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신심의 공덕/향기로운 법문(2)

2009. 11. 22. 15:40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당신이 주인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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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은 '신심의 공덕' 이런 주제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신심은 믿는 마음이거든요. 믿는 마음인데 불자의 신심이 뭐냐?

첫째는 부처님 세계에 대한 믿음입니다.

대숭경전중에서 가장 웅대한 경전이 화엄경인데

화엄경 구성을 보면 제일 앞부분에 부처님세계를 설명하고 있어요.

그 다음에 신심을 설명하고 있고

그 다음에 발심을 설명하고 있고

그 다음에 보살행을 설명하고 있고

다시 또 부처님 되는 세계를 설명하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불자가 첫번째 신심이라고 하면 부처님세계를 먼저 믿는게 그게 들어가는 중요한 신심입니다.

그러면 부처님세계를 어떻게 믿어야 되는가? 그것이 아주 중요한데요.

한국불교 법당에 모셔진 많은 부처님들이 계시죠.

그런데 부처님들의 이름을 보면 벌써 그 부처님의 명호를 보면 부처님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흔히 대웅전이라고해서 들어가면 대웅이라는 말이 부처님의 호중의 하나이거든요.

크게 웅장하다.

또 세존이다 이것도 부처님 명호 아닙니까?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신 분이다.

여래다 진리모습 그대로 오신 분이고

'여'자라고 하는 것은 진리모습과 같이...또 오셨다라고 하는 것은 인격화되었다.이소리죠.

진리모습 그대로 머무시고 진리모습 그대로 가셨다. 여래!

불(佛)! 깨달으신 분이다. 이런게 불세계를 명호를 통해서 다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여래명호의 특수한 명칭이 석가모니 아니에요.

본래 석가라는 것은 종족의 이름인데 그 종족이 무엇을 명칭을 의미하느냐 하면

능인!이라고 번역을 해요. 능할능자 어질인자

모든 인덕을 다 드러낼 수 있다 인덕을 다 이룰 수있다. 인덕이 가능한 분이다.

이게 능인의 뜻이거든요.샤카의 의미가 바로 그런거에요.

그래서 우리나라에 능인이라는 말이 많거든요.

선원이름도 짓고 학교이름도 짓고 여러가지 명칭을 많이 짓는데요.

그게 석가를 한자로 번역한 말입니다.능인 참 좋은 말이에요.

인이라고 하는건 자비고. 좋은 거잖아요.

그래서 부처님은 어떤 인덕도 어떤 자비도 다 이룰 수가 있다. 실천할 수가 있다.이게 능인이거든요.

모니라는 말은 성인이라는 말로 부르는데

그 본래의 의미는 적묵이에요. 고요할 적자 침묵이라는 묵자 적묵!

침묵입니다. 말이 없는 거에요.말이 없다라는 의미는 뭐냐?

만족을 뜻하는 거죠. 인간이 만족하지 못하면 말이 많아요.

사회에서도 그런 말이 있잖아요. 먹은 사람은 말이 없다 그러잖아요.

아이들도 젖을 푹 먹고 나면 울지않아요.

뭐가 어떻고 뭐가 어떻고 자꾸 주장하고 변명하고 막 하는 것은 아직 자족, 만족을 못하고 있다.

자족하는 사람은 말이 별로 없습니다.

또 일많이 하는 사람은 또 말이 없어요.

일안하고 만족 못하고

실제로 실천하는 사람은 또 말이 없어요. 꼭 그래요.

정신세계의 극치에 올라가면 자족과 만족인데요.

자족과 만족이 되면 말이 줄어드는 거에요. 그대로 실천으로 다 드러내는거죠.

그게 침묵입니다.

그래서 만족속의 능인이에요.

만족속에 어떠한 인덕도 다 실현가능하게 이루신다. 그게 능인이거든요.

좋은 일을 많이해도 자족하지못한 상태에서 하면 지속 불가능한 선행이에요.

일시적인 선행가지고는 안되거든요.아주 지속적인 선행이라야 된다 말입니다.

그럼 지속적인 선행이 되려면 자족한 상태에서 해야돼요.

손님이 왔을때 억지로 하는 거 그거 오래 못가거든요.

그래서 지속가능하게 해야된다.어거에요.오늘도 할 수 있고 내일도 할 수 있고...

지속가능한 능인이 되려면 스스로 만족해야 되거든요.

공부를 해도 스스로 만족해야 그게 지속적으로 계속 할 수가 있거든요

그냥 와장창하는 것은 일시적으로는 되는데 지속적으로는 안되요. 

석가모니 이 얼마나 좋습니까! 

스스로 만족한 상태에서 모든 인덕을 다 이룰 수 있다. 또 인덕을 이루시는 분이다.그런 의미구요.

나무서가모니불!

 

아미타불!

아미타불이라는 것은 무량광 무량수 이렇게 번역을 하거든요.

광명이 한량이 없고 수명이 한량이 없다.

광명이 한량이 없다는 것은 부처님세계에는 어둠이 없다. 소리에요.

수명이 한량이 없다는 얘기는 부처님 세계에는 죽음이 없다는 소리입니다.

그래서 이세상에는 본래 어둠과 죽음은 없다.

그런데 사람들이 시각적으로 감각적으로 어둠을 느끼고 죽음을 느낄 분이에요.

요게 아주 중요한 핵심입니다.

진리에는 암흑과 사망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인간이 감각으로 암흑을 느껴요. 감각으로 느끼는 거하고 존재하는거하고는 틀립니다.

그게 아주 중요해요.

내가 몸이 이상이 오면 나무같은 걸 만져도 감각적으로는 아주 굉장히 찰 수가 있어요.

그런데 이게 지금 찬거냐? 그건 아니거든요 

느끼기는 하는데 존재하지는 않는다.그걸 바로 아는게 깨달음입니다.

존재 그대로 아는게 깨달음이에요.

그래서 여실지,여실견 그러거든요.여실지 아주 실답게!  여실 실과 같게.. 

엉뚱한걸 알라는게 아니고 지금 우리가 감각적으로 엉뚱하게 알고 있으니까

그걸 바르게 아는게 그게 정견이고 바르게 보는거고 여실견이고 여실지죠.

아무것도 아닌거에요. 깨달음이라는게 알고보면..

그러니까 자기집에 있는 사람이 잠시 감각의 착오현상이 일어나서 이걸 남의 집으로 느꼈다 이거죠.

사실은 자기집인데 남의 집으로 감각으로 느껴진거에요. 그런데 그건 확실한거에요. 그때 그순간에는..

그런데 아 이게 나의 집이었구나 이렇게 보면 이게 여실지 여실견이에요.

여실하게 본거고 여실하게 안거다 그게 깨침입니다. 

그래서 암흑과 사망은 없다. 어두움도 없고 죽음도 없다.

그런데 감각의 착오가 일어나서 그걸 무명이라고 그럽니다.

무명이라는건 감각적 착오! 착오가 일어나서 어둠을 느끼고 죽음을 느낀다 이말이에요.

그러니까 그것이 없다라는 것을 확실히 알려주기위해서 불생불멸 불구부정 막 그냥 하죠..

그거 어둠과 죽음이 없다는 소리거든요.

그런데 문제는 믿지를 않는다.

말로는 불생불멸 하라니까 불생불멸하고

불생불명 나는 것도 아니고 죽는 것도 아니다.   

무유공포 두려움이란 없다 하는데 안믿고 한다는 얘기에요. 문제는..안믿고 한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접근이 자꾸 안되는 거에요. 그래서 믿음이 이렇게 중요해요.

아미타라는 것은 광명이 무량하고 수명이 무량하기때문에

광명이 한랑이 없다는 얘기는 어둠이 없다는 얘깁니다.

어둠이 어딘가에라도 있다면 그건 광명에 한계가 있는 거에요.

내 뱃속에도 어둠이 없고 내 머리 아주 해골속에도 어둠이 없고

여러분 몸전체에 어두움이란 없다.

우리 몸전체에 죽음이란 없다.

그런데 왜 우리가 죽음을 느끼느냐? 변혁을 잘못 느껴가지고...

변하고 바뀌는 건데 변하고 바뀔뿐이지 없어지는 것이 아닌데

인간은 변하고 바뀌는 것을 탄생과 사망으로 느껴가지고

이제 태어나는 걸 좋아하고 밝은 걸 좋아하고

또 죽는 것처럼 보이는 안보이는 걸 또 싫어하고 어두운 걸 싫어한다.   

이게 감각의 현상이죠.

감각이라고 하는 것은 밝은 걸 좋아해요 어둔걸 싫어하고

이렇게 사는 걸 좋아하고 죽는 걸 싫어하고...

그런데 삶과 죽음이라는게 불교 깨달음에서 보면 변혁현상이라는 거에요.변하고 바뀌는거!

태어나는 것도 변혁이고 죽는 것도 변혁이다.

변혁이란 말 아시죠. 변할변자 바뀔혁자.

태어나는 것도 변혁이에요.이게요! 그러니까 삶도 변혁이고 죽는 것도 변혁이라.

변혁이 있을 뿐이지 어둠과 생사라고 하는거는 없는거다.

그러나 우리의 감각으로는 분명히 있는 거에요.

감각은 생각이죠.바르게 보는 건 지혜고

그래서 생각을 지혜로 바꾸는게 그게 깨달음이죠.

그래서 지혜로 보면 삶과 죽음은 없고 어두움은 없고

생각으로 보면 어두움이 있고 죽음이 있다. 이 차이죠. 이차이!!!

그러니까 아미타불 하는게 가능한거에요.

어둠이 없는 무량광! 죽음이 없는 무량수! 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비로자나불!

완전히 대광명이라는 소리에요. 온 우주가 끝없는 광명이다. 

대광명이라고도 하고 광명변조라고 광명이 두루 비춘다.그거잖아요.

이게 비로자나라는 뜻이거든요.

이렇게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대세지보살 문수보살.... 

이런 명칭들이 전부 불세계의 만족과 인덕, 지혜와 자비

이런 부처님의 세계를 드러내는 명호들입니다.

그런 세계를 믿는게 첫번째 신심입니다.

 

두번째는 그런 부처님에게만 그런 세계가 가능하냐?이런 문제가 있거든요.

부처님에게만 가능하고 사람에게 전혀 불가능하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문제가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 인간들에게 그렇게 될 수 있는 씨앗을 가지고 있다.

이게 여래장이고 불성이거든요.

우리도 그런 여래를 가지고 있는데 부처님을 가지고 있는데 다만 감추어졌을 뿐이다.

이게 장이에요. 저장되어 있을 뿐이다.감출장자거든요 여래장이라고 하는건!

부처님은 여래출현으로 나타난 여래고 우리 중생들은 감추어진 여래다.이거에요 여래장!

부처님은 그냥 여래고 중생은 여래장이다.

그러니까 감추어진 요거 장만 떼어내면 되는거에요.장만 떼어내면...

장이 문제에요,여래가 문제가 아니라 여래장! 

이게 불교입니다. 명칭속에 그대로 들어있는 거에요.

또 불성 그러면 부처의 씨앗, 그 본성이라는게 씨앗이라는 말이에요.

부처의 씨앗이 있다. 여래장이다 이거에요.

그래서 우리는 씨앗이에요. 부처님은 완전히 열매를 맺은거구요.불과(佛果)!

그래서 부처님은 불과고 중생은 불종이다 이말이죠.

불종자라는 말 많이 들어보셨죠. 불종들이에요. 여기 불종들이 여기 꽉 찬거에요.여래장이 여기 꽉찬거죠.

그래서 여래장, 불종, 불종자 이런 거잖아요. 또 불성같은거요.

불성이란건 뭐냐? 예를 들어

부처님은 활활타고 있는 나무라고 한다면

그냥 나무는 불에 막 타지는 않지만 불이 일어날 수 있는 성능을 가지고 있다.

나무가 불날 수 있는 가능성은 다 가지고 있잖아요.

다만 불을 만나면 타고 안만나면 안타고 또 물을 만나면 그냥 붓죠.

그 차이에요. 불성이 좋은 인연 만나면 잘되고 그렇지않은 인연 만나면 또 잘못되고 이러거든요.

그게 바로 나무인데 햇볕에 잘말라서 불만 넣어서면 금방 타는데

그런데 이게 진흙속에 쳐박혀있다든지 물속에 묻혀있으면 점점 더 붓는거에요.안타고..그거하고 똑같습니다.

 

불성! 도대체 이 불성이 뭐냐? 불성이 어디 들어있느냐?이거에요.

불성이 어디 들어있는지 뭔지 아세요?

간단한거에요. 지금 여러분들 저를 쳐다보죠.

그 쳐다보는게 불성이에요. 생각이 그게 불성이에요.그 생각을 떠나서 따로 여래가 없는거에요.

듣는게 그게 불성이에요.

듣는게 생각인데 생각만큼 듣거든요 생각만큼 보고 생각만큼 느끼는 거에요.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기억하고 하는 그게 불성이에요.

생각해보세요.

자기집에 있는데 순간적으로 착각이 일어나서 이게 내집이 아니다. 내집으로 가야된다

그랬다면 자기집이 아닌 걸로 알고 한참을 괴로워하다 구닥다리 자기집인걸 알았다 이거에요.

그럼 조금전에 자기집이 아니라고 안거하고 자기집이라고 안거하고 그게 두개겠습니가?

이건 내집이 아니라고 착각한 그것이 바로 깨닫는 거에요.

착각할 능력이 없다면 올바로 깨달을 능력도 없는 거에요.

그러니까 지금 보고 듣고 생각하고 움직이는 그게 불성이에요.

맨날 그걸 가지고 있는 거에요.만날 거기서 살고 있는 거에요.

다만 이것이 밝게 확확 펼쳐나가지 못할 뿐이에요.

어디에 그럼 감추어져 있는가?두려움이라든지,미움이라든지,욕심이라든지,착각이라든지...

여기에 감추어져 있는 거에요.그게 여래장이에요.그걸 번뇌라 그러잖습니까!

번뇌는 공포,분노 이런 거거든요.

공포와 분노가 있으니까 항상 그걸 또 해결하려고 욕망을 가지지 않을 수 없어요.

공포가 없으면 욕망이 없거든요.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않는 사람에게 물질적인 탐욕은 없어요.

그거 거짓말인거 한번 실험해보세요.

내가 마 오늘 죽어도 전혀 두렵지도 않고 무섭지도 않다

그러면 그사람에게는 물질에 자꾸 집착하고 물질에 얽매이는 그런 어리석은 거는 없거든요.

단, 이 죽음이 두려울 때,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할 때 물질에 대한 욕망을 굉장히 강하게 가질 수 밖에 없어요.

그런데 죽음이 전혀 두렵지않다.그 순간에 물질의 구속으로부터 많이 자유로워지는거에요.

있으면 먹어서 좋고 없으면 안먹어서 좋고

살면 살아서 좋고 죽으면 죽어서 좋고 그게 모니죠! 모니...

절대적인 만족을 갖는게 그게 모니에요.

죽음에 대한 불만이 있다면 그건 절대적인 만족이 아니에요.모니가 아니에요.그건 삶에 대한 집착이죠.

왜 그럼 삶에 대해서 자꾸 애착을 가지게 되는가?

삶이 뭔지를 확실히 모르니까.죽음이 뭔지를 확실히 모르니까.

죽음이 없는 것을 확실하게 알면

여실지 여실견 여실하게 알고 여실하게 보면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잖아요.

죽음이 없기때문에!

단 죽음이 뭔지 모르기때문에 죽음을 그렇게 두려워 하는거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면 삶에 대한 애착이 줄어들잖아요.

삶에 대한 애착이 줄어들면 물질에 대한 욕심이 저절로 줄어들 수 밖에 없구요.

물질에 대한 욕심이 줄어들면 자연히 자비,보시를 안할래야 안할 수가 없는 거에요.

아주 간단한 거에요.불교가 구조적으로 보면..그런거죠.

그래서 이렇게 대광명!

큰 광명속에 있다 이런건데 그런 씨앗을 우리가 다 가지고 있다.

이게 불성에 대한 믿음이거든요.

그래서 우리 자신이 다 이게 불종자를 다 가지고 있기때문에

마음만 열면 된다 이거에요.

그래서 착각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기때문에 그것을 바로잡기만하면 된다 이게 성불이거든요.

미워할 수 있는 능력, 욕심내는 능력,남을 해칠 수 있는 능력,거짓말 할 수 있는 능력...

그래서 번뇌를 떠나서 무슨 여래가 없다.깨달음이 없다하는게 바로 그거에요.

그러니까 보세요.

착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깨달을 수 있는 능력도 있지.

착각을 아예 할 수 없다면  깨달을 수도 없는 거에요.

예컨대 막 누구를 욕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칭찬할 수 있는 능력도 있거든요.

미워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좋아할 수도 있는 거에요

괴로워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즐거워할 수도 있다.그게 불성이에요.

그러니까 그걸 잘 키우면 되는거에요.

지금 이야기 들을 수 있는 능력 그거 하나 가지면 비로자나불도 될 수 있고 

아미타불도 될 수있고 석가모니불 다 될수 있는 거에요.그게 씨앗이거든요

그러니까 이게 뭐~두려워할 수 있는 감각만 있어도 얼마든지 성불할 수있다.

꿈꿀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 꿈깰 수 있는 능력은 반드시 있다.

여러분 꿈 꿔봤죠. 그럼 깨기도 하죠. 꾸기만 하고 아직까지 못 깼습니까?그게 불성인거에요.

시시각각으로 보고 듣고 행동하고 판단하고 기억하고 움직이고...이게 불성이에요.

그래서 이것만 잘 열고 닫고 키우면 되는거에요.불성!

이걸 자비로 키우고, 지혜로 키우고, 원력으로 키우고, 자상한 공덕으로 키우면

그럼 되는 거에요. 아무것도 아닌거에요.

그래서 지금 미워하는 마음, 두려워하는 마음 이마음을 떠나서 있는게 아니라

그 마음을 바로만 열면 된다 이거죠.

그래서 우리 이런 미워하고 두려워하고 이렇게 하는 것은 파도와 같다면

비로자나불 아미타불 서가모니불 이런 불세계는 바다와 같다.

그 파도를 떠나서 바다가 없잖아요.

미워하는 마음을 떠나서 좋아하는 마음이 없는 거에요.

미워하는 마음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바꾸기만 하면 되는거거든요.열면 된다 이거죠.

그래니까 불성이 그렇게 중요해요.

외로운 마음, 외로워하는 마음 그것만 잘 돌리면 되거든요.

그래서 우리 하나하나 생각하고 느끼고 움직이는 그것만 잘 살펴가면 그게 성불이에요.

 

그럼 어떻게 해야 성불하느냐?

믿고 하면 돼요. 이게 신행이에요.믿고 하는게 신행이에요.신행하면 되는거에요.

그럼 왜 안돼냐? 이런 얘기를 하는데

안되느냐는 생각도 그게 생각이고 또 할려고 하는 생각도 생각이거든요.

그럼 왜 안되느냐 그 마음을 바꾸면 되어요.

왜 안되느냐 그게 부정적인 생각인데 그 마음만 탁 바꾸면 바로 되는거에요.

그럼 언제 그렇게 지루하게 오래오래 되느냐? 그런대요.

지루하다 빠르다 이것도 생각이에요.

본래 진리에는 길고 짧은 게 없는 거거든요. 

그래서 이걸 부처님 말을 믿어야 되어요.

믿는게 반야심경하고 법성게 있잖아요. 이게 아주 한국불교의 살아있는 기본 교전입니다. 

법성게 읽어보면은 다 나와있는 거에요.

일념즉시무량겁 무량원겁즉일념 이게 시간의 지속이 없다는 얘기에요.

더디고 빠른게 없다는 얘기에요.더딜지 빠를속

더디고 빠르다라는 것은 우리 생각인거에요.

이게 일념즉시무량겁이요 무량원겁즉일념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이걸 믿어야 되어요.안믿으면 소용없는 거에요.

그러니까 답답해요 보면은 맨날 경은 읽는데 맨날 생각하고는 경하고는 삼천리라.

아주 재미있어요. 경은 읽어요. 이게 어마어마한 철학이고 어마어마한 이게 세계관이거든요.  

일념즉시무량겁이요 무량원겁즉일념이라 그런데 이게 사실인거에요.

내 자신도 그전에 이거 몰랐거든요.몰랐는데 근래 딱 보니까 아주 틀림없는 진실이에요.

어떻게 알았느냐?

어릴 때 생각하면 노인들 보면

'저 지루한 한평생을 뭐하고 살았을까' 이런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또 뭐 물어보면 몰라요 이양반들이! '아무것도 모르면 왜 공부도 안했을까'

이런 생각을 했는데 아 요즘 내가 보니까

그 일생이 지루한게 아니라 눈깜짝할 사이에 일생이더라구요.

그래서 60년이 한순간이다.이게 사실인거에요.

24시간을 기다렸다하지만요 딱 마지막에 보면 24시간이 한순간인거에요.

24시간이다 하는 이런 기계적인 숫자는 생각인거구요. 

생각으로 계산하면 1시간이 몇초고 몇초가 얼마고 굉장히 많죠 이게요.

그런데 이 우리 지혜로 딱보면 한순간인거에요.

뭐 60년을 참선했다 100년을 참선했다 하지만요 일순간인거에요.이게 일념즉시무량겁이거든요.

그러니까 언제 됐니? 빠르게 됐니? 이런 생각 전혀할게 없어요 할게없고 그냥 하면 되는거에요.

그게 바로 뭐냐하면 인과라는 거거든요. 그게 세번째 믿음이에요.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인데 원인과 결과가 따로 떨어진게 아니고 한순간에 있다.

이게 일념즉시무량겁 무량원겁즉일념이고 이게 구세십세호상즉이에요.이게 불교입니다

생각으로 하면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고 다른거죠.

인과 과가 다른데 이 지혜로 보면 일념이 무량겁이고 무량원겁이 바로 일념이고

또 구세십세가 호상즉이니까 호상즉이라고 하는 것은 시간이 항상 함께 있다는 얘기에요.

시작과 결과가  함께 있다는 얘기죠. 시작과 결과가 그러니까 바로 되는거에요.

천만년이라고 그래도 이건 생각이고 천만년 지나놓고 보면 한순간이다 이것이 깨달음이거든요.

이 얼마나 좋아요 구세십세호상즉 말만 자꾸 외우지말고 믿는게 그렇게 중요해요.

구세라는게

소승불교에서는 삼세를 이야기하고 대승불교에서는 십세를 이야기하거든요.

소승불교 시간관과 대승불교 시간관의 가르침이 틀린데

삼세가 발전하면 십세가 되거든요.그럼 어째서 십세가 되느냐? 

삼세가 과거세 현재세 미래세인데 과거세가 또 삼세가 있지않습니까.

현재세도 삼세가 있고 미래세도 삼세가 있고 이러면 구세잖아요.삼세가 구세가 되는데요

실제 우리 이제 느끼는 그순간 딱 보는 순간에는

이게 과거도 아니고 현재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고 이게 현재 일세에요.그래서 십세가 되는거죠.

그걸 세라고 하는 이런거 찰나! 현재일찰라! 찰라라는 말을 번역하면 생각념자로 번역을 하거든요.

현재일념.일념할 때의 그 일념즉시무량겁할때의 일념은 일찰라라는 소리에요.

일찰라가 무량겁이고 무량겁이 일찰라다.찰라죠.

현재일찰라는 구세삼세에 포함이 안돼요.그냥 그대로 일찰라에요.

그러니까 구세에다가 그 일찰라 일세를 더 합하면 십세가 되는거죠.

그러니 우리가 뭐 다가와도 다가와도 현재라는 얘기에요.

지나가도 지나가도 현재라는 얘기고요.

그래서 미래라고 하는 것은 새롭게 오는 미래가 아니고 오래된 미래다.

오래된 미래, 지나간 미래 이런 얘기 들어보셨어요. 오래된 미래 지나간 미래 못들어보셨어요.

진리는 이런거에요. 생각으로는 미래와 과거가 틀린데

진리에서 보면 그게 함께 있는 거지요.이게 호상즉입니다. 호상즉이라는 말은 함께있다 이소리에요. 

그러니까 언제 극락갈까? 지금 당장 여기서 가는거에요.

여기서 바로 아미타불 잘하면 구세십세호상즉이니까 일념이 무량겁이니까 바로 가는거에요.

그게 신심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세계를 믿고 또 중생의 여래의 씨앗을 믿고, 인과를 믿고 닦으면 되는거에요.

그래서 언제될까! 빠르게 될까! 이게 절대 이건 망상이다.

일념이 무량겁이고 무량겁이고 일념이니까 그런 지속을 걱정하지마라

빠르고 더딘거 절대 걱정하지말고, 되고 안되는거 걱정하지마라

잃어버리고 얻는거 걱정하지 마라.이건 전부 망상이에요.

오로지 닦고 또 닦고 닦고 또 닦고...닦으면 열리게 되어 있죠.

그것이 신심의 공덕입니다. 이런 신심의 공덕이 없으면 안되거든요.

그래서 불자에게는 신심의 공덕이 그만큼 중요해요. 그 믿음이!

그러니까 우리가 믿음을 갖는것 같아도 실제 안믿어요.안믿습니다.

우리는 인간이다 이런 믿음은 강한데 우리는 부처의 씨앗이다 이런 믿음은 없어요.실제로 없어요. 

뭐 고약한 할머니다 이건 믿어도 저분이 바로 감추어진 여래다 이거 안믿어요. 안믿어.안믿습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신심이 있느냐 너무 미약하다라는거죠.

불생불멸을 과연 믿느냐 미약해요.그렇잖아요.

구세십세가 다 함께 있다.일찰라가 무량겁이라는걸 얼마나 믿는가!

일찰라가 무량겁이라는 걸 믿으면 빠르고 더딘거에 대해서 그렇게 두려워하지않거든요.

그래서 인과를 믿고,불성을 믿고, 또 하나 뭐라그랬어요 불세계를 믿고...

서가모니불 아미타불 비로자나불 전부... 대광명 무량광 무량수 만족과 능인, 만족과 자비

만족없는 자비가 없고 자비없는 만족이 없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왜 자비가 안되느냐? 스스로 자족을 못해서 그런거죠.

우리나라도 보면 자유와 성장이 있는데

선진국이 될려면 기본조건이 경제성장입니다.아주 빈곤국 중에서 선진국이 없거든요.

그래서 갖추어질 기본이 경제인데 우리나라 현재 국민소득이 크게 잡아서 만사천불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내노라하는 선진국이 될려면 3만불이 되어야 된다는거에요.

그럴려면 우리가 2010년도까지 선진국이 될려면 경제성장이 년 5.2%는 성장이 되어야된다.

지금같이 되면 힘들다는 얘기에요. 5.2% 이상으로 계속 성장을 해야

이제 우리나라가 노령화가 되기전에 2010년 혹은 2015년전에 30000불대에 들어가서 선진국대열에 낄 수있다.

이게 기본수치로 나와있는 거거든요.

그럼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자유냐 성장이냐? 성장없는 자유냐 자유없는 성장이냐?

그 옛날에 민주화운동 한참할 때 그때 경제성장을 부정하지는 않았거든요.

인권자유가 없다고 민주화를 외쳤잖아요.

민주화 이후에는 자유없다고는 말 안해요.그런데 지금 성장이 자꾸 뒤떨어진다라는 거에요.

그래서 자유를 누리면서 성장을 포기할 것인가? 성장을 누리면서 자유를 포기할 것인가?

이 자유와 성장이라는게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이게요.

그래서 지금 데모많이 하고 뭐하는게 자유의 표현중의 하나에요.

저거 왜 저러냐? 자유를 저렇게 누리고 있구나 민주화를 즐기고 있는거죠.지금!

이게 한계입니다. 점점 자유를 많이 누리다보면 성장이 뒤지거든요.

그래서 성장과 자유를 잘 조절을 해야돼요.

성장하면서 자유! 자유를 누리면서 성장을 해야지 

하나라도 포기하면 이게 독재국가가 되는거고 아니면 이게 공산국가가 되는거에요.

그래서 다 인권을 존중하고 여러가지 자유를 존중하면서 성장은 해야된다. 

그럴려면은 어떻게 해야되는가? 전부 서로가 서로를 믿고 존경하고 단합해야 돼요.

믿음과 존경이 없으면 결속력이 안생기거든요.

그래서 지금도 보면 회사라든지 이런 그룹그룹별로는 이걸 해내는 데가 있어요. 

그거는 반드시 훌륭한 지도자를 가지고 있는 조직이에요.

훌륭한 지도자를 가지고 있으면 서로 믿음이 생기고 믿음이 생기면 서로 존중하면서 성장을 한다고요.

가정도 마찬가지에요. 집에 돌어가서 아들딸 어른들에게 믿음을 딱 주면 서로 단합이 되고요.

그래서 일을 많이 해도 믿음이 있으면 즐거운 거에요.

그래서 이런 쪽으로 조직이 바뀌어야 되거든요. 자유와 성장이 공존할 수 있는 이게 인과거든요.

그래서 불교의 신심 참 좋아요.

부처님세계를 믿고 죽음이 없고 어둠이 없는게 부처님 세계라고 했죠.

또 중생이 여래의 씨앗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믿고

열심히 닦으면 더디고 빠른게 없이 금방된다 이걸 믿고 하면 되는거에요.

기본적인 걸 믿고해야지 현상적인 세력으로만 보면 안된다라는거죠.

자꾸 차별심이 생기고 서로가 장벽이 생겨서 안돼요.

얼마전에 어느 곳을 갔는데 작품을 여러개를 전시해놓았는데 그 작품중의 하나가 옷걸이 작품인데요.

나무로 옷걸이를 만들고 또 그 옷형태도 나무로 조각해서 딱 해놓으면서

나무옷 조각안에 시를 하나 써놓았는데 아주 기가 막힌 시였어요.

하도 감동을 푹 먹었는데요 얼마나! 읽고 또 읽고 그래가지고 외워버렸거든요.하도 좋아가지고!

참 좋은 시였어요. 시가 뭐냐?제목이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라'이거였는데요.

첫번째 어떻게 시작하느냐 세탁소 옥걸이로 시작해요.

세탁소에 갓 들어온 새옷걸이에게 헌옷걸이가 한마디하셨다.

(이렇게 되는거에요 뭐라고 말했느냐?)

너는 옷걸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말기를 바란다.

(헌옷걸이가 아주 대단해요 권위가 있어요.그러니까 새옷걸이가 뭐라냐라면)

왜 옷걸이라는 것을 그렇게 강조하시는지요?

(인제 물었어요.그래서 헌옷걸이가 말씀하시기를 이거 아주 중요한데)

잠깐씩 입혀지는 옷이 자기의 신분인양 오만해지는 옷걸이들을 그동안 많이 보았기때문이다.

(세탁소의 옷걸이가 잠깐씩 입혀지잖아요. 그렇잖아요!  야 아주 삥돌겠더라구요.그말을 보니까 !)

이거다 이거 인생은 못걸이다.

인생의 옷걸이에게 어린이라는 옷도 입혀지고 학생이라는 옷도 입혀지고

청년이라는 옷도 입혀지고...마지막에 가서는 할매,할배! 할머니 할아버지라는 옷도 입혀지고

때로는 여러가지 옷이 입혀지잖아요.그런 그건 옷걸이에 잠시 입혀졌다 벗겨지는...

그런 잠깐씩 입혀지는 옷에 불과하고 옷걸이는 아닌거에요.그런거에요. 

세력이라는 건 그런겁니다. 옷걸이에게 잠시 입혀지는 옷이다.그렇거든요

그래서 우리 불성이 그게 또 진짜 옷걸이고 삶과 죽임이라는 것은 잠시 입혀지는 옷에 불과한거에요.

그래서 우리는 불성을 바로 알아서 이 불성을 키워야 되지

거기에 뭐 수시로 바뀌는 아침나절은 이옷이 입혀지고 저녁나절은 저옷이 입혀지고

입혀지고 벗기고 벗기고 입혀지는 데 자꾸 연연하다보면 그 옷걸이가 안정을 못찾잖아요.

그 얼마나 멋있어요.그래서 내가 시에 대한 공부를 했더라면 '인생은 옷걸이'그런 시를 꼭 짓고 싶은데

거 잘안되거든요 안되는데 그뿐만아니라 인생자체가 또 하나의 입혀진 옷이다.

불성에 입혀진 옷이 삶과 죽음에 불과하다.그래서 삶과 죽음이라고 하는것은 불성에 입혀진 옷이라는거에요

그럼 불성은 뭐냐? 어려운 말로 '원적'이라고도 하잖아요.

원이라는 건 만족이란 소리에요. 적이라는 건 평화라는 소리에요.만족한 평화!이게 원적이거든요

우리는 만족한 평화속에서 있는데

그런 옷걸이 위에 태어남이라고 하는 옷도 입혀지고 죽음이라는 옷도 입혀지고

잘났다라는 옷도 입혀지고 못났다라는 옷도 입혀지고...수많은 옷이 입혀지고 벗겨져요 

그러니까 이런 것을 신심으로 거기에 휘둘리지 말고

끊임없이 닦데 만족한 상태로 닦아가는 것이 지속가능한 공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