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 세월을 벗어나는 삶의 지혜

2010. 1. 10. 20:16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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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말에 “숙석청운지에 차타백발년”이라(宿昔靑雲志 蹉跎白髮年)하는 말이 있습니다.

젊은 시절 밤마다 잠자리에서 청운의 푸른 꿈도 많았는데 넘어지고 헛딛으며 살다보니 어느새 백발이 되었도다. 하는 뜻입니다.

 

젊은 시절 열심히 살아온 삶들이었건만, 작금의 경제는 기성세대들에게 차타백발년이라는 말대로 넘어지고 헛딛으며 살아온 노년이라는 스스로 자조하게 될 시련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1300년 전 시대의 원효스님께서는 발심수행장에 이런 말씀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금일부진(今日不盡)이어늘, 조악일다(造惡日多)하고 명일무진(明日無盡)이어늘, 작선일소(作善日少)하며 금년부진(今年不盡)이어늘, 무한번뇌(無限煩惱)하며 내년무진(來年無盡)이어늘, 불진보리(不盡菩提)로다.

 

시시이이(時時移移)하야, 속경일야(速經日夜)하고 일일이이(日日移移)하야, 속경월회(速經月晦)하며 월월이이(月月移移)하야, 홀래년지(忽來年至)하고 년년이이(年年移移)하야, 잠도사문(暫到死門)하나니, 파거불행(破車不行)이요 노인불수(老人不修)라, 와생해태(臥生懈怠)하고 좌기난식(坐起亂識)이니라.

 

기생(幾生)이간대 불수(不修)하고 허과일야(虛過日夜)하며 기활(幾活)이간대 일생불수(一生不修)오. 신심유종(身心有終)하리니 후신(後身)은 하호(何乎)아! 막속급호(莫速急乎)며 막속급호(莫速急乎)아!   풀어서 말씀드리자면,

 

“하루하루 악행은 많이도 짓고 내일 낼로 미루면서 선업은 쥐꼬리만큼이나 짓네. 금년도 다 가는데 번뇌는 끝이 없고 내년으로 밀어놔도 깨달음의 보리정진은 다가가질 못하네.

 

시간은 속히 흘러 낮과 밤은 빠르게도 지나고 하루하루 속히 지나 달을 넘기고 한 달 한 달 하다 보니 일 년을 흘낏 지나쳐 한 해 두 해 지나다보니 문득 죽음 문턱에 이르렀네.

깨진 수레 못 굴러가듯, 늙은 몸에 수행 닦음 있을 건가. 틈나는 대로 누워 뒹굴던 게으름에 앉아본들 혼미한 망상에 어지러울 뿐이라.

 

살면 얼마나 살 것이라고 기도정진수행하지 않고 낮과 밤을 헛되이 보내며 살아 있을 날이 얼마나 남았다고 한 생의 헛된 몸뚱어리 수행으로 닦지 않는가?

 

허망한 몸과 마음 끝이 있으리니 죽은 다음 생은 어찌 할 것인가? 생각하면 할수록 급한 것이거늘,” 하는 대목입니다.

 

금일은 영차사하고 명일은 조피사라(今日營此事 名日造彼事) “오늘은 이 일을 경영하고 내일에는 저 일을 만든다”는 말이 있듯이 대부분의 중생들은 뭔가를 열심히 하고들 살아가지만 부지불각에 사멸지(不知不覺 死滅至)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만 쓰러져 죽어버리는 일들이 비일비재한 것이 바로 현대인들의 무상한 삶과로사라는 것입니다.

 

조선시대 환성(喚醒)이라는 호를 쓰신 지안 스님이 계셨는데 지안선사의 설법이 너무나 깊고 오묘하신데다 평소 신령스러울 정도로 기적적인 일들이 많아 스님 계신 곳은 많은 중생들이 모여들었는데, 말법 세상에 도가 천 길이면 마가 만 길이라 듯이, 유생들의 시기질투로 인해 지리산에서 참선수행 중에 계신 스님을 잡아다있지도 않은 죄로 날조해서 감옥에 5년 동안을 가두더니 무죄가 판명되었음에도 끝내 죄를 만들어 제주도 조천 연북정으로 유배시켜 영조 5년 7월 1일 도착해 모진 고문을 당하시다가 7월 7석 오후에 순교하시니 3일 동안 한라산에서 굉음이 울리고 파도가 들끓었으며 영결식 하던 날 하늘에 무지개가 서고 서기가 빛을 내자 세인들은 성자의 입적이라고까지 전해오던 스님이셨는데, 한국불교의 법맥과 계맥은 모두 환성 지안선사의 맥입니다.

 

하루는 환성스님께서 서광사 큰 법당에서 설법을 하고 계시는 도중에, 웬 사람이 법당 문을 열고 들여다보는데 눈은 주먹만 한 왕눈인데다, 눈방울은 일월과 같고 눈빛은 호랑이 눈처럼 화등잔 만한데 키가 9척 장신인 굉장한 사람이 법당 안을 불쑥 들여다보며, 하는 말이 “아이고, 대단하시네, 난 또 누구라고, 자치벌레 어르신네가 대단하시네.”하고 문을 닫아버리자, 대중이 어안이 벙벙하다가 “웬 사람이 스님을 보고 자치벌레 라고 하십니까?” 하고 묻자, 환성스님이 대답하시길, “그 사람은 영산회상에 계셨던 화엄신장이십니다. 영산회상에 화엄신장인데 부처님께서 설법하시던 당시, 나는 자치벌레였는데 자치벌레로서 부처님 발 앞에 붙어서 부처님 법문을 들은 인연공덕으로 수겁생 동안 몸을 바꿔 금생에 인간으로 환생해서 출가사문이 되어 오늘 이 자리에 화엄 대법사로 설법을 하고 있는데 그때의 화엄신장이 지나치다 설법소리를 듣고 누가 이리 설법하나 싶어서 문을 열어보고 간 것입니다.” 했답니다.

 

태양계의 지구는 한 번 자전이 24시간이고 한 번 공전이 365일 이지만, 명왕성이나 천왕성은 한 번 자전하는 것이 지구의 70년에 해당되기에 그곳의 1년은 인간 70년이 된다고 하니, 아미타경에 상방세계 하방세계 등의 모든 세계가 나옵니다만, 현대과학이 지금 태양계 밖에 또 다른 은하계가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가고 있잖습니까?

 

이렇게 부처님 당시 자치벌레에 불과했던 환성스님도 다겁생을 돌고 돌며 몸을 바꿔 금생에 화엄경의 대법사가 되셨듯이 금생에 사람 몸 받은 우리도 아까 말씀드렸듯이 “살면 얼마나 살 것이라고 기도정진수행하지 않고 낮밤을 헛되이 보내버리고 살아 있을 날이 얼마나 남았다고 한 생의 헛된 몸뚱어리를 수행으로 닦지 않는가? 허망한 몸과 마음 끝이 있으리니 죽은 다음 생은 어찌 할 것인가? 생각하면 할수록 급한 것이거늘,” 하는 말처럼 금생에 이 몸 받았을 때, 늙어 노망이 나거나 치매에 걸린다 해도 입에선 염불소리가 끊이지 않을 정도로 잠재의식 정도가 아니라 몽중일여, 동중일여의 칠식 팔식까지도 염불이 훈습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고 그 정도가 돼야 삼매에 든다고 할 것입니다.

 

“삼계는 오직 마음이요, 만법은 오직 마음의 인식이므로 마음밖에는 따로 법이 없구나.” 했던 원효스님의 말씀대로 오직 하나, 기왕에 있는 내 마음을 어떻게 해야만 부처님 가운데 토막처럼, 성불이 결정된 대승보살처럼 쓸 것인가 만을 생각하고 살아도 다겁생 동안 지어온 악업을 탕감하기에도 바쁠 것인데 사람 몸 받은 이 일대사 인연에 부처님 법까지 만난 한 생을 이리 끄달리고 저리 끄달리며 허송세월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래서 열한 번째인 광학박구난(廣學博究難)처럼 자기 아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널리 배우려 들지 않거나 하찮은 지식을 가지고 다 깨달은 것처럼 자만하는 사람들은 진리를 탐구하기 어렵고 아까 말씀처럼 파거불행(破車不行)이요 노인불수(老人不修)라 와생해태(臥生懈怠)하고 좌기난식(坐起亂識)이니라 했듯이 배움에 게으름만이 아니라 기도정진에도 눈곱만큼 기도하고는 엄청 많은 기도를 한 것처럼 하는 것을 경계하는 대목이 바로 광학박구난입니다.

 

열두 번째는 금강경에서 그리도 경계하는 네 가지의 상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뿌리로 한 소아적인 사고로 갖는 아만심을 없애기는 참으로 어렵다는 것이 멸아만난(除滅我慢難)이라 하는 것으로 지혜인은 순간순간 스스로 자기가 최고라고 여기는 교만한 아만심은 없는지를 살필 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열세 번째는 불경미학난(不輕未學難)이라 서로가 못 배운 죄로 무식한 처지에 있는 사람끼리는 동병상련이요, 끼리끼리 서로가 서로를 이해해주는 마음이라도 있지만, 조금 배웠다고 스스로가 뭔가를 안다고 하는 사람 일수록 자기보다 무식하고 못 배운 사람을 업신여기지 않기 어려운 것이 중생심인지라 아닌 것처럼 하더라도 그런 마음이 감춰져 있을 때는 상대방은 느낌으로 알 수 있는 것이라 후일에는 자기에게 해로움으로 돌아오는 원인이 되기에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열네 번째의 심행평등난(心行平等難)에 있어서는 일상에 마음과 행동을 평등하게 갖기 어렵다는 것인데 매사에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서로 계합하고 부합되는 것을 심행평등이라고 하지만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일상에서 거짓 없고 꾸밈이 없을 때를 일미평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논어의 서편(緖編)으로 학문의 중요성과 공자의 사상이 깃들어 있다는 1 편인 학이(學而)에 “子曰, 교언영색이 선의인(巧言令色 鮮矣仁)이니라.”하고 나옵니다.

 

교묘하게 꾸민 말과 보기 좋게 꾸민 얼굴 빛에는 어진 마음이 드물다고 했듯이 어떤 사람에게나 차별 없이 평등한 마음을 내기 어렵고, 이해와 손익을 따져 차등을 두지 않기 어렵다 했지만, 보편적인 중생심은 가진 자에게는 속으로는 싫어하면서도 겉으로는 굽신거리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 측은지심을 내기보다는 군림하려드는 것이 바로 제멸아만난과 불경미학난이 바탕에 깔려 있기에 심행평등난은 더욱 어려운 것입니다만, 자기 안에 감춰진 보편적인 중생심을 알아차려 경계하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대승보살의 길을 가는 삶인 것이지 중생심으로 사는 것은 그야말로 인생난득에 불법난봉인 다겁생의 윤회길, 금생에 사람 몸 받아 불법을 만난 이 일대사 인연을 또다시 놓쳐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입니다.

 

성불하십시요.

한 해를 마무리하는 때에 천지자연의 모든 것들은 스스로 갈무리하는 시기에 들어가기에 상달이라고 하고 공달이라고 했건만 산업사회로 들어서면서 편리함이 주어지는 대신 반대급부로 치명적인 위험들이 우리 주변에는 널려져 있을 것입니다.

1월에 이천의 냉동창고에서 발생한 화재로 40명이 사망하더니 엊그제 5일에도 역시나 이천의 물류센터에서 발생한 화재로 7명이 사망한 사고가 있었습니다만, 이 모든 화재의 원인들이 안전에 대한 관리 부주의나 안전에 대한 무감각들로 벌어진 인재들이었습니다.

사고에 대한 관리책임도 문제인 것이고 사고발생의 작업자도 문제입니다만, 이런 사고에 대해서는 반복되고 있고 이런 사고에 대해서 책임질 사람이 없다는 것이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악습들일 것입니다.

 

멀쩡하게 일 나갔던 사람들이 사고 당일 그 시간에 주변에 함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그런 화마에 목숨을 빼앗기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는가를 우리는 진지하고 겸허하게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중생들은 일상에서 아무런 탈 없고 큰일들이 발생되지 않게 되면 무사안일에 빠지거나 나에게는 그런 일들이 해당되지 않을 것이라 방심하는 교만한 마음들이 사실은 안전 불감증에 해당된다고 할 것입니다.

 

오늘 일요법회에 이렇게 오셔서 호법신장님들이 상주옹호하시고 부처님이 계신 불도량에 인등을 켜고 지극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참배하고 예경하는 행위들이 결코 헛된 행위들이 아니다 라고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축원을 올리면서 “사백사병 영위소멸”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본디, 사백사병(四百四病)이란 사람들의 몸에 생기는 병의 전체 가지 수를 말하는 것인데 사람중생의 몸은 지수화풍의 4대 요소(4大要素)로 구성되어 있는지라 이 네 가지의 구성요소가 조화롭지 않게 되면 소위, 어느 한 구성요소가 증대하거나 약소해지게 되면 한(寒) 열(熱)로 인한 병이 생기게 되는데 지수화풍의 4대가 제각기 각각 101 가지씩의 병의 원인이 된다 해서 404病 이라고 하는 것인데 이 법회에 참석하신 모든 분들에게 사백 네 가지의 병들이 다 영원히 침범하지 말도록 간절히 축원해드리는 것입니다.

 

또, “동서사방 출입왕환 시에 상봉길경하고 불봉재해 관재구설 삼재팔난 사백사병 등, 영위소멸 귀인상봉 만사일일여의 원만형통 지 발원”하지 않습니까?

동서사방을 다니면서 만나는 일, 대하는 일마다 경사스럽고 원만한 일들을 만나오며 재해로 다가올 흉한 일들이나 횡액은 다 피해가며, 관재와 온갖 구설과 도병재와 질병재, 기근재의 소삼재를 비롯해서 화재 수재 풍재의 대삼재마저도 다 피해가고 지수화풍의 사대로 이루어진 이 몸에 사백 네 가지의 모든 병들이 다 소멸되고 귀한 인연을 만나오며 만 가지 일들이 매일매일 항상 원만하게 형통해지시라고 축원 해드리는 기도가 결코 뻘이 아니란 말입니다.

 

5일 날 발생한 이천 물류창고의 화재사고만 하드래도 대부분 20〜30대 나이의 사망자 였고 3 개월 된 딸을 두고 취직 하루 만에 변을 당한 젊은 아빠, 어머니 생일 날 저녁을 같이 하자던 아들이 변을 당해버린 한 치 앞도 모르는 우리들 인지라 편안함이 삼일만 계속되면 어리석음이라는 교만함으로 네 가지의 번뇌를 일상에서 스스로 씨를 뿌려 가꿔가고 있는 것입니다.

 

중생 몸의 아(我)가 무아(無我)임을 모른 체, 아(我)가 나라고만 여기는 아치(我癡)와 실제적인 실아(實我)가 있어 내 생각 내 견해라는 그릇된 소견에 집착하는 견(我見)과 나라는 거짓된 유한한 나를 믿는 마음이 강해서 존재하는 이 몸에 대한 믿음이 너무 강해진 만(我慢), 시시각각 변해가는 이 유한한 몸뚱어리의 무상함을 모른 체, 거짓된 이 몸뚱어리의 나에 대해 애착하고 사랑하는 아애(我愛)의 네 가지 번뇌(4煩惱)바로 중생심의 뿌리인 것입니다.

 

중생은 제 눈에 안경이라 모두가 자기 분상에서 나름대로 자기 알음알이라는 아견에 떨어져 내 것이 옳으니 그르니, 네 것은 틀리고 내 것은 맞다고 분별하지만 중생들의 그런 분별은 정견이나 부처님 경지의 지혜가 아닌 자기 알음알이, 자기 분상에서 자기 눈높이의 잣대로 길고 짧고 무겁고 가볍고를 사량하는 껍데기 분별일 뿐인 것입니다.

 

사고를 낸 사람도 그렇고 일을 지시한 사람도 설마 그런 일들이 내게도 일어나겠나 싶은 안일한 생각들이 돌이킬 수 없는 어리석음으로 이런 비극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저번 법회 때도 말씀드렸듯이 금일은 영차사하고 명일은 조피사라(今日營此事 名日造彼事) “오늘은 이 일을 경영하고 내일에는 저 일을 만든다”고 말씀드렸듯 대부분의 중생들은 뭔가를 열심히 하고들 살아가지만 부지불각에 사멸지(不知不覺 死滅至)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한 치 앞도 분간을 못한 체, 그만 일은 저질러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지극하고 간절하게 불보살님들의 명훈가피력을 간구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일상에서 인유이십난의 열다섯 번째에 해당되불설시비난(不說是非難)은 사람이 박덕해지기 쉽고 박복해지기 쉬운 첫 번째가 바로 이 불설시비난이기에 우리는 박복해지거나 실덕을 하는 일을 스스로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누군들 실수를 하거나 잘못하는 사람의 그릇됨을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한데도 자기는 불보살님의 자비로운 가피력을 구하면서도 상대를 향해 옳다 거니 그르다 거니 시시비비를 논한다는 것은 스스로에게 자비심이 없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또, 살아가는 동안에 참으로 올바른 선지식을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이 바로 열여섯 번째의 회선지식난(會善知識難)인데, 선지식을 만나겠다는 마음을 내기도 어렵지만, 그런 인연을 만나기도 어려운 것입니다.

 

내가 제일이다, 내가 누군데, 내가 잘 낫다는 생각으로 꽉 뭉쳐진 사람에게는 아까 말씀드린 네 가지의 번뇌 중에 아만심이 가득한지라 문득 선지식을 만났다 해도 자기 눈에 안경으로 자기 잣대로 사량분별을 하기 때문에 제대로 선지식을 알아보지도 못할뿐더러 도리어 업만 짓는 어리석은 교만만 늘어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만이 아니라 부처님의 진리의 가르침을 진실로 믿고, 지극하게 알려고 들고, 알고 있음을 일상에서 실천하려든다면, 우리에게는 열일곱 번째의 견성학도난(見性學道難)은 이미 난이 아닌 것입니다.

성(性)이란 참다운 진여법성(眞如法性)을 말하는 것이도(道)란 “아뇩다라샴막삼보리”인 깨달음의 보리무상도(菩提無上道)를 말하는 것이기에 자성을 깨달은 견성의 개오(開悟)가 아니고는 모두가 다 말로만 하는 구두선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봉행한 이 간절한 기도가 5일 날 참변을 당해 다시 올 수 없는 길을 가신 분들에게 작은 공덕이라도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들에게 오늘 기도를 회향하고자 합니다.

 

한 치 앞을 모르는 우리들이기에 항상 지극한 신심으로 불보살님의 명훈가피를 발원하고 내게 이루어지는 명훈가피가 다른 이들에게도 함께 미치기를 발원하는 자비심이 마음 안에 이루어지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성불하십시요.

 

귀의삼보하옵고

 

 

 

지난 해 말 12월 26일 대구 도림사에 가 계신 법전 종정스님을 찾아뵈었다.

큰스님께선 늘 그러하시던대로 차를 내놓으셨다.

10년 묵힌 산사과차와 무슨 차인가 두 종류의 차를 내놓으시고

한 일간지 신년대담 차 우루루 찾아간 객들에게 손수 차를 따라 주셨다.

 

좋은 말씀을 참, 많이 해주셨다.

 

그 가운데

 

죽음과 삶을 하나로 보아야 한다는 말씀,

내 인생에 오는 즐겁지 않거나 추한 것도 다 아름다운 것과 동일한 것이라는 말씀,

우주를 동체로 보는 자가 참눈을 가진자라는 말씀..

 

그리고..

 

자빠지지만 않고 정신 바짝차리고 일어서 걸어가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다라는 말씀은

올 한해 내가 지니고 갈 금과옥조와 같은 말씀이었다.

 

 

오늘,

가벼운 바람에도 흔들거리는 마음을 들여다 본다.

이렇게 오랜 세월을 살아왔음에도 부동은 아직 멀었다니..

 

몇 일 전 만난 사업가 한 분은,

 

한 이십 년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 즐기고 싶은 것 멀리 하고(초심이 흔들릴까봐)

꿋꿋히 일에만 몰두하니

이제야 웬만한 것엔 흔들리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그를 보면서 도인이 따로 없단 생각을 했다.

 

 

오늘 읽은 책에서 그런다.

 

살고 사랑하고 웃으라.

 

끊임없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면서 ..

그렇게 살아야겠다.

 

 

 

우연히 문수카페에 갔다가  그 날 찍은 사진이 올려져있기에 몇 마디했습니다.

_()_

 

 

 

 

 

 

 

 

 

 

 

 

☆ 몽골, 그 아름다운 땅 ☆


  
울란바타르는 몽골어로 '울란'은 붉다(Улаан), '바타르'는  
영웅(баатар )이란 뜻이라 합니다. 몽골의 산과 초원, 그 속에
사람의 흔적, 자연발생적인 도로의 모양새가 퍽 이채롭습니다.



기내에서 내려다 본 울란바타르 주택가입니다. 집이 앉은
자세가 반듯하고 질서정연합니다. 초원을 누비던 유목민들을
이렇게 한 곳에 모여 살게 한 힘은 대체 무엇일까요,
사회주의 이념이, 그들이 주장하는 평등사상이 도시 조성에도
한몫을 한 걸까요.



공항에서 만난 여행복 차림의 남녀, 맵시로 보아 마님과 하인
같기도 합니다 승무원도 보이고 좌측에 공항 외부에 위치한
화장실도 보입니다.



공항에서 라마승과 기념촬영도 했습니다.
라마승 사이에 앉은 여인은 제 사진 친구 경자씨입니다.^^



이동하는 동안 차창 너머로 보이는 염소떼와
울란바타르 주택가를 담았습니다.



광활한 초원과 그 사이로 구불구불 흐르는 물줄기
표현 그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야크떼를 몰고 가는 여자 목동이 한 폭의 그림 같습니다.



울란바타르를 끼고 흐르는 툴(Tull)강입니다, 인공구조물이
없으니 눈도 카메라 파인더도 얼마나 홀가분한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나라 같았음 무슨 매운탕이나 가든 이름을 붙인 음식점들,
또 카페나 낚시터 같은 상업시설이 구석구석 자리했을텐데요...



툴강 변에서 몽골 전통악기 마두금 연주를 들었습니다.



악기의 윗부분에 말머리 문양이 장식된 우리의 해금과
비슷한 찰현악기인데 애절하면서 서정적이고 때론 웅장하기까지 한
마두금의 음색은 몽골 고유의 정서를 담는 데 그만이라 합니다.
마두금은 듣는 이에 따라 몽골의 초원에서 부는 바람 소리,
야생마가 우는소리, 말밥굽이 지축을 울리는 소리처럼 들린다고
하네요. 그래서 '초원의 바이올린' 또는 '초원의 첼로'로 불리는데
유네스코가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했다 합니다.
지금 흐르는 배경음악이 마두금으로 연주한 것입니다.



울란바타르에서 무릉까지 몽골 국내선 항공을 이용하여
흡수골호수로 이동했습니다.



어디로 눈을 돌려도 풍성한 초원과 맑은 햇살과 상큼한 공기,
가축들에게도 낙원입니다.



말을 탄 사람들이 흡수골 호수변을 유유히 거닐고 있습니다.
지하철 문이 닫힐세라 헐레벌떡 뛰어드는 사람도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퀵서비스 아저씨도 저곳에선 볼 수 없었습니다.



하얀 말 한 떼를 몰고 달려옵니다. 멀리 보이는 산,
이크산이라고 들었는데 크다는 뜻인지 희다는 뜻인지.....
이 숭악한 기억력을 어찌 할까요...ㅜ.ㅜ



호수변에는 순록을 키우는 차탕족도 삽니다. 예전에는 산
깊숙한 곳에서 순록을 키우면서 유목생활을 했는데 요즘은
관광수입이 더 나은지라 거의 정착하여 살고 있다 합니다.



'어워'라 부르는 우리네 서낭당과 비슷한 곳입니다.



이날은 흡수골 호수 안쪽에 있는 하등웨이라는
무인도에 가는 날입니다.



섬까지 배로 약 2시간 반 정도의 거리인데
사람 손길이 전혀 닿지 않은 듯한 원초적 풍광에
가슴이 서늘해지기도 했습니다.



하등웨이 섬을 떠나올 때 배웅이라도 하는 듯
민물 갈매기떼가 계속 따라 왔습니다.



호수에 비친 구름의 반영도 때 묻지 않은
끼끗함 그 자체입니다.



일몰 시각 숙소에 들 즈음, 호수변에 내린 반영입니다.



숙소는 유목민들의 전통 주택인 게르처럼 꾸민 곳입니다.
가운데 장작을 때는 난로가 있어 장작이 탈 때는 덥고
꺼지면 추워서 잠을 설쳤습니다. 이 작은 공간에도 엄연히
상하 위계가 있고 가족의 생활 규칙이 철저하다고 합니다.



이른 새벽 호숫가에서 맞이한 일출입니다. 카메라에 담기가 미안할만큼
아름다웠습니다. 그래서 가슴에다 더 많이 담았습니다.



해가 오르자 신비스런 기운이 전신을 전율케 합니다.  



숙소인 게르 곁에 분홍바늘꽃이 햇살을 받아
행복해 합니다. 형언하기 어려운 태고의 아름다움을
지닌 곳 몽골땅, 문득 칭기즈칸을 떠올렸습니다.



언뜻 보면 척박하기 그지없는 땅, 그럼에도
유럽대륙까지 거침없이 밟았던 그의 저력은 무엇일까?



그의 말발굽 소리, 아직도 건강하게 초원을 가르고



우렁차게 대지를 흔들고 있었습니다.


호숫가에 물망초가 손을 흔듭니다. 그래, 내 어찌 너를 잊을까,
다시 오마 다시 오마를 되뇌며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렸습니다.

 

 

생명의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