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 8. 22:16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세월은 시계바늘처럼 빠르고도 정확하게 세상을 변화시키면서 부지런히 숨 쉬고 있는 나라는 중생의 생과 사를 좀먹어가고 있습니다.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이라 여겼던 그 모든 것들도 되돌아보면 한갓된 부질없는 것으로 느껴지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철들었다 하기 보다는 무상을 알아가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카페의 아침인사에 이런 글이 올라와 있었습니다.
“날씨도 춥고, 마음도.. 춥고... 오늘은.. 어제보다.. 나아지길.. 내일은..오늘보다.. 더.. 나아지길 바라면서.. 인내하고.. 마음을 다 잡아보지만.. 초초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네요... 잠시 잠깐이지만... 여기 들어오면.. 그나마.. 마음이.. 편안해지니.. 너무... 좋습니다.. 남보다... 많이.. 남보다.. 화려하게.. 이런 걸. 원하는 게.. 아닌데도.. 이 고비가.. 절..더.. 짓누르고 있습니다.. 부처님.. 자비로.. 나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도와주세요.. 다들 너무도.. 힘들어.. 먹고 살기도.. 힘들다고.. 아우성입니다.. 이들을 봐서라도.. 조금이라도.. 풀어 주세요.”하는 절규에 가까운 안타까움이 절절히 묻어나는 글이었습니다.
배고파 허기진 사람에게는 부처님의 팔만대장경보다도 따뜻한 국물있는 라면 한 그릇이 더 절실한 것이고 머리가 깨질듯이 아픈 사람에게는 아스피린 한 알이 관세음보살의 손길과도 같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저입니다만, 그 글을 읽는 순간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현실적으로 뭔가를 직접해주질 못하는 신통력 없는 저의 한계에 제 가슴이 막혀오고 저려왔었습니다.
각설하고, 불교라는 종교는 자력의 종교이자 타력의 신앙도 함께하는 곳입니다만, 항상 제가 드리는 말씀이 자기 스스로를 들여다보고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온갖 생각들을 알아차려야 한다는 말을 무수히 해드렸을 것입니다.
합장은 불교만의 전유물이 아니고 지구상의 모든 종교는 나름대로 양손이 합해지는 종교적인 액션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관과 객관이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의미도 되겠지만, 신과 내가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의미이자, 자력과 타력이 하나라는 것입니다.
초월적인 절대자를 상정해두고 거기에 구원을 바라고 매달린다 해도 그러고 있는 자기라는 주관이 있어야 하듯이 “진인사 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 자기 할 일을 다 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는 말처럼 하늘도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살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기회를 준다는 말로 해석을 해보기도 합니다만, 그보다는 더 적극적으로 관운장이 자기를 한번 살려준 조조에게 은혜를 갚고자 적벽대전에서 위나라의 조조를 살려 보내자 제갈량이 한탄을 하며 수인사대천명(修人事待天命)이라는 말을 했듯이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도리를 지키고 최선을 다한 뒤,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는” 진인사(盡人事)하는 생활자세도 필요하지만 수인사(修人事)하는 마음을 바탕에 굳건히 두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방등경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어느 날, 월정광덕천자가 문수보살에게 묻기를 “보살은 무엇으로 보살도를 닦습니까.” 하고 묻자, 문수보살이 답하기를 “천자여, 마땅히 알라. 보살은 중생을 불쌍히 여기는 대비(大悲)로써 근본을 삼으니 그 까닭은 중생은 반역과 배신을 하는 까닭이니라.”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러자 다시 묻기를 그럼 “보살의 대비는 무엇으로 근본을 삼습니까?” 하고 묻자, “직지(直志) 곧은 마음을 근본으로 삼는다.” 하고 대답합니다. 또 묻기를 “그 곧은 마음은 무엇으로 근본을 삼습니까” “일체 중생을 평등하게 보는 마음을 근본으로 삼는다.” 그렇다면 “평등심은 무엇으로 근본을 삼습니까”하고 묻자, “차별 없는 행을 근본으로 삼는다.”
그럼 “차별이 없는 행은 무엇으로 근본을 삼습니까?”묻자 “깊고 깨끗한 마음을 근본으로 삼는다.”그렇다면 “깊고 깨끗한 마음은 무엇으로 근본을 삼습니까.”
“깨달음을 얻고 지혜롭게 살고자 하는 보리심을 근본으로 삼는다.” 그렇다면 “그 보리심은 무엇으로 근본을 삼습니까.”
하고 묻자, “육바라밀을 근본으로 삼는다.” “육바라밀은 무엇으로 근본을 삼습니까.”하고 묻자, “방편지혜로 근본을 삼는다.” “방편지혜는 무엇으로 근본을 삼습니까.” 묻자, “방일하지 않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 것이다.”
“방일하지 않는 것은 무엇으로 근본을 삼습니까.”“세 가지 선행을 근본으로 삼는다.” “세 가지 선행은 무엇으로 근본을 삼습니까.” “십 선업을 근본으로 삼는다.” “십선업도는 무엇으로 근본을 삼습니까.” “육근을 섭수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다.” “육근섭수는 무엇으로 근본을 삼습니까.” “바른 생각을 근본으로 삼는다.”
“바른 생각은 무엇으로 근본을 삼습니까.” “바르게 관함으로써 근본으로 삼는다.” “바르게 관하는 것은 무엇으로 근본을 삼습니까.” “굳게 생각하고 잊지 아니함을 근본으로 삼는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무엇을 굳게 생각하고 잊지 아니함이 근본이 될까요?
방등경에는 일상에서 우리가 지혜롭게 살아가는 길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법당에 오셔서 부처님 전에 간절히 기도하고 열심히 절하고 있습니다만, 선가의 공안 중에 “조주삼전어(趙州三轉語)”라는 이런 공안이 있습니다.
“어느 날, 조주선사가 상당(上堂)하여 설법하시기를,“금불(金佛)은 용광로를 건너지 못하고 목불(木佛)은 불을 건너지 못하고 토불(土佛)은 물을 건너지 못한다.”고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벽암록(碧巖錄) 96則에 나오는 대목입니다만, 아까 제가 불교는 자력의 종교지만 타력도 함께 해야 된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방등경에서 문수보살이 월정광덕천자에게 해주는 말은 바로 자각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속내를 들여다보고 알아차리는 것은 자기만이 할 수 있는 것이지 남이 대신 할 수는 없는 것이듯, 자기가 자기 속내를 들여다보면서 자기 안의 중생심을 알아차리고 발로참회하는 자력심으로 무릎이 깨지도록 절을 하고 눈에서 피눈물이 날 만큼의 진실참회를 했을 때 겨우 구품참회 중에서 하품하의 충실한 참회가 이루어지고 타력 또한 함께 하는 것이니, 이것이 진인사참회(盡人事懺悔)요, 수인사참회(修人事懺悔)가 되는 것입니다.
카페에 올려진 안타까운 글에는 위안도 필요하고 현실의 어려움이 당장 발등의 불이긴 하지만 고집멸도라는 사성제의 이치로 비춰 본다면 이렇게 밖에 살아가지 못하는 나의 업장을 바로보고 소멸하고자 하는 지혜가 전제 되지 않고는 왼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고 나면 잠시 후 오른 발등에 또 불이 붙을 것이니 평생을 양 발에 불을 끄노라 무엇을 해낼 수 있겠습니까?
그러다 세월 다 가버리고 이 몸 늙어지면 이 한생은 또 다시 끝없는 윤회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니 이제 불법에 들어와 부처님의 수승한 가르침에 계합하고자 한다면 자기의 뒤를 돌아다보며 승속을 떠나 수많은 생을 수없이 많은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오는 동안 알게 모르게 맺어왔던 인연업 속에 자신의 신구의 삼업을 청정히 하고자 하는 발심이 전제가 되어야 할 것이고 그 발심은 흔들리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참회수행이라는 도구로 스스로가 복을 담을 그릇을, 복이 담길 그릇을 만든 다음에 기다릴 줄을 알아야 하고 이루어짐이 더딜 때는 자기의 발로참회가 부족함을 탓해야지 스님을 원망하고 부처님을 등지는 중생심으로는 다겁생에 지어온 업력의 장애를 절대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방등경에 또 이런 가르침도 있습니다.
월정광덕천지보살이 문수보살에게 묻기를 “보살은 몇 가지 마음으로 능히 인을 성취하며 과를 섭취합니까?” 하고 묻자, “모든 보살은 네 가지 마음으로써 능히 인(因)과 과(果)를 섭취한다.
네 가지 마음이란 초발심(初發心:처음으로 내는 마음)과 행도심(行道心:공부하는 마음)과 불퇴전심(不退轉心:물러서지 않는 마음)과 일생보처심(一生補處心: 한 생의 수도로 인해 후생에는 반드시 성불한다는, 하겠다는 마음)이라는 네 가지 마음을 씨앗 삼아 과를 얻는 것이니, 初發心은 곡식을 밭에 심는 것과 같고, 行道心은 곡식이 자라는 것과 같으며, 不退轉心은 꽃과 열매가 맺는 것과 같고, 一生補處心은 꽃과 열매가 쓰이게 되는 것과 같다.
初發心은 수레를 만드는 목수가 재목을 모으는 것과 같고, 行道心은 재목을 다듬는 것과 같으며, 不退轉心은 만든 재목으로 수레를 맞추는 것과 같고, 一生補處心은 수레가 되어 굴러가는 것과 같다.
初發心은 달이 처음 떠오르는 것과 같고, 行道心은 초닷새 달과 같으며, 不退轉心은 초열흘 달과 같고, 一生補處心은 보름달과 같다.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와 같은 것입니다.
스스로가 자각을 통하여 자기 중생심을 들여다보면서 이 마음이 다겁생을 돌고 돌며 지어왔을 온갖 업과 연을 떠올리며 간절히 참회기도를 위한 불퇴전의 자력심과 간절한 발원의 타력이 충실해 졌을 때, 기도의 가피는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만져지는 오욕락을 뿌리로 온갖 것에 휘둘리는 자기의 중생심은 어둡고 무겁기만 한데도 자기의 근본 중생심으로 인한 어두움은 생각도 하지 못하고, 하려들지도 않으면서 뭔가 이루어지기만을 바란다고 하는 것은 마치, 등에 무거운 짐을 지고 가면서도 착심 때문에 내려놓을 줄 모르는 어리석음은 사람과 똑 같을 것입니다.
육조단경에 부처의 행을 수행한다는 행불어록 열 가지 중에 첫 번째가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것입니다.
이제 지금 내가 하루를 열고 서 있는 일상에서 나는 과연 어떤 선업을 만들어 내고 있는 가를 생각해보면서 하루의 주인공이 되는 삶을 만들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선 나를 바로보고 내 안의 중생심을 자각하면서 잘못 지어왔던 마음 밭에 농사를 다시 가꾸기 위해 발로참회(發露懺悔)하는 지극함과 간절함의 기도로써 승화 될 때, 우리의 미래는 달라지는 것입니다.
참회의 참(懺)은 지나간 허물을 뉘우치는 것이며 회(悔)란 또다시 반복되는 어리석음을 영원히 끊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을 말합니다.
중생들은 지난 것은 뉘우치고 회개할 줄은 알면서도 앞으로 있을 허물을 경계할 줄을 모르기에 끝없이 제 자리 본전장사만 하게 되는 것입니다.
발로참회(發露懺悔)는 여기서 더 나아가 부처님 전에 자기의 허물을 숨김없이 들춰내고 드러내어 뉘우치는 적극적인 진참회를 말하는 것이니, 지금 이 법문을 들으시는 순간부터 스스로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드리겠습니다.
성불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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