀려서 죽음으로 가거든요.
그리고 그 웅덩이에 내려있는 나무 줄기는 생명! 몇년을 사느냐 생명에다가 비유한거에요
마지막의 독사는 죽음에다고 비유한거고
또 웅덩이의 뱀네머리가 서로 입을 내밀고 물려고 하는 것은
네마리 지수화풍 우리 몸이 항상
혈액이 잘 안돈다든지,덥다든지,열이 난다든지,뼈가 쑤신다든지
이런 아플때가 있다 이거죠. 지수화풍의 몸이 늘 병이 찾아오는거에다 비유한것이구요.
그 다음에 또 꿀을 떨어뜨리는 것은 세상에 있는 쾌락,세상의 쾌락에다가 비유한거다 이거죠.
그리고 양쪽에서 흰쥐,검은쥐가 쪼는 것은 밤과 낮인데
밤과 낮이 자꾸 바뀌다가보면 죽음으로 가는거에요.결국 똑 떨어져서 마지막 독사한테 물릴거 아닙니까!
인생이라고 하는거는 이런 겁니다.
그래서 이세상의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깨닫지못한 기쁨은 그렇게 위급한 상황에서 잠시 잊으면서 꿀한방울씩 받아먹는거와 같은 것인데
세간의 쾌락에 그런 큰 의미를 둘 수가 없습니다.그래서 나는 구도의 길을 택한 것입니다.
이렇게 구도자와 왕과의 대화가 이루어지는 내용이 빈두로존자우타얀왕설법경이거든요
우타얀왕을 위해서 법을 설한다 이거요. 아주 중요한 얘기인데요.
그러면 이런것을 딱 당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어떻게하면 이사람이 그 위급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가 있을까? 이게 아주 문제거든요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위에는 코끼리가 딱 지키죠.밑에는 독사가 있죠.
영원히 또 매달릴 수도 없는게 쥐가 계속 양쪽에서 쪼고있구요.
편치도 않는게 작은 뱀들이 또 자꾸 번갈아가며 입을 내밀고 있죠.
여기서 벗어나는 길은 딱 한가지밖에 있어요.
그런 꿈을 꾸다가 딱 깨어났을 때
그거는 뭐 코끼리도 뱀도 뭐 쥐도 다 없는 거에요.아무것도 없는 거에요!
그와같은 꿈을 꾸다가 그런 악몽에 한참 지금 막 괴로워하다가 딱 깨는 순간에 그건 싹 없어지거든요.
그게 깨달음이에요.
이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꿈에서 깨어나는 거와 같다.
도대체 이 깨달음이라는게 이렇게
바다에 있는 나그네가 바다에서 벗어나는 거와같고
불타는 집에 있는 사람이 불타는 집에서 나오는 거와 같고
어두움에 있는 사람이 태양을 만나는 거와 같고
그 악몽을 꾸던 사람이 꿈에서 깨어난 거와 같다했을때 그게 과연 뭘을 의미하는 건가?
저기 베트남 스님으로서 유명한 스님이 있는데요,
그 분은 깨달음을 그렇게 설명하셨어요.
궁극적 실재와 만나는 것이다.
궁극적 실재가 있다.이거요. 아주 좋은 말씀이에요.
그러면 궁극적 실재와 만나는 것이라는 것은 다른말로 표현하면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이 세상에 원초적 진실상이 있는데
원초적 아주 하나도 변함이 없는 원초적 진실상이 있다.
그 원초적 진실상과 만나는 일이 깨달음이죠.
원초적 진실상이라는 말은 요즘말고 한문에서는 진여라 그럽니다.
참진자 같을여자 참그대로다 이거에요.원초적진실상이라는 얘기여요.참그대로! 진여!
전혀 변함이 없다 이걸 또 여여라 그래요 같을여자 둘써서 같다같다!
그러면 진여와 만난다. 뭐 여여와 만난다 그래가지고 잘 모르거든요.
원초적! 처음과 같이! 아주 본래근원에서부터 있던 처음과 같은 진실상과 만나는 것이 그게 깨달음인데
그걸 이제 깨달아보면 뭐냐? 예를 들면 이런 거에요.
물이 있는데 이 물이라는 것이
때로는 구름도 되고 구름이 저게 뭐냐? 물입니다
때로는 얼음도 되고 때로는 비도되고 때로는 이슬도 되고...
이게 물이에요.이런 거를 변혁법이라 그럽니다.바뀌어요
변혁법이라 그러고! 이게 변혁성이에요! 자꾸 변하고 바뀌는 성격이죠
그런데 이슬이 되든 구름이 되든 뭐 얼음이 되든간에 그 물이라고 하는 속성은 안바뀌어요.
이게 불변성입니다. 불변성!
그래서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변혁성에서 불변성을 보는거에요.
이것이 원초적 진실상입니다.
그래서 원초적 진실상을 보면 좋은 거에요.
얼음이 되면 얼음이 되는대로 좋고, 도
이슬이 되면 이슬이 되는대로 좋고
구름이 되면 구름이 되는대로 좋고...
그거에요. 그게 깨달음의 세계에요.
그래서 그 원초적 진실상이라 그러는게 그게 바로 불변성인데
그 불변성으로 돌아가서 변혁성을 해결해야 되지
변혁성에서 변혁성을 해결할려 그러면 안된다라는게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한 법문입니다.가르침이에요.그러니까
얼음 하나를 붙잡고 만수무강하라는 것처럼 야 얼음아 얼음아 영원히 녹지마라!
이래가지고 이게 될법이나 한 소리입니까?
저 아름다운 구름아 구름아 항상 흩어지지마라! 그래가지고 될 일이에요.
구름이 흩어지든 얼음이 녹든 그 물이라고 하는 그 아주 불변성이 있는데 그걸 알아서
때로는 얼음도 되주고 때로는 구름도 되주고 때로는 비도 되주고 그렇게 되어야 되는거 아니에요.
이렇게 죽음속에서 죽음이 없는 진실상! 늙음속에서 늙음이 없는 진실상!
이게 원초적 진실상이거든요.그걸 보는게 그게 깨달음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왜 여유롭게 돌아가실 수 있는가?
죽음이 없는 진실상을 봤기때문에 죽음을 여유롭게 맞을 수가 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일반사람들은 죽음자체만 보지 죽음이 없는 진실상을 못보는거죠.
그래서 항상 삶에 대한 집착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으니까
생사의 고통이라는 건 피할 수가 없는 거에요!
그래서 정말 편안하고 싶으면 죽음이 없는 진실상을 볼때 편안함을 얻을 수 있는거다
이게 고향찾는 일이거든요.
그러면 이런 죽음이 없는 진실상을 보면 어떻게 되는가?
아주 원초적 진실상, 궁극적 실재상 이걸 체험을 했을 때
거기에 한없는 만족이 느껴진다.이게 부처님 상이에요. 만족!
그래서 이 세상에 만족보다 더 중요한거는 없다라는 거요.
그러면 만족을 얻으면 그 다음에 무슨 반응이 나타나는가? 평화! 평화입니다.평화가 있어요.
그래서 이세상에 정말로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마음이 먼저 평화가 되어야되어요.
자기 마음이 평화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이 세상에 중요한 만족을 어디서 얻어야 되는가? 내마음을 평화시켜서 만족을 얻을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내마음이 평화되지아니한 상태에서는
어떤 환경이 바뀌어도 마찬가지라는거에요. 내마음이 평화되지않았기때문에!
내마음이 평화가 되면 절대적인 만족이 있는거에요.
그래서 이 몸이라고 하는 것이 물이라고 하는 불변성의 변혁성이기 때문에
그 변혁성의 환경에 지배를 안받는 만족 그게 절대적인 만족이에요.
얼음이라고 그러는게 그게 변혁성이고 물이라는게 불변성 아닙니까?
그러면 얼음이 녹아도 좋다 이거에요. 늙음과 죽음이 전혀 나의 만족을 해칠수가 없어요.
이게 부처님 만족이에요.
이런 얘기를 믿지 못하죠 믿지못하니까 이런 만족을 못얻는 겁니다.
믿는 사람만이 얻을수가 있어요. 죽는 순간도 만족한다 이거죠.
지혜가 고도로 높아지면 이세상에 만족하지 않을 데는 아무데도 없다.
이게 깨달음의 만족입니다.
그러나 아주 이런게 문제인게
항상 얻어도얻어도 부족하고 받아도받아도 부족하고 들어도들어도 부족하고
만날 아부하는 사람! 자기한테 잘보이는 사람이 오면 만날 칭찬해주거든요.
그거 아주 고약하더라고.
직위가 낮은 사람은 직위가 높은 사람한테 가서 절대 바른말 해주는 법이 없더라고
왜냐하면 직위를 통해서 손해볼까봐.
분명 내가 잘못한걸 내가 아는데 밑에 사람이 와서 이거이거 잘못했습니다하고
지금까지 말하는 사람 한사람도 못봤어요.야 이거 문제가 심각하다.
그런데 직위하고 전혀 상관없는 친한 사람은 아 요거 잘못하드라 요거 잘못하더라
얘기 금방 해주거든요. 나도 아는 내용이거든요.내가 잘못한거 알았단 말이에요.
그런데 밑에 사람 말 안해요 입 싹 닫아요.잘한 것만 얘기해요! 잘한 것만!희안해요.
상좌들도 보면 은사스님이 어느정도 사랑을 해주기때문에 싫은 소리해도 괜찮을 것이다
이렇게 믿음이 있는 사람은 막 말을 하는데요.
좀 서먹서먹한 사람은 은사스님이라도 절대 싫은 소리 안해요.
그래서 싫은 소리 안하는 사람은 거리가 있는 사람이고
싫은 소리 하는 사람은 굉장히 믿음이 형성되어서 친밀감이 있는 사람이다 이걸 알수가 있어요.
우선 내마음이 먼저 평화되는 거 이게 제일이에요.
내마음이 먼저 평화가 되면 늘 어디나 괴로울게 없는 거에요.
내마음이 평화가 되었을 때 만족이 오는거지 내마음이 평화되지않으면 만족이 없다.
만족을 자기마음의 평화에서 얻도록 하고 자기마음이 평화되도록 노력을 해야되는데 이걸 못하는 거에요.
이게 아주 큰 문제에요.
그래서 부처님이 위대하다는 건 당신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는 거에요.
그래서 마음의 평화를 얻은 분의 얼굴을 만들어 내는게 불상조성입니다.
마음의 평화를 얻은 분의 표정을 어떻게 그려볼까? 이래가지고 지금까지 노력을 했거든요.
일본은 일본대로 하고 한국은 한국대로.. 그래서 일본불상하고 한국불상하고 틀리지 않습니까?
그래서 평화를 얻은 분의 표정을 지극정성으로 다해서 그려낸 업적물이에요.다들
아주중요한 거에요.문화라는게!이렇게 되거든요
그래서 항상 깨달음이라는게 그렇게 만족과 평화 이렇게 되는거죠.
그럼 만족과 평화를 얻은 분이 하는 일은 뭐냐?
무념과 여락인데요.
이 세상으로부터 구하는 집착이 없어요. 이걸 무념이라 그래요.
집착이라고 하는건 미워함이거든요. 왜 미워하느냐? 집착때문에 미워해요
얼마전에 재미난 얘기를 들었는데
누가 친정에를 가서 딴 지방 갔다가 늦게 친정집에 들어갔는데
새로 시집온 남동생의 아내 그 올케되는 사람이 저녁을 안해놓았다라는 겁니다.
아주 기분이 좀 안좋았던거에요.
밥이 있는가 해가지고 늦은 시간에 알아보니까 전기밥솥에 밥이 조금 있더래요.
배는 고프니가 먹을라고 밥을 한숟가락 뜨니까 밥이 안넘어가고 눈물이 팍돌아서
떳다가 못삼키고 그냥 다시 덮어놓고 잤다 그러거든요.
아 왜? 있는 밥도 못먹습니까?지금 배고프니까 밥이 있잖아요 그럼 먹고 자지.
먹을라고 보니까 목이 메어가지고 안넘어가는거에요.
왜 그러냐? 시집온 남동생의 아내가 미운 거에요. 미움이 팍 일어난 거에요.
이게 집착이거든요. 왜 집착이냐?
내가 친정에 모처럼만에 왔으니까 나의 저녁은 챙겨놨어야만 한다 요런 집착이 있는 거에요.
그런데 그 기대가 전혀 어긋나고 반찬도 없고 밥도 조금 남은게 몇숟가락 남은거 있는데
그거나따나 먹고 잘라니까 슬픔이 밥넘어가기전에 확 북받쳐서 고것마져도 못먹고 그냥 잔거에요.
그게 중생계거든요.
그래서 바라는 마음이 있으면 미움이 생기는거에요.
미움이 왜 생기느냐? 바라는 마음때문에 그래요.
올케에게 바라는 마음이 있으니까 올케가 미운 거에요.남동생이 미운거 아니에요.
미우니까 슬픔이 눈물이 나는 거에요.
눈물나니까 조금 남은 밥마저도 못먹고 그냥 자는거에요. 이런 참내 답답한 일이 있어요.
뭐가 미워요.그건 그런거고 현실을 그냥 받아들이고 밥을 해먹든지 있는 밥이라도 먹고 자든지...
그게 무념입니다.그런 미워하난 마음이 없는게 무념이에요. 없을무자 생각념자 미워하는 생각이 없다 무념.
그러면 여락이에요. 여락이라는건 모든 중생에게 즐거움을 준다.
이게 고향나그네의 고향찾은 삶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의존심을 끊어야 마음이 편안해요.
부모에게 의존하고 애인에게 의존하고 누구에게 의존하고
그러면 의존하는대로 안되거든요 그러면 미우는 거에요.미워~
이게 애증이거든요. 미워미뮈미워 맨날 밉다구.
미우니까 욕하거든요. 그래서 왜 욕을 하느냐? 기대했고 기대한대로 안돌아간다고..
우리나라를 보면 아직도 대통령 욕을 더러 하더라구요 민주주의가 덜 성숙한거에요.
대통령에게 큰 기대를 하면 안됩니다.나라의 주인은 국민이거든요.
국민으로서 할 일은 자꾸 찾아서 열심히 하고 잘못한건 뭐라고 나무래도
국민의 대행자로 국민의 권한을 위임받아서 한시적으로 일하는 머슴아닙니까?머슴!
그런데 대통령을 주인처럼 기대하고 바라고 의존하고 이거 해주시요 저거 해주시요
대통령이 무슨 재주로 그렇게 많이 해줘요
이 나라 백성들이 언제쯤 되면 대통령에 대한 기대가 적어질까?
대통령에 기대를 많이 한다는건 국민으로서 할일은 적게한다는 소리거든요.그렇지않습니까?
모든 국민이 자기가 해야할 주인노릇을 철저히 하고
대통령이 올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자꾸 여론을 환기시키고 이런쪽으로 몰아가야되지
잔뜩 기대했다가 옛날에 주상전하 상왕마마처럼 기대했다가 안되니까 막욕하고 아주 미숙한 감정처리거든요.
술좌석이나 계모임 같은데서 대통령 욕한다고 그대 들어갑니까?저 청와대까지 들어가요?
들어가지도 않는 욕을 뭐하러하나! 자기불만이잖아요!
이게 무념이 되어야돼요. 미워하는 생각이 없어져야됩니다.
그게 평화입니다.
가슴속에 누구를 내가 얼마만큼 미워하고 있는가 다 찾아내서 이걸 다 없애버려야 돼요
이게 정신건강입니다.
미워한다는건 그사람에게 의존한다는 건데요.
아버지 미워한다는 건 아바지에게 지금도 의존하고 있다는 거고
어머니를 미워한다는 건 어미니에게 너무 매달려 있다는 거에요.
의지하지 말아야되어요.내힘을 자꾸 키워서 내힘을 자꾸 발전시키고..이게 무념이거든요.
여락이에요. 기쁨을 준다. 이게 만족 평화!
조금전에 뭐라고 했죠. 미워하지않는 걸 뭐라고 표현한다 했죠?무념!
미워하는 생각이 없다 이거죠.
그다음에 여러 사람에게 기쁨을 준다 이걸 한자로 뭐라한다 그랬죠? 여락
한자로 줄여자가 있거든요. 여락!
그러니까 미워하지 않는 사람의 얼굴은 기쁨을 줘요.
부처님의 얼굴이 미워하지않는 얼굴이니까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거에요.
태양은 미워하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해가 뜨면 다 즐거워해요.
이게 고향나그네가 고향을 찾은 다음에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되기위해서는 항상 살피는거 이거 중요해요.
금강경에는 응작여시관!이랬잖아요.
금강경 마지막 부분에 나오거든요 응당히 이와같이 보라. 보라는거에요! 보라!
반야심경에는 조견오온개공도 조견오온 비추어봐라 전부 보는거에요.
살피는 거에요.살펴!
그러면 천지만물이 항상 무상하게 변하는데 이게 변혁성이란 말이죠.
그런데 원초적 진실상으로서의 불변성이 변혁성속에 그대로 있다.
그러니끼 큰 스님들이 법문하실때 이래 탁 보이지 않습니까?
보이는 게 다 이유가 있는 거에요.
이게 다 이걸 통해서 형상을 보라는게 아니라 이름을 알라는게 아니라
형상도 이름도 이것은 다 변혁성이에요. 거기에 불변성을 봐라 이거에요.
그렇잖아요. 보면되어요. 보면 된다.
보면 그게 바로 진실상인데 진실상을 볼 때 나그네 시름은 다 없어진다.
살펴라 이거에요. 어디서 살피느냐?
바로 지금,여기 지금여기에 원초적 진실상이 바로 드러나 있다.
그런데 모르는 거에요.
항상 지금 여기인데 오늘도 지금여기고 내일도 지금여기고
그런데 지나간거 생각하다가 다가올거 걱정하다가
허둥지둥 돌아다니다가 내가 어디서 걸어왔는지 걸어오는 사이에 뭐가 있었는지 까맣게 모릅니다.
심지어는 경을 읽을때도요.
반야심경을 읽을때도.계속 그냥 뭐 앞만 생각하고 읽다보면
내가 읽었는지 안읽었는지도 몰라요! 다 읽고나면
그게 살피지않는 고통이거든요.
그래서 항상 순간순간 자기가 있는 곳을 살필 때 그게 명상이에요.
그게 원초적 진실상과 만나는 행위에요.
살피면 보인다.
그럼 거기에는 죽음도 없는 거에요.고통도 없는거죠.
그래서 항상 살피는 가운데 부처님도 보인다.
그래가지구 모든 진실을 살펴보면 거기에 변하는 속에 불변성이 보인다 변혁성속에 불변성이 보인다.
그러면 그게 고향에 돌아간 거에요.
(컵을 들며)이게 전부 변혁성 아닙니까?변하고 바뀌는,,,
이걸 깊이 보면 불변성이 보이는 거에요.그래서 항상 이렇게 보여요 보여!
이게 인제 어느 문화보다 특이한거 서양문화에 이런 거 없거든요.
이론적으로 설명할려 그러지 보여주는게 아니에요.이게 큰 차이점입니다.
벽암록이라고 하는 책이 있는 데요. 백가지 중요한 법문을 모아놓은 거에요.
백측인데 거기 19측에 19번째 나오는 법문이 있는데
구지선사라고 하는 스님은 누가 와서 뭘 물어도 요것 뿐이다! 손가락 하나만 보여줘요!
이게 다 이유가 있는 거에요. 손가락 하나! 평생법문이 요것 뿐이다.
그래서 이 구지선사의 손가락 하나로 깨달은 사람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구지선사 자신도 손가락 하나를 보이는 걸 보고 깨달았아요.
이게 탁 보면 이건 손가락도 아니고 손가락도 아닌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생각으로 정의할 수 없고 개념이 안통하는거에요.진실상은!
정의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원초적 진실상을 딱 보는 순간에
그 인간적으로 느껴지는 빈부상하라든지 인생적으로 느껴지는 생노병사시름이 그냥 없어지는 거에요.
이게 깨달음이에요. 그게 인제 불가의 법입니다.
그리고 어떤 스님은 법을 물으면 그냥 땅바닥을 쳤어요.땅바닥을 닥 치고요.
이게 전부 그런 거에요. 이게 바로 깨닫게 하는 겁니다.
그리고 어떤 분은 뭐라고 죽는게 뭡니까? 사는게 뭡니까?물으면
하나의 방법인데 입을 딱 벌렸어요 자기입을 딱 벌렸어요! 희안하죠.
이게 다 법문인데요. 그래서 이런 거를 평한게 있어요. 시로!
손가락 하나 보인다든지 땅을 탁 친다든지 자기입을 쫙 벌린다든지...그거 멋있잖아요.
그런거를 시로써 어떻게 평을 했느냐 그러면
저 눈거북이를 바다에서 건져내기위해서 나무 판자를 하나 띄워주는 거와 같다.
이렇게 평했어요.그것도 멋진거에요.
손가락 하나 보여주는게 이걸 시로써 표현할 때 이게 뭐냐?
눈먼 거북이가 저 바다에 많이 있는데 이걸 건져내려면 잘 안되잖아요.
그런데 나무판자 하나 띄워줬다는 거에요 나무판자위에 올라와가지고 나오라고...
이거는 법도 높고 시도 잘짓고..이런 분들이 하는 멋진 그런 표현이거든요.
하여튼 참 멋진 거 많아요.우리가 그냥 널려져 있는 거에요.
불교를 만나서 기도 잘하면 바로 깨달을 수 있는거에요.
경 잘 보면 바로 깨닫고.
바로 이 현상을 이름만 기억하지 말고 형태만 보지말고 깊이 보면 바로 그 원초적 진실상을 만나게되요.
그럼 거기에 참다운 평화가 있고 참다운 기쁨이 있다 이겁니다.
이것이 깨달음의 행복인데
깨달음의 행복이라고 하는 것이 나그네가 고향을 찾은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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