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천도재를 왜 지내야 하는가

2009. 11. 27. 22:2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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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쉼 없이 시간은 흘러가고 간단없이 세월은 지나가기에 옛 사람들이 가는 세월에 대해 말하기를 흐르는 물 같다 해서 흐를 流字물 水字를 써서 유수 같다거나, 화살같이 빠르다 해서 살 같다고들 해도 젊은 시절엔 그저 그렇거니 하고 감이오질 않더니 이제는 제가 가는 세월을 피부로 느껴지고 있으니 참으로 걱정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 금년 1월 들어서부터 카페에 올라온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려다 보니 기왕에 할 바엔 법문의 제로 삼아 우리절 신도님들도 남은 세월 동안에 정신 좀 차리고 참으로 사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에 대해서도 공부 좀 하시고, 절대명제인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기에 우리도 언젠가는 이생을 달리해야하기에 이 조촐한 법문을 듣거나 읽으시는 모든 인연 닿는 분들께서 법문을 접한 인연으로 다겁 생에 얽혀든 모든 인연들을 모두 제도시켜드리는 선근공덕을 심어금생에 자기 갈 길을 미리 닦아 다음내생을 보장하고 끝없는 윤회로부터 벗어나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오늘 법문의 문을 열고자 합니다.


이러는 저도 물위를 헤젓는 백조라, 여러분들 앞에서 겉으로는 한 경계를 맛본 것 같지만, 사실은 다음 생에 제 갈길 닦기가 바쁩니다.

선객들의 법문에 자주 인용되는 “어떤 스님이 몇 푼어치 되지도 않는 무말랭이를 시골장날 좌판에 놓고 눈만 감고 앉아 지내다가 지나는 누군가가 가격을 물어보거나 석양이 지면 다리를 뻗고 통곡을 하고 울었다고” 하잖습니까.   


왜냐, 이 하루는 지나가면 다시 올 수 없고 세월은 쉼 없이 가기에 자신은 죽어가고 있건만 오늘도 공부를 성취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에 통곡을 했다는데 저는 요즘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마음을 여러분들은 공감을 하셔야만 합니다.

왜냐,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흐르는 시간과 세월에 떠밀려서 인생의 끝을 향해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천도재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도대체 왜, 천도재를 지내는가에 대한 이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의 사후세계를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현대의 의학계에서도 소위 가사상태를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인정하고 있고, 잘났고 잘난 척 하는 사람들도 모두가 겉과 말로는 종교에 귀의해 뭣 뭣처럼, 뭣답게 참되게 살아보기 위해 종교를 택했다고들 말하지만, 그 내면에는 죽음에대한 공포와 사후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편안함을 얻기 위함이 더 크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소위 가사상태를 경험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의 이야기나 영매(靈媒)의 입을 통하여 사후세계가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천도재는 사람이 죽은 후, 살아 있을 때는 마음이라 부르고 그 마음이 동하면 생각으로 움직여 이 한 몸뚱이는 죽는 순간까지 온갖 생각과 말과 행동이라는 신구의 삼업을 만들고 살다가 죽게 되면 바로 귀신이요 영혼이라 부르는 것인데 “삼혼칠백”이라 하여 사람의 정신작용을 넋 혼자를 써서 혼(魂)이라 부르고 형체에 의지한 영(靈)을 넋 백자를 써서 백(魄)이라하는데 도교에서는 혼도 3혼이 있고 백도 7백이 있다고 하는데 진(東晉:317~420)의 갈홍(葛洪)이 지었다는 신선방약(神仙方藥)과 불로장수의 비법을 서술한 도교서적인 포박자라는 책을 보면 “사람의 형체가 분산하면(죽음) 몸에 있는 삼혼칠백을 볼 수 있다”고 하였고, “지장보살 발심인연 시왕경”에도 삼혼칠백에 대해서 언급이 있으나 원래 불교에는 이런 용어들이 없고 도교에서 만들어낸 말들이지만, 흔히들 “얼빠졌다, 넋 나갔다”고 많이들 말합니다.

바로 “얼은 혼”이고 “넋은 백”이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단어들이 알 식자, 식(識)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살아있을 때, 제대로들 알고 살아야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죽어서도 제대로 자기 갈 길을 지향성에 의해 제대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소위 무상법문이라는 것이 뭐 별겁니까?

살아있는 사람들이 말로만 노상하는 “마음비우기”라는 것이란 말입니다.


하지만, 마음이 어디 있고 어떻게 생긴지도 모르기에 금강경에도 수보리가 세존께 묻기를 “응운하주 운하항복기심”이라고 하질 않습니까?


마음이 어떻게 생겼고 어디에 있는 줄도 모르는 중생들인 우리들이기에 더 쉽게 말씀드리자면, 한마디“한 생각 바꾸기”란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들을 죽어 천도재를 할 때 업식이 가벼운 영가와 무거운 영가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 보이는 것입니다.

“한 생각 바꾸기”가 살아 생전에 잘 수련되어 일상에 베여있던 영가는 죽어서도 너무도 쉽게 천도가 되건만, 그렇지 못한 영가들에게 필요한 것이 지극 정성에 온갖 무상법문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온갖 것에 애착과 집착이 강하게 남은 업식이 무거운 영가는 엄연히 존재하기에 그러한 영혼을 육도윤회(六度輪廻)에서 벗어나 빨리 내생의 좋은 곳에 환생(換生) 하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천도재인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예들이 많지만 이러한 업식이 두꺼운 영가들이 머무는 곳은 죽을 당시의 장소나 죽기 직전 살았던 장소 또는 가장 정들었던 곳에 머무는 것이 대부분인데 가끔 심신이 허약한 사람의 몸 속에 머무는 경우도 있습니다.


만약 사람 몸속에 머물게 되면 악몽을 꾼다거나 환상이 보이고 환청이 들리게 되고 그 부위는 병명 없이 아프게 되고, 사람의 머리에 있을 경우 처음에 두통이 있다가 그대로 놔두면 점점 더 심하게 되고 나중에는 정신병자처럼 되어버리기도 합니다.


또, 엄마 배속의 태아로 죽었거나 어린 나이에 죽은 영혼도 엄마 곁을 떠나지 않으려고 하여 엄마의 몸 속에 남아있는 경우도 있고, 젊은 나이에 죽은 영혼은 생에 대한 집착과 자신이 죽은 것이 두려워 금방 이승을 떠나지 못하게 되고, 뜻밖의 사고로 갑자기 죽은 영혼은 죽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확인하려고 가족이나 친지에게 나타나는 경우도 있으며, 원한이나 애정, 재물, 권력 등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는 경우에도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오랜 세월동안 관계있는 주위를 맴돌게 되는 것이기에 천도제가 필요한 것이며, 더구나 요즘 세상 일들이 흉악하게 변해가는 것도 사실은 서양종교에서 자신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준 조상에 대한 효성마저도 미신으로 치부해서 제사조차도 못 지내게 하는 그런 작태들로 후손들이 있는 “유주혼”들이 제사 밥도 못 얻어먹“무주고혼”들이 되어 죽은 다음에서야 철들어 자식들이 자기를 위해 뭔가를 해주기를 바라지만, 살아생전에 자식들에게 가르친 것이 없으니 죽은 자기를 위해 해주는 것이라곤 입으로만 해주는 기도문과 노래 밖에 없어 배고플 수밖에요.

여러분들도 오늘 법회가 끝나고 점심공양 없이 돌아간다고 해보세요. 얼마나 뱃속이 허하겠습니까?

생자와 사자는 따로 노는게 아닙니다.

이 법당 안에 전깃불도 켜져 있지만, 전깃불 있다고 촛불이 별 볼일 없나요? 형광등 켜져 있다고 백열등이 별 볼일이 없나요? 


이렇게 한 공간에 서로 역할을 다하면서 어우러져 있듯이 생자와 사자의 세계는 같이 공존하고 있지만, 서로의 영역의 구별은 분명하기에 영가가 사는 세계는 음(陰)의 세계이고 인간이 사는 세계는 양(陽)의 세계이기에 서로 음양의 기운이 맞지 않고 파장이 다르기에 서로 구별은 있지만, 착심이 강하고 원결이 강한 영가들이 넘어서는 안되는 영역을 넘어 살아있는 사람들의 양의 세계에 에너지를 보내게 되어 음과 양의 부조화로 여러 가지 불행한 일이 일어나고 피해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가들이 진짜로 나쁜지, 나쁘다면 왜 나쁜지도 모르면서 서양종교에서 말하기를 사탄이라고 하기에 나쁘다는 이유로 그러는 자기도 죽으면 사탄이 될 것이건만, 쫓으려 하고 몰아내려고만 하기에 영가는 더욱 좋지 않은 기운으로 주변을 맴돌게 되는 것입니다.

오는 사람도 편안하게 해주고 가는 사람도 편안하게 해준다면 편안함을 느끼는 것은 마음이지 몸이 아니듯, 영가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영가들에게 잘해주면 계속해서 찾아 오기에 잘해주면 안된다고들 하는데, 그처럼 박복해지는 말은 없는 것입니다.


거지도 인심 좋은 집에 자주가고 잘 얻어먹으면 어디서 말이라도 잘해주는 듯이 영가도 똑 같이 보시면 됩니다. 아시겠지요?

그 자체가 공덕이고 복덕행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천도재를 지내고난 후를 보십시다.

천도재로 죽은 영혼이 그 동안의 응결이 풀리어 좋은 곳으로 가게 되면 천도시켜준 사람에게 고마워하면서 천도된 후에도 그 은혜를 잊지 못하고 내생에서 좋은 인연으로 다시 만나게 되고, 그 동안 알 수 없던 불행이 없어지고 원하는 소원이 이루어지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몸속에 붙어있는 영가를 천도시켜 주면 천도재가 끝나는 그 자리에서 아픈 곳이 씻은 듯 나아질 수 있고, “다겁생래 선망조상 제형숙백 자매질손”의 천도재로 집안의 우환이 사라지고 사업실패자는 재기의 기회가 생기고, 결혼 전에 죽은 조상이나 형제자매 혹은 일가친척의 혼령을 천도해 주면 남녀의 애정문제가 저절로 해결되기도 합니다.


엄마 뱃속에서 죽은 태중영가(胎中靈駕)로 인하여 그 집안의 자녀가 무기력 병에 걸리거나 자살충동을 자주 느끼거나 유별나게 고독감에 많이 잠기는 경우가 있고 부모를 미워하고 돈을 아낄 줄 모르고 물쓰듯 써버리는 등 부모의 속을 썩이고 방황하거나 장애를 일으키는 경우들도 태중영가들을 천도시키면 깨끗이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럼, 천도재(薦度齎)를 지내는 불자들의 자세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대부분의 불자들은 薦度(천도)라고 하면 스님들이 기도를 열심히 하면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소위 지옥중생들과 선망조상영가들을 번쩍 들어 올려 극락세계로 보내줄 걸로 생각들 하시고, 또 한번해주는 천도재로 인연영가에 대한 도리를 다 했다고 생각들 합니다. 

이런 생각은 지극히 위험한 생각일 뿐 아니라, 자칫 하면 부처님의 연기법(緣起法)을 왜곡하게 됩니다.


천도(薦度)란 쉽게 말해서 “현 상태보다 나은 곳으로의 자리옮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천도란 천혼(薦魂) 또는 천령(薦靈)이라고도 하는데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어주기 위해서, 불보살님들께 재를 올려 영혼들로 하여금 정토나 천계에 태어나도록 하는 의식이 바로 천도재인 것으로, 여기서 천도의 薦字는 천거할 천자이고 도는 법도 度字를 쓰며 재(齋)는 신구의 삼업을 깨끗이 하여 악업을 짓지 아니함을 말하며 원뜻은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것을 말했으나 요사이는 망자를 위해 천도하는 법회를 재라고 합니다.


우리가 제사라고 할 때의 제자(祭)는 "사람과 신이 서로 만난다"는 뜻이 있어 제사 祭字를 쓰는 것입니다. 


천도란 쉽게 말하면, 어떤 사람이 짐수레를 끌고 가다가 수렁에 빠졌을 때, 나오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혼자서는 역부족일 때 누군가가 뒤에서 조금만 밀어준다면 평지에 이를 수 있듯이, 이것이 수렁에서 평지로의 천도인 것이고, 가난한 사람이 깊은 병에 들었으나 병원에 갈 엄두도 못내고 고통받고 있을 때, 친척이 달려와 병원 치료를 받게 한다면 이것도 바로 천도인 것이기에, 그래서 우리는 애착과 원결이 강하게 죽은 영가를 위해서 불보살님들께 재를 올려 영혼들로 하여금 정토나 천계에 태어나도록 독경과 염불을 통해서 영가를 깨우치는 의식으로 영가는 신체가 없어서 식(識)이 맑아져 있어 살아 있을 때 보다 진리의 법문을 더욱 잘 알아들을 수 있기에 영가에게 부처님의 무상법을 들려줌으로써 지난 세상에 대한 애착과 집착을 끊고 점점 좋은 세계로 나아 가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천도재를 지내는 것이며 영가만 좋은게 아니라 본인은 기도를 함으로써 삼업이 청정해지고 기도공덕을 받게 된 영가 또한 좋은 기운을 음덕으로 되갚을 것이기에 서로 좋은 것이 바로 천도제인 것입니다.


49재도 잘 지내 주었고, 매달 지장재일에 꼭 참석하고, 우란분재나, 기회 있을 때마다 천도재에 몇번씩 동참했는데 언제까지 계속해야 합니까?”라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만, 대답은 한 평생 살아가면서 인연이 닿을 때 마다 천도재에 동참하라고 하겠습니다.


심지어 본인의 기도 때마다 마음속으로 인연무연의 일체중생들을 위해서 축원을 해주면 더욱 좋은 것입니다.

지금 이 몸의 내가 있기 까지는 무량한 다겁생의 부모와 형제자매가 있었듯이,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길을 가다가 죽은 짐승들의 뼈 무더기 앞에서 잠시 머물러 간절하게 기도를 하자 수행하던 아난이 묻기를 “세존이시여! 저 뼈들은 하찮은 짐승의 뼈에 지나지 않건만 어찌 그리 정성을 다하여 기도를 올리십니까?”하고 묻자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난아 ! 너의 눈에는 짐승의 뼈로 밖에는 보이지 않느냐, 너와 내가 다겁생을 돌고 돌며 부모와 형제로 만났던 이들의 몸이니라.”하셨듯이 그 의미를 새겨본다면, 이 세상 유정이 모두 나의 혈육이요 부모 아님이 없거늘, 매일 천도재를 봉행하여도 오히려 부족한 것이기에 여러분들께 일요일 마다 영단에 시식을 해드리고 함께 공덕행을 짓자고 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노력하고 성실하게 사는데도 불구하고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집안에 우환이 끊이지 않을 때 “도대체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생길까?”라고 한두 번 생각 안 해본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영가로 인한 장애일 경우가 의외로 많습니다.


또 상식적으로 안될 일인데도 꼭 누가 도와주는 것처럼 일이 순조롭게 풀리는 경우도 종종 있었을 것입니다.

 

나를 조상으로 둔 숙세의 인연이 어디에선가 선망부모 및 인연영가를 위하여 천도재를 지내고 열심히 수행정진하고 있는 공덕의 염파가 지금의 나에게 전달되어 그렇게 된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천도제는 단순히 죽은 사람을 위한다는 것 외에도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닥칠지도 모르는 재해를 막고 복을 가져다준다는 의미도 포함되는 것이고, 영가에게는 부정의 세계에서 긍정의 세계로 옮겨다 주는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 주에 49재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말라 하셨던 부처님의 말씀이 있기에 가볍게 끝내려고 했더니 기왕 내친 김에 자세히 말씀드리려다 이렇게 한 달을 이 법문으로 하게 됐습니다.


모두 성불하십시오.

가을 햇살이 좋은 ..어느가을

 

나는 잠시..

익숙한 길..이거나

또는 호기심 어린 눈을 반짝 거리며..낮선 여지를 찾아

두리번 거리며..삶의 언저리를 기웃 거립니다..

 

새로운 것들은 늘 익숙하지 않아서

망설임과 고통을 주기도 하지만

늘상 대하던 것들로 부터 벗어나

내가 미쳐 알아내지 못한 기쁨을 내게 주기도 합니다..

 

우리가 항상 머물러 있는 습관을

경계해야 하는.. 사유..가 아닐런지요..

 

귀챦다거나..괴롭다거나..

막연히..두려운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항상 깨어있는

마땅한 삶의 태도 일것 같더라는..

 

............

 

내 마음은 오늘도

천국의 문을 두드려요..

천국의 문을 두드려요..

 


Franz Liszt / Piano Concero No. 1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게 하지 않는다

 

 

젊었을 때는 인생(人生)이 무척 긴 것으로 생각하나,

늙은 뒤에는 살아온 젊은 날이

얼마나 짧았던가를 깨닫는다.

젊음은 두 번 다시 오지 아니하며
세월은 그대를 기다려 주지 아니한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
자고이래(自古以來)로 모은 재물(財物)을 지니고 
저승까지 간 사람은 한 사람 도 없다. 

삼계(三界)의 윤회(輪廻)하는 고통(苦痛) 바다의

대죄인(大罪人)은 보잘 것 없는 이 몸뚱이...

다만 먹고 입는 세상사에 항상

분주하여 구원(救援)을 찾지 않네.

그대여 일체 세간사(世間事) 모든 애착을 놓으라
세상일 즐거워 한가롭더니 고운 얼굴 남 몰래 주름 잡혔네.

서산에 해 지기를 기다리느냐,

인생이 꿈같음을 깨달았느냐,
하룻밤 꿈 하나로 어찌 하늘에 이르리요... 

몸이 있다하지만 그것은 오래지않아 허물어지고

정신이 떠나 모두 흙으로 돌아가리니 잠깐 머무는 것.

무엇을 탐(貪)하랴...
오늘은 오직 한 번뿐이요, 다시는 오지 않으리니
우리 인생(人生)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이 몸이 늙고 병들어 떠나기 전(前)에
오늘을 보람 있게 살자.

사람은 남의 잘 잘못을 비판하는 데는 무척 총명하지만
자기비판에 있어서는 어둡기 마련인것.

남의 잘못은 꾸짖고 자기의 잘못은 너그럽게 용서한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마음의 죄를 지은 사람이다.

죄인은 현세에서 고통받고 내세에서도 고통 받나니
죄를 멀리하라 죄가 없으면  벌도 없음이니라.  

시간이란 누구에게나 똑같이 부여되는것
느끼기에 따라 길고 짧은 차이가 있나니


즐거운 시간은 천년(千年)도 짧을 것이며
괴로운 시간은 하루도 천년 같은 것.

그러므로, 시간이 짧게 느껴지는 사람은
오히려 행복한 것,
시간이 길게 느껴지는 사람이 어찌 행복하다 하리오.

옮겨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