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산 일출봉 동암사 49 일 영가 법문

2010. 1. 12. 21:1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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空手來 空手去 是人生(공수래공수거 시인생)

"生從何處來  死向何處去  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浮雲自體本無實 生死去來亦如然 獨有一物常獨露 湛然不隨於生死"니라, 南無 阿彌陀佛!

생종하처래 사향하처거 생야일편부운기 사야일편부멸 부운자체본무실 생사거래역여연 독유일물상독로 담연불수어생사" 나무아미타불!


오늘 이 자리에 주인공이 되어 계신 영가님과 더불어 여기 참석한 우리 모두의 모습입니다.


"태어남은 어디로 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태어남은 한조각 뜬구름이 일어남과 같고 죽는다는 것 또한 일어났던 뜬구름이 사라지는 것과 같은 것니, 뜬구름은 실다운 모습이 없으니 나고 죽고, 오고 감도 또한 그와 같을지라,  다만, 홀로이 맑은 이슬 같은 한 물건이 있어 나고 죽는 허망한 이치를 벗어나 있노라." 하는 말입니다.


이 시는 부운(浮雲)이라 해서 삼국유사 원효편에 실려 있는데 空手來 空手去 是人生(공수래공수거 시인생)이라 해서 인생이 뜬구름과 같다는 말이 이때 부터 생겨난 것입니다.


회자정리면 이자재회라 모였다 흩어짐이 있다면 흩어짐은 인연 따라 다시 모이는 것이 정해진 순리인지라, 오늘 이 자리에 모셔진      영가께서 가셨다고들 하지만      영가께서는 49일 간의 중음의 세계를 벗어나 새로운 세계에 인연 따라 새롭게 탄생을 하실 것이니 우리는 새로운 탄생을 축하해주고 기뻐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이제       영가께서 49일 지나는 오늘 육도윤회의 화택 문에 들어가실 것이나, 홀연히 윤회 문에 들고남이 자재롭게 윤회의 문턱을 쉽게 넘어가실 수 있도록 마지막 순간까지 지니고 계셨을 무거움은 가벼움으로, 어두움은 밝음으로, 부정은 긍정으로 모든 업식들이 바꿔질 수 있도록 지극하고 간절하게 오늘을 보내야 할 것입니다.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 천하 명시인 김삿갓으로 세상을 관조하며 살다 가신 김병연시인의 한문 파자놀이를 전해드리며 영가님께서 오늘 법문의 인연 따라 새로운 세계로 가시는 길을 도와드리고자 합니다.

 

김삿갓이 천하를 유랑을 하던 중, 경상북도 안동의 어느 대감 집 앞에서 점심 한 끼 해결하고자 든 시각이 마침 점심시간인데 양반 점심에 곁다리를 낄 요량으로 서로 수인사를 하고 점심상이 나오기를 이제나 저제나 하고 앉아있는데 객을 마주하고 있는 대감에게 하인이 오더니 한다는 소리가 "인량복일(人良卜一)"하오리까? 한단 말입니다.

그러자 양반이 답하는 말이 "월월산산(月月山山)"거든 하자, 천하에 김삿갓이 들어보니 괘씸한 생각이 들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김삿갓이 양반을 향해서 한마디 하기를 "정구죽천(丁口竹天)에 녹자화중(鹿者禾重)"이로다 하니, 양반 얼굴색이 뻘겋게 변하더니 하인에게 어서 겸상으로 내오라고 했답니다.


人良卜一이라는 말은사람人字 밑에 어질良字를 넣으면 밥 먹을 食字가 되고 占卜字 밑에 한一 字를 갖다 붙이면 윗상上字가 되니"진지 올릴까요?"고 물었던 것입니다.


비록 양반이라 하나, 허름한 차림의 김삿갓과 겸상을 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 月月山山이라 달月 字 두개가 합해 벗붕 朋字가 되고 묏山 字 두 개는 날出字라 객이 떠나거든 점심을 내 오거라 하는 파자암호였던 것입니다.

 

천하에 김삿갓이 주인과 하인의 수작을 보다가 퉁명스럽게 내 뱉어 버린 丁口竹天이라 말은 천간丁字와 입口字를 합하면 옳을可자가 되고 대竹字 밑에 하늘天字가 합해지면 웃을 笑字가 되니, 노는 수작이 가소롭다고 쏴 부치고, 거기다 덧붙인 鹿者禾重은 사슴뿔 록犭변에 놈者字가 합해 돼지猪자가 되고 벼禾字와 무거울 重字가 합해 씨種字가 되니 "돼지 같은 놈들아 가소롭구나." 하고 비웃고 있었으니 밥 한 끼 아끼려다 지체 높은 대감이 돼지종자로 놀림을 당하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자린고비로 살면서 객에게 밥 한 끼도 베풀지 못하고 살던 양반이 죽는 순간에 숨이 턱밑에 차오르자, 죽으면서 아들에게는 기이~기이~ 하다가 죽어버립니다.


살아생전에 아들에게도 감춰두고 혼자만 꺼내보며 즐기던 온갖 재물이 기둥 밑에 묻혀 있으니 기둥 아래를 파보라는 말이었는데 미처 다 말 못하고 죽어버리자, 숨겨놓은 재물을 지키겠다고 자기 집에 키우던 누렁이 개새끼로 태어납니다.

이게 바로 지향성인 것입니다. (지향성 풀이)


양반 체면이니 아들이 스님을 모셔다가 재 지낼 일을 상의하는데 엊그제 태어난 강아지 한 마리가  아들의 바지춤을 물고 기둥으로 끌고 가서 자꾸 땅을 후벼대자 스님이 아들에게 그 기둥 밑을 한번 파 보시오했더니 대감이 그동안 혼자 감춰두었던 전 재산이 들어 있더란 것입니다.


49재가 끝나는 날, 스님은 강아지를 앉혀 놓고 무상법문을 들려주기를 "그대가 살아생전에 아상, 인상, 중생상과 수자상에 빠져 잘 난 체, 아는 체, 최고인 체, 하는 세 가지 쳇병에 걸려 살다가 죽으니 갈길 몰라 축생계로 났도다.

나고 죽고 오고 가는 도리를 모르고 탐심 진심 어리석음의 삼독을 家財寶로 삼아 살았기에 이 같은 결과가 난 것임을 바로 알아듣고 축생의 몸을 벗으면 무상불도를 깨달아 해탈의 길로 가도록 하거라"고 일러주고 재를 끝내니 강아지가 홀연 밖으로 나가더니 잠자듯이 그 몸을 벗더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한평생에서 병이 들어 힘들고, 괴롭고, 마음 졸이고 지옥 같았던 날들을 다 제하고 철없던 시절, 늙어 가물거리는 세월을 다 빼버리면 불과 백년도 채, 못사는 인생에 사는 것처럼 살았다고 할 만한 날들이 과연 며칠이나 될까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생노병사의 네 가지 개인적인 큰 고통에 애별리고라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아픔과, 원하는 것은 많건만 이루어지는 것은 손바닥만 한 소구부득고의 갈증에 괴롭고,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과 얼굴도 대하기 싫은데도 마주봐야하는 번뇌의 원증회고와 때가 되면 육근이 육식을 만들어 이 몸에서 일어나는 온갖 욕구들로부터 일어나는 오음성고가 있어 이러한 여덟 가지 고통들이 팔만사천가지의 번뇌를 만들어 이날 이때까지 휘둘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바로 업보중생인 우리의 현주소일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업보중생의 삶을 苦海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거기다 잠깐 헤어지는 것도 아니고 사랑하는 사람과 삶과 죽음의 서로 다른 길에서 영원히 헤어져야 하는 슬픔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내게 일어나는 이 슬픔의 순간이 내겐 가장 큰 일이지만, 이 순간에도 비일비재하게 서로가 이별하는 일들이 세상에서는 한시도 쉬지 않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족이란 이름으로, 핏줄로 서로 바라보며 듣고, 말하고, 슬픔과 기쁨을 함께 나누던 사람이, 아무런 말도 나눌 수 없고, 그 모습 또한 찾아볼 길 없고, 그 목소리도 들을 길이 없으니 참으로 인생은 허망하고 무상한 것입니다.


아까 제가 인생이 뜬구름 같다는 浮雲이라는 시를 들려드렸지만, 정말 한 세상 살다가는 사람의 삶이 마치 뜬 구름처럼 허망한 것이기만 할까요?

인생이 과연 뜬구름처럼 허망하기만 하다면 우리는 오늘날 살아가는 의미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은 우리에게는 부처님께 의지하여 수행이라는 이름으로 마음을 닦아가다 보면 윤회화택 문을 벗어나는 부처님의 가피를 입을 수 있는 영원한 영생의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중생의 눈에는 인생살이가 무상하고, 허무하고, 나고 죽고 허망하게 보일지라도 우리 안에는 태어남도 없고, 더럽지도 않고,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는 영원히 죽지 않는 완전한 신령스러운 한 물건이 있는 것입니다.반야심경에도 나오지 않습니까? 바로 그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獨有一物常獨露 湛然不隨於生死"라 하는 것입니다.

"다만, 홀로이 맑은 이슬 같은 한 물건이 있어 나고 죽는 허망한 이치를 벗어나 있노라." 하는 뜻이니,이 한 물건이 살아생전에는 생각이라 부르고 마음이라 불렀으되 이제는 영가라 부르고 영혼이라 부르고 있으니 이 한 물건이 계절 따라 옷을 바꿔 입듯이, 인연 따라 출생이란 옷을 입고 본유로 나들이를 나왔다가 인연이 다하면 사망이라는 옷으로 갈아입고 중유의 세계에 들어 또 다른 인연세계로 찾아가는 것이니 이것을 범부중생의 눈에는 슬픔과 기쁨이 혼재하는 나고 죽는, 생과 사로 보일 뿐인 것입니다.


부처님의 지혜로운 가르침대로 진실된 근본에서 보면 인생이란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는 것입니다.

이런 진실된 도리를 바로 알게 되면 삶과 죽음은 나들이 갈 때 갈아입는 외출복과 같은 것이기에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슬퍼하지도 않고 삶에 집착하지도 않게 되어 그야말로 생사(삶과 죽음)에 걸림이 없는 참으로 무애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제행이무상이니, 시생멸법이요, 생멸이멸이 하면 적멸위락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제법이종본래이니 상자적멸상이요, 불자행도이 하면 내세득작불이로다,"   나무아미타불,!


위에 제행무상의 게송은열반경에 나오는 사구게시간적인 상황을 낙처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영원한 것이 없듯이 나고 죽는 것도 이러하니 죽음에 대한 공포나 두려움을 가질 필요 없이 인연 따라 또 다른 세상이 새롭게 열려짐을 깨달아 나고 죽음에 매이지 않는다면 한 티끌의 희노애락우비고뇌 없이 고요하고 편안한 열반의 세계를 이룰 수 있다는 뜻입니다. 


다음 게송 또한, 법화경 방편품에 나오는 게송으로 공간적인 상황을 낙처로 삼아 “심불급중생이 시삼무차별이라,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차별 없이 본래 그대로 부처인 것이니 우리의 육신은 인연 따라 태어나고 인연이 다하면 한 줌 재가 되고 말지만, "오직 한 물건이라 부르는 보고, 듣고, 말하며, 이날 이 때까지 육근에 휘둘리고 육식에 매여 희노애락우비고뇌를 휘감고 중생심으로 살아오게 했던 한 생각, 이 마음이 이제는 영가라 부르고 영혼이라 부르고 있으니 영가께서는 이러한 도리를 깨달으시어 천년 동안 어두움이 지배했던 암흑의 굴속일지라도 촛불 하나 켜는 순간에 천년의 어둠은 물러가고 밝음이 찾아들 듯이 영가께서는 인연 따라 이 자리에 오게 된 무명법사가 일러드리는 무상의 도리를 깨달으시어 이생에 대한 일체의 집착과 애착과 괴로움과 원망과 분노와 미움일랑 다 놓아버리시고 부디 윤회화택 문조차도 뛰어넘어 영원히 윤회가 없어 수명이 한량이 없고 찬란한 광명이 끝이 없는 무량수, 무량광의 아미타부처님 계시는 극락세계 연화좌 위에 오르시기를 간절히 축원드리옵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 관음세지 양대 보살 마하살,  성불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