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신심과 행원/향기로운 법문(4)

2009. 11. 25. 21:46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당신이 주인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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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심이라고 하는 것은 믿는 마음구요.

행원이라고 하는 것은 보현행원품이라고 우리나라의 주요 유통경전이 금강경,법화경,화엄경입니다.

그런데 금강경은 짧으니까 그대로 독송을 하구요.

법화경은 좀 깁니다.그 중에서 관세음보살보문품을 주로 독송을 합니다.

화엄경은 더 깁니다.80권,60권 또 40권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그러니까 이걸 다 독송하기가 어려우니까 그중에서 보현행원품을 독송합니다.

우리나라 주요 독송경전이 금강경,관세음보살보문품,보현행원품 이것이 주요 경전이구요.

또 아미타경,천수경 이런 정도가 아주 주요 한국불교 독송경전입니다.

한국불교가 어떤 경전을 신봉하는가 하면

천수경하고 금강경하고 보문품하고 행원품하고 아미타경하고 예불문 반야심경

뭐 이런 정도만 자꾸 읽으면 거기에 다 포함되는 신봉경전이거든요.

그래서 행원이라는 말은 보현행원품때문에 많이 알아요.

신심이란 말도 많이들 쓰고 있구요.

행원은

행은 행할행자인데 실행할 행자인데요. 몸소 실행하는 걸 말합니다.

신행(身行)이라고 몸신자 행할행자 몸소 실행하는게 행이거든요.

그리고 원은 마음으로 원하는 거에요. 심원(心願)! 마음으로 원하는 것이 원이구요 심원이구요!

행은 신행이에요 몸소 실행하는 것이 신행이에요

그래서 이걸 신행에서 행자 하나 따고 심원에서 원자 하나 따면 행원이 되는 거에요.

그러면 심신이 행원으로 실천이 되거든요.

행원이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 공덕을 닦고 노력을 하고 실행을 하는데

거기에는 하나하나 서원이 담겨있는거죠. 그게 행원이거든요.

그러면 그런 서원 밑에는 신심이 있어야만 그런 서원과 실행이 나옵니다.

믿는 마음이 없으면 실행과 서원이 나올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신심과 행원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뿌리와 줄기와 잎새와 같은 것이다.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럼 이런 행원을 하기위해서 첫째가 신심입니다.

신심은 뭐냐? 믿는 마음인데요.

믿는 마음이라는 것은 안정된 마음, 결정된 마음,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에요.

못믿는 마음이라는게 안정이 안되죠 결정을 못하고 늘 흔들리거든요.

그러니까 결정심이 신심입니다. 결정하는 마음인데

그럼 뭐를 믿는냐? 두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불성을 믿습니다

둘째는 인과를 믿습니다

불성과 인과 이것에 대한 신심이 기본입니다.

불성은 뭔가? 부처가 될 수 있는 본성이다.이거죠.

불은 부처님인데 부처님이 될 수 있는 씨앗이다. 불종자!불성!

그런데 이것을 화엄경을 중심으로 한 저술이 법성게라고 하는

신라시대 의상스님의 저술이 있는데 거기서는 법성이라고 그랬어요.

법성!법이라는 건 우주현상인데 우주현상의 근본, 본질,존재의 핵심 그걸 법성이라 그러고 

또 거기서는 진성이라고 그랬어요.참다운 본성이다 그래서 법성이다 본성이다.

그럼 그게 어떤 성격인가?

법성이라고 하는 것은 원융성이라 이렇게 설명을 해요.법성원융무이상이라 이렿게 이야기하거든요.

법성이 불성인데 불성은 우리의 생명이고 근원이고 우리의 본질이다.

그런데 그것의 성격이 원융하다는 거에요.원융성이라는 거죠.

불성의 첫째 의미가 원융성이다.

원융이라는게 뭔가?무이상이라고 했어요. 법성원융무이상이라고,둘이 없다고.

그럼 둘이 없다는라는게 뭐냐?하나라는 것도 아니고요.

원융이란 말이 참 재미있는 말이에요.

원융이라고 하는 것은 법성게에서 설명하기를

일즉일체!라 하나가 모든 것이다 이렇게 설명을 하고 있어요.

또 일념이 무량겁이다 한순간이 무량겁이다. 이게 원융성이에요.





 

그럼 인간의 생명이라는 게 뭔가? 이게 아주 중요한 문제인데요.

생명이라 그러는 것이 현상적인 생명이 있고 본질적인 생명이 있다고 한다면

본질적인 생명은 불성이죠

현상적인 생명은 인과입니다.

그래서 이 생명을 기계론적 생명으로 보면 그건 전부 낱낱이 모여져서 된건데 이게 기계론이죠.

그런데 불교의 생명관은 기계론적 생명관이 아니고 업성론적 생명관이에요.

이 생명은 업으로 이루어지는 생명이에요.

그래서 이게 기계처럼 하나의 부품부품이 모여져서 되는게 아니라

인간이 어떤 활동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서

생명이 항상 새롭게 탄생을 해요. 그래서 업으로 이루어진다. 이래가지고 이걸 업성론이라 그러거든요.

그래서 생명이라는 건 절대 고정불변한게 아니고 기계의 부품이 아니고 

생각하는대로 생명이 바뀌는거고 행동하는대로 바뀌는거고 말하는대로 바뀌는 게 생명입니다.

이게 업성론입니다.

그렇게 될 수 있는 이유가 그 불성이라고 하는 것은 원융성이기때문에

하나가 모든 것이 되고 모든 것이 하나가 되고

일찰라가 무량겁이 되고 일념즉시무량겁 그말이 있거든요.

일념이라는 건 찰라라는 말이에요. 일찰라가 무량겁이고 무량겁이 일찰라이고 이게 원융성이고요.

시작이 바로 도달하는 점이에요.

그래서 법성게의 제일 마지막에는

궁좌실제중도상(窮坐實際中道床)

궁극적으로 실제의 그 세계에 들어가보니 거기가 중도인데

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

옛날부터 한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더라 이게 마지막 구절이에요. 이게 원융성입니다.

그러니까 불성에서 보면

하루를 살아도 영원하게 산거고 억만년을 살아도 일순간을 산거고

이게 일념즉시무량겁, 무량원겁즉일념이에요

이 세계에 들어가야 돼요.

그러니까 내가 지금 왜 이나이에 죽느냐고 하는거는 불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그래요.

일념즉시무량겁이요 무량원겁이 즉일념이라는 것을 외우기만 할 것이 아니라 몸소 느껴야되거든요

이걸 체험이라 그러고 인간은 몸으로 느끼는게 최고입니다. 

머리로 생각하는 거는 힘이 약해요.체험!

그러니까 아무리 훌륭한 의사선생님이라고 하더라도 살고싶은대로 다 살게 해줄 수는 없는거에요.

그럼 어떻게 하는게 정말로 편안하게 해주는 길인가?

하루를 살아도 영원히 사는 것을 느낀다면 그게 해탈이고 열반이고 그게 도인입니다.

내가 오늘 죽어도 일념즉시무량겁이니까 일찰라가 영원한거니까 부족할 게 없다

이걸 생각으로 이해하는게 아니라 몸소 느끼는게 중요하거든요.

이게 불성의 세계이거든요.원융성이다.

원융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를 알면 모든게 다 포함이 되고,순간을 경험하면 영원을 다 포함한다 이거죠.그래서

순간속에서 영원을 느끼고, 하나속에서 모든 것을 느끼는 것

그게 법성의 원융성인데 그 법성은 바로 불성이다.이거에요

법이라는 것은 우주의 본성인데

우주의 본성은 앎의 본성과 똑같다.불(佛)이라는 건 안다는 말이거든요. 그게 원융성이에요.



 

그리고 이 불성이라고 하는건 금강경에서 반야로 설명되는데반야에서는 청정성이에요.

청정성이라고 하는건 뭐냐?

불생불멸이요,불구부정이요, 부증불감이다

능제일체고 모든 고통이 다 제거된다

진실불허다 진실해서 전혀 헛됨이 없다.이게 청정성이거든요

이 생명이 하루에도 엄청난 생명이 태어나는데 태어난게 없다

하루에도 엄청난 생명이 죽어가는데 죽어간게 없다 이게 불생불멸이거든요.

사람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옛날 그런 말 많이 했죠.

이 금강경 반야심경의 생명관으로 보면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닌 거에요.불생불멸인거에요.

이런 걸 믿는게 신심입니다.

하나속에 모든 것이 있고 찰라속에 영원이 있다라는 걸 믿는게 그게 신심입니다.

나도 나는게 아니고 죽어도 죽는게 아니라는 걸 믿는게 그게 신심입니다.

요즘에는 어디서 왔다 어디로 가는가 그걸 금방 알수 있어요. 다알아요..

어떻게 압니까? 병원에서 와서 병원으로 가요.병원이라는게 이렇게 중요한데요.

올 때도 병원이고 갈 때도 병원이에요. 그거 다알거든요. 아주 재미있어요.

오고 가는게 없는게 그게 생명이다 이말이죠.

하나만 예를 든다면 인생은 초로와 같다.예날 어른들이 그랬거든요.

풀끝의 이슬과 같다.

그럼 그 아침의 풀잎에 이슬이 맺혔는데 그게 어디서 왔겠는가? 온데없이 맺혔죠. 

그럼 또 한낮의 이슬이 사라지는데 그게 어디로 갔겠는가? 간데없이 사라졌거든요.

그거와 같다.

또 인생은 아침해와 저녁해와 같다.

아침에 해가 동방에서 올라와요. 그게 일출인데요.

아침에 일출로서 올라왔다 그래도 해가 생겼겠는가? 불생이죠.

저녁나절에 해가 일몰로 지는데 그게 없어졌겠는가? 불멸이라 말입니다.

이게 불생불멸이에요.

맨날 나고 맨날 죽지만 나고죽음이 없는 걸 믿는게 불성의 청정성을 믿는 겁니다.

하나속에 모든 것이 있다라고 믿는게 불성의 원융성을 믿는거에요.

둥글게 통하니까 안통할 게 없는게 원융아닙니까. 둥글게 통하니까 그렇잖아요.

 

그 다음에 불성의 역동성이에요. 힘차게 움직여요.

역동성이라는게 뭐냐하면 원을 세워서 그 정진을 하다보면 어마어마한 힘이 나옵니다.

이걸 원력이라고 합니다.원력!원하는데서 힘이 나온다.

실력이라는 말도 있잖습니까? 사실만큼 진실만큼 힘찬게 없다.이게 실력이죠.

권력이라는 말도 있는데요. 권력은 다른 사람이 갖다준 힘이에요.

옛날에는 국왕으로부터 권력이 나왔는데 요즘은 국민으로부터 나오거든요.

국민이 준 권력을 회수해버리면 없는거에요.국왕이 준 권력을 빼앗아버리면 없어요.

그래서 권력은 아주 위험한 힘이고

실력! 진실과 사실에 근거한 힘 이게 중요한데 그런데 실력보다 더 중요한게 원력!

아주 이 서원이 견고하고 확실할때 힘이 엄청나게 나오거든요.

그래서 이 원력과 비슷한게 의지인데요.

조선시대의 아주 유명한 서산스님께서 법문을 하시기를

志之所在(지지소재)에 氣亦隨之(기역수지)하고

뜻이 있는 곳에 인간의 기운이 또한 따라간다.

인간에는 혈기 원기 이런 기(氣)라는 게 있거든요.

양의사 선생님들은 기를 잘 안믿더라구요.

희안한 분들 많아요. 아니 자기경험만 믿으면 인간이 몇 백년 경험해도 다 못하는데

무궁무진한 세계의 원리를 어떻게 혼자 다 경험해요.

천하의 이치는 무궁한데 개인이 경험할 수 있는 건 한정적이다. 

내가 경험은 못해도 있을 수가 있다 이렇게 열린마음을 가지고 공부를 해야

나이가 많아도 발전을 하고 성장을 하지 아예 닫아 놓고 하면 안되거든요.

그전에 경험한 한의사분들 보면 양의에 대해서 믿는데

양의사분들은 한약먹었다그러면 얼굴을 이렇게 돌려요.

희한하더라구 왜 얼굴을 왜 돌려요.먹고 남는데.그렇잖아요

혈을 움직이고 혈을 끌어가는 기가 있는 거에요.기가 죽었다 기가 살았다 분명히 그런게 있거든요.

그런데 기가 어떻게 해서 살고 죽고 하느냐?

뜻이 있으면 기가 따라온다는 거에요.기역수지라!

氣之所在(기지소재)에 天地亦隨之(천지역수지)라.

기가 있는 곳에 천지가 따라온다는 거에요 하늘과 땅이 따라온다.

천지불능탈피부지지!라 천지도 한 개인의 뜻을 빼앗을 수 없다.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뜻이라는 게 이렇게 중요해요.그래서 뜻을 잃어버리면 모든 게 다 잃어버리게 되는거거든요. 

그러니까 원이라는게 그만큼 중요한 데요. 그 원이 어디서 나오는가?

그게 불성의 한기능이에요.

그러니가 불성에는 이렇게 원력과 같은 역동성이 있고

청정한 불생불멸의 청정성이 있고

두루 통하지 않는데가 없는 원융성이 있다 이런 얘기죠. 이게 바로 불성입니다.

이걸 믿어야 돼요.그게 신심이에요.

두번째는 인과인데 인과라는건 뭔가? 자업자득이에요.

인과는 어려운게 아니라 자업자득! 자업자득이 뭐냐?내가 밥을 먹어서 내 배가 부르다.이거에요.

어머니가 밥을 자시면 이거는 어머니처럼 가까운 분이 없어도 어머니 배가 부르지 내배는 안부르다.

아무리 친한 애인이 있어도 애인이 밥을 먹으면 애인배가 부르지 내배는 안부르다 그게 자업자득이거든요.

어떤 분은 그래요. 나는 먹은 것도 없는데 살쪘다고... 새빨간 거짓말이에요.

먹은게 없는데 살찔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살쪘다면 부처님이 자업자득을 이걸 포기해야 되어요.

살찐 분이 있다면 요즘말로 하면 헌법재판소에 가서 재판에 붙여야 되어요. 왜 그런걸 퍼뜨리냐구.

이건 절대 그럴 수가 없는 거에요.먹은 것만큼 살쪄요.

그래서 몸이라는게 내 자업자득의 결과물입니다.

이 몸안에는 내가 평생동안 무엇을 먹었고 어떻게 행동했고 어떻게 잠을 잤고

어떻게 생각한 일생일대의 블랙박스에요. 이게!

완전 한평생 업이 다 내장되어 있는 이게 블랙박스라고.

이덜 판독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 그렇지,

판독할 수 있는 능력만 있다면 자기 행위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여기 녹아 있거든요.

이게 자업자득인 거에요.

그래서 이 자업자득을 믿는게 그게 신심입니다.

그래서 나한테 어려운게 있으면

그걸 부모를 원망한다든지 친구를 원망한다든지 시대를 원망한다든지 그러면 자업자득을 안믿는거거든요.

그런데 이 자업자득을 믿지를 않으면 성장을 못해요.

잘못이 나한테 없기때문에 복수만 할려그래요.

복수를 한다는 것은 상대편에게도 고통스럽지만 내자신이 파괴가 되는겁니다.

위대한 사람은 불교를 안믿어도 다 이 결과를 자기로 돌린 순간에 새 출발할 수가 있었어요.

그게 아주 동서고금의 특징입니다.

다 어려움이 있고 역경이 있었는데 그 역경에서부터 새로운 세계를 이루는 계기가 뭐냐?

자기로부터 반성할때 그게 나와요.아 이건 내가 이런 잘못을 저질렀구나.나에게 이런 결함이 있었다.

이런 것을 확실하게 느낄때 확실하게 새출발을 할 수가 있습니다.  

유럽의 근세사를 보면 새로운 혁명이 많이 일어났거든요.

그중에 아주 기본적인게 과학혁명인데요.과학혁명이라는게 뭐에요?

완전히 우주를 보는 눈이 달라진거거든요.하늘이 돈다고 했다가 땅이 돈다.그런 것처럼 이게 과학혁명이에요.

그 다음에 시민혁명,산업혁명 나오고...

이렇게 되는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사물이 존재한다라고 믿는거에요.

그래서 믿을 건 인간의 머리밖에 없다 이게 이성론인데요.

이 이성을 중시하는 사유구조가 몇가지 특징이 있는데

첫번째 특징이 과학주의입니다. 과학적인 거라야만 믿을 수가 있다 이게 과학주의거든요.

과학이라는게 뭐에요. 원리와 법칙이 있다.이거거든요.

이 과학주의가 마지막에 산업화로 연결되어가지고 자본주의가 된 거에요.

자본주의가 나중에는 향락주의로 되는거에요.

이게 현대의 중요한 아주 사조인데 과학주의,자본주의,향락주의!

그럼 향락주의 그 다음에는 어디로 가느냐? 갈곳이 없어요.

그러면서 이거를 하면서 인륜이 파괴가 되고, 인성이 붕괴가 되고, 자원이 고갈되고, 환경이 오염되어서..

이러한 현대사조가 합리주의로 출발했는데 지금 완전히 비합리성에 봉착을 한거에요.

그래서 합리주의를 주창했던 유럽에서부터 또 미주미국에서부터

이 합리주의를 초월한 탈출구를 찾을려고 엄청나게 애를 쓰는데요.

개발도상국가나 후진국에서는 합리주의를 열심히 찾아갈려고 따라갈려고 지금 애를 쓰고 있습니다.

이게 더 중요한 문제거든요.

그런데 거기서 아주 중요한 게 하나가 있어요.

하늘이 돈다 그랬다고 땅이 도는데 거기에 머물렀다구요.

땅이 도는게 아닙니다. 내마음이 도는 겁니다 여기까지 가야 되어요.

그런데 서구에서는 지구가 돈다는 것만 알지 내마음이 돈다는건 몰라요.거기까지 가야 되는 거에요.

유심소현(唯心所現)이라는 말이 있잖습니까? 마음이 나타난 거라고.일체유심조라고.

이게 세번째까지 올인을 해야 되는 겁니다.유심소현!

지구라고 하는것도 내마음이 나타난 것이고 우주라고 하는것도 내마음이 나타난 것이다.

이게 하늘을 본다 그래서 내의식을 떠나서 하늘이 따로 존재하는 것 같지만 

내의식으로 보여지는 그림자라는것이죠.이게 유심소현이에요. 마음이 나타난 바!이게 불교입니다.

그래서 아주 유명한 얘기가 있잖아요.

원효스님이 해골물인줄 모르고 마셨을 때는 달았는데 해골물인줄 알고 마셨을때는 역겨웠다.

유쾌하고 불쾌한게 이게 물의 어떤 원소가 들어있고 무슨 뭐가 함량이 되어 있어서 그런게 아니라

유심소현이다. 내생각의 산물이라는 거죠.

그리고 중국의 육조헤능스님의 유명한 법문이 있잖아요.

깃발이 움직이느냐 바람이 움직이느냐 논쟁을 일으키는 걸 보고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그 다음 답변이 뭐죠?

내 마음이 움직이는 거다. 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보고 듣고 느끼는게 다 자업결과에요. 자기 업의 결과인거에요.

그래서 업을 지은만큼 보고 업을 지은만큼 듣는다.이게 아주 중요한 겁니다.

그래서 업이 달라져야 세계가 달라지는 거지.

업이 작고 어리석고 어두울때는

세계를 아무리 봐도 어두울 수 밖에 없고 세계를 아무리봐도 작을 수 밖에 없다 .

이게 불교입니다.그게 자업자득이에요

그래서 내눈에 보이는게 지금 확실히 나와는 상관없이 있는 것 같지만

이건 어리석게 보는거고

알고보면 내업에 의해서 보는거지 나와 상관없이 있는게 아니라는거죠.

내 업이 달라지면 세계가 다 달라진다는 거죠.

그런데 이런 얘기를 하면요 대략 관심들이 없더라구요.

이게 왜 그러냐? 합리주의에 물이 들어가지고 그래요.

합리주의라는게 아주 비합리적이라는 걸 체험하면서

잘살려고 막 산부수고 막 이래가지고 했는데 결국 산도 없어지고 가족도 없어지고

남는 건 목숨 하나 있는데 목숨은 점점 늙어가니까 별별 수단을 다 써도 자꾸 허무해지고...

이게 합리성이라는게 완전히 비합리성이라는 걸 눈앞에 느끼면서도  

합리주의에 깊이 이게 오염이 되어서 이런 거를 잘 안믿어요.

내마음에 의해서 우주가 나타난다라는 걸 못믿어요.

그래서 반야심경을 맨날 외며 불생불멸 막 힘차게 외우는데 막상 아이고 죽으면 어떻게 하나!

신심이 없는 거에요.그렇잔하요. 

그래서 내마음이 움직이는 거니라! 그거 하나만 잘 믿으면 불교 다 아는거거든요.

그리고 유명한 이야기가 또 있지않습니까?

조선시대 초기에 유명했던 무학스님이라고 계셨잖아요. 

조선왕조를 처음에 세운 태조 이성계 태조대왕이 있잖습니까?

태조대왕과 무학선사가 한낮에 따뜻한 햇빛아래서 대화를 했다고 그러잖아요.

농담주고 받기 했다 하잖아요. 농담 좀 해보자 그래서 그래 하자 그랬더니

태조대왕이 무학스님보고 돼지같다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무학스님은 태조대왕보고 부처님같다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왜 농담하자고 하고 진담하느냐고 태조대왕이 따졌어요.

그러니까 그게 아니다 그럼 뭐냐? 

이저안관지즉저야 이불안관지즉불야(以猪眼觀之卽猪也 以佛眼觀之則佛也)

돼지의 눈으로 보면 돼지고 부처의 눈으로 보면 부처다. 그게 답변이에요.

부처로 보이는 사람은 자신이 부처니까 부처로 보이고

돼지로 보이는 사람은 자신이 돼지니가 돼지로 보인다.이게 불교의 세계관입니다.

그래서 물리학이라고 하는것도 실험적 결과를 중시하는데

거기서 하나 놓치고 있는거 어떤 마인드를 가지고 실험을 하느냐

그 생각에 따라서 결과는 다르게 나타나는 거에요. 이거 절대 거짓말 아닙니다.

그 실험하는 사람의 마인드!마음 그게 결과를 결정해버리는 거에요.그걸 몰라요.

그래서 아주 고등물리학에 들어가면 실험자의 마음상태가 이미 결과는 결정돼버리는거에요.

그러니까 내가 부처님 마음을 가지고 딱 보면 부처님이 그대로 보이는거에요.

내가 돼지마음을 가지고 딱 보면 그냥 돼지로 보이는 거에요. 

그래서 요즘 사랑도 마찬가지에요.

내가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애인을 볼때 사랑스럽게 보이지

내가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보는데 어떻게 사랑스럽게 보입니까.

그러니까 내가 변해야 세상이 변한다. 이게 자업자득이거든요.

그런데 서구 근대사조는 그렇지를 않아요. 나와는 별개로 모든 것이 존재한다.

이게 기계론이고 이게 과학론이거든요.그것가지고 안된다는 거에요.

그런거를 받아들여서 요새 문학도 하고 역사도 하고 철학도 하니까

메말라가지고 인문학이 요새 대학에서 죽어가고 있어요. 

왜냐? 그런 공부를 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인생을 소외시켜버린거에요.

예를 들면 공자사상을 연구한다그러면

공자의 그 인과 의를 내 인격으로 성장시킬 생각은 꿈에도 없고

그걸 책으로만 연구하고 자기는 별개인거에요.

오늘 아침 신문에 난 얘기인데요.

참선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연구해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 참선은 한시간도 안해본 사람이 많다.

그게 현대의 인문학의 현주소라는거죠.

그냥 참선에 대해서 연구만 해서 논문만 썼지 

그 참선에 대해서 연구한 자기자신은 그냥 망가뜨리고 헛세월 다 보내고 만거에요.

그게 현대판 인문학이다.그러니까 죽을수 밖에 없다는 거죠.

업을 고쳐야 되어요. 자업자득!

날씬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맨날 먹고, 많이 자고, 일 안하고 그렇게 해보세요 어떻게 되나.

날씬하거하고는 거리가 멀거든요. 사실이 그래요.

그러니까 불성과 인과만 믿으면 전혀 거기에 대해서 두려움이 없다.

그러면 어떻게 되냐? 그 다음에는 원을 하죠.

내가 이런 것을 이루고 이런 것을 하고...원을 해요. 

그래서 원은 탐욕과 다르거든요

원은 그것을 이루기위해서 실질적으로 노력을 하는게 원입니다.

탐욕은 노력은 안하고 결과만 탐하는게 탐욕입니다.  

그래서 원을 그렇게 세우면 자업자득을 탁 믿으면 내가 할일밖에 없거든요.

하는 것민큼 이루니까.그래서 원을 세울 거 아닙니까?

원을 세우면 그 원이 이루어지도록 부단히 정진하는 거에요. 그게 행이거든요.행원!

그래서 하고 또 하고, 하고 또 하고 자꾸 하는게 이게 행원이죠.

그리고 또 다한 다음에 어떻게 되느냐? 그 결과를 내가 다 수용하면 그거는 또 서원이 아니에요.

열심히 해서 내가 다 쓰지말고 나머지 부분을 다른사람에게 회향을 해요.돌려요!그게 또 서원입니다. 

그래서 수행과 수행아닌것의 차이점이 뭐냐?

하는 거는 똑같아요.

그런데 수행이 아닌 것은 자기노력의 결과를 자기가 소유하는 거에요.

이게 바로 일반적인 행이죠.

그런데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열심히 해서 거기에서 얻어진 결과를 돌려요. 회향을 해요.그게 수행이거든요

뭐든지 소유를 하면은 자기도 망가지고 다른사람도 도움을 못주고 그래요.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자꾸 전환시켜서 새출발을 해야지 소유를 하면은 그만큼 고통이 되는 거거든요

같이 이루었는데 

소유하면 고통이고 회향하면 기쁨이다.

이게 아주 핵심이에요.소유와 회향의 결과가 뭐냐?

소유하게 되면 고통이 와요.

뭐든지 내가 가지고 있는다는 것은 즐거움만 있는게 아니라 반드시 부담이 따라요.

행복이라고 하는게 뭐냐?행복이라는게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있는 거지 무엇을 이루느냐에 있는게 아니다.라고 하는걸 확실히 믿게 하는게 중요해요

그래서 부처님이 임종을 맞을때 편안했지않습니까.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편안하게 받아들이면 모든것이 행복해요,괴롭게 거부하면 모든것이 불행해요.

이걸 안락이라고 그래요. 불교에는! 편안하고 즐거운것!

불교 경전에는 행복이란 말은 없습니다. 다행하고 다복하다 이런 말은 있는데요.

안락이란 말이 있어요. 편안하고 즐거운 것!

부처님은 돌아가시는 순간에도 편안하고 즐거웠거든요

그리고 이걸 편안하고 즐겁게 받아들이면 그게 행복인 거에요.

무엇이든지 만족하면 그게 행복이에요.

그러니까

쳔년을 살아도 아 내가 더 살고 싶다 이러면 그거는 불행이구요.

하루를 살아도 이걸로 만족한다 그러면 그게 행복이에요

아무리 오래 살아도 자기 생애에 만족하지 못하면 불행한 거에요.

그러니까 생명이라는 것은

만족할때 안락이 있는 것이지, 연장할때 기쁨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게 불교의 생명관이고 이게 불교의 행복론입니다.

뭐든지 만족한 마음을 갖는데.

그거는 원융성,청정성,역동성의 그 불성에 대한 믿음과 체험이 있어야 이게 가능한일이에요. 

그냥 생각만으로는 안되는거에요.

그래서 자업자득을 믿고 열심히 노력해서 나머지 결과를 내가 소유하지 말고 함께 나눌때

그때 멋진 인생관이 수립되고 그때에 진짜 기쁨이 형성되는거에요.믿음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전통적인 어머니하고

아주 과학적으로 합리적으로 무장된 영국의 어머니하고 근본적으로 차이점이 있습니다.

현대의 어머니들은 합리주의에 많이 그런 학습이 되어가지고 또 틀려요.

그런데 전통적인 우리 어머니들은 달랐거든요

영국의 어머니는 아이들 데리고 병원에 가서 의사선생님이 긴 주사바늘을 가지고 딱오면

아이가 무섭지않습니까? 그럼 울죠!그럼 어떻게 달래느냐?

첫번째 하는 말이  저 주사맞아도 안죽는다! 아주 합리적이에요.

두번째 또 울면 참을 만하다

세번째 또 울면 저 주사 맞아야 신사가 된다. 좋은 사람된다

이러니까 꼼짝없이 아이가 맞는거에요.이게 영국의 어머니가 아이한테 해주는 말입니다.

그럼 우리 전통적인 어미니는 뭐라 그랬을까요? 느껴지는거 없으세요.

딱 가지고 오면! 나도 옛날에 가니까 그러더라구요.우리 어머니가 한말이 있어요

주사 가지고 나오면 막 겁나잖아요.어머니는 뭐라 그래요? 안아파 안아파 이래요.

틀림없어요.전혀 틀려요! 안죽는다그러는거하고 안아프다.

두번째 또 울면 뭐라 그래요. 모르세요?호랑이 나와 호랑이 나와!그럼 호랑이 안나오거든요

또 울어요.세번째 또 울면 뭐라그래요? 뭐라 그러는지 아세요? 이거에요! 주먹으로 때리는 거에요.

여기에 굉장히 차이점이 있습니다.

언뜻보면 영국 어머니가 굉장히 합리적인 것 같죠 한계가 있는 거에요.

우리 어머니가 최고인거에요.

안아프다 딱 믿고 딱 맞으면 아무렇지도 않아요.

안아프다는 말을 확실히 믿지않고 자꾸 겁내니까 이거 넣어야 되니까 그 다음에는 겁주는 거에요.

딱 믿고 차분하게 맞으면 아 착하다 그러고 잘맞았다 그러고 할텐데

어머니 말을 안믿고 자꾸 울고 그러니까 겁을 한번 줘야죠. 호랑이 나온다고.

그래도 말 안들으면 때리는 수 밖에 없는 거에요

그게 아주 직관적이고 그게 아주 체험적인거에요.

인생이라는건 말로 다되는 거 아니거든요 이 체험이 아주 중요해요.

그래서 야!그게 진짜 중요하다!

분명히 주사바늘을 가지고 오는데 어머니가 안아프다고 한거

이게 진짜 우리의 영혼이고 우리의 생명이다 이게 참 중요해요! 이런게!

이거를 합리주의에서는 신비주의라 그럽니다.

신비주의가 아니고요 그대로 진정성과 진실성에 의한 힘이에요.

이건 진설성에 대한 힘이다. 어머니의 진실을 표현하는 힘입니다.

안아프다고 딱 믿는 순간에 안아픈거에요.

그걸 이아이가 못믿고 겁주는 수 밖에 없구요.그래도 모르면 때리는 수 밖에 없는거에요.

아주 중요하거든요.  

그러니까 이 생명관에 대해서 앞으로 연구가 계속 되거든요.

그러니까 동국대학교 일산병원에서는 특성화를 해서 의료체계를 아주 신선하게 체계화시킬 필요가 있구요.

그래서 전국에 알려지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의료센터가 되어서

정말로 부처님의 이 불성에 대한 믿음이 모든 사람네들의 건강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라겠습니다. 

 


아 ! 우리 민족의 영산 백두산의 가을 절경 만끽하세요!!



10여년 동안 해마다, 철따라 백두산을 찾아 사계를 카메라로
기록하고 있는 사진작가 이정수씨의 사진임







백두산의 가을



지하산림 계곡



장백폭포



소천지



백두산 오르는 길



소백두의 가을



흑풍구에서 본 장백폭포



흑풍구에서 본 장백폭포



흑풍구에서 본 장백폭포



소천지 위 늪지

[ 출처: 동아닷컴 ]









흑풍구에서 본 장백폭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