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향(香)

2009. 12. 11. 22:24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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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암산> 

 

불교와 향(香)

나를 태워 온누리에 깨달음의 향기 베푼다



불교의례 육법공양서 첫 자리

사바세계와 부처님 잇는 도구

고구려 때 불교와 함께 전래돼

법회.민간의식 등서 널리 사용



자신을 태워 주변을 맑게 해주는 향은 사바세계와 해탈세계를 이어주는 통신수단이자 실천행의 원력이다.
“옴 바아라 도비야 훔.
옴 바아라 도비야 훔.
옴 바아라 도비야 훔.”
불보살에게 향(香)을 공양 올릴 때 외는 헌향진언(獻香眞言)이다.
향은 자신의 몸을 태워 주위를 맑게 하고, 나쁜 냄새를 없애 준다. 삿된 것을 없애고, 몸과 마음을 맑게 해주는 것이 향의 역할이다.
향은 희생과 화합 그리고 공덕을 상징한다.
불교에서 향을 해탈향(解脫香)이라고 하는 것도 깨달음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향은 등불조차 미치지 못하는 어두운 곳에도 향기를 나눠주는
 ‘베품의 공덕’을 갖고 있다.
미혹에 빠져 사는 중생들에게 구체적 삶의 지침인 깨달음의 향기를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향을 피우면 향기가 백천만억 떨어져 있는 부처님 세계까지 널리
퍼진다고 한다.
그로 인해 부처님들이 향기를 맡고 사바세계의 법문을 듣거나
공양하는 이들을 실제로 보고 알게 되는 공덕이 있다고 한다.
즉 향은 사바세계와 부처님의 세계를 연결하는 ‘통신수단’이나
마찬가지이다.
간절한 마음으로 한줄기의 향을 올리고 기도하는 것은
 곧 부처님과의 만남이며, 가르침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며
살겠다는 원력이기도 하다.

부처님을 모신 불단(佛壇)의 가장 가운데에 향을 피우는 향로를 둔 것도 향이 갖는 의미가 크기 때문이다. 모든 불교의례에 있어 향 피우는 일을 생략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부처님께 올리는 향(香)ㆍ등(燈)ㆍ차(茶)ㆍ꽃(花)ㆍ과일(果)ㆍ쌀(米) 등 육법공양 가운데 향을 제일 처음으로 삼는 것도 향이 갖는 의미가 큰 까닭이다. 또한 대부분 절에서 도량 안팎에 향나무를 심고 가꾸는 것도 눈여겨 볼 일이다.

“계향(戒香) 정향(定香) 혜향(慧香) 해탈향(解脫香) 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 조석예불을 올릴 때 반드시 들어가는 오분향례(五分香禮)이다. 부처님이 갖춘 다섯 가지 공덕인 오분법신을 향(香)에 대비시킨 것이다. 즉 향이 지닌 뜻이 부처님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찬불가인 ‘예불가’에도 향이 첫머리에 들어 있다. “한 줄기의 향으로써 한 없는 향운게를 지어서 / 삼보님께 올리오니 넓으신 자비로써 받으소서 …”

〈법구비유경〉 ‘쌍서품’에는 향과 관련된 부처님 이야기가 있다. 향을 싼 종이에는 향기가 나고, 생선을 엮은 새끼줄에는 생선냄새가 난다는 유명한 일화이다. 향이 갖는 의미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다.

부처님이 기사굴산에서 정사로 돌아오다 길에 떨어져 있는 묵은 종이를 보고, 비구를 시켜 그것을 줍게 하고 어떤 종이냐고 물었다. 비구는 대답했다. “이것은 향을 쌌던 종이입니다. 향기가 아직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다시 가다가 길에 떨어져 있는 새끼줄을 보고, 줍게 하여 그것이 어떤 새끼줄이냐고 물었다. 제자는 다시 답했다. “이것은 생선을 꿰었던 것입니다. 비린내가 아직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말했다. “사람은 원래 깨끗하지만, 모두 인연을 따라 죄와 복을 부른다. 어진 이를 가까이하면 곧 도덕과 의리가 높아 가고, 어리석은 이를 친구로 하면 곧 재앙과 죄가 이른다. 저 종이는 향을 가까이해서 향기가 나고, 저 새끼줄은 생선을 꿰어 비린내가 나는 것과 같다. 사람은 다 조금씩 물들어 그것을 익히지만 스스로 그렇게 되는 줄 모를 뿐이니라.”

향은 산스크리트어로 Gandha라고 하며, 중국으로 건너와 건타(乾陀)ㆍ건두(健杜) 등으로 음역됐다. 우리나라에 향이 들어온 것은 고구려에 불교를 전래한 묵호자(墨胡子) 스님 때였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양나라에서 의복과 향물(香物)을 보내왔는데, 그 사용법을 몰랐다. 그때 승려 묵호자가 이름과 사용법을 전했고, 불에 사르면 향내가 몹시 풍겨 신성에 정성이 통했다”고 되어 있다.

그 이후 불교가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전래되면서 향은 법회 등 불교행사 때 사용하게 됐으며, 민간에도 널리 퍼져 중요한 의례가 있을 경우 반드시 향을 사용했다. 선조들은 심신수양의 방법으로 거처하는 방 안에 향불을 피우기도 했다. 그래서 나온 말이 분향묵좌(焚香默坐)이다. 또 향을 주머니에 넣어 몸에 차고 다녔으며, 부모님께 아침 문안을 드릴 때는 반드시 향주머니를 차고 갔다고 한다.

중국 송나라 시대 유명한 시인이자 서화가인 황산곡은 향의 10가지 공덕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 ‘향의 열 가지 덕(香十德)’이란 제목의 글로 향이 지닌 공덕을 잘 알 수 있다. △감격귀신(感格鬼神), 귀신도 감응해 마지 않는다. △청정자심(淸淨自心), 자기의 마음이 청정해진다. △능제오예(能除汚穢), 거칠고 더러움을 깨끗이 없애준다. △능각수면(能覺睡眠), 잠이 오는 것을 깨끗이 없애준다. △정중위우(靜中爲友), 조용한 가운데 마음이 안정된다. △진리투한(塵裡偸閑), 속세에서도 한가로움을 맛보고 △다이불염(多而不厭), 많이 사용하여도 싫지 않고 △과이위족(寡而爲足),적어도 만족하며 △구장불휴(久藏不虧), 오래 보관하여도 썩지 않으며 △상용무장(常用無障) 항상 써도 영원히 싫지가 않다.

불교에는 훈습(薰習)이라는 말이 있다. 본인도 잘 모르는 새에 향기가 온몸에 배인다는 뜻으로, 향이 갖는 독특한 성질을 보여준다. 〈법구비유경〉의 일화처럼 향은 한 사람이 어떻게 수행하고 살아왔는지를 대변한다. 향기는 몸에서만 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마음을 갖고 살았는지, 그리고 어떤 삶의 모습에 훈습되어 있는지를 마음의 향기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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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름

 

한 때에 어떤 승려가 다른 수행자 앞에서

 성인과(聖人果)를 이루었다고 떠벌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스님, 내게서 번뇌가 소멸했어요.

그는 후회하여 . . .

 

그대는 파라지카 죄 ) 를 범하였다. (Vin.III.103; IV.8.12)

—————

) pārājika(波羅夷 라고 음역); 추방의

 

 

 

 

사실과는 다른게 번뇌를 소멸한 아라한과를

이루었다고 떠벌리면, 파라지카 가운데서 

대망어죄(大妄語罪)에 해당되어 쫓겨난다

 


말을 잘한다고 해서

현명한 이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 마음이 충만하여 두려움이 없는 사람

그를 일러 현명한 이라 한다.


말을 잘하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은 많지 않다.


장자(莊子)는 말한다.

개는 잘 짓는다고 해서 좋은 개가 아니다.

사람은 말을 잘 한다고 해서 현자가 아니다.


제법 유식한 말을 한다고 해서

정의로운 자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비록 배운 것은 적지만

그러나 올바르게 살아가려 애쓰고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정의로운 사람이다.


유식한 사람은 많다.

그러나 정의로운 사람은 많지 않다.


머리카락이 희어졌다고 해서

덕 높으신 어른이라 할 수는 없다.

속절없이 그저 나이만 먹었다면

그는 어른이 아니라 늙은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저 별 볼일 없이 나이만 먹었다고 해서

어른대접을 받으려 해서는 안 된다.

드넓은 포용력과 용서하는 마음이 거기 없다면

그는 어른이 아니라 주책없는 늙은이에 지나지 않는다.>


용모가 뛰어나고 말을 잘 한다 하여

존경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 마음속에 아직도

시기와 탐욕, 그리고 거짓이 남아 있는 동안은.


진리에 대한 열정과 생명에 대한 연민

그리고 자기 절제와 절도가 있는 사람

더러움으로부터 벗어난 이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어른이 아니겠는가?


그저 형식적인 종교생활을 한다고 하여

그를 수행자라 할 수는 없다.

저 영혼의 순결을 지키지 않고

올바름의 법칙을 거부하고 있는데

그를 어떻게 진정한 수행자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저 묵묵히 앉아 있다고 해서

저 무지하고 어리석은 자가

침묵의 성자가 될 수는 없다.

진정한 성자는 선을 취하고 악을 버림으로써

이 삶의 균형을 잡는다.


침묵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죽어있는 침묵이다.

아무것도 모른 채 묵묵히 앉아 있는 무지상태다.

둘째 살아 있는 침묵은 이미 모든 것을 다 알면서도

침묵을 지키고 있는 명상의 상태다.


첫째의 죽어있는 침묵을 지키는 것은 어리석은 자요,

둘째의 살아 있는 침묵을 지키는 것은 성자다.

불멸의 길을 가는 사람이다.


도덕적인 생활에 의해서도

종교적인 의식에 의해서도

그리고 지식과 명상에 의해서도

또는 독신수행자의 생활에 의해서도

저 깨달음에는 이를 수 없나니

수행자여, 그대 영혼의 순결을 되찾지 못하는 한

그대는 결코 자만에 빠지지 말라.


<가장 중요한 것은 형식이나 고행이 아니라

 순결이다.

몸의 순결이 아니라 영혼의 순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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