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심비불非心非佛

2011. 11. 11. 12:50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육조단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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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이 바로 부처다[心卽佛]


묻는다 : 마음이 곧 부처란 무슨 뜻입니까?

답한다 :

지난날의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마음이고,

未來에도 그 생각은 없어지지 않는 것이 곧 부처라.

一切의 形象을 만들어내는 것이 곧 마음이고

一切의 상(相)을 여의는 것이 곧 부처니라.

내가 만일 이것을 모두 다 말하기로 한다면

永劫을 두고 말해도 끝이 없으리라.


 蘇州法海禪師가 六祖를 참문한 禪問答이다.

 법해(法海)는 ‘6조檀經’을 編纂하고 그 序文을 쓴 慧能祖師의 10대 제자 중 한 사람이다.

이 問答을 話頭로는 ‘심즉불(心卽佛)’이라 한다. 禪은 마음이 곧 부처인 道理를 깨닫는 工夫다. ‘心卽佛’을 알게 되면 見性이고 成佛이다.

6조 慧能은 부처가 되려면 마음을 어떻게 가져야 하는지를 이 問答에서 明快하게 說破하고 있다. 즉 지난 일들에 대해 執着하지 말아야 하며[前念不生卽心], 不生不滅이고 부증불감(不增不減)인 우리 自性淸淨心은 永遠히 살아 있으므로 未來에도 결코 그 마음은 멸하지 않는다는 것[後念不滅卽佛]이다.


 얼핏 보기엔 서로 矛盾되는 것도 같고 難解하기도 하다. 우선 ‘前念不生卽心’은 지난 일에 執着, 마음의 本質인 本來 淸靜性을 더럽히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곧 부처라는 人格者가 가져야 할 마음 姿勢다. 다음의 ‘後念不滅卽佛’은 한마디로 이러한 부처(마음)는 永遠不滅이라는 얘기다.


 朝鮮祖의 백파긍선선사(1767-1852)는 “일념(一念)을 깨달으면 앞생각은[前念]은 미[迷]한 때의 마음이고 뒷생각은[後念]은 깨달은 마음이므로 부처라 한다”고 했다. 과거에 대한 一切의 執着을 떨어버린 마음이 곧 永劫의 歲月에도 永遠不滅하는 부처다. 여기서 過去에 대한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 마치 淸靜圓滿한 自性(마음,부처)을 枯木死灰처럼 아무 生命活動도 갖지 않도록 ‘屍體化’ 시키는 일은 결코 아님을 有意해야 한다. 마음의 執着을 버리는 것과 淸靜한 마음의 永遠한 活動은 전혀 別個의 次元이다. 이렇게 되면 ‘前念不生’과 ‘後念不滅’의 混亂은 整理된다.


 淸靜한 마음이 바로 부처인데 그 마음의 淸靜性을 더럽혀 부처가 되지 못하게 하는 가장 重要한 障碍要因이 執着이다. 執着은 公利的인 생각을 일으킴으로써 始作된다. 過去, 現在, 未來에 대한 모든 執着은 마음의 淸靜性을 離脫해 생각을 일으킨 結果다.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 意識作用을 멈추는 斷絶이나 죽음을 뜻하는 게 아니다. 오직 마음의 淸靜性을 벗어난, 때묻은 생각만 禁忌視할 뿐이다. 一切의 像을 여윈다 함은 意識作用을 멈추는 단상(斷想)이 아니라 우리 눈앞에 展開된 現像에 마음을 뺏기는 미혹(迷惑)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六祖의 ‘心卽佛’은 孫子인 馬祖道一禪師에 이르면 즉심즉불(卽心卽佛)-비심비불(非心非佛)- 불시물(不是物) : 한 물건도 아니다)로 發展해 祖師禪의 核心 禪思想이 된다. 馬祖의 제자 大珠慧海禪師는 그의 明著 ‘돈오입도요문(頓悟入道要門)에서 ’心卽佛‘의 뜻을 묻는 한 學人의 慘聞에 다음과 같이 答했다.


 大珠禪師는 學人에게 손가락을 내보이며 “너는 이것이 부처가 아니라고 疑心하느냐”고 되물었다. 學人이 對答을 못하자, 그는 “通達하면 부처가 아닌 것이 없고 깨치지 못하면 도(道)에 다 어긋나느니라”하고 가르쳐주었다. 大珠는 마음의 本來 淸靜性만 지켜 밖의 對象에 陷沒(함몰)당하지 않고 모든 現像의 實體를 主體的 진아(眞我)의 立場에서 보게 되면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다 내 마음으로부터 생겨난 나름의 眞如當體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宇宙萬物을 包容할 수 있는 심지(心地)를 가지면 見性이고 부처다.


소동파의 선시(禪詩) <남화사>를 살펴보자.

 

1

하늘에 계신 慧能祖師를 謁見(알현)하고자 함은 나의 本來面目을 알고자 함이요,

圓寂하시어 塔中에 계신 祖師께서는 나에게 “그대는 무엇을 보았는가“라고 물으신다.

 

(雲何見祖師 要識本來面 亭亭塔中人 問我何聊見)

 

 2

可憐한 명상좌 萬法을 한 순간에 電光石花로 요달하니,

물을 마셔보고 스스로 차고 더움을 알듯이

다시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고 달이라 하는 일 없네.

 

(可憐明上座 萬法了一電 飮水卽自知 指月無復眩)

 

3
   나는 本來 修行人으로 過去, 現在, 未來의 삼세식을 修行해 닦으려 했는데,

中間에 한 생각 잘못 일으켜 一生동안 무수한 시달림과 苦難을 당했네.

 

(我本修乃人 三世積修煉 中間日念失 受此百年유)

 

4

옷깃을 여미고 六祖 眞身像을 參禮하고 나니 感動의 눈물이 비오듯 싸락눈 내리듯하네,

祖師께서 錫杖을 찔러 파놓은 남화사 뒤 탁석천 물을 떠다가

실속없이 아름답게 꾸며대는 말들이나 늘어놓는 詩를 쓰느라 使用한 벼루를

깨끗이 씻어내고 다시는 글을 짓지 않겠노라.

 

(摳衣禮直相 感動汨雨霰 借師錫端泉 洗我綺語硯)


 曹溪 남화선사에서 3년 동안 隱遁한 소동파의 心懷를 잘 드러내고 있는 禪詩다. 世俗의 高位 官職과 美辭麗句의 시작(詩作)등에 매달렸던 어리석은 執着에 대한 悔恨을 吐露하고 있는 소식(蘇軾)의 시 ‘남화사’는 오늘에도 거듭 되씹어볼 만한 消息이다.


 詩를 感想해 보자. 소동파는 1094년 왕안석과 對立하다가 항주자사에서 광동성 領主太守로 左遷됐다. 赴任 도중 다시 發令을 받아 永遠 군절도부사로 降等돼 혜주(惠州)에 赴任하게 됐다. 그해 10월 대유령(慧能祖師와 明上座의 奇緣을 간직한곳)을 넘어 惠州에 到着했다. 이 詩는 이때 曹溪를 경유하면서 남화사 6조 眞身像을 參拜하고 지은 것이다.


 그는 政治에 대한 苦惱와 失意를 禪家의 智慧를 빌어 풀어보고자 했다. 詩의 첫줄 2구는 남화사에 와서 하늘에 있는 6조의 靈魂을 謁見하고자 하는 目的이 소동파 自身을 包含한 人間의 本來面目을 알고자 함임을 밝히고 있다. 이는 禪宗의 人生觀을 통해 自己認識을 한번 새롭게 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本來面目’은 慧能이 5조 弘忍으로부터 祖師 承繼 信標로 받은 衣鉢을 가지고 남쪽으로 逃避하던 중 衣鉢을 뺐으려고 뒤쫓아온 慧明學人을 대우령에서 만났을 때 가르쳐 준 한소식이다. 명(明)上座가 여기서 한 수 가르쳐 줄 것을 청하자 慧能은 다음과 같이 說했다.


 “善도 惡도 생각하지 말라. 바로 이렇게 했을 때 어느 것이 明上座의 本來面目인가.”


 이렇게 해서 ‘本來面目’이라는 話頭가 생겼고 그 뜻하는 바는 人間存在의 본바탕, 즉 分別意識을 떠난 ‘無心’을 象徵한다. 첫줄 뒤의 2구는 6조탑 안의 慧能祖師 肉身像에게 ‘本來面目’을 慘聞하니 6조가 마치 살아 있는 生佛처럼 “그래 그대는 무엇을 보았는가”하고 反問하더라는 象徵的인 시상(詩想)이다. 다음 5언 8구(句)는 慧能祖師의 물음에 대한 소동파의 對答이다. 동파는 明上座가 대유령에서 慧能祖師의 한 마디를 듣고 크게 깨쳐 “이제 가르침을 받으니 사람이 물을 마셨을 때처럼 스스로 차고 더운 것을 알겠습니다. 이제부터 노(盧)행자(6조혜능)는 저의 스승이십니다.”라고 했듯이 자기도 6조탑을 참배하고 금세 확철대오했음을 밝히고 있다.


 동파가 깨친 내용은 ‘능엄경’에 나오는 “사람이 손으로 달을 가리켜 달(自性本體)을 깨닫게 하고자 할 때 손가락을 봐서는 안 되고 달을 보아야 한다”는 “지월(指月)” 比喩를 引用, 禪宗의 得道 관건인 言語와 文字를 버리는 不立文字, 言語道斷의 妙諦 體得이다.


 中國 禪佛敎의 胎動 背景을 形成한 제1인자인 魏秦南北朝 時代의 동진 僧侶 승조법사(384-413)의 ‘반야무지론(般若無知論)’은 不立文字의 ‘무언법(無言法)’을 이렇게 說明했다.


“말이 모든 것을 解決하지는 못하지만, 그러나 말이 없다면 傳할 수가 없으니 그래서 聖人(석가모니)는 하루 종일 말하고도 한 마디 말도 하지 않는 불설일자(不說一字)다.”


 소식은 ‘指月無復眩’에서 자기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쳐다보는 식으로 過去엔 言語文字에 貪着했으나 이제는 손가락이 아닌 달을 바로 쳐다보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했다. 이는 소동파가 世上 風塵을 실컷 經驗하고 마지막으로 人生의 참뜻을 깨달아 이후로는 또다시 갈림길에서 길을 잘못 들지 않게 됐음을 말한 것이기도 하다. 이어 다음 두 句節에서 自信을 佛敎 眞理의 行列 속으로 밀고나가 元來 修行이었으나 한 생각 차이로 本性을 喪失해 一生 동안 무수한 試鍊을 만났음을 말하고 있다.


 ‘六祖檀經’은 “한번 어리석은 생각을 하면 般若가 끊어지고 한번 智慧를 떠올리면 般若가 생겨난다.”고 했다. 詩의 마지막 5언 절구 4구절에서는 六祖의 眞身을 參拜하면서 發願한 世俗 風塵으로부터의 解脫을 펼쳐보이는 具體的 行動을 展開한다. 그 行動은 慧能이 파놓은 남화사 탁석천(일명 구룡천) 물로 지금까지 아름답게 꾸민 巧言令色의 실속없는 말(詩)을 적던 벼루를 닦아냄으로써 다시는 詩를 쓰지도, 글을 짓지도 않겠노라 다짐하는 行動意志를 펼쳐 보인다.


 過去 政事를 論하는 글과 말들 때문에 追窮을 당하고 見責을 받는 政治鬪爭, 社會鬪爭에 휘말렸던 소동파는 오늘의 政治的 敗北와 左遷의 原因을 佛敎的 ‘업장’으로 歸結시키고 있다. 天太宗의 지의선사는 ‘마하지관’에서 “文字를 떠나는 것이 바로 解脫”이라고 했다. 소동파는 선리(禪理)를 따라서 오늘 不幸을 가져온 업장인 文字를 動員해 글을 쓴 벼루의 먹물을 씻어내 解脫에 到達하고자 한다.


 소동파는 人生行路에 難關을 만나 茫然한 가운데 禪을 찾아 自心淸靜의 觀念에 대한 疑問을 풀고 괴로운 마음을 治癒하고자 했다. 소식이 이처럼 禪佛敎에 依支해 자신의 苦惱를 달래고자 한 것은 소식이라는 한 個人의 悲劇일 뿐만 아니라 當時의 時代的 悲劇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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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매산 법상선사(大梅山 法常禪師)가 처음으로 마조를 친견하고 나서 물었다.
"부처란 무엇입니까?"
마조가 말했다.
"이 마음이 바로 부처다(卽心卽佛)
법상은 문득 깨닭았다.
이후 곧 대매산으로 들어 갔다.
법상이 산에 들어갔다는 소문을 듣고, 마조는 그의 한 제자를 보내어 법상에게 다음과 같이 묻도록 하였다.
"마조스님에게서 도대체 무슨 말씀을 들었기에 산에 들어와 계시는 겁니까?"
법상이 말했다.
"이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을 듣고 여기에 머므르고 있는 것이라네."
"요즈음에 들어서는 마조스님 말씀이 달라지셨습니다."
"아니, 어떻게?"
"비심비불(非心非佛)이라 하고 계십니다."
"그 늙은이가 사람을 한없이 헷갈리게 만드는군. 그러나 그가 비록 그렇게 말한다 해도 나는 오로지 즉심즉불일 뿐이다!"
제자가 돌아와 마조에게 사실을 이야기하자, 마조가 말했다.
"매실이 다 익었구나."

*휘호는 법상, 속성은 정씨, 양양(襄陽:호북성)사람이다.
어려서 형주의 옥천사(玉泉寺)로 출가하여, 20세 용흥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그후 마조의 '즉심즉불'에 깨달음을 얻었다.
정원(貞元) 12년(796), 사명(四明:절강성) 여조현(余조縣) 남쪽 70리에 있는 대매산 매자진의 옛 집으로 내려가 그곳에서 숨어 살았다. 대매산이라는 이름은 이로부터 얻은 것이다.

매실이 다 익었다는 것은 대매선사가 도를 얻었다는(깨달음을 얻었다는) 인가이다.
도는 언어에 있다는 말이 아니다. 비심비불이건 즉심즉불이건 도의 근원을 표현하는 용어는 못된다. 용어는 공부하는 사람의 근기에 따라 달리 표현되다.
또한 도는 언어에 끄달리는 것이 아니다. 즉심즉불에 깨달은 도인이 비심비불에 흔들리면 도인이 아니다. 도인은 언어의 함정을 알고 있다.
그래서 도를 얻은 사람은 마음을 부처라 하거나, 부처가 아니라 하여도 두려워 하거나 의심하지 않는다.

대매선사가 즉심즉불에 도를 얻어 비심비불에 마음이 흔들렸다면, 그의 마음은 흔들리는 것으로 확실한 법을 얻었다 하지 못할 것이나, 흔들리지 아니함으로 마조로 하여금 매실이 다 익었다는 인가를 받은 것이다. 

 

 

 

 

서럽더라 우리네여

                          - 양지스님(신라 향가)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서럽더라

 

서럽더라 우리네여

 

공덕 닦으려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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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첫 구절에서 세 번 '오다'라고 한 것은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를 통해

우리는 무한히 왔고, 오고 있고, 또 올 것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다음 구절의 '오다 서럽더라'는 와서 보니 우리의 인생은 괴로움의 연속이

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서럽더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서럽더라 우리네여'라는 부분에서는 어떤 상황을 막론하고 누구든지

고해에 젖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괴로움의 바다를 피해갈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대로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고해로 인해 서러운 인생이지만 '공덕 닦으러 오다'는 구절에서 삶의 목적을

분명히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에서 피안을 향해 가는 것처럼 공덕을 닦기 위해서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마지막 구절에서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