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눌스님의 가르침을 통해본 수행의 방편

2009. 11. 30. 20:1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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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제 살붙이들 몸을 사료로 만들어 먹이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미쳐버린 미국 소가 한국에 들어온다고 매일 촛불집회로 시끌벅적한 요즘 세상입니다.

 

아침에 도반 스님이 전화가 왔길래 촛불집회 이야기를 했더니 그 스님 왈, 우리는 매일 하루 세 번씩 촛불켜고 있잖냐고 해서 웃었습니다만 오늘은 보조 지눌스님과 그 누님의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

 

보조지눌(普照知訥: 1158 - 1210)국사는 고려 중기대 스님으로 속성은 정(鄭)씨이고 법명은 지눌이라합니다.

호는 목우자(牧牛子), 시호는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로 불리는데 8살에 출가하여 1182년에 승선(僧選)에 뽑혔던 스님인데 그 출가에 참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져 오기에 여담으로 전해드립니다.

 

태어날 때부터 허약하고 병이 잦아 백방으로 약을 구하여 썼으나 효험이 없자, 아버지는 동네 뒷산 절에 올라가 불전에 기도를 올려 병만 낳으면 자식을 부처님에게 바치겠다고 맹세하고 집에 돌아오자 씻은 듯이 언제 그랬냐는듯이 병이 나아 잘 놀고 있어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저 어린 것을 절로 보내기에는 너무 마음이 아파 다시 미루고 있었더니 몇 개월 지나 또 아프자 다시 동네 뒷산 절에 올라 기도를 하고 내려오자 또다시 낫고 하기를 네 번째에 결국은 절에 보내기로 결정하고 8세 때 부모가 정해준 대로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사굴산파(사堀山派)에 속했던 종휘(宗暉)스님에게 출가를 시키게 됩니다.

 

전라남도 청량사(淸凉寺)에서 육조단경(六祖壇經)을 열람하다가 “진여자성(眞如自性)이 생각을 일으키매 육근(六根)이 보고 듣고 깨달아 알지만, 그 진여자성은 바깥 경계들 때문에 물들어 더럽혀지는 것이 아니며 항상 자유롭고 자재하다.”는 구절에 이르러 문득 깨닫게 됩니다.

바로, 심성(心性)의 본바탕을 발견한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당시의 불교계는 선종과 교종의 대립이 심각해 서로의 우열을 논하면서 시비만을 일삼았던 시절인데, 보조스님은 선과 교가 모두 부처로부터 비롯된 것인데 어찌 서로 담을 쌓고만 있는가를 의심하다가 엄경 여래출현품에서 “여래의 지혜가 중생의 몸 가운데 있건만 어리석은 범부는 스스로 알지 못하도다.”라는 구절에 이르러 크게 깨닫고, “부처의 말씀이 교가 되고 부처의 마음을 조사(祖師)들께서 전한 것이 선이 되었으니, 부처나 조사의 마음과 말씀이 서로 어긋나지 않거늘 어찌 근원을 생각지 않고 아는 것에만 집착하여 부질없이 쟁론을 일으키며 헛되이 세월만 소비하고 있는가.”하는 선교일원(禪敎一元)의 원리로 원돈관문(圓頓觀門)의 사상을 세워 부처의 마음과 말씀이 둘이 없는 원칙에서 선교불이(禪敎不二)의 원리를 세워 당나라 규봉종밀(圭峰宗密)화상의 저술인 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에서 선교합일의 이론을 정립하여, 서로 분열하고 있던 선교양종에 대하여 선교합일 회교귀선(會敎歸禪)이라는 우리나라 불교의 특수한 종지를 세우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의 송광사에서 불교 중흥을 위한 결사를 하게 되시는데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라는 결사문에서 마음을 바로 닦음으로써 미혹한 중생이 부처로 전환될 수 있음을 천명하였고, 그 방법은 정(定)과 혜(慧)를 함께 닦는 정혜쌍수에 있다고 했습니다.

 

정과 혜의 두 가지는 한 마음이라는 일심위에 통일되어 늘 균형을 지녀야 된다고 본 것인데, 이것은 한 부처의 가르침이 선교양종·정혜이파(定慧二派)로 분열되어, 정과 혜가 한마음 위에 통일될 때 온전한 불교공부가 된다는 것을 망각한 채, 시비를 일삼아왔던 당시 불교계 수행법에 대한 깊은 자각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스님의 이러한 결사운동은 정법 불교로의 복귀 작업이었고, 결사문은 부패하고 타락된 당시의 불교현장을 이념적 또는 형태적으로 혁신하고 재건하기 위한 일대 선언서였던 것입니다.

 

10여 년 동안 송광사를 중심으로 새로운 선풍을 일으키시다가 1210년 3월 27일 대중들과 함께 선법당(善法堂)에서 문답을 끝낸 뒤 주장자로 법상(法床)을 두 세 번치고 “천 가지 만 가지가 모두 이 속에 있다.”는 말을 남긴 다음 법상에 앉아 입적하시게 됩니다.

 

주장자를 친 그 자체에 천만 가지가 들어있지 않고 주장자를 칠 때, 보이지 않는 소리를 보이지 않는 귀로 들어 마음이 분별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보조스님의 말씀대로 천만가지 이치를 명확히 알 것이지만, 그 소리를 듣고 단 하가지라도 분별을 일으킨다면 어쩔 수 없는 중생에 불과하단 말입니다.

 

당시에는 자기 아는 것으로 인한 시비 분별이 일고 있었지만, 요즘 세상은 물질을 수반한 온갖 재물 신으로부터 오는 유혹을 이겨내는 자기 수행이 더욱 절실한 세상이 되어 버렸으니 보조스님께서 요즘 세상에 계셨더라면 어떤 결사가 일어나야할 지 싶습니다.

 

바로 이런 스님이 보조스님이셨는데, 스님에게는 누님이 한 분계셨는데, 스님이 누님에게 항상 염불을 하라고 할 때마다 그 누나가 말하기를, “내게는 부처님같이 훌륭한 아우가 있는데 염불공부를 해서 뭐해? 내가 그 힘든 도를 않 닦더라도 다른 사람까지 제도해 주는 아우가 있는데 나 하나쯤 좋은 곳으로 제도시켜주지 않을건가?” 하고 말하고는 매냥, 노는데만 정신이 팔려 있더란 말입니다.

 

보조스님은 말로써는 누님을 제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다른 방법을 쓰기로 했는데, 어느 날 누님이 절에 오는 것을 미리 알고 스님은 방에 진수성찬을 가득 차려 놓고는 누님이 들어오자 국사는 한번 힐끔 쳐다보고는 말하길, “누님 오셨습니까? 앉으십시오. 막 공양을 하려던 참입니다.” 하고는 스님은 혼자서 음식을 맛있게 들고는 상을 물려버렸습니다.

 

전에 없던 일로 누님은 섭섭하고 노여운 감정이 일어나서 말하기를 “스님이 오늘은 왜 이러나? 무슨 말씀입니까, 누님?” 하고 시침을 뚝 떼자, 누님은 화난 목소리로 말하길, “무슨 말이라니? 나는 그만 집으로 갈라네.” 하고 돌아서자 “진지나 잡숫고 가셔야지 먼 길을 그냥 가시면 시장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하자 누님은 더욱 화가 난 목소리로, “밥을 줄 생각이 있으면서 이제까지 있었나? 몇 십리를 걸어온 사람을 보고 음식을 먹으면서도 한번 먹어 보라는 말도 없으니 그게 사람이 할 짓인가?” 하고 화를 내자 보조스님은 정색을 하고 말하기를, “아니 누님, 제가 이렇게 배가 부르도록 먹었는데 누님은 왜 배가 아니 부르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누님은 기가 차다는 듯이, “밥은 자네가 먹었는데 어찌 내 배가 부르단 말인가?”하고 받아치자 보조스님은 때는 이때다 싶어서 말하기를 아니 누님은 항상 말하기를 “제가 도를 깨치면 누님도 제도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동생이 배부르면 누님도 배가 불러야 하지 않겠습니까?”하자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가? 밥은 창자로 들어가고 염불은 마음으로 하며 정신이 극락을 가는 것이니 밥 먹고 배부른 것과는 다른 것이 아닌가?” 하자 스님이 얼른 받아치기를 “그렇습니다. 누님, 제가 음식을 먹어도 누님이 배부르지 않듯이 내 마음으로 염불을 하면 내 영혼은 극락을 가도 누님은 갈 수 없습니다. 누님이 극락에 가고 싶으면 누님의 마음으로 염불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죽음을 대신하지 못하는 것처럼 극락도 대리극락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말을 마치고 스님은 누님의 점심상을 차려오게 하고 말하기를, “누님, 이 동생이 제도해 줄 것을 믿지 말고 누님의 지극정성으로 염불하는 마음을 내시어 내생에 극락으로 가도록 하십시오.” 했더랍니다.

 

그 날 이후로 보조스님의 누님은 지성으로 염불을 하며 수행했다고 합니다.

 

입구에 간이화장실 옆에 자두나무에 떨어진 자두는 꿀벌이나 작은 벌레들의 달콤한 양식이 되고 원빈이가 흘린 밥은 개미들의 넉넉한 겨우살이 식량이 되고 원빈이 물그릇에 고인 물은 목마른 새들에게 목을 축여줄 수 있고 베어진 나무그루터기는 지친 나그네에게 편안한 자리를 줄 수 있듯이 세상에는 아무리 하찮은 것일지라도 존재하는 이유가 다 있는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 대하는 모든 사물과 현상을 통해 지혜를 찾고 볼 수만 있다면 그 자리에는 이미 부처나 예수나 조사가 다 분시구에 불과한 것입니다.

 

설거지 하는 싱크대 수돗물에서 막힘없는 용심의 지혜를, 깨끗해지는 그릇에서 청정을, 걸레질 속에서 맑아지는 마음을 찾고 볼 수 있는 정신세계에 도달하신다면 그리고 일상에서 그대로 생활화가 된다면 그 자리는 바로 평상심이 바로 도인 것이란 말입니다.

 

그런 자리에 먼저 터파기 공사를 하기 위해선 염불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성불하십시요.

< 걷는 수행[經行]의 이익 >


위빠사나 수행은 걷고, 서고, 앉고, 눕는

일상의 모든 동작을 알아차리는 수행이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눈을 뜨면서부터

저녁에 잠에 들 때까지가 모두가 대상이다.


나무를 계속 비벼야 불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수행도 계속해서 알아차려야 지혜가 나게 된다.


그 중 경행은 일상생활 중에 하나의 동작에서

다른 동작으로 연결하는 고리역할을 하게 된다.

 

수행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일상의 알아차림이

지속되어야 하기 때문에 경행이 매우 중요하다.


경행을 하면 몸에 지구력이 생겨 이동이 자유로우며

걸으면서 생긴 힘은 좌선을 할 때 지구력을 갖게 한다.


움직이지 않거나 좌선을 오래하면 건강을 해치고

피로가 누적되어 집중력을 얻지 못해 발전이 없다.


또한 지나치게 천천히 걸으면서 자세히 알아차리려고

힘을 기울이면 상기가 오거나 피로해 질 수도 있다.


경행은 소화가 잘 되게 하고 식곤증을 없애준다.

소화가 안 되면 집중이 안 되고 알아차릴 수가 없다.


걸으면서 알아차림을 지속하면 집중력이 생기는데

움직이면서 생긴 집중력은 쉽게 깨지지가 않는다.


경행으로 생긴 집중력은 맑은 정신을 갖게 하고

가벼운 몸을 만들어서 수행을 지속할 수 있게 한다.


경행은 자신의 나태함을 스스로 극복하게 하는데

움직이기 싫어하는 수행자의 게으름을 치유한다.


수행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정진력인데 경행은 정진력을 키우는 수행이다.

 

< 수행의 이익 >


어리석은 자는 수행의 이익을 모르며

수행을 손해 보는 짓이라고 생각한다.


지식이 있는 자는 수행의 이익을 알지만

생각으로 그치고 수행을 하지 않는다.


공덕을 쌓은 자는 수행의 이익을 알아

사마타 수행으로 선정의 고요함을 얻는다.


지혜롭고 선한 자는 수행에 대한 확신을 갖고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해탈의 자유를 얻는다.


수행을 하면 마음이 청정해져 번뇌가 제거되고

슬픔과 근심과 비탄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고뇌가 극복되고

네 가지의 도(道)와 과(果)를 성취하게 된다.


수행의 궁극적 목표는 열반을 성취하여

고통뿐인 기나긴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 수행은 노력하는 것 >


수행은 장애를 넘는 노력을 하는 것이다.

감각적 욕망, 악한 의도, 혼침과 게으름,

들뜸과 후회, 의심이란 장애를 넘어야 하며

망상, 통증이 일어날 때마다 알아차려야 한다.


수행은 고정관념과 진실의 맞닥뜨림이고

습관과 새로운 질서의 맞닥뜨림이고

선하지 못한 것과 선한 것의 맞닥뜨림이고

어리석음과 지혜의 맞닥뜨림이다.


맞닥뜨림은 결코 대결이 아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아는 것이다.

바라지 않고 없애려고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노력을 하는 것이다.

 

노력은 바람이 없고 선한 것을 위해서 해야 하며

지나치게 힘이 들어가지 않고 적절하게 해야 한다.

노력이 지나치면 들뜨게 되어 집중이 되지 않는다.

불퇴전의 노력을 할 때만이 해탈의 자유를 얻게 된다.

< 지혜 수행 > 


선한 행위를 했을 때 선한 과보를 받게 되고

이로 인해 다시 선한 마음을 갖게 된다.


전생이나 현생의 행위에 대한 과보 중에서

가장 값진 과보를 받은 것이 지혜다.


지혜는 모든 번뇌를 일거에 소멸시키고

해탈을 하게 하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지혜의 과보가 주어졌을 때라야

비로소 위빠사나 수행을 할 수 있게 된다.


지혜가 있어야 위빠사나 수행을 한다는 것은

이 수행이 통찰지혜를 얻는 수행이기 때문이다.


반드시 수행을 해야 만이 통찰지혜가 생기며

다시 통찰지혜가 있어야만 수행을 할 수 있다.


무지한 자는 몰라서 오직 무지를 선택하며

지혜가 있는 자는 현명해서 지혜를 선택한다.

< 수행의 양과 질 >


수행은 양도 필요하지만 질도 중요하다. 

처음부터 많은 것을 얻으려 하지 말고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알아차려야 한다.


한 번의 호흡이나 한 번의 발걸음이라도

정확하게 겨냥하고 분명하게 알아차리면

두 번, 세 번을 연속해서 잘 할 수 있다.


단 한번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면

계속해서 정확하게 알아차리기가 어렵다.


수행이 잘 된다고 좋아하거나 잘 되지 않는다고

낙심하는 것이나 모두 오만한 것이다.

이런 마음 때문에 법을 얻기가 어렵다.


수행은 경험해보지 않은 새로운 정신세계를

여행하는 것이라서 잘 안 되는 것이 당연하다.


수행이 잘되면 욕심이 생겨서 수행을 그릇 치고

자아가 강해져서 오히려 퇴보하게 된다.


잘 안 되는 것은 원인과 결과며

무아라는 법의 성품이 나타난 것이다.

내가 없기 때문에 잘하려고 해도 안 되는 것이다.

내가 있다면 원하는 대로 될 수 있어야 한다.


수행이 잘되는 것은 노력을 해서

알아차림이 지속되어 집중력이 생긴 것이다.

집중력이 생기면 전에 경험하지 못한

여러 가지의 현상들이 나타나게 된다.

 

이것은 단지 현상에 불과하므로 특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계속해서 그냥 주시해야 한다.


처음에는 대상을 정확하게 겨냥하기가 어렵고

마음이 집중되지 않아 흐린 상태로 보게 된다.


바라는 마음 없이 인내하면서 알아차림을 계속하면

차츰 집중이 된 맑은 상태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지혜가 나게 된다.

< 수행의 대상 >


위빠사나 수행은 몸, 느낌, 마음, 법을 알아차린다.

4가지 대상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려서 집중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과정을 거치는 수행이 필요하다. 


괴로울 때는 먼저 괴로운 마음을 알아차리고,

가슴으로 와서 괴로운 마음에 의해 일어난

콩닥거리는 느낌이나 거친 호흡을 주시해야 한다.


망상을 할 때도 먼저 망상한 마음을 알아차리고

가슴으로 와서 망상한 마음에 의해 일어난

느낌이나 호흡을 지속적으로 주시해야 한다.


대상을 알아차린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심념처다.

그 마음으로 인해 일어난 여러 가지 형태의 느낌을

가슴이나 머리에서 알아차리는 것이 수념처다.


가슴이나 머리에서 일어난 느낌을 알아차린 뒤에

다음 단계로 몸의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이 신념처다.

이들 대상에서 무상을 알아차리면 법념처 수행이다.

< 수행경력 >


수행자가 수행에 대하여 말할 때

나는 어떠한 수행을 했다고 하거나

몇 년을 했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이것은 한낱 관념에 불과한 것이다.


수행은 단 한순간이라도 제대로

알아차리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수행의 형식 보다는 내용이 중요하며

관념보다는 실재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


세속적 관점에서는 수행이 포장되고

삿된 것에 큰 가치를 둘 수 있다.

허나 수행의 가치는 진실에 기초하고

지혜가 있을 때 존중되는 것이다.

< 수행의 목표와 실제 >


위빠사나 수행의 목표는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롭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을

알아차려서 갈애가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갈애가 일어나지 않으면 집착이 끊어져서

업을 생성하지 않아 윤회가 끊어져 버린다.


이를 위해서는 바라는 것이 없어야 하며

없애려고 하지 않고 알아차려야만 된다.

 

바라지 않고 없애려고 하지 않는 방법은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것 뿐이다. 

 

이상을 가지고 최상의 목표를 세워야  하지만

행위를  함에 있어서는 하려함이 없어야 한다.


수행은 괴로움을 없애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괴로움 때문에 일어난 반응을 주시하는 것이다.


세간의 방식이 아닌 이러한 출세간의 노력이 

있어야만 가장 숭고한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


살아온 날들 동안 바라고 없애려고만 했는데

과연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없앨 수 있었는가.


바라면 바랄수록 더 갈증을 느끼게 되고

없애려 한만큼 더 화를 내게 되는 것이다.


나타난 현상은 모두 알아차릴 대상이며

지금 여기에 와서 보라고 법을 드러낸 것이다.


오직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때만이

번뇌가 소멸되고 지고의 행복을 얻게 된다.

< 범부와 수행자 >


범부는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에

과거에 머물러 후회를 하며 살거나

미래에 대한 걱정과 허황된 꿈을 꾼다.


수행자가 대상을 알아차리게 되면

과거는 원인을 아는 지혜가 되고

미래는 결과를 아는 희망이 된다.


알아차림은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 있는 것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후회가 지혜로 걱정이 희망으로 바뀐다.


범부는 잘못을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수행자는 잘못한 것을 알아차려서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놓는다.

< 수행의 과정 >

수행은 생각으로 하는 수행이 있고,
수행이 무엇이라고 말하는 수행이 있고,
직접 알아차림을 실천하는 수행이 있다.

생각은 사유이지만 수행의 기초가 되며
그 다음에 수행에 대하여 말할 수 있으며
그리고 실행에 옮기는 과정을 거친다.

생각하고 말하고 실천하는 일련의 과정은
자연스러운 것으로써 처음부터 실천하기
어렵다면 단계적으로 실행에 옮겨야 한다.

생각으로 그치지 않고, 말로 그치지 않고,
실천에 옮기기까지의 기간을 단축하려면
선한 마음을 가져야 하며 노력을 해야 한다.

스스로의 노력이 부족하면 경전을 읽거나
훌륭한 도우들과 가까이 지내야 하며
지도자의 법문을 듣고 안내를 받아야 한다.
<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림 >


위빠사나의 알아차림은 몸과 마음에서 나타나는
모든 대상을 하나의 현상으로 주시하는 행위다.

마음이 대상을 알아차리게 되면 할 일이 생겨서
선하지 못한 일이나 불필요한 일을 하지 않게 된다.

대상을 알아차릴 때 좋아하거나 싫어하지 않게 되면
마음이 청정해지고 계율을 지켜서 고요함이 생긴다.

알아차림은 무엇이나 수용하므로 자신이 이로우며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일어나서 남에게도 이롭다.

망상이나 괴로움은 알아차리지 못해서 나타나고
집중과 지혜는 알아차려서 나타나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모든 것이 똑같은 대상이기 때문에
망상이나 지혜나 알아차릴 대상으로는 같은 것이다.
< 수행 >

어리석은 자는 수행의 이익을 모르며
수행을 손해 보는 짓이라고 생각한다.

지식이 있는 자는 수행의 이익을 알지만
생각으로 그치고 수행을 하지 않는다.

공덕을 쌓은 자는 수행의 이익을 알아
사마타 수행으로 선정의 고요함을 얻는다.

지혜롭고 선한 자는 수행의 이익을 알아
위빠사나 수행으로 해탈의 자유를 얻는다.

< 자애수행[慈悲觀] >

4가지 거룩한 마음가짐 수행은 자애[慈],
연민[悲], 함께 기뻐함[喜], 평정[捨]이다.

이 중에 자애[慈] 수행은 화를 내지
않는 마음으로 하는 사마타 수행이다.

자애수행은 입으로만 외워서는 안 되며
자애로운 마음가짐으로 실행해야 한다.

만약 성내는 마음으로 자애관을 하면
자애가 가는 것이 아니고 화가 간다.

자신이나 남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 하는
수행이 오히려 해로움을 줄 수도 있다.

자애관을 할 때는 먼저 자신에 대하여
행복, 고통, 원한, 근심이 없기를 바란다.

타인에 대해서는 싫어하는 사람이나
애욕을 일으키는 이성은 피해야 하며

또한 죽은 자를 대상으로 삼지 말며
원한이 있는 자에 대해서도 삼가야 한다.

정상적인 관계가 아닐 때는 진정한 자애가
일어나지 않고 성냄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 지혜 수행 >

선한 행위를 했을 때 선한 과보를 받게 되고
이로 인해 다시 선한 마음을 갖게 된다.

전생이나 현생의 행위에 대한 과보 중에서
가장 값진 과보를 받은 것이 지혜다.

지혜는 모든 번뇌를 일거에 소멸시키고
해탈을 하게 하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지혜의 과보가 주어졌을 때라야
비로소 위빠사나 수행을 할 수 있게 된다.

지혜가 있어야 위빠사나 수행을 한다는 것은
이 수행이 통찰지혜를 얻는 수행이기 때문이다.

반드시 수행을 해야만이 통찰지혜가 생기며
다시 통찰지혜가 있어야만 수행을 할 수 있다.

무지한 자는 몰라서 오직 무지를 선택하며
지혜가 있는 자는 현명해서 지혜를 선택한다. 
< 수행 경력 >

몇 년간 수행을 했다는 것은 관념이다.
숫자 속에는 법의 성품이 있지 않다.

몇 가지 수행을 했다는 것은 경력이다.
경력은 훈장이 되지만 지혜가 아니다.

수행경력은 자랑할 만한 것이 아니다.
한순간이라도 바르게 알아차려야 한다.

경력은 밥그릇 숫자를 세지만
지혜는 허세를 잘라 버린다.

알아차리지 못하고 사는 백년보다
알아차리고 사는 단 하루가 더 좋다.

무지한 채로 살아가는 백년, 천년보다
지혜를 가지고 사는 단 하루가 더 좋다. 
< 수행이 잘 되면 >

수행 중에 노력과 알아차림과 집중이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게 되는 상태를 수행이 잘 된다고 말한다.

수행은 한 시간이 잘된다 싶으면 하루가 안 되고
하루가 잘된다 싶으면 며칠 동안 잘 되지 않는다.

한 번 잘되면 다음 시간에도 잘 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몸과 마음이 들뜨고 긴장하여 잘 할 수가 없게 된다.

수행이 잘 되던 때는 과거이며 항상 새로운 조건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수행을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잘 되던 때와 같이 기대를 걸고 하다가 잘 안 될 때는
수행이 잘 안 되는 것을 알아차리고 새로 시작해야 한다.

처음에 ‘지금 무슨 마음으로 수행을 하는가?’하고
마음가짐을 알아차린 뒤에 수행을 시작해야 한다. 

< 수행자는 있는가 >

수행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몸과 마음이 하는 것이다.
수행자라는 관념이 생기면 대상의 성품을 볼 수 없으며
수행자라고 하는 새로운 상이 생겨 아만심에 빠지게 된다.

수행은 두 가지가 있는데 자아의 유무로 구별할 수 있다.
내가 있다는 자아를 강화하는 수행은 깨달음과는 무관하며
내가 없음을 아는 수행을 할 때만이 해탈에 이르게 된다.

자아를 강화하면 성취욕을 충족시켜 자신감을 갖게 되고
자아가 없음을 알게 되면 집착이 끊어져 도과를 성취한다.
두 가지 중 하나의 선택은 수행자의 조건에 따라 결정된다. 
< 수행자 >

수행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수행은 자발적으로 하기도 하고
타인에 의해 유발되어서 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경우나 선한 마음과
선한 과보가 결합되어야 수행을 한다.

수행자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진실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이 수행자다.

긍정적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
선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이 수행자다.

수행자는 생각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고
단 한순간이라도 알아차리는 사람이다. 

< 수행의 대상 >

좌선을 할 때는 먼저 대상이 있어야 하고
다음에 대상을 알아차려야 하고
그리고 대상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려야 한다.

수행의 대상은 먼저 자신의 몸과 마음이다.
마음이 몸을 대상으로 알아차리고
다시 마음이 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몸과 마음에서 알아차릴 대상은 매우 많다.
그러나 어느 것도 대상으로 선택하기에
쉽거나 편안한 것이 없어 어려울 때가 있다.

처음에 대상을 잡기가 어려운 것은
대상을 정확하게 겨냥하지 못한 탓이며
아직 집중력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대상이 중요하지 않은 경우가 있다.
단지 어떤 대상이거나 대상을 아는 마음만 있으면 된다.
알아차리기가 어려우면 단순한 대상을 하나만 알면 된다.

알아차리는 힘이 없을 때는 힘이 없는 것을 알아차리면 된다.
이때는 대상을 잡기 어려운 것을 알아차리는 앎을 해야 한다.
항상 특별한 대상을 알려고 하지 말고 현재의 상황을 알아야 한다.

대상을 잡을 수 없다고 서두르거나 조급해 해서는 안 된다.
이때는 대상을 잡을 수 없는 현재의 마음을 알아차린 뒤에
몸으로 가서 눈꺼풀, 입술, 손, 엉덩이 등을 차례로 알아차린다. 

< 위빠사나 수행의 선택 >


위빠사나 수행은 선정수행이 아니고
지혜수행이라서 쉽게 선택하기 어렵다.

선정은 대상과 하나가 되기 때문에
수행을 하는 즉시 고요함을 얻어 효과를 보지만

위빠사나 수행은 일정한 기간을 거쳐야
지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즉시 효과를 볼 수 없다.

이런 이유로 강력하게 필요로 하는 사람이나 때가 무르익어
준비된 사람이 아니고서는 위빠사나 수행을 선택하기 어렵다.

설령 이런 저런 이유로 선택을 했다고 해도
계속해서 수행을 지속하기는 여의치 않다.

지혜수행은 지혜가 필요하다고 해서 선택하는 것이므로
이것이 이미 무지에서 벗어나 조건을 성숙시킨 것이다.

괴로움으로 인해 삶의 방식을 바꾸려는 강력한 의지가 없으면
누구도 위빠사나 수행을 시작할 수가 없고 계속하기도 어렵다. 

< 수행의 탐심 >


수행을 시작하자마자 안 된다고 하면
노력도 하지 않고 얻으려는 탐심이며
잘 되지 않는다고 화를 내는 것이다.

씨를 뿌리면 물을 주어야 하고
걸음을 주고 잡초를 제거한 뒤에
열매가 맺을 때까지 기다려야한다.

수행은 잘 안되는 것이다.
수행은 살아온 삶의 방법과 다른 방식을
새롭게 배우는 과정이므로 기다려야 한다.

수행은 잘 안되는 것을 알기 위해서한다.
수행이 잘되기만 한다면 교만해진다.
잘 안되는 것 속에서 지혜가 성숙된다.

수행이 잘 안되는 것을 통하여
괴로움이 있다는 진리와
자아가 없다는 진리를 알게 된다. 

 


참된 사람의 조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끊지 못했으면서도
자신은 초선을 성취했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있다.
그가 참되지 못한 사람이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끊지 못했으면서도
자신이 2선 3선, 4선을
성취하고 공처 식처,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의
성취를 자랑삼는 사람이 있다.
그가 참되지 못한 사람이다.

이에 비해 참된 사람은 정반대다.
비록 자신이 귀족출신이고, 용모가 단정하며,
말재주가 뛰어나며, 박학다식하고, 장로이며,
옷차림이 위의에 맞고,
검소하고, 절제가 엄정하고,
아난나행을 하고, 초선과 비상비비상처정을
성취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자랑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살피며 삼독심을
끊어 없애려고 한다. 그가 참된 사람이다.”

-중아함 21권 85경 〈진인경(眞人經)〉-
 

  



- 흐르는 곡은 지성스님 작사 기광 이영구님의

노래"생멸법"입니다  

 

도반님들 성불하소서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