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찬 수
종교문화연구원장
전철에서 어떤 사람이 열심히 전도를 하고 있다. “주 예수를 믿어라, 그러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어떤 사람은 험악한 말도 불사한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답답해진다.
습관이 되다시피 머리 속에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믿어져야 믿지!” 믿고 싶건만, 믿어지지 않는데 어쩌란 말이냐! 분명한 것은 믿고 싶은데 믿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믿어져야만 믿을 수 있는데, 무조건 믿으라니. 참 공허한 외침이다.
믿음은 내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그러니 믿으라고 해서 무조건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게 생겨나는 것이고, 주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선물이요 은총이다. 믿음이 주어져야만 “나는 믿는다”고 말할 수 있다. “내가 믿는다”지만, 사실상 주어지는 것이고, 따라서 그렇게 믿어지는 것이다. 나만의 의지가 아니다. 내 안팎의 상황에 어울리게 그렇게 된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나? 사실 가만히 살펴보면,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는데 그냥 그렇게 된 것은 없다. 그렇게 되도록 되어있었기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믿어질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되어 있었기에 적절한 때에 적절한 조건들을 만나 믿어지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저 진공 상태에서, 텅 빈 허공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노력하고 고민하고 갈등하고 투쟁한 지난날의 흔적이 적절한 상황을 만나 피어나는 것이다. 나의 온 삶 안에 무질서하게 들어있던 온갖 자료들이 일제히 질서를 잡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은 ‘세계관의 전환’이기도 하다. 그리고 깨달음과도 같다.
흔히 ‘대번에 깨닫는다’(頓悟)고 말하지만, 사실상 그렇게 깨달을 수 있을 사람만 적절한 때에 깨닫게 된다. 겉으로는 대번에 깨닫게 된 것 같지만, 그에게는 이미 그렇게 깨달을 수 있는 토양이 준비되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점진적으로 쌓여왔던 그 동안 삶의 재료들이 어느 순간에 일제히 재배치되는 것이다.
본래 깨달을 수 있도록 되어있는 바탕 위에서 본래 그래야 하는 원리에 맞게 기존 경험적 재료들이 적절한 순간에 재배치되면서 일어나는 일이 깨달음인 것이다. 내가 쟁취하는 것 같지만, 사실상 나란 존재가 그러한 삶을 추구해왔기에 어느 순간에 그러한 일이 나에게 벌어지는 것이다. 고민하고 갈등하던 지난날의 흔적들이, 온갖 삶의 자료들이 재배치되면서, 다시 질서를 잡는 행위가 바로 깨달음인 것이다.
그리고 일단 깨달음을 얻게 되면 그 깨달음은 마음대로 물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깨달음도 각고 끝에 얻게 되면, 그 다음에 아무 때나 반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 마음대로, 내 독자적으로 깨달았던 것이 아니듯이, 깨달음의 반납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이다. 일단 믿어지면, 그 다음은 믿지 않으려 해도 믿지 않을 수 없다. 이제부터는 믿지 말아볼까 의도해도, 믿지 말아야지 작정해도 믿어진다. 믿는 것이 내 맘이 아니었듯이, 믿지 않는 것도 내 맘이 아니다. 적절한 때에 믿지 않게 될 수 있을 뿐, 아무 때나 내 마음대로 믿음을 버리지 못한다. 설령 환속을 하고 목사직을 반납하고 신부/수녀 복을 벗을 수는 있어도, 깨달음 자체, 믿음 자체를 반납할 수는 없는 일이다. 생겨난 것이 내 맘이 아니었듯이, 반납도 내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닌 탓이다.
흔히 불교적 깨달음은 자력적이고, 기독교적 믿음은 타력적이라고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의식하든 못하든 내가 노력한 결과라는 점에서 자력적이지만, 더 크게 보면 내 계획 너머에 있던 인연들 속에서 알지도 못한 사이에 내 안에 불쑥 생겨난다는 점에서 타력적이다. 크든 작든 우리의 삶은 다 그런 식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
895호 [2007-0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