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배하고 법을 배운 인연-참청기연(參請機緣)

2009. 12. 3. 19:20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육조단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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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배하고 법을 배운 인연(1)

 


   대사께서 조계산으로 가시어 소주ㆍ광주 두 고을에서 교화하시기를 사십 여 년이었다.

   만약 문인을 말한다면 스님과 속인이 삼오천(三五千) 명이라 이루 다 말할 수 없으며, 만약 종지를 말한다면 단경을 전수하여 이로써 의지하여 믿음을 삼게 하였나니, 만약 단경을 얻지 못하면 곧 법을 이어받지 못한 것이니라.

   모름지기 처소와 년월일과 성명을 알아서 서로서로 부촉하되 단경을 이어받지 못하였으면 *남종(南宗)의 제자(第子)가 아니니라. 단경을 이어받지 못한 사람은 비록 돈교법을 말하나 아직 근본을 알지 못함이라, 마침내 다툼을 면하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오로지 법을 얻은 사람에게만 돈교법(頓敎法)의 수행을 권할지

니, 다툼은 이기고 지는 마음이라, 도()와는 어긋나는 것이니라.

   세상 사람들이 다 전하기를 『남쪽은 혜능이요 북쪽은 신수』라고 하나,

아직 근본 사유를 모르는 말이니라.

   또한 신수선사는 형남부 당양현 옥천사에 주지하며 수행하고, 혜능대사

는 소주성 동쪽 삼십오 리 떨어진 조계산에 머무르니, 법은 한 종()이나

사람에게 남쪽과 북쪽이 달라서 이로 말미암아 남쪽과 북쪽이 이루어지

게 되었느니라.

   어떤 것을 점()과 돈()이라고 하는가? 법은 한 가지이나, 견해에 더디

고 빠름이 있기 때문이니 견해가 더디면 바로 점()이요 견해가 빠르면 바

로 돈()이니라. 법에는 점과 돈이 없으나 사람에게는 영리함과 우둔함이

있는 까닭으로 「점」과「돈」이라 이름한 것이니라.

 

 

 

[주해註解]

*남종제자南宗第子 : 혜능(惠能)의 종지(宗旨)는 남종혜능(南宗惠能)ㆍ북종신수(北宗神秀)

하는 남종(南宗)이란 의미(意味)가 아니라, 남천축(南天竺)의 달마(達磨)로부터 상전(相傳)

된 남종지(南宗旨)라는 취지(趣旨)임.


참배하고 법을 배운 인연(2)

 


   일찍이 신수스님은 사람들이 혜능스님의 법이 빠르고 곧게 길을 가리킨

다고 말하는 것을 보았다. 신수스님은 드디어 문인 지성스님을 불러 말하였

다.

   『그대는 총명하고 지혜가 많으니 나를 위하여 조계산으로 가서 혜능스

님의 처소에 이르러 예배하고 듣기만 하되, 내가 보내서 왔다 하지 말아라.

들은대로 그 뜻을 기억하여 돌아와서 나에게 말하여라. 그래서 혜능스님의

견해와 나와 누가 빠르고 더딘 지를 보게 하여라. 그대는 되도록 빨리 오너

라. 그래서 나로 하여금 괴이하게 여기지 않도록 하여라.』

   지성은 기쁘게 분부를 받들어 반 달쯤 걸려서 조계산에 당도하였다. 그는

혜능스님을 뵈옵고 예배하여 법문을 들었으나 온 곳을 말하지 않았다.

   지성은 법문을 듣고 그 말 끝에 문득 깨달아 바로 본래의 마음에 계합하

였다. 그는 일어서서 예배하고 스스로 말하였다.

   『대사이시여, 제자는 옥천사에서 왔습니다. 신수스님 밑에서는 깨닫지

못하였으나 대사님의 법문을 듣고 본래의 마음에 계합하였습니다. 대사께

서는 자비로써 가르쳐 주시기 바라옵니다.』

   혜능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거기에서 왔다면 참 좀살스러웠구나』

   지성이 말하였다.

   『말을 하기 이전에는 그렇습니다마는, 말씀을 드렸으니 그렇지 아니하

옵니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번뇌가 바로 보리임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대사께서 지성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들으니 그대의 스승이 남을 가르치기를 오직 계ㆍ정ㆍ혜를 전한

다고 하는데, 그대의 스승이 가르치는 계ㆍ정ㆍ혜는 어떤 것인지 나에게 말

해 주기 바라노라.』

   『신수대사는 계ㆍ정ㆍ혜 말씀하시기를 *모든 악을 짓지 않는 것(제악불

惡不作)을 계라 하고, 선을 받들어 행하는 것을 혜라고 하며, 스스로

자기 마음을 깨끗이  함을 정이라고 합니다. 신수대사의 말씀은 그러하온

대, 대사의 의견은 어떠하신지 알지 못합니다.』

   혜능대사가 대답하셨다.

   『그 법문은 불가사의하나 혜능의 소견은 또한 다르니라』

   지성이 『어떻게 다르옵니까?』

   혜능대사께서 대답하시기를『견해에 더디고 빠름이 있느니라.』

   지성이 계ㆍ정ㆍ혜에 대한 혜능대사의 소견을 청하였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그대는 나의 말을 듣고 나의 소견을 알아보아라.

   마음바탕에 그릇됨이 없음이 자성(自性)의 계()요, 마음 바탕에 어지러

움이 없음이 자성의 정()이며, 마음 바탕에 어리석음이 없음이 자성의 혜

()이니라.』

   혜능대사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그대의 계ㆍ정ㆍ혜는 작은 근기의 사람에게 권하는 것이요, 나의 계ㆍ

정ㆍ혜는 높은 근기의 사람에게 권하는 것이니, 자기의 성품을 깨달으면 또

한 계ㆍ정ㆍ혜도 세우지 않느니라.』

   지성이 여쭈었다.

   『대사께서 세우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뜻은 어떤 것입니까?』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자기의 성품(자성自性)은 그릇됨도 없고(무비無非) 어지러움도 없으며(無亂) 어리석음도 없나니(무치無痴), 생각생각마다 지혜로 관조하며

항상 법의 모양()을 떠났는데, 무엇을 세우겠는가. 자기의 성품(자성

)을 단번에 닦을지니, 세우면 점차(漸次)가 있게 되므로 세우지 않느니

라.』

   지성은 예배하고 나서 바로 조계산을 떠나지 아니하고 곧 대사의 문인이

되어 대사의 좌우를 떠나지 않았다.


[주해註解]

*제악불작諸惡不作 :【增一阿含經증일아함경】에 [칠불통계게七佛通戒偈]라 하여 『제악불작

(諸惡不作) 중선봉행(衆善奉行) 자정기의(自淨其意) 시제불교(是諸佛敎)』라 하였음.

*자성무비무란무치自性無非無亂無痴 : 자성(自性)  곧 진여불성(眞如佛性)은 본래(本來)

로 청정(淸淨)하여 심지(心地)에는 원래(元來) 삼독(三毒)[탐(貪)ㆍ진(瞋)ㆍ치(痴)]과 오욕

(五慾)[재(財)ㆍ색(色)ㆍ명(名)ㆍ식(食)ㆍ수(睡)]이 있을 수 없으니 염념(念念)이 반야지혜

(般若智慧)로 자성(自性)을 관조(觀照)하여 수행(修行)함을 최상승(最上乘)의 돈교수행(頓敎

修行)이라 함.

 

 

참배하고 법을 배운 인연(3)

 


   또 한 스님이 있었는데 법달이라 하였다. 항상 【법화경】을 외워 칠 년

이 되었으나 마음이 미혹하여 바른 법의 당처(當處)를 알지 못하더니 와서

물었다.

   『경에 대한 의심이 있습니다. 대사님의 지혜가 넓고 크시오니 의심을 풀

어주시기 바랍니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이여, 그대 이름은 제법 통달하였으나 그대 마음은 통달하지 못하

였구나. 경 자체에는 의심이 없거늘 그대의 마음이 스스로 의심하고 있나

니, 그대 마음이 스스로 삿되면서 바른 법을 구하는구나.

   자기 마음의 바른 안정(安定)이 바로 경전을 지니고 읽는 것이니라.

   나는 한평생 동안 문자를 모르니, 그대는 【법화경】을 가지고 와서 나와

마주하여 한 편(一遍)을 읽을지니, 내가 들으면 바로 알 것이니라.』

   법달이 경을 가지고 와서 대사를 마주하여 한 편을 읽었다. 육조대사께서

듣고 바로 부처님의 뜻을 아셨고 이내 법달을 위하여 【법화경】을 설법하

다.

   『법달이여, 【법화경】에는 많은 말씀이 없나니, 일곱 권이 모두 비유와

인연 말씀이니라. 부처님께서 널리 *삼승(三乘)을 말씀하심은 다만 세상 사

람들의 근기가 둔한 사람을 위함이며, 경 가운데서 분명히 「*다른 승()

이 있지 아니하고 오로지 한 불승(佛乘)뿐이라」고 하셨느니라.』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이여, 그대는 일불승(一佛乘)을 듣고서 이불승(二佛乘)을 구하여

그대의 자성(自性)을 미혹하게 말지니, 경 가운데서 어느 곳이 일불승인지

를 그대에게 말하리라.

   경에 말씀하시기를 「*모든 부처님 (제불諸佛) ㆍ세존(世尊)께서는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때문에 세상에 나타나셨다.(출현어세故出現於

)고 하셨다. (이상의 열여섯 자는 바른 법이다.) 이 법을 어떻게 알며

법을 어떻게 닦을 것인가? 그대는 나의 말을 잘 들어라.

   사람의 마음이 헤아리지 않으면 본래의 근원이 비고 고요하여 삿된 견해

를 떠나나니 이것이 바로 일대사인연이니라. 안팎이 미혹하지 않으면 바로

양변(兩邊)을 떠나니라. 밖으로 미혹하면 모양에 집착하고 안으로 미혹하

면 공()에 집착하나니, 모양에서 상()을 떠나고 공에서 공을 떠나는 것

이 바로 미혹하지 않는 것이며, 그러므로 이 법을 깨달아 한 생각에 마음이

열리면 세상에 나타나는 것이니라.

   마음에 무엇을 여는가?

   부처님의 지견을 여는 것이다. 부처님이란 깨달음을 말하는데 네 문()

으로 나뉘나니, 깨달음의 지견을 여는 것과, 깨달음의 지견을 보이는 것과,

깨달음의 지견을 깨닫는 것과, 깨달음의 지견에 들어가는 것이니라.

   열고() 보이고() 깨닫고() 들어감()은 다 한 곳으로부터 들어가는

것이니, 바로 깨달음의 지견으로 자기의 본래 성품(자성自性)을 깨닫는 것

이 바로 세상에 나오는 것이니라.』



[주해註解]

*삼승三乘 : 성문승(聲聞乘)ㆍ연각승(緣覺乘)ㆍ보살승(菩薩乘). 성문승(聲聞乘)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깨닫는 교법(敎法)임. 연각승(緣覺乘)은 스승 없이 홀로 깨닫는 가르침으로서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을 관(觀)하고 또는 다른 인연(因緣)에 의(依)하여 깨닫는 가르침.

보살승(菩薩乘)은 상구보리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의 보리심(菩提心)을 발(發)하여 불

도(佛道)에 입(入)하고 사홍서원(四弘誓願)을 발(發)하여 육도만행(六度萬行)을 수(修)하여

무상정각(無上正覺)을 증오(證俉)하는 가르침.

*무유여승유일불승無有餘乘唯一佛乘 : 【법화경法華經】[방편품方便品]에 시방불토중(十

方佛土中)에는 오직 일불승(一佛乘)만이 유(有)하고 이승(二乘)도 무(無)하고 또한 삼승(三

乘)도 무(無)함.

*제불세존유이일대사인연고출현어세諸佛世尊唯以一大事因緣故出現於世 : 【법화경法華

經】[방편품方便品]에 『제불세존(諸佛世尊)은 중생(衆生)으로 하여금 불지견(佛知見)을 개

(開)하고, 불지견(佛知見)을 시(示)하고, 불지견(佛知見)을 오(悟)케 하고, 불지견(佛知見)에

들게[입(入)] 하기 위하여 출현(出現)하신다.』고 함. 차경문(此經文)의 대의(大意)는 본래

청정(本來淸淨)한 자기본성(自己本性-자성自性ㆍ불성佛性)을 깨달아야 함을 지시(指示)함.

돈황본(敦煌本) 단경(壇經)에는 「이상십육자시정법已上十六子是正法」이라 있는데 이

【法華經】의 근본의(根本義)는 [제불세존유이일대사인연고출현어세(諸佛世尊唯以一大事

因緣故出現於世)]의 십육자(十六字)에 요약(要約)돠었음을 의미함.

 

 

참배하고 법을 배운 인연(4)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이여, 나는 모든 세상 사람들이 스스로 언제나 마음 바탕으로 부처

님의 지견을 열고 중생의 소견을 내지 않기를 바라노라. 세상 사람의 마음

이 삿되면 어리석고 미혹하여 악을 지어 스스로 중생의 소견을 내고, 세상

사람들의 마음이 발라서 지혜를 일으켜 관조하면 스스로 부처님 지견을

여나니, 중생의 소견을 내지 말고 부처님의 지견을 열면 바로 세속에서 나

오는 것이니라.』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이여, 이러한 것이 【법화경】의 일승법(一乘法)이니라. 아래로

내려가면서 삼승(三乘)을 나눈 것은 미혹한 사람을 위한 까닭이니, *그대는

오직 일불승(一佛乘)만을 의지하여라.』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이여, 마음으로 행하면 【법화경】을 굴리고 마음으로 행하지 않

으면 【법화경】에 굴리게 되나니, 마음이 바르면 【법화경】을 굴리고 마

음이 삿되면 【법화경】에 굴리게 되느니라.

   부처님의 지견을 열면 【법화경】을 굴리고 중생의 지견을 열면 【법화

경】에 굴리게 되느니라.』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힘써 수행하면 이것이 바로 경을 굴리는 것이니라.』

   법달은 한 번 듣고 그 말 끝에 크게 깨달아 눈물을 흘리며 감격하여 말하

였다.

   『대사님이시여, 실로 지금까지 【법화경】을 굴리지 못하였습니다. 칠

년을 【법화경】에 굴리어 왔습니다. 지금부터는 【법화경】을 굴려서 *

각생각마다 부처님의 행을 수행(염념수행불행,念念修行佛行) 하겠습니

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부처님 행이 곧 부처님이니라.』

   그때 듣는 사람들은 깨닫지 못한 이가 없었다.

   그때 지상이라고 하는 한 스님이 조계산에 와서 대사께 예배하고 사승법

(四乘法)의 뜻을 물었다.

   지상이 대사께 여쭈었다.

   『부처님께서는 삼승(三乘)을 말씀하시고 또한 최상승(最上乘)을 말씀하

셨습니다. 제자는 알지 못하겠사오니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혜능대사가 말씀하셨다.

   『그대는 자신의 마음으로 보도록 하고 바깥 법의 모양에 집착하지 말아

라.

   원래 *사승법(四乘法)이란 없느니라. 사람의 마음이 스스로 네 가지로 갈

리어 법에 사승이 있을 뿐이다.

   보고 듣고 읽고 외움은 소승(小乘)이요, 법을 깨달아 뜻을 앎은 중승(

)이며, 법에 의지하여 수행함은 대승이요, 만 가지 법을 다 통달하여 만

가지 행을 갖추며 일체를 떠남이 없으되 다만 법의 상()을 여의고 지어도

얻는 바가 없는 것이 최상승(最上乘)이니라.

   승()은 행한다는 뜻이요 입으로 다투는 데 있지 않나니, 그대는 모름지

기 스스로 닦고 나에게 묻지 말지니라.』



[주해註解]

*여단의일불승汝但依一佛乘 : 【법화경法華經】[방편품方便品]에 『여래(如來)는 단지 일

불승(一佛乘)만을 위하여 법(法)을 설(說)하신다. 과거(過去)의 제불(諸佛)도 무량무수(無量

無數)의 방편(方便)과 종종(種種)의 인연(因緣)ㆍ비유(譬喩)ㆍ언사(言辭)로써 중생(衆生)을

위(爲)하여 제법(諸法)을 연설(演說)하시나니, 이러한 법(法)도 모두 일불승(一佛乘)을 위

(爲)하기 때문이다.』

*염념수행불행念念修行佛行 : 생각생각에 반야(般若)로 관조(觀照)하여 자성(自性-진여불

성眞如佛性)을 여의지 않고 수행(修行)함을 불행(佛行)이라 함.

*사승四乘 : 소승(小乘-성문聲聞) ㆍ중승(中乘-연각緣覺)ㆍ대승(大乘-보살菩薩)의 삼승(三

乘) 위에 다시 최상승(最上乘) 곧 일불승(一佛乘)을 가(加)한 것.


참배하고 법을 배운 인연(5)

 



    또 한 스님이 있었는데 이름을 신회라고 하였으며 남양 사람이다. 조계산

에 와서 예배하고 물었다.

   『대사님께서는 좌선하시면서 보십니까, 보지 않으십니까?』

   대사께서 일어나서 신회를 세 차례 때리시고 나서 신회에게 물었다.

   『내가 그대를 때렸는데, 아프냐 아프지 않으냐?』

   신회가 대답하였다.

   『아프기도 하고 아프지 않기도 합니다.』

   육조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하느니라.』

   신회가 또 여쭈었다.

   『대사님은 어째서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하십니까?』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본다고 하는 것은 항상 나의 허물을 보는 것이니 그러므로 본다고

말하는 것이며, 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하늘과 땅과 사람의 허물과 죄를

보지 않는 것이니, 그 까닭에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하느니라. 그대가 아

프기도 하고 아프지 않기도 한다 했는데 어떤 것이냐?』

   신회가 대답했다.

   『만약 아프지 않다고 하면 곧 무정인 나무와 돌과 같고, 아프다 하면 바

로 범부와 같아서 이내 원한을 일으킬 것입니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신회여, 앞에서 본다고 한 것과 보지 않는다고 한 것은 양변(兩邊)이요,

아프고 아프지 않음은 생멸(生滅)이니라. 그대는 자성(自性)을 보지도 못하

면서 감히 와서 남을 희롱하려 하는가?』

   신회가 예배하고 다시 더 말하지 않으니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그대 마음이 미혹하여 자성(自性)을 보지 못하면 선지식에게 물어서 길

을 찾을지니, 마음을 깨달아서 스스로 자성을 보게 되면 법을 의지하여 수

행하여라. 그대가 스스로 미혹하여 자기 마음을 보지 못하면서 도리어 혜능

의 보고 보지 않음을 묻느냐? 내가 보는 것은 내 스스로 아는 것이라 그대의

미혹함을 대신 할 수 없느니라. 만약 그대가 스스로 본다면 나의 미혹함을

대신하겠느냐? 어찌 스스로 닦지 아니하고 나의 보고 보지 않음을 묻느

냐?』

   신회가 절하고 바로 문인(門人)이 되어 조계산중을 떠나지 않고 항상 좌

에 모시었다.


 

 

 

삶의 잔잔한 행복 ♣ 


마음이 맞는 사람과
아침 공기를 마시며 산책할 수 있다면
손을 잡지 않아도 따스한 온기가
가슴으로 느껴져
내내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면
욕심 없는 행복에 만족하겠다.

마음이 닮은 사람과
한 곳을 바라보며 걸어갈 수 있다면
눈빛이 말하는 것을 읽을 수 있어
가슴으로 포근하게
슬픔을 안아줄 수 있다면
이름없이 소박한 삶에도 만족하겠다.

사랑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벗이 되어 동행할 수 있다면
꼭 옆에 같이 살지 않아도

가끔씩 기분좋은 소식을 전하는 일에
들뜬 가슴 열어 세상을 헤쳐 나간다면
때때로, 지치고 힘들다해도
손해 보는 삶이라도 후회는 없겠다.

세상에 빛나는 이름 남기지 못한다 해도
작은 행복에 만족할 줄 알았다면
명예가 사랑보다 귀한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면

앞에 놓인 빵의 소중함을 경험했다면
진실을 위해 소중한
어떤 것을 희생했었다면

먼 훗날, 어둠이 조용히 나리울 때
삶의 잔잔한 행복을
차지했었노라 말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