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道)는 무엇인가?

2010. 1. 10. 11:24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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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道)는 무엇인가

 

김인수(불교신문 前편집국장)



 

21세기로 접어들면서 서구인들은 부쩍 도에 관심이 많다.
서구인들이 도에 관심을 갖게 되자 국내에 있는 일반인들도 이에 덩달아 선과 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16세기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500년 동안 효력을 발휘하던 환원주의와 고전과학이 힘을 잃게된 데다가 새로운 관점과 논리로 등장한 전일적 시스템이론과 소산구조와 유기체주의가 세계의 과학체계를 하나 둘 장악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서구인들은 동양인을 만나면 대뜸 도(道)에 대해서 묻는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관점과 논리를 가지고는 21세기 세계 질서 재편의 변수를 쉽사리 읽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적용성의 한계를 노출한 고전과학을 가지고서는 다양성을 중시하는 21세기의 세계 질서를 합목적적으로 이끌고 나가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는 무엇이냐고 묻는다.
도는 불가사의한 것이라고 대답한다.
불가사의는 무엇이냐고 묻는다.
보통 사람의 생각, 통상적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의 생각으로는 미루어 해아릴 수 없을만큼 오묘한 불가사의한 세계가 도의 세계라고 대답한다.

서구인이 묻는다.
문:도를 아는 사람이 있느냐?
답:있다.
문:어떤 사람이 도를 알고 있느냐?
답:눈/귀/코/입/몸/뜻의 수준이 부처와 꼭 같은 사람이 도를 알고 있다.
문:그런 사람이 우리 곁에 존재하느냐?
답:존재한다.
문:그런 사람을 어디에서 만날 수 있느냐?
답:동/서/남/북/중앙에 가면 만날 수 있다.
질문자는 더 묻지 않고 돌아간다.

한 선객(禪客)이 와서 또 도를 묻는다.
문:도는 무엇이냐?
답:도는 우주의 미분화(未分化)된 심미적(審美的0 연속성(連續性)이다.
한 마디로 끝난다. 선객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간다.

고승(高僧)이 와서 도를 묻는다.
문:도는 무엇이냐?
답:도는 자연의 만물이 지니고 있으나 밖으로 드러낼 수 없는 생명의 창발성인 동시에 만물조화(萬物調化)의 창조적 율동이다.
고승도 역시 돌아보지 않고 떠난다.

학자가 와서 도를 묻는다.
문:도는 무엇이냐?
말없이 주먹을 내보인다.
문:손가락으로 지적하셔야지 주먹을 보이시면 어떻게 압니까.
답:주먹을 보고 모르면 손가락을 보고도 모른다.
문:모르는 까닭기 무엇입니까?
답:학자는 계곡의 물을 마시고 도인은 산정(山頂)의 물을 마신다.문:계곡의 물과 산정의 물은 다릅니까?답:계곡의 물은 고여있는 물이요 산정의 물은 샘솟는 물이다.
문:저에게도 샘솟는 물을 한 컵 내려 주시지요.
학자의 잔에 물을 부었다. 잔이 넘치도록 부었다.
문:왜 잔에서 물이 넘칩니까.
답:학자의 관점과 논리 때문에 물이 들어갈 여백이 없어서다.
학자는 엎드려 있다가 조용히 돌아갔다.

도를 알고자 하는 사람은 많으나 도를 올바르게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은 귀하다.
백년 동안 변법개조(變法改造)와 전반서화(全般西化)에 주력하느라 도라는 도는 모두 불태워 버렸기 때문이다.
오늘에 이르러 도를 바로 알고자 한다면 도가 일어났던 당조(唐朝)의 문화를 더듬어 살펴볼 수 밖에 없다. 관왕지래(觀往知來)를 활용하여 바른 길을 찾고자 하기 때문이다.

당조의 정신을 보려면 두보와 왕유의 시를 살펴야 한다. 당 현종대 선승들의 행적도 살펴야 한다. 초기선종의 육대조사도 살펴 보아야 한다.일의일발로 평생을 살았던 조주종심선사도 살펴 보아야 한다.

시정을 휩쓸고 다니는 엉터리 도사들에게서는 바른 도를 찾을 수 없다.
요즈음 도사들은 모두 변법개조 전반서화의 서구화 물결속에서 부분의 패러다임과 체계화된 세계의 기계주의적 세계관과 논리체계를 중시하는 논리실증주의에 침윤된 도인들이다. 데카르트와 뉴턴의 관점이나 환원주의적인 논리체계 밖에 있는 도를 알 까닭이 없다.
근세 백년 동안 서구화의 물결에 밀려 도인이 모두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에 도를 전수해 줄 사람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도를 전수할 수 있는 선배가 없는데 올바른 도인이 시정에 나타난다는 것은 넌센스다.
어머니 없는 자식이 어느 곳에서 인/의/예/지/신을 배울 수 있으랴!
인의예지도 모르는 위인이 어찌 도를 안다고 할 수 있으랴!

도의 출발은 달마대사의 사행(四行)이다.
보원행, 수연행, 무소구행, 칭법행이 그것이다.
보원행(報怨行)은 서로 서로 다른 사람들끼리 서로가 서로의 성립을 위해 보탬이 되어 주고 도움을 주는 실천행이다.
부분과 전체 전체와 부분이 서로 서로 막힘이 없이 상통하도록 통약성을 공고히 하는 것이며 보편성과 특수성을 소장한 부분과 전체가 서로의 성립을 위해 막힘없는 상보적 작용을 베푸는 것이다.
수연행(隨緣行)은 인연을 중시하여 막행을 삼가하고 덕행을 쌓는 것이다. 이타행을 함으로써 서로가 서로의 받침대가 되어 주는 것이다.무소구행(無所求行)은 측은지심을 가지고 속으로 바라는 것 없이 좋은 일을 실행하는 것이다.칭법행(稱法行)은 윤리 도덕 규범(법)을 지키면서 정직하게 사람의 도리를 찾아 가는 것이 칭법행이다.

도의 근원이 되는 사행(四行)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도의 세계에 입문(入門)할 수 있다.
사행을 실천하는 사람도 귀한데 우리의 주변에 도인이 있을 수 있으랴! 있다고 하면 그것은 거짓이다!
동북아(東北亞) 삼국(중국 한국 일본) 중 노장(老莊)의 도와 빛깔이 다른 불교의 도를 처음으로 가르치기 시작한 나라는 당(唐)나라다.
527년, 초기선종(初期禪宗)의 창시자인 달마대사가 인도의 벵골만을 떠나 중국 양(梁)나라에 들어옴으로써 새로운 불교의 서막이 올랐다.

달마는 시간가 공간 속에 활발발한 부처를 지향했다. 과거의 부처가 아니라 지금 당장 살아서 작약하는 역동적인 생명의 창발성(創發性)을 희구했다.
결코 죽은 부처를 원하지 않았다. 그림 속의 부처를 원하지 않았다. 살아 있는 마음을 가진 약동하는 생명의 부처를 원했다.
사구(死句)를 불태워 버리고 활구(活句)를 선양했다.
살아서 숨을 쉬는 언어를 좋아했다. 맥이 없는 죽은 말은 가까히 하지 않았다. 글도 역시 살아서 꿈틀거리는 글을 즐겨했다.

달마의 뜻을 이어 사행(四行)을 행하는 사람은 결코 사람을 속이지 않는다.
도를 가르친 달마대사는 결코 그런 말 한 적 없다. 묵묵히 보원행,수연행,무소구행,칭법행을 실행했을 따름이다.

바른 도를 배우려는 사람은 도를 창시한 달마의 행을 잘 보고 그대로 따라야 한다. 선생의 가르침과 전혀 다른 행위를 한다면 그것은 사도(邪道)지 정도(正道)는 아니다.
바른 마음을 가지고 정도를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이 정도를 가르친 선생님의 말씀과 다른 행위를 한다면 그것을 어찌 정도라 할 수 있으랴!
정도(正道)를 따르려는 생각을 갖고 도가(道家)에 입문한 사람이 어찌 정도의 창시자인 선생님의 가르침과 전혀 다른 행위를 할 수 있으랴!도를 닦는 달마의 제자들은 불상 앞에 절을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집도 여러 체를 짓지 않았다. 삼간 모옥에 눈 비를 피할만큼만 주택을 건사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에게 삼간 모옥을 찾아오라고 엽서 한 장 띄운 적이 없다. 기도회를 열고 수륙제를 지내고 예수재를 지내지 않았다.
그런 일을 하려면 차라리 세간에 나가서 큰 회사를 차리고 큰 기업체를 만들어서 대대적으로 펼치면 된다. 왜 도가(道家)의 문패를 걸고 앉아서 그런 일들을 하는 것인가. 양두구욕(羊頭狗肉)이다.

도가의 문패를 걸었으면 도를 닦아야지 도와 관계없는 행을 행하는가.
도가의 문패를 걸고 도와 관계없는 짓거리를 하는 사람을 일러서 양두구육(羊頭狗肉)이라고 한다.
문 앞에 양의 머리를 걸어 놓고 개고기를 판다는 뜻이다.
도가에서는 네 가지 행위규범을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보원행, 수연행, 무소구행, 칭법행을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 사행을 행하지 않으면 도인이 될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사행을 실천하여 몸과 마음을 단정히 한 연후에 반야공관(般若空觀)을 가르쳤다. 반야공관을 공부한 다음에서야 능가사상(楞伽思想)을 주입시키고자 능가경(楞伽經)을 가르쳤다. 마지막으로 "이것이 무엇인가"하고 질문을 던졌다. 이것이 무엇인가? 이 질문은 문제의 제기다.
각인의 가슴속에 문제의식(問題意識)이 들어 앉아야 한다는 뜻이다. 문제의식을 갖지 못하고 삶을 살게 되면 또 양두구육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달마는 도를 알고자 하는 제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以指標月 其指所以在月
以言喩道 其言所以爭
顧言而不顧其道 非知道也
昧指而不昧其月 非識月也
所以至人常妙悟於言象之表
而獨得于形骸之外.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 것은 그 손가락의 뜻이 달에 있고
말로써 도를 표현하는 것은 그 말이 도에 있기 때문이다.
말만을 귀담아 듣고 도를 돌아보지 않으면 도를 안다고 할 수 없고
손가락만을 바라보고 달을 보지 않으면 달을 알지 못한다.
지극한 도를 아는 사람은 항상 언어 밖의 소식을 묘하게 깨닫고
형상 이전의 실재를 얻게 된다.

달마는 자기가 머지 않은 장래에 극약을 마시고 당당하게 죽으리라는 결심을 하면서 혜가에게 유교(遺敎)를 남겼다.
달마의 뜻을 따르는 역대 제자들은 이 유교를 철저하게 지켰다.
당(唐) 무종(武宗:841~846)이 폐불(廢佛)의 칼을 휘두를 때 달마의 가르침 그대로 살던 수행자들은 단 한 사람 다치지 않았다.
형상 이전의 실재를 얻고자 노력하라는 달마의 가르침을 따라 도를 얻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도록 할 까닭이 있겠는가.
달마의 가르침은 지금도 유효하다.달마는 분명이 <형상 이전의 실재>를 얻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형상 이전의 실재가 무엇인가. 그것이 우주의 미분화된 심미적 연속성이요, 그것이 자연의 만물에 내재하는 만물조화의 창조적 율동이다. 그것이 곧 도다.

오늘 날도 마찬가지다.
달마의 제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형상 이전의 실재>를 얻고자 노력해야 한다.형상 이전의 실재를 얻으려면 형상에 국집해서는 안된다.
달마의 법손(法孫)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고대광실 불당을 세우고 돌을 깎아서 불상을 새기고 생전예수재를 주선하고 수능시험 무사통과기도회를 ??고 있다.
도대체 그러한 것들이 <형상 이전의 실재>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달마가 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쳤던 일들이다.

현실은 달마의 가르침과 다르다. 달마의 얼굴을 드높이 걸어 놓고 앉아 <형상 이전의 실재>는 알고자 하지 않는다.오늘을 사는 달마의 제자들은 <형상>에 꽁꽁 묶여 있다. 형상으로부터 단 한 발자욱 물러서지 못하고 있다.눈에 보이는 형상마져도 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당(唐) 송(宋) 대의 화려한 정신문화는 반야공관(般若空觀)과 혈맥론(血脈論)에 입각하여 <형상 이전의 실재>를 추구한 결실로 본다.그래서 원(元)나라나 청(淸)나라의 정신문화를 뛰어 넘는다.

바른 도를 알기 위하여 초조(初祖)인 보리달마(菩提達磨)의 생애와 사상을 공부해야 한다.
달마는 반야공관(般若空觀)과 이입사행론(理入四行論)과 능가경(楞伽經)을 원용하여 도를 가르쳤다.

참다운 도를 가르쳐 주려고 인도의 벵골만을 떠나 3년만에 양나라에 들어와 양무재와 단판을 한후 소림사에 들어가 면벽 9년만에 천하를 제패할 듯싶었지만 달마는 결국 독약을 마시고 비명횡사했다.
도를 구하겠다고 부르짖던 사람들이 왜 진짜 도인을 만나면 죽이려고 드는지 알 수 없다. 예수도 마찬가지다. 광야에서 기도를 끝내고 많은 사람들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겠다고 온 예수를 그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죽음의 길로 몰아 넣었다.
간디도 마찬가지다. 비폭력운동을 전개한 위대한 간디를 죽음으로 이끌어들인 사람도 그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 코페르니쿠스도 마찬가지다. 부분보다는 전체를 위해서, 교부들 보다는 인류를 위해서 코페르니쿠스는 지동설을 주장했다. 그것을 알면서도 거대 안목을 가진 코페르니쿠스를 죽이고 말았다. 의인들이 잘 살아야 되는데 비명횡사자가 많다.

확연무성(廓然無聖)
달마는 양나라에 닿아 양무제(梁武帝)를 만났다.
양무제는 대뜸 달마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진리의 제일 큰 뜻입니까?"
달마는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했다.
"확연히 거룩한 진리는 없습니다."
거룩한 진리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는 말이었다.
그러자 양무제가 다시 질문했다.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누구시죠?"
달마는 여전히 의연한 태도를 보이며 답변했다.
"모르겠습니다."
양무제가 달마의 말 뜻을 모르는 것 같자 강을 건너 위(魏)나라로 갔다. 달마는 그 길로 소림산(少林山)으로 들어갔다.

면벽(面壁)
달마는 조그만 굴속에 앉았다. 벽을 향해서 앉았다. 자연적으로 벽을 보게 되었다. 벽을 보고 앉은 지 9년만에 공부를 끝내고 바깥 세상으로 나왔다. 다른 불교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불교를 가르쳤다.

달마의 시.

오본래자토(吾本來玆土)
전법구미정(傳法救迷情)
일화개오엽(一花開五葉)
결과자연성(結果自然成)

2祖 혜가선사(慧可禪師).
스승인 달마의 뜻을 받들어 대의를 그릇되이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수명을 다하지 못했다. 2조도 죽임을 당했다.

혜가의 시.
본래연유지(本來緣有地)
인지종화생(因地種花生)
본래무유종(本來無有種)
화역불회생(花亦不會生)

3祖 승찬선사(僧璨禪師).
심산에 몸을 숨기고 살았다.
3조도 역시 죽임을 당했다.

승찬의 시.
화종수인지(花種雖因地)
종지종화생(從地種花生)약무인하종(若無人下種)
화지진무생(花地盡無生)

4祖 도신선사(道信禪師).
선대의 3대 조사가 모두 비명에 목숨을 잃었기 때문에 극히 사람을 조심했다.
<신심명>이라는 책을 남겼다.

도신의 시.
화종유생성(花種有生性)
인지화생생(因地花生生)
대연여성합(大緣與性合)
당생생불생(當生生不生)

5祖 홍인선사(弘忍禪師).
홍인의 시.
유정래하종(有情來下種)인지과환생(因地果還生)
무정기무종(無情旣無種)
무성역무생(無性亦無生)

6祖 혜능선사(惠能禪師).
<육조단경>을 남겼다.

혜능의 시.
심지함제종(心地含諸種)
보우실개맹(普雨悉皆萌)
돈오화정기(頓悟花情己)
보리과자성(菩提果自成)

 

 

(__)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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