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 1. 12:24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무아(無我)와 원통불교(圓通佛敎)
청화큰스님 |
이번 법회의 제목이 순선안심법회(純禪安心法會)라, 순선이라는 말이 처음 듣는 사람들은 좀 생소하실 것입니다. ‘참선에 무슨 순수한 참선이 따로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드실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참선이 너무 흐트러져 있습니다. 종파적인 참선, 자기들 식만 옳다고 고집하는 그런 참선, 그렇게 되면 참선법도 법집(法執)이 되고 맙니다. 성자들의 분상에서 법집(法執)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법집이란 자기만 옳다는 주장입니다. 특히 아집(我執), 이른바 개인적인 이기심이라든가 자기가 속한 단체에 따른 집단적 이기심 이런 것들이 모두가 다 아집(我執)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불교 자체가 ‘바로 본다’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는, 자기라는 것이 본래 없는 것입니다. 무아(無我)라는 개념은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교리입니다. 어째서 내가 없는가? 그것은 인연법(因緣法)이라, 나라는 것은 인연 따라서 잠시간 거짓 모양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 무아(無我)에 대해서 우리 불교인들이 처음에는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인연법을 생각해보면 그냥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사람 같은 모양, 동물 같은 모양, 식물 같은 모양을 나툰 것이지 실존적인 고유한 나(我)는 있지가 않습니다. 사실은 무아(無我)를 알면 불교의 전부를 알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 인간은 본질을 보지 못하고 상(相)만 보기 때문에 내가 있다고 고집하는 것이지 본 성품, 본래 바탕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나라는 존재가 물에 비친 달 그림자 같은 것이지 실존적인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시초의 본 성품은 무엇인가? 소승에서는 본 성품 자리를 제대로 말을 못합니다. 그러나 대승에서는 분명하게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 또는 ‘법성(法性)’이라, ‘중도실상(中道實相)’이라. 이렇게 성품자리를 말씀했습니다.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영생불멸하는 생명 자체, 이 자리에서 잠시간 인연 따라서 천지만물이 상(相)을 나타낸 것입니다. 여러분들께서 많이 들으신 법문 중에 ‘상(相)을 떠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보시를 하더라도 상을 떠난 무주상 보시라, 좋은 일을 하더라도 상을 떠나지 않으면 위선의 찌꺼기만 남습니다. 그런데 중생들은 상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런가? 중생들은 근본 성품을 못보고 겉에 나타난 상만 보기 때문이지요. 좋고, 싫고 하는 상을 떠나지 못하고 아상(我相), 또 내 생명이 얼마나 길 것인가 하는 수자상(壽者相), 나는 사람이고 개나 소는 짐승이다 라는 인상(人相)등, 중생들은 이런 수 많은 상 때문에 여기서 못 벗어납니다. 아무리 상을 빼고 보라고 해도 중생차원에서 그것은 무리입니다. 그러나 성자의 입장은 다릅니다. 성자는 항시 근본 성품을 직관하기 때문에 성자가 보는 이 세상의 삶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명예나 감투나 부귀영화 같은 것들이 한낱 무상한 허깨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성자도 현상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다 꿈같이 봅니다. 꿈같이 보니까 집착을 안 하게 되겠지요. 따라서 원효스님이나 의상스님, 또 고려 초기의 대각국사, 나옹스님, 태고대사, 보조국사, 이조 때 와서 벽송지엄 스님, 서산대사, 사명대사, 이런 위대한 분들의 책을 보면 조금도 옹색한 데가 없단 말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그 분들은 상을 떠나있으니까 이른바 법집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꼭 내가 하는 식만 옳다라고 하는 고집이 그분들에겐 없습니다. 따라서 그분들은 모두 원통불교(圓通佛敎)입니다. 특별히 통불교(通佛敎)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불법 자체가 원융무이(圓融無二)한 원통불교(圓通佛敎)인 것입니다. 종파에 치우치거나 교에 치우치거나 또는 참선에만 치우치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어느 해에 해남 대흥사에서 4, 5년 동안 지낸 경험이 있습니다마는 그곳에서 다행히 『초의선사 문집』을 봤습니다. 그 전에는 본 일이 없었는데 그때 처음 읽었습니다. 대흥사는 우리 스님네들은 다 잘 알으십니다마는 신라불교는 경주를 중심으로 해서 빛난 것이고, 고려불교는 송광사로 꽃 피었고, 이조불교는 대흥사로 해서 빛났습니다. 대흥사에서 13대 종사, 강사가 나왔는데 그 가운데서 초의선사는 12대 종사입니다. 그 분은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다도(茶道)의 할아버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초의스님이 계셨던 일지암에서 일년에 한 번씩 모여서 다신제(茶神祭)라 해서 잔치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차 마시는 한 가지 예식만 치르지 초의 스님의 핵심인, 즉 말하자면 『초의선사 문집』 가운데에서 『사변만어(四辨漫語)41)』라, 『사변만어』는 굉장히 중요한 책입니다. 41) 『사변만어(四辨漫語)』1권, 초의 의순(草衣 意恂)이 저술한 것으로 백파(白坡)의 『선문수경(禪文手鏡)』을 반박한 글. 그래서 제가 그 때 번역을 하려고 주지스님께 사정을 해서 원고를 가져다가 지금도 간직하고 있는데 그런 저런 사정으로 번역을 못해서 지금도 아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마는 제가 생각할 때는 서산대사의 『선가귀감』 다음으로는 이조 불교사에서 그렇게 좋은 책은 처음 보았습니다. 『사변만어』가 그렇게 좋은 책입니다. 여러분들께서도 기회가 있으시면 구해서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그걸 보면은 조금도 막힘이 없단 말입니다. 그 문집은, 이조 말엽에 한국 불교를 대변하다시피 한 백파 스님을 비판해서 낸 글입니다. 초의스님은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추사 선생과 절친한 도반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산 정약용 선생과도 절친했습니다. 문장도 당대 버금가게 유려하고 그 내용이 아주 훌륭한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내용이 좋다는 것은 아집과 법집이 없다는 말입니다. 초의스님이 봤을 때 백파스님이 분명히 오류를 범했는데, 오류를 범했다 함은 과거 선지식들의 말씀에서 빗나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자기 실력이 부족하니까 섣불리 반박 할 수가 없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일지암에서 사십 년 동안 공부를 해서 나중에 『사변만어』라는 책을 내어 백파 스님을 비판했습니다. 나중에 추사 선생을 비판한 글도 있습니다마는 제가 굳이 이런 말씀을 하는 까닭은 적어도 정통 조사라고 하는 분들이나 도인들은 남을 함부로 비판하지 못하고 또 자기만 옳다고 내세우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결국 나와 남도 없는 것이고 본질적으로 생각할 때 개념 같은 것도 다 허망한 것인데 이른바 법집이나 아집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천지우주를 오직 하나의 진리, 통달무이한 하나의 진리로 보는 분상에서 어떻게 핏대를 세워 옳다 그르다 시비를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일본에서도 화두만 하는 임제종과 묵조만 하는 조동종, 또는 염불을 화두로 하는 황벽종이 있습니다. 또 대만에는 주로 염불을 화두로 합니다. 따라서 황벽종에서는 자기들 방법만 옳다고 하고 임제파에서는 화두 없이 꾸벅꾸벅 졸아 버리는 묵조사선(黙照邪禪)이라, 삿된 참선이라 매도를 하는가 하면 또 묵조선에서는 화두 하는 임제파에게 본래가 부처인데 무슨 필요로 이것인가 저것인가 의심할 것인가? 이렇게들 서로 주장들을 합니다. 우리 한국도 가만히 보면 참선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화두선만 참선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다른 방법들은 다 부정해 버리겠지요. 원효스님의 위대함을 세계가 다 아는데도 화두로 참선한 분이 아니라고 그 분을 부정해 버립니다. 하물며 기독교 같은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편협하기 짝이 없겠지요. 그것이 외도인 것 같으면 2천년 동안이나 순교자도 나오고 지금까지 발전해 왔겠습니까. 이렇게 개명 천지에서 17억 인구가 믿고 있는 것인데 그네들을 아무 필요 없는 외도라고 간주해 버리면 결국은 싸움밖에 일어날 게 없습니다. 정보화 시대란 것은 온갖 정보와 가치가 뒤섞이고 교류가 되기 때문에 자기 것, 자기들 문화권만 옳다고 주장할 때는 결국 싸움밖에 더 나올 것이 없습니다. 옛날에는 교류를 자주 못하니까 내 것, 네 것을 성을 쌓고 살았지만 정보화 시대에는 세상 사람들과 매일매일 교류가 되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에도 구십육 종 외도라, 불교 아닌 가르침이 구십육 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원효 스님 계실 때도 여러 가지 종파로 화엄경 좋아하는 사람은 화엄경이 옳다 하고, 각기 다르게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십종십문화쟁론(十種十門和諍論)이라, 모든 종파를 하나로 회통(會通)시킨 것입니다. 어떤 도인들이나 그 분들의 행적을 보면 당대 일어난 문화현상을 하나의 도리로 회통시킵니다. 보조국사도 역시 염불이나 참선, 교리 등을 하나로 회통시켰습니다. 태고 스님도 마찬가지고 위대한 도인들은 하나같이 다 회통불교를 지향했던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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