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욕락을 극복하고 행복의 길로 들어가는 길 --

2009. 12. 17. 20:0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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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2007년 12월 2일입니다.

바로 대설과 소한 사이에 있는 매년 22일에 걸리는 동지절기입니다.


이렇게 빨리 가는 세월을 어떻게들 생각하십니까?

엊그제 점심공양에 지인의 별청을 받고 서울에 나갔었습니다.


맘먹고 초청을 한, 자리인지라 멋들어진 샹들리에 등불 켜진 커다란 레스토랑에 나가보니 정말 먹을 것도 많고 접시 들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면서 분위기를 깰까봐 조심하면서 혼자 생각에 대한민국은 아직도 불경기는 아닌가보다.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저들 중에는 일 년에 한번 큰 맘 먹고 온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천차만별의 다양한 사람들이 왔을 것이지만, 그래도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누가 뭐래도 극락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너무 넘치게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게 무슨 넘치게 살고 있냐고 하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지만, 멀리 볼 것도 없이 동남아에서 온 노동자들이나, 가까운 북한의 주민들, 저 아프리카의 내전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겐 우리 살아가는 생활수준이 감히 생각조차도 떠오르지 않고 상상조차 안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구나 점심공양을 간 그곳을 그들이 보게 된다면 아마 말로만 보고 듣던 극락이나 천국으로 여기지 싶었습니다.


중생은 넘치게 살게 되면 타성에 젖게 되어 더 자극적인 것을 찾게 되는 것처럼 자신도 모르게 한국사회의 병들어 가는 과소비문화에 떠밀려서 물고기가 물의 소중함을 모르고 살아가고, 우리 모두가 아무런 조건제약 없이 들여마시는 맑은 공기를 의식하지 못하고 살고 있듯이, 우리는 정작 가장 소중한 자신의 삶의 이유나, 가족들의 존재가치, 그리고 이렇게 살다가 세월에 떠밀려 숨 끊어지게 되면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생각들을 해 볼 겨를도 없이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식사하는 도중에 보이는 손님들의 대부분이 다 아줌마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하길, 햐! 아줌마들 천지네, 했더니 동석하신 분의 말이 걸작이었습니다.


요즘 방콕하고 있는 여자를 뭐라고 하는지를 아냐고 묻기에 현모양처가 아니냐고 했더니, 뭐란 줄 아십니까?

요즘 사람들이 말하길 여자가 대낮에 집에 있으면 어디가 아픈 환자가 아니면, 능력이 없거나 성질 못된 사회부적응자라서 그렇다고 한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금 대한민국의 사회가 이렇게 미처 돌아가고 있으니 이 속에서 살아가는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은 비정상으로 취급되는 속에서 우리는 서있는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어떤 사람이 대통령이 된들, 우리의 미래가 어찌 되겠습니까?

우선 먹기는 곳 감이 달다는 속담처럼, 지금 살기 어려운 경제이기에 경제 대통령을 뽑자고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우리의 후손들의 미래를 위해서 올바른 대통령을 뽑긴 뽑아야 하는데 제대로 된 인격자가 누가 있습니까?


거짓말을 밥 먹듯이 예수님 이름을 앞세운 장로 후보에 거기다 장로 대통령 만들어 보겠다고 앞장서는 기독교회 목사님들의 모습에서 우리의 미래와 이 시대의 정신가치가 존재할 수가 있겠습니까?

차떼기 부정을 거침없이 한 사람들을 택해야 합니까?


정몽주의 앞 뒤 꽉! 막힌 일편단심민들레가 있다면, 방원이의 “하여가”는 자칫하면 정체성을 소각시키는 위험한 정신세계를 불러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백유경이라는 재미있는 경전이 있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부처님께서 일생 동안 말씀하신 모든 형태의 가르침들을 살펴보면, 중생의 근기에 맞게, 알기 쉽게, 비유를 들어서, 그리고는 질문에 반문을 하십니다.


가르침의 내용이나 방식에 따라서 아홉 가지(九分敎), 또는 열두 가지로도 분류하는데(十二分敎) 어느쪽에든 포함되는 여러 가지의 비유(avadana譬喩)를 들어 설하신 경에 백유경(百喩經)과 출요경(出曜經)이 있는데, 백유경은 이를 백비경(百譬經)ㆍ백유집(百喩集)ㆍ백구비유경(百句譬喩經),또는 백구비유집경(集經)이라고도 불리는 경전입니다만, 백유경의 저자로는 부처님께서 직접 설하셨다는 설과 승가사나(僧伽斯那)가 짓고 그의 제자인 구나비지(求那毘地)가 492년에 한역했다는 설 등이 있지만, 승가사나가 지었다고 경전의 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백유경이라는 경전에 보면 외눈달린 원숭이 이야기가 나옵니다.

부잣집에서 애완으로 살던 원숭이 한 마리가 주인의 손에 끌려 배를 타고 먼 여행길을 떠나게 되는데, 여행 도중에 풍랑을 만나 배는 파선되고 주인과 헤어져 겨우 판자조각을 잡고 있던 원숭이는 표류하다 어떤 섬에 다 달았는데, 정신없이 모래사장에 쓰러져 있다가 기력을 찾게 되어 주변을 둘러보니 외딴 섬이었고 멀리서 자신과 같은 원숭이들의 소리가 들리자 살았다는 생각에 원숭이들의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가게 됩니다.


가는 길에 우물에서 물도 마시고 열매도 따먹으며 기력을 회복해서 원숭이 무리들이 있는 곳엘 갔더니 거기에 원숭이들은 죄다 이마 한가운데 눈이 하나만 달린 원숭이 무리들이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낯선 원숭이가 나타났는데, 이마에 눈이 두개 달린 원숭이가 나타나자, 다들 경계하다가 서로 수군대기를 야! 어디서 두 눈 달린 병신원숭이가 왔다고 서로 수군수군 거리다가 그 중에 대장격인 원숭이가 두 눈 달린 원숭이게 말하기를 야! 너 병신 너는 어디서 왔는데 이렇게 병신이냐? 하고 묻자, 이 두 눈 달린 원숭이가 생각하기를 무슨 소리냐? 내가 알기론 외눈박이들이 병신이지! 하자, 갑자기 외눈달린 원숭이들이 떼거지로 모여들어 두 눈 달린 원숭이를 집단폭행을 해버립니다.

감히, 어디서 굴러들어온 것이 자기들을 병신으로 취급했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그 날 이후로, 외눈달린 원숭이들이 가까이 오지도 못하게 하고 같이 놀아주기는커녕, 열매도 못 먹게 하고, 온갖 훼방을 놓으며 병신이라 놀리자, 외로움과 따돌림에 못이긴 두 눈 달린 원숭이는 바닷가에 쪼그려 앉아 자신의 삶을 비관하다말고 갑자기 곁에 있던 나뭇가지를 들고 자신의 두 눈을 찔러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서 외눈박이 원숭이들의 무리에 가까이가자 외눈박이 원숭이들이 말하길, 어! 저 병신이 우리와 같아졌네! 하면서 한 무리로 받아들였답니다.


어쩌면 이 시대의 우리는 이렇게 스스로 자기 한쪽 눈을 찔러버리는 원숭이처럼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더불어 살아가고 조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는 자기 합리화로 말입니다.


하지만, 팔리어로 “경(經)들의 모음”이라는 뜻을 가진 팔리어 경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경전의 하나인 경장의 소부(小部 KhuddakaNikāya)에 실려 있는 “수타니파타”에서 부처님께서는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라!” 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한 세상은 오늘 이 순간이라는 현재가 있으면 어제나 작년이라는 과거가 있고, 내일이나 내년이라는 미래가 있습니다.


금생을 살아가는 것은 전세살이 사는 것에 불과한 것이고 우리가 가지고 있고, 소유하고 있고, 내 것이라고 하는 것들도 사실은 갈 때는 다 놓아두고 가야할 잠시 임대차한 것들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의 삶에 대해 무소의 뿔처럼 세상의 모든 희노애락에 대해서 취하지도 말고 빠져들지 말아야 하지만, 그렇다고 등 돌릴 필요는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스스로의 눈을 찔러버리는 어리석은 원숭이가 되기보다는 무리 속에 있을 때는 한 쪽 눈을 가리고 홀로 있을 때는 두 눈 똑바로 뜨고 살아가는 지혜로운 원숭이가 되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가”의 주인공이 되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초기의 경전인 “성구경”을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성구경(聖求經)은 중부경전 26권에 실려 있습니다.


중생들이 행복과 만족을 느끼고 번뇌에 시달리는 근본의 원인은 바로 오욕과 칠정에 사로 잡혀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성구경”에서 말하는 오욕을 극복하는 가르침을 전해드리겠습니다만, 그것도 할 것이냐 말 것이냐는 스스로에게 달려있는 것입니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욕망의 대상은 다섯 가지(色,聲,香,味,觸)이다. 

이 다섯 가지란 무엇인가?

으로 식별하여 좋아하고 사랑하고 희망하고,사랑할 만한 모습을 하고, 애욕을 불러일으키고, 정을 느끼게 하는 색깔(色)과, 로써 식별하여 좋아하고 사랑하고 희망하고, 사랑할 만한 모습을 하고, 애욕을 불러일으키고 정을 느끼게 하는 음성(聲), 로 식별하여 좋아하고 사랑하고 희망하고, 사랑할 만한 모습을 하고, 애욕을 불러일으키고 정을 느끼게 하는 향기(香), 로 식별하여 좋아하고 사랑하고 희망하고, 사랑할 만한 모습을 하고, 애욕을 불러일으키고, 정을 느끼게 하는 맛(味), 으로 식별하여 좋아하고 사랑하고 희망하고, 사랑할 만한 모습을 하고, 애욕을 불러 일으키고, 정을 느끼게 하는 느낌(觸)이 있다.


비구들이여! 실로 이러한 다섯 가지가 욕망의 대상이다.

비구들이여! 어떤 수행자나 바라문을 막론하고 이러한 다섯 가지 욕망에 얽매이고 취해 있고 탐착하며, 허물을 보지 못하고 벗어나는 지혜도 없이 즐겨 누리는 이들은, 불행과 재앙을 만나고 악마의 포로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비구들이여! 예컨대 사슴이 덫에 걸릴 때 불행과 재앙을 당하고, 사냥꾼에게 사로잡힌 채 달아나지 못한다.

그같이 비구들이여! 어떤 수행자나 바라문이라도 이러한 다섯 가지 욕망에 얽매이고 취하고 탐착하며, 허물을 보지 못하고 벗어나는 지혜도 없이 즐겨 누리는 사람들은 이렇게 불행과 재앙을 만나고 악마에게 사로잡히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다시 비구들이여! 어떤 수행자나 바라문들이라도 이러한 다섯 가지 욕망에 계박되지 않고 취하지 않고 탐착하지 않으며, 허물을 보고 벗어나는 지혜를 얻어 즐겨 누리는 이들은, 이렇게 불행이나 재앙을 만나지도 않고 악마의 포로가 되지도 않는다.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사슴이 덫에 걸리지 않았을 때에는 불행이나 재앙을 당하지도 않고, 사냥꾼이 오더라도 생포되지 않고 달아날 수 있는 것처럼,.....

그와 같이 비구들이여! 어떤 수행자나 바라문들이라도 그러한 다섯 가지 욕망에 계박되지 않고 취하지 않고 탐착하지 않으며, 허물을 보고 벗어나는 지혜를 얻어 즐겨 누리는 이들은, 이렇게 불행이나 재앙을 만나지 않고 악마의 포로가 되지도 않는다.

비구들이여! 비유컨대 마치 사슴이 마음 놓고 들이나 숲,산을 거닐고 앉고 누울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비구들이여! 그것은 사냥꾼이 추격해 오지 않기 때문이다.

또 그렇게 비구들이여! 비구들이 모든 욕망을 떠나고 악(惡)을 떠나고,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려(思慮)를 떠나게 되면 기쁨과 안락함의 경지, 초선(제1단계의 禪定)에 도달하여 노닐게 된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는 악마를 눈멀게 하고 악마의 눈을 흔적도 없이 끊어, 악마의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거친 사유, 미세한 사려를 청정히 하고 마음에 때를 여윈 상태가 되어 거친 사유도, 미세한 사려도 없게 되고, 정신통일에서 얻은 기쁨과 안락함의 경지, 제2선(第二禪)에 도달하여 노닐게 된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는 악마를 눈멀게 하고 악마의 눈을 흔적도 없이 끊고, 악마에게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기쁨을 떠나 마음을 평정하고 바른 생각을 가지고, 명확하게 마음을 집중하여 몸에서 즐거움을 느낌으로써 성자들이 마음을 평정하고, 생각을 바로하여 즐겁게 노닐고 있다. 고 하는, 제3선 (第三禪)에 도달하여 노닐고 있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는 악마를 눈멀게 하고 악마의 눈을 흔적도 없이 끊어, 악마에게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즐거움도 괴로움도 단절하고 이전에 느꼈던 기쁨과 근심도 소멸함으로써,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고 마음의 평정함을 지니도록 생각을 바르게 하는 청정한 경지, 제4선(第四禪)에 도달하여 노닐고 있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는 악마를 눈멀게 하고 악마의 눈을 흔적도 없이 끊어, 악마에게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모든 관념을 소멸하고 또한 모든 관념을 작용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허공은 끝이 없다고 깨달은 선정의 경지(虛空無邊處)에 도달하였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는 악마를 눈멀게 하고 악마의 눈을 흔적도 없이 끊어, 악마에게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허공은 끝이 없다고 깨달은 선정의 경지를 초월하여, 인식작용은 무변하다고 깨달은 선정의 경지(識無邊處)에 도달하여 노닐고 있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는 악마를 눈멀게 하고 악마의 눈을 흔적도 없이 끊어, 악마에게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인식작용은 무변하다고 깨달은 선정의 경지를 두루 초월하여,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선정의 경지(無所有處)에 도달하여 노닐고 있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는 악마를 눈멀게 하고 악마의 눈을 흔적도 없이 끊어, 악마에게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선정의 경지를 두루 초월하여, 생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선정의 경지(非想非非想處)에 도달하여 노닐고 있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는 악마의 눈을 멀게 하고 악마의 눈을 흔적도 없이 끊어, 악마에게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생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라고 깨달은 선정의 경지를 두루 초월하여, 마음의 작용이 모두 끊어진 선정의 경지(想受滅)에 도달하여 노닐뿐 아니라, 지혜로써 모든 것을 보고 번뇌를 소멸한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는 악마를 눈멀게 하고 악마의 눈을 흔적도 없이 끊어, 악마에게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된 사람, 이 세간에서 집착을 건너 해탈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안심하고 다니며 서 있고 누울 수 있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비구들이여! 악마에게 쫓기지 않는 곳에 머물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설하셨다. 그들 비구들은 환희하고, 세존께서 설하신 바를 찬탄하였다.


이것이 바로 성구경에서 말하는 오욕락을 극복하고 초월하는 가르침입니다.


물 속의 고기는 물 속의 먹이만 먹어도 평생을 먹을 수 있을 것인데 별식이나 특식을 탐하다가 낚시에 걸려 생명을 버리는 것 처럼, 삼성의 뇌물을 먹은 공무원들의 모습도 이와 똑같을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저지르지 않으면 걸림 없이 편한 것인데, 저부터도 중생인지라 그 경계를 벗어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제 오늘부터 모두가 스스로를 들여다보며 자신의 욕구들로 인한 번뇌로 부터 자유로워지시길 바랍니다.


성불하십시오.

 

 
 -12월의 엽서 -

  한해가 가버린다고 한탄하며 우울해 하기보다는

아직 남아 있는 시간들을 고마워하는 마음을 지니게 해주십시오

  한해 동안 받은 우정과 사랑의 선물들 저를 힘들게 했던

슬픔까지도 선한 마음으로 봉헌하며솔방울

그려진 감사카드 한 장 사랑하는 이들에게 띄우고 싶은 12월

  이제, 또 살아야하지요 해야 할 일 곧잘 미루고

작은 약속을 소홀히 하며 남에게 마음 닫아 걸었던한 해의 잘못을 뉘우치며 겸손히 길을 가야 합니다.

  올해도 밉지만 후회는 하지 않으렵니다

  진정 오늘밖엔 없는 것처럼 시간을 아껴쓰고 모든이를 용서하면

그것 자체로 행복할 텐데...이런 행복까지도 미루고 사는

저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십시오

보고 듣고 말할 것 너무 많아 멀미나는 세상에서

항상 깨어 살기 쉽지 않지만 눈은 순결하게마음은 맑게 지니도록

고독해도 빛나는 노력을 계속하게 해 주십시오  

 

12월엔 묵은 달력 떼어내고 새 달력을 준비하며 조용히 말하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