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계를 벗어난다는 해탈업이란무엇인가?

2009. 12. 24. 19:55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728x90

항상 반갑습니다.

 

밖에는 태풍 갈매기가 몰고 온 천둥번개와 비로인해 모든 게 씻겨 내려갈 정도로 비가 내립니다.

 

법화경 약초유품에 삼초이목의 비유가 있습니다.

부처님의 감로 비는 차별 없이 대지를 적시지만 정작 초목은 제 근기에 맞게 빗물을 받아들일 뿐이라는 비유와 밝은 동녘 햇살은 제일 먼저 큰 산부터 비추어 낮은 들판까지 시차를 가지고 골고루 광명을 전해준다는 말씀이 떠오릅니다.

 

헌데도 중생들은 정작 자기 자신의 근기는 되돌아 볼 줄을 모르고 부처님의 지혜를 담아갈 자기 그릇의 크기도 모르고 자신들이 깨끗이 닦여진 준비된 그릇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도 없이 나라는 그릇이 덜 닦여지고 냄새가 남겨진 그릇인줄도 모른 채, 눈만 뜨면 무엇인가를 발원하고 원하는 욕구를 채우고자 온갖 기도에 매달려 지극정성으로 매달리다 보면 자신의 간절한 의업의 파동에너지와 불보살님들의 가피력으로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중생들이 유한한 삶 속에서 유루의 욕망이나 욕구의 성취인 것이고 다음 생에 하늘에 오르는 것만이 신행생활의 전부는 아닌 것입니다.

 

초발심엔 뭣 모르고 인연지은 불교일지라도 “아뇩다라샴먁삼보리”라는 무상정등정각의 초월적인 부처님의 지혜를 배우겠다고 마음을 낸 불제자라는 우리들이 부처님의 궁극적인 가르침을 온 몸과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가는 세월 속에 생노병사 네 가지의 고통과 또 다른 네 가지의 근본 고통까지 四苦八苦라는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끝없는 윤회고를 전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처님께서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하셨던 멧세지인 윤회하는 삶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봐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절대적으로 부정을 하셨던 정해진 업이라고 하는 자신의 운명이나 팔자나 업이라는 단어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으로 이것은 “부파불교의 해탈론”에 해당된다고 할 것입니다.

부파불교에 대해서는 제가 전번에 말씀드렸지요?

 

부파불교의 해탈론은 “번뇌를 끊어서 해탈에 이른다.”는 점을 가장 강조했던 것으로, 둘째 주 법문에 제가 말씀드린 대로 불교에서 말하는 업이나 윤회 좋은 업을 쌓아서 하늘세계에 태어나 편안히 사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업을 청정이 해서 마침내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해탈에 그 목적이 있기에 불교의 업이나 윤회설은 인도적인 단순한 “생천사상이나 기독교의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예천불지” 사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당시 인도인들로서는 이러한 “궁극적인 해탈을 추구하는 불교의 견해”를 쉽게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부처님은 차제설법(次第說法), 즉 단계적인 가르침을 펼치셨던 것이고, 그릇된 욕망이 바로 괴로움의 근본이라는 것을 가르쳐서 그들의 마음을 청정이 하도록 한 다음, 마음이 청정해졌을 때 비로소 부처님은 사성제와 팔정도의 가르침을 통해 그들이 진리에 눈 뜨도록 했던 것이라고 말씀드린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이러한 해탈론을 “단혹증리론(斷惑證理論)”이라고도 하는데 괴로움의 근본 원인인 미혹을 끊어서 진리를 깨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진리는 허위에 반대되는 개념인 학문적인 학설 따위가 아니라 부처님께서 누누이 말씀하셨던 존재의 실상에 대한 참된 이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온갖 괴로움의 원인이자 온갖 미망과 미혹근본 원인이 되는 무명(無明)이란 무엇인가를 밝혀본다면 무명은 다름 아닌 “나라는 아상에 빠진 채, 소아적인 사고와 탐 진 치 삼독의 욕구에 끄달려 물질로부터 헤어나지 못하는 대부분의 중생들이 살아가는 삶으로 연기와 무상과 무아의 실상을 깨닫지 못한 어둠의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이 무명이 바로 뿌리가 되어 자기중심적인 생각들로 가득한 중생심의 본질이 되는 것입니다.

 

중생심에는 승속이 따로 없고 성속이 차별이 없으나 수행과 자각을 통해 자신의 본질을 보기 시작한다면 무명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연속극을 보시다가 끝에 가서 어찌될 것인지 결말을 어느 정도 알게 되면 별 재미없어지듯, 자각을 통해 자신의 삶의 속에서 욕구의 흐름과 번뇌의 본질을 알게 되면 그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온갖 업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 무명과 번뇌란 원래 클레샤(Kleśa)란 말로서, “물들다. 더럽혀지다.”라는 의미인데 “입아비달마론에서는 이 번뇌를 심신을 소란케 하고 적정을 방해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부파불교에서는 가장 무거운 근본 번뇌를 구체적으로 열 가지로 나누어 십혹번뇌(十惑煩惱)라고 했습니다.

 

미사혹(迷事惑)이라 해서 존재의 실상에 대한 미혹번뇌로 선천적인 다섯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탐욕(貪), 성냄(瞋), 어리석음(痴), 아만(慢), 의심(疑)이라고 합니다.

 

미리혹(迷理惑)이라 해서 바른 견해에 대한 미혹으로서 자기 몸의 실체가 있다는 견해(身見)와 사후 세계에 대한 그릇된 견해(邊見), 인과에 대한 그릇된 견해(邪見), 그릇된 소견을 옳다고 고집하는 견해(見取見), 금하고 있는 율법에 대한 그릇된 견해(戒禁取見) 등의 후천적인 다섯 가지 그릇된 견해를 말합니다.

 

이 열 가지 근본 번뇌 중에서 후천적인 다섯 가지의 사견은 연기의 진리와 사성제 등을 잘 관찰하면 쉽게 끊을 수 있으나, 탐진치만의라는 선천적인 미사혹의 다섯 가지 번뇌들은 끊기 어려운 것으로 이것은 지적인 이해나 알음알이로는 끊을 수 없고, 수행을 통한 자각이 이루어짐으로 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열 가지 근본 번뇌를 뿌리로 하여 지말번뇌(枝末煩惱), 즉 팔만 사천 번뇌와 백팔 번뇌 등이 중생들의 일상에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순간까지도 여기에 응해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백팔번뇌라고 할 때, 108이란 숫자는 우리의 감각기관인 여섯 가지의 안이비설신의 6근(根)과 좋다, 싫다, 좋지도 싫지도 않다는 세 가지의 느낌을 곱하고(6×3=18), 여기에 한 가지 기관이 작용하는 데도 다른 6근이 모두 연관되어 있으므로 다시 6을 곱해보면 (6×3×6=108) 108번뇌가 된다고 합니다만, 이러한 번뇌 망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대 자유인이 된다는 것이지만, 겨우 이러한 백팔번뇌 따위로 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해서 이러한 것들이 해탈업이 과연 될수가 있는가에 대해 혼자서 자문해볼 때가 많습니다.

 

다음 법회 때에는 해탈업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성불하십시요.   

 

 

 

 

<<아기 예수 탄생을 축하하며~>>

 

   불자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내일은 아기 예수가 탄생한 성탄절입니다.

 

   온 인류와 더불어

   성인의 탄생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예수는 배타적 유대민족의 종교인 유대교라는 문화 속에서

  태어났고 자라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어떠한 사람도 차별하지 않고, 하느님의 사랑을 전했습니다.

 

  ◇ 신약 성경에서

   그리스도는

   스스로를 전도자라고 칭하면서 사제가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든가,

   성찬식이라며 빵과 포도주를 끄집어내는 등의 이른바 마법과도

   같은 의식을 행하는 것은 신을 모독하는 일이라 금지하였습니다.

 

     또 어떤 인간이 다른 인간을 전도자라고 부르는 일조차

  지극히 분명하게 금지하고 있습니다.

 

    또 예수는 교회에서 행하는 기도를 금지했고,

    각자가 고독한 곳에서 조용히 기도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다시 예수는 교회 자체도 금지하고, 자기는 교회(유태교)를 깨뜨리기 위해서

   온 자이며, 기도는 교회에서가 아니라 마음으로 진심을 다해서 해야 한다고

   설파했습니다.

 

   특히 예수는 지금 여기서 행하여지고 있는 것 같은 일,

   즉 다른 사람을 재판하고 감금하고 학대하고 모욕하고 처벌하는 등의

   일을 금지시켰습니다.

      또 다른 사람에 대한 일체의 폭력을 금지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묶여있는 사람을 해방하러 왔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2천5백여년전  인도에 석가모니부처님이 나오셔서 인도의

   사성제라는 불합리한 계급제도를  타파하신 것과 같습니다.

       두 분다 권위와 폭력을 부정하시고 인류의 참 행복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신

  것  입니다.

 

   ◇ 이 땅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의 제자들이시여~

        부처님의 제자들이시여~

 

       예수님은 어떠한 사람도 차별하지 않고,

       하느님의 사랑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인류가 서로 차별함이 없이 예수님 가르침처럼

      오순도순 잘 살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이 땅에 있는 우리 겨레 우리 형제들이시여~

      그 중 예수님의 제자들이시여~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리며

      다함께 기도합시다.

 

       '" 이제 우리는 모두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모든 인류의 빛과 소금이 되게 노력하소서....아멘

 

          이젠 교회를 위한 교회 지상주의로 가지 않게하시고

          교회의 권위와 교회의 권익을 먼저 생각하지 마시고

          헐벗고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우리 형제들을 먼저 구원하소서.  "

 

        " 교회를 위한 교회가 아니라

           진정한 그리스도인을 위한 교회가 되게 하소서. "

           아멘~~ 

 

 

      성경의 말씀은 명백하게 그리스도교를 뜻하지

         교회로서의 교회를 뜻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겸허, 참회, 순종, 운동, 삶의 지혜,

         영적생활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진정한 하느님의 세계를

         표방하고 있습니다.

 

    ◇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이

        이 세상 곳곳의 모든 사람들에게 내려지기를 바랍니다.

        부자나 가난한자나

        행복한자나 불행한자나

        교회 속에서나 교회 밖에서나

        그리스도는

        권의주의의 교회를 비난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폄하하고 짓밟는 것을 비난했습니다.

        예수는 권위주의 율법에 저항했습니다.

        특히 모세의 10계명이라는 것도

        그 10계명에 의해서 권위주의로 흐르는 것에

        저항 했습니다.

 

        오직 자유롭게

        고요히 혼자서

        누구나 직접 하느님과 대화하기를 가르쳤습니다.

 

 

     ◇ 이 땅에 진정한 그리스도의 정신이

         내리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그리스도의 참사랑이

         온 세상을 덮을 때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요 또 불국정토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래서 우리 불교도들은 예수그리스도를 거룩한 불보살로

         부르는 것입니다.

         대자 대비한 예수 불보살 !

 

     ◇ 그리스도의 참사랑과 석존의 대자대비심(大慈大悲心)은

         우리 인류를 구원할 인류의 희망이요, 광명입니다.

         이젠 우리 모두 종교의 벽을 넘어야 할 때입니다.

 

         성탄절을 맞아

         다시 한 번 아기예수의 탄생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우리 모두 저 지혜의 언덕으로 함께 건너갑시다.

         마하반야바라밀

 

         그리고 다함께 기도합시다.

         아멘

 

         개운정사(개운선원)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