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25. 20:45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오매일여
[현각에세이] 달을 숭앙하는 나라
잃어버린 음력의 시간 … 성묘하는 가족의 모습에서…
매일매일 정신 없이 사는 현대인. 매초, 매분, 매시간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채워지지 않는 좌절에서 벗어나지도 못한다. 스스로 만들어낸 소외를 자랑하는 바보처럼. 인간 스스로 만든 인공적 시간이 우리를 좌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시간의 참된 본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시간은 돈이다.” 하지만 그것은 ‘시간’이란 이름의 디지털 환상에 시달리는 고통의 경제일 뿐이다. 도대체 시간과 돈 중 하나라도 충분히 가졌다고 믿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것이 인간이다.
내가 태어나 자란 서양은 태양의 문화에 속한다. 태양문화권에서는 해가 달을 지배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사실 아득한 옛날부터 유럽인들은 한국사람과 마찬가지로 달의 주기에 따라 살아왔다. 축제일도 초승달-반달-하현달의 자연적 주기에 맞춰 결정되었다. 그러나 1582년 교황은 유럽의 토착 전통을 무너뜨렸다. 교황이 선언하기를, 우리 서양은 달이 아닌 해에 맞춰 시간을 가르노라! 그리하여 그때부터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태양력이 서양의 기준 달력이 됐다. 즉 양력은 유구한 전통의 음력을 짓밟으면서 탄생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현재 서양의 시간 개념 역시 지배와 복종을 통해 탄생했다. 미국의 양력판 추석인 추수감사절을 보자. 이것은 백인들이 광대하고 기름진 신대륙을 주셔서 고맙다고 신에게 감사하는 명절이다. 하지만 백인이 들어오기 훨씬 전부터 그 땅에 이미 사람이 살고 있었고, 고도의 문명을 지닌 원주민들은 백인에 의해 점차 ‘제거’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백인들은 오랫동안 황인종의 땅이었던 신대륙을 자기들에게 주셔서 고맙다고 신에게 감사해온 것이다. 우연의 일치일까. ‘신대륙’을 지배하러 온 백인은 태양을 숭배한 반면, 이들에 패배한 황인종은 달을 숭배했다. 즉 태양이 달을 지배하고, 거짓된 시간이 자연의 시간을 지배한 것이다. 어쩌면 서양인들은 권력을 위해 영혼을 팔았는지도 모른다.
비록 한국인은 아니지만 나도 음력 한가위를 매우 좋아한다. 시간의 자연적인 흐름으로 돌아가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또 태양문화권에서는 사라져버린 조상을 기리는 문화가 살아 있는 것도 매우 소중하다.
몇 년 전이었다. 추석 며칠 전, 나는 소백산에서 힘든 기도를 마친 후 서울행 버스를 탔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승객들의 휴대전화 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렸다. 대화내용은 대부분 이랬다. “나 못 가. 너무 바빠서 시간이 없어.” “전화하려고 했는데 시간이 없어서 말이야, 미안해.” 버스가 영동고속도로의 안개 낀 산길을 헤쳐나가는 동안 나는 차가운 차창에 얼굴을 기대고 있었다. 바로 그때, 내가 영원히 기억하고픈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갑자기 시야가 탁 트였다. 그리고 얕은 언덕 위의 풀이 무성한 무덤 앞에 가족 몇 명이 보였다. 돗자리에는 과일과 음식과 소주가 소반 위에 차려져 있었다. 그리고 부부와 세 아이가 무덤 앞에서 머리가 땅에 닿도록 큰절을 올리는 것이었다. “이게 바로 한국이야!” 이야말로 많은 나라들이 잃어버린 옛 지혜가 아니던가! 나는 그들이 정성을 다해 경건히 절하는 모습에 깊이 감동 받았다.
나는 뜨거운 태양이 지배하는 나라에서 고요한 달을 숭앙하는 나라로 이주해왔다. 마치 더 좋은 기후를 찾아 이동하는 한 마리 새처럼. 한가위는 내게 잃어버렸던 음력의 시간을 되찾아주었다. (현각·화계사 미국인 스님)
추석 한산한 시장에 나온 어머니. (동대문시장. 1962년9월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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