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 11. 19:48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난세를 이겨나가는 한 마음의 활용
반갑습니다.
뉴스에서는 세계경제가 어렵다고 해대지만 7%성장을 시켜주겠다던 선거공약의 메아리를 둘러대기 위함이 아닌가 싶으면서도 실물경제가 어려워지다 보니 걱정만 앞서고 있습니다.
이 모든 어려움들이 인간들의 교만함과 방종함으로 인한 자업자득이라는 생각을 해보면서도 가장 먼저 힘든 사람들은 없이 사는 서민들이라는 생각에 안타깝기만 할 뿐이지 전지전능한 재주가 없어서 애만 타더란 말입니다.
근대 한국불교의 선맥을 되찾으신 선승이신 경허스님에 대해서는 잘들 아시리라 여깁니다.
경허(鏡虛 1849〜1912)스님에 대한 기록은 생략하고 지금부터 경허스님의 행장에서 사람중생이 얼마나 무한한 능력을 지닌 만물의 영장이자 스스로가 주인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부처님 당시부터 지금 이 시대에 이르기까지 사람을 비롯해서 생명이 있는 모든 생물들은 태로 태어나고, 알로 태어나고, 습해서 태어나고, 생명이 다해 중음의 세계에 태어나는 사생 사유의 현상을 거쳐서 지금 이 자리에 우리는 존재하고 있습니다만, 몇 가지의 분별능력 외에는 본능으로 살아가는 축생계는 재껴두고 온갖 분별과 욕구와 착심이라는 오욕과 칠정으로 뭉쳐진 사람중생들은 잘난 사람이든, 못난 사람이든 정신이상자가 아닌 한에는 정상인이던 신체적 장애를 가진 사람이든 간에 모두가 공통적으로 무한한 능력들을 가지고 있고 그렇기에 모두에게 자기발전의 무한한 기회는 온갖 방향으로 열려있지만, 사람중생들은 자기 것을 써먹지도 못하는 무명에 떨어져 있기에 마음이 부처라고 하면서도, 내 안에 성령이 있다고 하면서도 스스로 자기의 주인공이 되고 있질 못하는 것입니다.
경허스님은 전라북도 전주 자동리 사람인데 속명은 송 동욱(宋東旭), 법명은 성우(惺牛)라고 하셨는데 23세 때 동학사에서 학인들을 가르치던 중, 볼일이 있어 마을에 내려갔다가 지금의 악성콜레라가 만연되어 온 마을에 시신이 널려있는 참혹한 현장을 보고선 그동안 당신이 알고 있던 경전의 그 모든 알음알이들이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을 처절하게 느끼고는 절로 돌아와 날이 밝자 마자 학인들을 해산시키고선 혼자서 생사를 깨치는 정진에 정진을 거듭하시더니 견성을 하신 후, 참선과 무애행으로 살다가 1912년 64세로 입적하셨던 분이 바로 경허스님이십니다.
제가 지금 경허스님의 말씀을 드리는 것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이 한마음이라는 체(體)는 이미 서로들 가지고 있는 것이니 있다 없다 할 것도 없는 것이고 다만 어떻게 쓸 것인가 그 사용방법인 용심(用心)에 대해서 경허스님의 행장을 통해서 일러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루는 만공(滿空)스님이 경허스님께 볼 일이 있어 스님 방으로 헛기침을 하고선 불쑥 들어갔는데 방에 누워 있는 경허선사의 배위에 시커먼 뱀 한 마리가 걸쳐 있더란 말입니다. 깜짝 놀란 만공스님이 “스님 그거 뱀 아닙니까?” 하고 놀란 채 말하자, 경허스님이 말하시길 “가만두어라 내 배위에서 실컷 놀다가게.” 했더란 말입니다. 천지동근(天地同根)이라 천지자연의 일체를 하나의 같은 뿌리로 보는 열려버린 안목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겠습니다만, 경허스님께서 하루는 천장사(天藏寺)에 그 날 49제 막 재가 있어 법문초청을 받아 오셨는데 젯 상에 온갖 과일과 떡을 푸짐하게 진설해 놓은 것을 보신 경허스님은 재가 끝나면 얻어먹으려고 절 문 앞에서 안을 들여다보며 기웃거리던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이들을 불러들여 전부 나눠 줘버렸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주지스님이 경허스님에게 노발대발해가며 “주더라도 재를 지내고 난 뒤에 주어야지 어째서 재 지낼 것을 주었냐고” 나무라자 경허스님이 말씀하시기를 “이렇게 지내는 재가 진짜 재입니다.” 했다고 합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만해 한용운 스님의 제자로 도봉산 망월사에 주석하셨던 춘성스님 역시나 망월사에 큰 재가 들어왔는데 원주스님에게 당신이 시내에 내려가는 길에 시장을 봐다 준다면서 장 볼 돈을 달라 해서 시장 가는 길에 만난 거지에게 다 털어주고 당신은 거나하게 취해서 그 다음날 올라오셔서 안절부절 못하는 원주스님에 걱정을 마라시더니 밥 한 그릇 떠 놓고 재를 지내주고는 상주들에게 내가 당신 아버님의 생전의 빚을 다 갚아주고 왔으니 재는 이보다 더 훌륭한 재가 없을 터이니 그리 알고들 내려가라고 하시자 평소에 춘성스님의 도력을 익히 알고 있던 상주들은 흔쾌히 하산을 했는데 그 이후로부터 그 자손들이 하는 일마다 그리도 잘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제가 오늘 법문의 양념으로 삼고자 하는 대목은 여기가 아니고 바로 이 대목입니다.
하루는 경허스님과 만공스님이 탁발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스승님에게 쌀자루를 매라할 수 없는 제자인 만공스님의 등에 진 쌀자루에는 쌀이 가득했는데 되돌아 갈 길은 먼데 무겁기는 하고 경허스님은 나눠서 함께 지자는 말은 전혀 없는 눈치고 그래서 만공스님이 일부러 낑낑대자 경허스님이 만공스님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무거우냐?” “예” “그러면 내가 무겁지 않은 방법을 한 가지 가르쳐 줄 것이니 너도 따라서 하거라” 하자, 만공스님은 등짐을 안 무겁게 해준다는 말에 귀가 솔깃해져서 “예, 스님 그렇게 좀 해 주십쇼.” 하고선 등짐을 나눠지자고 할 줄 알았는데 경허스님이 휘적휘적 앞서 걷더니 물동이를 이고 다가오는 젊은 아낙네의 양귀를 잡고는 입을 쪽 맞춰버렸습니다. “에그머니나.” 아낙은 비명을 지르고 물동이가 떨어져 깨져버리자 가까운 들녘에서 일하던 마을 청년들이 그걸 보고는 손에 든 곡괭이에 호미에 농기구를 든 채로 “저 땡 중놈들 잡아라!” 하고 우르르 몰려오자 일 저지른 경허스님은 이미 저 멀리 도망가고 있고 어안이 벙벙하던 만공스님은 붙잡히면 죽는다는 생각에 놀라서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치기 시작했는데 온 힘을 다해 죽기 살기로 도망가는 두 스님을 마을 사람들이 못 따라오자 만공스님이 죽기로 도망쳐 마을을 벗어난 언덕배기에 올라 서자 먼저 도망간 경허스님이 길가에 앉아계시자 만공스님은 차마 화를 낼 수도 없고 씩씩대고만 있자, 경허스님이 제자인 만공스님에게 묻기를 “아직도 무거우냐?” 하고 묻자 만공스님이 대답하기를 “그 먼 길을 어떻게 달려왔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자, “그래, 내 재주가 어떠냐? 무거움도 잊고 그 먼 길을 단숨에 달려왔으니 말이다.” 했더란 말입니다.
이게 바로 한 생각의 차이입니다.아들 딸 대학 입시가 목전에 다가오거나 사업이 풍전등화의 기로에 서듯, 발등에 불 떨어지면 죽기 살기로 힘든지도 모르고 부처님께 매달려 업장소멸기도를 무릎이 닳도록 기도에 매달리다가 발등에 불 꺼지고 속편해지면 어쩌다 부처님 문안인사나 드리는 게 중생의 속성일 것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은 아무리 해도 힘들다는 생각이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하게 되고 자기가 싫어하거나 마음이 내키지 않을 때 하는 일은 콧구멍 후비는 일도 지겹기만 한 이것이 바로 누구나 가지고 있는 한마음이 주는 오묘함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한 마음이 누구에게나 있음을 여실히 인정하고 다만 어떻게 쓸 것인가에만 연구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유이십난”의 여덟 번째로 인격적인 모욕을 당하고도 화내지 않기 어려운 진심(嗔心)을 다스리는 수행방법인 피욕부진난(被辱不瞋難)에 대해서 한번 쯤 생각을 해봐야 할 것입니다. (금강경14 이상적멸분 인욕선인의 사상과 가리왕) 아홉 번째는 힘이 있고 세력이 있는 사람이 그 세력을 써먹지 않기도 어렵다는 것이 유세불림난(有勢不臨難)입니다.
이 대목은 꼭 권력으로만 이해하시지 마시고 자신이 경제적인 부가 있거나 학력이 높다고 해서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깔보는 경계까지도 포함되는 것입니다.
열 번째로는 매사에 가정에서건 직장에서건 대중이 모여 사는 곳에서 벌어지는 서로 간에 마음 상하는 일에 있어 마음에 아무런 흔들림 없이 무심하기 어렵다는 것이 촉사무심난(觸事無心難)입니다.
촉사무심난에서 말하듯 주변의 모든 상황에서 아무런 동요가 없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주변의 모든 상황에서도 탐심이나 진심이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과 같습니다만, 경허스님께서 보여주신 대로 우리는 자기 안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한마음의 주인이 된다면 눈뜨면 현실속에서 아무리 어려운 일이거나 견디기 힘든 일이 있다 해도 한 생각 돌려 이겨나가실 거라 여깁니다.
성불하십시요.
인유이십난 중에서, 참으로 잘사는 법
세계경제는 말 할 것도 없이 국내 실물경제는 점점 어려워지고 취업은 갈수록 좁아지는데 며칠 전 한겨레 신문을 보니 이런 기사가 있었습니다.
“서울 용산구 동자동 쪽방촌의 반지하방에서 사는 유씨(56)는 이달 중순까지 월세 13만원을 내야 하는데, 남은 시간 동안 부족한 5만원을 채울 방도가 없다고 한다.
새벽 인력시장에서 노가다로 막일 감을 얻어 생활해 온 유씨는 건설경기 침체로 제대로 일을 구하지 못한데다 막일도 젊은 사람들한테 밀려 써주는 데가 없고 결국 석달 전부터 고철·고물 수집으로 생계수단을 바꿨지만, 그마저도 철강업체들이 최근 생산을 줄이면서 고철값이 폭락해 몇 달 새 놋쇠가 1㎏에 6000원에서 1500원으로, 쇠붙이는 350원에서 40원으로 뚝 떨어져 한 리어카를 채워봐야 4천 원 정도라, 하루 두 끼를 무료급식소에서 해결해도 부족한 월세를 채우기가 힘겹다”고 하는 뉴스였습니다.
이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하층민들의 실물경제의 현실이었고 옛말에 가난은 나라도 구제를 못한다 했지만, 아무리 시장원리를 앞세워도 수정자본주의는 할 수 있는 것이 자유 자본주의라고 봅니다.
헌데도 작금의 우리나라 정치는 서민들을 위한 복지는 딴전인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다 그동안 우리나라 기업의 총수들이 죽을 때 가진 것 못 갖고 가는 것을 수없이 봐왔건만 사지 멀쩡하게 키워서 많은 공부시켜주고 호의호식 시켜준 자식들에게 웬만큼 물려주었으면 죽어서 저승 가는 길에 홀가분해서 좋고 후대에 교훈을 심어주고 가는 지혜로움의 한가지로 가진 것의 사회 환원이라는 것도 한 번쯤 생각해 볼만하건만 그런 진정한 기업가다운 인물들이 없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태국에는 밤이면 부잣집 사는 담벼락 밑에는 포장마차가 줄을 지어 들어선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어려서부터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까이 해온 부자들인지라 밤이면 없이 사는 사람들이 전기를 무상으로 쓸 수 있도록 자기 집에서 전기선을 끌어다 밖으로 내놓기 때문에 밤이면 부잣집 주변에 포장마차가 들어서서 장사를 한다고 합니다.
태국에는 수없이 많은 군부쿠테타가 일어나고 빈부차이가 그렇게 극심해도 폭동이나 사회혼란이 오지 않는 이유가 삶에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서로 나눌 수 있는 마음을 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보시이자 회향인 것입니다.
한국 기독교의 어느 목사님께서 불교 믿는 나라는 다 못사는 나라들이라 했지만, 한국의 서울을 보십시오.
한 집 건너 기독교 교회고 밤이면 시뻘건 네온싸인의 십자가들이 하나님 이 땅에 내려오시다 발바닥 찔릴 정도로 하늘을 향한 가시처럼 찌르고 있고 이 땅의 위대한 불도저 대통령께서 목사님을 모셔다 청와대에서 구국을 위한 조찬예배를 보는 마당인데도 우리의 경제는 나아지지를 않고 있습니다.
잘 사는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가치관을 가졌던 기업의 총수는 1969년 기업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혈연관계가 전혀 없는 사람에게 사장직을 물려줌으로써 전문경영인에 의한 기업경영의 선구자적 역할을 했던 유한양행의 유일한회장 밖에 없다고 봅니다.
그런데 얼마 전, 대만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대만플라스틱이라는 거대기업의 회장이었던 왕융칭씨가 그런 분이었습니다.
대만의 두 번째 갑부로 경영의 神으로 불렸던 故 왕융칭(王永慶)회장이 지난달 15일 향년 91세로 숨지면서 자녀들에게 남긴 편지가 공개되었는데 그 내용인 즉, “모두가 재와부(財富)를 바라지만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없고 누구도 떠날 때 가지고 떠날 수 없다. 모으는 재산은 다를지 모르지만 세상과 작별할 때는 재산도 모두 사회로 돌아가는 것은 예외가 없다.
내가 노력해서 성취를 이뤘지만 인생의 가장 큰 보람은 사회에 공헌하는 것이니 내 재산을 사회에 기부해 사회의 진보와 복지에 기여하려고 한다. 너희들이 충분히 이해하고 동의할 것을 바란다.”고 했답니다.
왕융칭 씨는 “재와 부는 하늘이 우리에게 잘 관리해서 쓰라고 맡긴 것이라는 본질을 알고 이런 인식하에 인생을 충실히 꾸려가길 바란다. 사회에 공헌하고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 것을 주요 뜻으로 삼되 오직 개인의 사리를 도모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기를 바란다.”고 자식들에게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왕 회장의 개인재산은 약 68억 달러로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8조9700억 원이 된다고 합니다.
우리 속담에 개 같이 벌어서 정승처럼 쓴다고 했지만, 속담도 틀린 말이 참 많습니다. “아는 게 힘이다” 고 하지만 식자우환도 있잖습니까?
아는 게 병일 수도 있고 모르는 게 약일 수도 있지만 개처럼 버는 동안에 정승처럼 쓰는 법을 배우질 못하면 개처럼 벌어서 개같이 쓸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의 속성 일지도 모릅니다.
요즘 우리나라 국민들의 가치관이 너무나 혼란스러워져버렸다고 봅니다.
마치, 어미 게가 지는 모로 가면서 새끼 게에게는 똑바로 안 간다고 야단치고들 있다는 것입니다.
모로 갈 바엔 안 가는 게 옳은 줄 알면서도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여기는 풍조가 만연 되어버린 원인이 어디 있을까요? 대한민국의 대통령선거만 봐도 알 수 있잖겠습니까?
요즘 젊은이들에게 흥부와 놀부를 말하면 흥부를 더 나쁘다고 한답니다. 능력도 안 되는 것이 애만 퍼질러 놔가지고 다 고생시킨다고 말입니다.
정승처럼은 아니라도 개같이 살지는 말아야 하는 것이 사람 사는 도리이지만 오탁악세를 살아가는 우리는 정말 지혜로워야 한다고 봅니다.
전 세계가 이리도 살기 어려워지는 이유는 지구촌의 해충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들이 지구의 자원을 다 파 먹으면서도 전혀 아끼지를 않고 감사할 줄을 모르고 과소비를 미덕으로 알고 저지른 인과들이 지금의 우리경제를 이렇게 힘들게 하고 있다고 봅니다.
각설하고 사람으로서 행하기 어려운 인유이십난도 어떤 각도에서 바라보고 해석 하는가 하는 관점에서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 속담도 이리 보면 맞고 저리 보면 틀리는 것과 같단 말입니다.
부처님께선 지혜보다 더 강조하신 것이 복이었다고 말씀드렸지만, 뿌리면 거두고 심으면 나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자 우주의 질서인 것입니다.
卽心是佛이니 心卽是佛이니 해서 마음이 부처라고 하듯이 마음이 부처라면 내 몸은 곧 법당일 것입니다.
초전법륜의 사상적인 기반이 되는 극단에 치우침이 없는 중도와 공자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치우침이 없는 중용을 말씀하셨듯이 우리는 금생에 부처가 될 씨앗도 가지고 있고 선과 악의 갈림길, 어리석음과 지혜스러움의 양 극단을 함께 가지고 있는 만물의 영장들입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죽을 때 갖고도 못가는 세속의 유한한 즐거움에 탐닉해서 생사윤회의 고통을 벗어나려들지 않는 상몰(常沒)의 부류들이 있는가 하면 끝없는 생사윤회의 원인종자가 되는 세속의 탐욕과 번뇌로부터 잠깐은 벗어나고자 수행을 결심했지만 도심(道心)이 굳건하질 못해서 다시 탐욕번뇌의 세속에 빠져 들어가는 잠출환몰(暫出還沒)부류들이 있다고 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이 세상이 유지되고 있는 것은 출관인(出觀人)이라 해서 비록 세속에 살고 있다 해도 출세간법을 닦아 생사윤회를 벗어나려는 사람들도 있고 세간에 있으면서도 세간의 탐욕과 번뇌로 부터 매이지 않는 마음법을 닦아 일체의 착심을 여의고 생사윤회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져 열반적정에 들어가려는 득도인(得度人)이라는 진정으로 잘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은 인유이십난의 다섯 번째로 생치불세난(生値佛世難)이라 부처님 계신 세상에 태어나기 어렵다고 했지만, 어찌보면 우리는 너무나 다행스럽고 행복한지도 모릅니다.
부처님 당시에 못 태어났고 미래에 미륵부처님 오실 때에 맞춰서 태어날 건지는 모르지만 부처님 당시에 사람들은 서양철학이 뭔지 사서오경이 뭔지도 몰랐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 인생 60〜70을 넘기기 어렵다 해도 조금만 노력하면 부처님의 가르침만이 아니라 지하철이고 교도소고 호텔이고 성경책이 널브러져 있으니 이 얼마나 호사스러운 정신세계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까?
내 안에 부처가 될 씨앗, 부처가 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우리들이 조상 탓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잠재된 무한한 가능성을 찾아내는 지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가능성을 찾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틈나는 대로 화두를 잡고 자기 본성을 찾는 것입니다. 참선이 산중에 있는 선방의 문고리나 선방 아랫목의 용상방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주좌와 어묵동정에 앉으나 서나 순간순간 깨어서 자기의 내면을 바라보며 일어나는 한 생각을 다 털어버리고 오로지 한 생각에 매어 볼 수 있는 것, 생각이 매이지 않으면 입으로 마음으로 오로지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하는 것이 바로 염불 삼매에 들어가는 첩경인 것입니다.
업장을 짊어지고도 왕생극락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염불삼매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생치불세난에 매일 수 있겠습니까?
알아서들 하십시요.
여섯 번째가 인색인욕난(忍色人欲難)이라 색심(色心)이나 욕심을 참기 어렵다고 했는데 어찌 이 두 가지만 참기 어렵겠습니까?
전번에도 말씀드렸다 싶이 참을 인(忍)자 셋이면 못해낼 일이 없다 했는데 이것도 틀린 말입니다.
참다 참다 못 참으면 가슴앓이 심장병이 생기던지 헷까닥하게 되면 못 저지를 일이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도 중도에 대해 말씀하셨고 공자님이 말씀하셨듯이 과유불급이라 지나침을 경계해야 될 것입니다.
도리와 사회윤리와 인과법을 향해 눈 딱 감지 않는 자기를 바로 보는 한 생각을 놓치지 않는다면 이 또한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일곱 번째가 좋은 것을 보고도 탐심을 내지 않기 어렵다는 견호불구난(見好不求難)입니다. 요즘 생계형 절도범이 증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사흘 굶어 남의 집 담 안 넘는 사람이 없다던 옛 말이 있습니다만, 요즘 젊은 사람들은 흥부의 무능력을 탓하고 놀부의 자기 것 챙기는 정신을 좋게 보지만, 흥부가 위대한 것은 그리 살면서도 놀부형네 집에 가서도 견호불구난을 했다는 것입니다.
물질이 풍요로우면 행복이 바로 코 앞 인줄 알지만, 인간의 욕구는 말 타면 고삐 잡고 싶어지는지라 결국은 자신의 욕구를 들여다보고 알아차리면서 자신의 중생심을 자각하는 것이 바로 부처님 법의 수승함인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성불하십시요.
神의 山 마차푸차레 네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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