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에 따른 보를 받는 시기

2010. 1. 14. 21:24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728x90
x-text/html; charset=iso-8859-1" hidden=true width=280 src=http://home.postech.ac.kr/~smlee07/music/Kaleidoscope.wma volume="0" loop="-1">

x-text/html; charset=EUC-KR" width=500 src=http://js875.hosting.paran.com/동뜸빛.swf autostart="true" loop="-1">

그동안 계속해 업(業)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만, 업에는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업에 따른 결과라는 보(報)가 있습니다.

 

살아가는 현실에서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 이런 모든 현상들을 인연과보(果報)라 한다면 이 과보의 원인이 되는 업에 대해 알려들면 보통사람들에게는 너무 난해한 것입니다.

 

그래서 쉽고 간략하게 법문시간에 말씀드려 삶 속의 행과 불행, 성공과 좌절의 원인을 알고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악행을 저지르던 사람도 갑자기 선행을 할 수도 있고 평생을 선하게 살던 천사표도 상황에 따라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서양종교에서는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 한다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불행과 악행의 모든 책임은 신에게 있는 것이지 피조물인 우리에게 있는 게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도 좋은 일, 행복한 일, 잘된 일들은 다 신에게 감사하고 나쁜 일, 힘든 일, 괴로운 일, 불행한 일들의 책임은 피조물인 사람이 책임을 져야한다면 정말 잘못된 논리일 것입니다.

 

때문에 모든 일들을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준다는 이러한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삶 속에서 자신에게 벌어지는 현재와 미래에 닥쳐올 모든 행, 불행과 성공과 실패는 사실은 몇 생을 두고 내가 씨 뿌려온 업과 인연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겸손하게 받아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한 형제끼리도 살아가는바 삶의 형태가 다르고, 좋아하는 기호가 다르고 성격이 다른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신의 피조물이라면 마치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제품처럼 모두가 같은 상표가 찍히고 성능도 다 똑같아야 하건만, 중생은 천층만층으로 다르고 세상천지가 다 차별의 세계인 이것은 신의 실수가 아니라 신께서 인간의 교만함과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려고 이렇게 만들었다는 식의 말장난 같은 허무맹랑한 말에 넘어가는 유식하지만 내면이 나약하고 허망한 현대인들의 자화상을 바로 무명 중생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작자수, 내가 뿌리고 지어온 업의 결과임을 똑바로 알아 다음 생의 자기, 그 다음생의 또 다른 생의 주인공이 될 자신의 업을 끝없이 정화시켜 나갈 때, 결국에는 법화경에서 말하는 중생이 끝없이 윤회를 하더라도 마음이라는 불성을 가지고 있기에 즉심시불이요, 심외무법이라 종국에는 성불하게 된다고 했던 말과 같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업이라는 말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업이라는 말은 중국말입니다.

 

전에 말씀드렸듯이 부처님 당시에 인도말로 카르마, 팔리어로는 캄마(厘磨)라고 했던 이 말들은 행위, 움직임, 동작이라는 단순한 의미에 불과하다고 말씀드렸을 것입니다.

 

카르마 끝에 안타를 붙이면 “카르만타”라고 해서 직업이란 말이 됩니다.

좋아하는 것만을 즐겨 찾고 거기에 욕구를 갖게 되면 버릇이 생겨나게 되고 버릇이 굳어지면 습관이 되고 습관이 지나치면 업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담에 세살버릇 여든 간다는 말이 바로 업이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중국말로 업이라는 말을 부처님께서 과연 알았을까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업이라는 말은 중국 사람들의 사유 속에서 만들어진 말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던 카르마란 개념과는 많이 다른 것입니다.

 

무의식적인 행위나 육근이 육경과 인연하여 작용을 하더라도 의식적이고 의도적이며 의지적인 식이 작용하지 않으면 카르마는 만들어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법회에 참석하신 것이나 on-line 상에서 법문을 보고 듣도록 하는 뿌리는 바로 생각을 일으켰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업을 짓게 만드는 근원인 것입니다.

 

업이라고 하는 것은 의도적이고 의식적인 행동이 전제됐을 때 업이 되는 것이지 무의식적이거나 의도적이 아닌 것은 업이 되질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운전 중에 개나 고양이를 치었을 때 그것이 업이 될 것인가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것은 업이 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살생은 살생이기에 인과와 인연에는 걸리더라도 업은 되질 않는 것입니다.

생각과 말과 행위를 스스로가 의식하면서 했을 때 선업이다, 악업이다. 라고 하는 것이지 의도적이고 의식적이 아닌 것은 업에 해당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기의 이기적인 욕구를 충족하고자 의도적이고 의식적인 식의 작용을 일으켰을 때 악업이 되는 것이고 자신의 삶에 대한 보다 질 높은 정신적인 세계를 추구하고자 의도적이고 의식적인 선한 의업을 일으켜 닦아서 행하는 수행을 몸에 익혀 인생을 살아간다면 선업이라 하는 것입니다. 업이란 이렇게 별게 아니란 말입니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위의 결과로 나타나는 보를 받는 시기에 대해서는 삼시업이나 사시업보(四時業報)라 해서 금생에 지어 금생에 받는 순현업으로 인한 순현보가 있고, 금생에 지어 다음 생에 받는 순생업으로 인한 순생보도 있으며 다다음생에 받게 되는 순후업으로 인한 순후업보가 있는 것이며 언제 받을지 모르는 부정보업도 있는 것입니다.

 

인연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이라는 씨앗이 연이라는 조건을 만나 업이라는 뿌리를 내려 줄기와 입과 꽃과 열매가 맺히면 꽃을 감상하거나 열매를 따먹는 것이 바로 인연과보이기에 지금 나의 현 주소가 바로 여기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이자 우주의 질서인 것입니다. 바로 진리인 것입니다.

 

하지만, 인연과보가 들어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이 바로 우리들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뜻대로 안 되는 세상사, 선하게 살아도 불행하게 인생을 마감하는 인생도 있고 불량스럽고 개떡같이 살아도 풍족을 누리고 살아가고, 전과가 14범이라고들 하는데도 대통령도 해먹고 있으니 이런 세상을 업인과보로는 설명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그래서 제가 아까 삼세인과를 말했던 것이니 금생에는 그리 보일지 몰라도 과거생의 어느 한생에서 그만한 복력을 지었기에 시와 때와 장소가 맞아 떨어져 풍족하게 살게도 되고 대통령도 해먹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금생에 교만과 제 잘난 맛에 떨어져 박복하게 살다보면 다음 생에 있어서는 안 봐도 비디오가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돌고 도는 윤회 가운데서 사시업의 울타리 안에서 돌고 돌며 인연과보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선가에 전백장 후백장의 이야기처럼, 중생은 인과를 저지르고도 불낙이라고 하고, 아라한은 불매라고 하듯이 “보살은 원인이 되는 씨앗을 두려워하고 중생은 뿌린 인과 연은 생각도 않고 결과만을 두려워한다고 합니다.

 

보살은 나쁜 원인이 되는 인과 연을 경계하고 끊어 버리기 때문에, 죄악과 업장이 사라지고 공덕이 쌓여 부처가 되지만 중생은 생활 속에 나쁜 인과 연을 쉼 없이 지으면서도 악연과 악한 보는 안 받고자 하지만 받을 업의 때와 장소가 정해지지 않은 부정보업인 후보는 결과가 나타나는 시기는 일정하지 않지만, 언젠가는 자기가 받게 되는 것이기에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주소가 바로 이 네 가지의 보를 받는 시기에 다 해당될 것입니다.

 

전에 제가 말씀드렸던 인광대사께서는 부모와 자식은 네 가지 인연이 있다고 했습니다.

 

지금 이 법문을 들으며 나는 내 부모에게 어떤 자식이었는 가를 한번 생각해보시면서, 나와 내 자식 간의 관계를 되 집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이 도리는 혼자 사는 스님들이나 신부님들에게는 해당사항이 안되지만 결혼해서 자식 낳고 사는 목사님들은 이 도리에서 벗어나질 못하는것입니다.

 

첫째는 은혜를 갚는(報恩)인연이고, 둘째는 원한을 갚는(報怨)인연이며, 셋째는 빚을 갚는(償債)인연이고, 넷째는 빚을 받으러 온 인연이라고 합니다.

 

은혜 갚는 인연이란, 부모가 자식에게 전생에 큰 은혜가 있어 그 은혜를 갚기 위해 금생에 자식으로 태어나, 생전에 부모를 극진히 봉양하고 사후에도 조상이 흠향하도록 제사를 정성껏 모셔드리고 이웃에게 덕을 베풀어 사람들로 하여금 흠모하면서 누구네 집 자식이라는 칭송을 들으며 그 부모까지 존경받도록 하는 인연을 말하는 것이며,

 

두 번째 원한 갚는 인연이란, 부모가 자식이 사람의 몸이었던 축생의 몸을 지녔던 간에 전생에 원한을 지었기에 그걸 앙갚음하기 위해 자식으로 태어나 어려서는 부모 마음을 거스르고, 장성해서는 부모에게 천하에 불효를 저지르며 죽은 뒤에는 제사봉공은 커녕, 살아생전에 세 때 끼니조차도 전혀 없어 황천에서도 모욕을 당하고 제 잘났다고 요직에 앉은 신분으로 부정부패와 불궤(不軌)의 죄악을 저질러 가문과 친족을 파멸시키고 조상의 무덤까지 파헤치며,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그 부모까지 침 뱉게 만드는, 왕망(王莽)이나 조조(曹操), 동탁(董卓), 진괴(秦檜)등과 같은 간신역적이 대표적인 예라 했지만, 우리나라에도 근세조선 당시부터 을사오적의 이완용부터 박정희 정권만 아니라 지금 이명박 정권까지도 그런 불효 불충한 인간들이 수없이 많다 할 것입니다.

 

세 번째 빚을 갚는 인연이란, 자식이 전생에 부모에게 진 재물 빚을 갚으려고 태어난 경우로 진 빚이 많으면 평생토록 뼈 빠지게 일해 받들어 모시지만. 빚이 적으면 잘 봉양하다가 더러 중간에 그만두거나 자식이 부귀공명을 조금 얻는가 싶더니 그만 요절한다든지, 사업이 잘되어 재산 좀 모아 부모에게 잘하다가 죽어버리거나, 장가간 후로는 마누라에 빠져 부모 보기를 거들떠도 않는 짓들이 며느리가 잘못 들어와서가 아니라 바로 이런 빚 갚는 인연이었기에 그리된다고 할 것입니다.

 

네 번째 빚 받으러 온 인연이란, 부모가 자식에게 전생에 빚을 진 까닭에 그 빚을 받으려고 태어난 경우로, 열 달 동안을 어미의 뱃속에서 편안히 받아먹다가 세상에 태어나 빚이 적으면 생활비나 학비 뒷바라지로 수억씩 들여 공부 가르쳐 빚을 갚고 결혼시킨다고 수 천 만원이나 수억 원의 혼수 돈 들여 결혼시켜 사회활동 할 만하니 그만 수명이 다해 교통사고나 궂은 병으로 죽어버리기도 하고, 사업한다고 돈 대달라더니 집안 재산을 다 탕진해버리는 경우를 말합니다.

 

이렇게 자식은 대부분 과거생의 빚쟁이들일 경우가 비일비재한 것입니다.

법문을 듣고 계시는 여러분들도 각자의 부모님들에게 그런 존재였을 것입니다.

 

이럴 때, 중생들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치면 하늘과 조상을 원망하거나 환경과 사람을 탓하기만 하지, 전생에 진 빚을 갚는다는 생각으로 죄업을 참회하는 마음을 내고 웬수 불리고 속상하게 하는 자식을 향해서 전생에 진 빚을 갚는다는 마음으로 해원결을 하기 위해 차라리 웬수 불리는 자식을 향해 축원을 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리되면 잘난 남의 집 자식들과 비교해가며 신세 한탄해가며 지옥 같던 마음이 편안해질 것입니다.

하지만, 말이 쉽지 그게 참 잘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불자들입니다.

 

부처님의 지혜를 받아 지니고 내 마음이 바로 부처를 이룰 수 있다는 가능성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불제자들입니다.

 

이렇게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 수행인 것이지 산에 들어가 사는 것이 수행이 아니란 말입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것입니다.

금생에 불량하면서도 복을 누리는 사람들은 전생에 심어 놓은 선업의 과보가 많기 때문이지만 금생에 어리석은 교만으로 악업을 가까이 한다면 과거 생에 지었던 선업의 인과가 거덜 날 때는 노후 인생이나 다음 생이나 다다음 생에 받거나 만나게 될 업보는 불을 보듯 뻔 한 것입니다.

 

금생에 착하게 살면서도 악한 일을 당하는 것은 전생에 지은 업으로 인한 장애와 인과가 두텁기 때문인 것이지만 그나마 착하게 살지 않는다면 받는바 과보와 업장은 더욱 크게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치를 잘 살펴 살아가는 자신의 삶을 지혜롭게 살펴 삶 속에서 다겁생의 인과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소멸시키고자 참회하고 선업을 지어가는 마음농사의 선근불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8월 7일이 입추이자 칠석입니다.

현재 십악 중에 네 번째인 기어참회를 위한 백일기도 중이고 백중기도 중이나 우리절은 매주 일요법회로 정작 재일당일 기도법회는 거르는 편입니다만, 이번 칠석기도에 많은 동참을 바랍니다.

 

세상이 어려울수록 지성이면 감천 하듯이 우리는 불보살님의 가피력을 의지하고 기도를 통해 자기 정화가 필요한 것입니다.

 

성불하십시오.

 

중생들의 업

 

요즘 살아가는 세상을 보게 되면 총체적으로 미쳐 돌아가고 있다는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재임기간 중에 자료를 빼돌렸다는 말을 서슴없이 해가며 광우병 소고기나 환율정책의 실패와 같은 정책의 실수들로부터 어떻게든 국민들의 관심을 돌려보고자 하는 현 정권의 개그에 가까운 퍼포먼스에는 답이 없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거기다 장로가 대통령됐다고 아래 것들은 교묘하게 불교에 대한 탄압에 가까운 미망에 찬 불이익과 차별들을 하고 있습니다.

 

이조 5백년 동안 천민에 가까운 차별과 도성 출입금지까지 당해가면서도 국난 때마다 승병을 일으켜 가며 나라를 위해 싸워온 불교가 겨우 임기 5년의 전과 14범에 제멋대로인 장로 대통령 시절이랍시고 온통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만들어 대한민국을 지옥세계로 만들어 예수 팔아 배불리는 종교의 탈을 쓴 저들의 업보가 얼마나 지중하게 될런지 걱정이 앞서고 있습니다.

 

저번에도 제가 말씀 드렸듯이 몇 생을 두고 환생을 하셨다는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까지 추앙을 받고 계시는 티벳의 달라이 라마께서는 고뇌에 빠져 계신다고 합니다.

 

중국은 중국대로 지금의 티벳사람들의 중국정부에 대항하는 책임을 달라이 라마에게 책임전가를 시키고 티벳의 국민들은 달라이 라마의 비폭력주의에 실망하고 달라이 라마에 대한 신뢰가 점점 약해져 간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업의 논리로 밖에는 달리 해석할 방법이 없다고 봅니다.

 

범어로 카르마(karma), 팔리어로는 캄마(kmma)라고 하는 업(業)이란 말은 소위 뭔가를 “짓는다.”는 말입니다.

몸과 입으로 짓는 말과 동작인 행위의 두 가지 업의 뿌리가 되는 생각, 즉 뜻으로 짓는 신구의 삼업 자체와 그로인해 발생되는 파동의 에너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업은 짓는다는 의미이지만, 생각하는 의념의 작용으로 의념이 뜻을 결정하고 선과 악이라는 업을 짓게 해서 그로부터 발생되는 파동에너지에 휩싸이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업은 이 시대에 함께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천정부지로 오르는 기름 값에 시달리는 것을 공업(共業)이라 부르고 그 속에서도 기름 값으로 돈 버는 유전업자들의 업이나 기름 값 감당을 못해 출어를 포기하는 어부들의 업이나 기름 값에 시달리는 서민들의 업이 바로 별업(別業)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업은 사업(思業)과 사이업(思已業)으로 구별해서, 사업은 뜻으로 활동하는 정신내부의 의업(意業)을 말하는 것이고, 사이업은 한번 뜻을 결정한 후에 외부로 표현되는 신업(身業)과 구업(口業)과 의업(意業)을 말하지만, 이 세 가지 업들이 밖으로 나타나 표현되면 이를 표업(表業)이라하고 밖으로 표현은 안했다 쳐도 신구삼업으로 인한 선업과 악업이 유전 상속하는 것을 무표업(無表業)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업이란 말은 불교를 통해서 우리가 흔히들 자업자득(自業自得)이니, 인과응보(因果應報)니, 업보(業報)니,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라고들 하는 말은 모두 업과 관련된 불교적인 용어들입니다.

 

하지만, 업과 윤회사상은 불교 이전부터 있었던 인도의 전통사상으로, 선한 삶을 살면 죽어서 하늘에 태어난다는 일종의 생천사상(生天思想)이었습니다.

 

한국적인 “예천불지”의 기독교사상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소박하도 할까요? 단순하다고 할까요? 이런 사상은 예나 지금이나 종교를 떠나 가장 인도적인 전통으로서 그들의 삶의 한 배경이 되고 있기에 아직도 인도에서는 민중봉기나 반란이라는 말들이 없는지도 모릅니다.

 

불교는 이러한 인도의 전통적인 생천사상과 업설을 받아 들여 그것을 체계적인 사상으로 발달시켜왔습니다.

그래서 인도의 업설은 불교에 수용되어 가장 체계적인 이론으로 그 모습을 갖추게 되었던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업이나 윤회 좋은 업을 쌓아서 하늘세계에 태어나 편안히 사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업을 청정히 해서 마침내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해탈에 그 목적이 있기에 불교의 업이나 윤회설은 단순한 생천사상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인도인들로서는 이러한 불교의 견해를 쉽게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부처님은 차제설법(次第說法), 즉 단계적인 가르침을 펼치신 것입니다.

 

남에게 많이 베풀고 계율을 잘 지키면 생천하지만, 악한 일을 하면 좋지 않은 곳에 태어난다는 선인선과, 악인악과의 업보설을 가르치고 난 후, 다음으로는 그릇된 욕망이 바로 괴로움의 근본이라는 것을 가르쳐서 그들의 마음을 청정히 하도록 한 다음, 마음이 청정해졌을 때 비로소 부처님은 사성제와 팔정도의 가르침을 통해 그들이 진리에 눈을 뜨도록 했던 것입니다.

 

대중들이 이해되기 쉽게 전통적인 업과 윤회설을 수용하고 이를 통해서 진리의 세계로 나아가도록 하는 부처님의 지혜롭고 자상하신 가르침의 차제방편설법인 것입니다.

 

업이란 무엇인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업(Karma)이란 우리들이 짓는 행위로서 일상을 살아가는 생활 그 자체의 살아가는 모습인 것입니다. 입으로 말하고 몸으로 행동하고 마음으로 생각하는 이른바 신구의 삼업(三業)그 자체인 것입니다.

오늘 법회에 와계신 이 자체도 바로 업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업과 일반적인 행위는 다른 것입니다.

일반적인행위라고 말할 때는 무의식적인 행동이나 직업 속에서 일상적인 말이나 행동으로 나타난 것만을 가리키지만, 불교에서는 생각으로 짓는 것을 가장 무거운 업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말이나 행동도 중요하지만 생각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생각은 말이나 행동의 뿌리가 되는 말과 행동을 일으키는 에너지가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생각이 청정해지면 말이나 행동도 청정해지지만, 마음이 거칠고 욕심이 많으면 말과 행동도 거칠고 탐욕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이번에 금강산관광에 북한군의 총격에 숨진 관광객의 사건이나 강화도 모녀 피살사건의 모든 것들이 이 한 생각이 일어나 벌어진 상황들인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업이라 하는 행동이나 생각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가 영향력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행위와 다른 것입니다.

 

생각의 지배를 받아서 일으키는 말 한마디나 손짓 한 번의 결과는 그대로 자신의 잠재의식에 종자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잠재의식 속에 남아있는 과거 행위의 종자는 소멸되지 않고 다음 생이나, 아니면 그 이후에 나타나는 우리들의 생각이나 말 행동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업의 힘이 쌓이는 곳을 부파불교에서는 일미온(一味蘊), 또는 보특가라(補特伽羅)라고 했던 것니다.

 

소위 부파불교라고 하는 근본불교에서 이러한 심층의식, 잠재의식을 중시한 것도 이러한 업의 이론이 발달한 결과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업은 각자의 운명을 창조하는 중요한 과이라는 점입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말, 행동은 업이 되고 업의 힘이 쌓여 있다가 다음에 나타나는 자신의 모든 행위에 영향을 미치게 되지만, 우리의 생각이나 말, 행동은 자신의 삶에서 습성이나 습관을 형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의 행위나 생각의 결과가 바로 오늘의 현주소인 것이고, 지금의 행위는 미래의 나를 창조하는 중요한 에너지가 되는 것이기에 그래서 함부로 행동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어떤 조직이나 한 나라라고 하는 공동체 운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마음속의 생각이 밖으로 표현되지 않더라도 그것은 우주적인 에너지의 파장을 일으키게 되고 그 파장은 다른 사람이나 동물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기 때문에 하다못해 키우는 개가 주인의 눈치를 살피는 것도 주인의 행동이 개에게 영향을 주었기 때문인 것이며 양계장에서 음악을 틀어놓았더니 닭들의 산란율이 높아지는 것도 이와 같은 이치인 것입니다. 의업의 에너지 파장은 심지어 식물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하물며,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는 자가 좌충우돌하면서 갈피를 못 잡고 한 나라를 일개 기업정도로 생각해서 나를 따르라! 하는 식으로 제멋대로 일을 저지르고 본다면 국민들의 사고는 어떻게 변해 가겠습니까?

 

자기의 운명을 창조하는 개인적인 차원의 업을 별업(別業)이라고 한다면 공동체적인 차원의 업을 공업(共業)이라고 하지만, 그러나 이 둘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생각과 행위를 개인적인 입장에서 볼 것인가, 아니면 공동체적인 입장에서 볼 것인가의 차이일 뿐인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공동체인 것입니다. 그 구성원들인 국민들과 정치인, 그리고 공무원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위를 하는 가에 따라 대한민국의 오늘과 내일이 결정되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황금만능주의에 쫓겨 물질만을 추구했던 우리 사회 전체의 생활습성이 이제는 도덕불감증에 걸려 전과자인 사람도 대통령이 되어 취임 한지 채, 백일도 안 되어 공사장에서 관리 소홀이나 부실시공 일 때 나타나는 불신임이라는 결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한 나라의 대통령을 선출할 때 갖추어야할 도덕적인 부분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황금만능에 떨어졌던 이 나라 국민들이 함께 겪어가야 할 공업인 것입니다.

 

불교의 업에는 업보라는 두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하나는 내가 한 어떤 행위는 반드시 그 결과를 초래한다는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업보(業報)의 원칙이 있고 다른 하나는 내가 지은 것은 내가 받는다는 자업자득(自業自得)의 원칙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의 나는 어제 만들어 지었던 나의 생각이나 행동의 결과인 것입니다.

 

조직이나 한 나라라는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의 우리 사회의 모습은 어제의 공동체 구성원들이 해 온 행위의 결과인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의 모습을 보면 우리의 과거를 알 수 있고, 미래의 모습을 알기 위해서는 오늘 정치권과 이 나라의 공무원들과 국민 대다수가 하는 짓을 보면 답은 나오는 것입니다.

 

성불하십시요.

 

중생계를 벗어난다는 해탈업이란무엇인가

법화경 약초유품에 삼초이목의 비유가 있습니다.

부처님의 감로 비는 차별 없이 대지를 적시지만 정작 초목은 제 근기에 맞게 빗물을 받아들일 뿐이라는 비유와 밝은 동녘 햇살은 제일 먼저 큰 산부터 비추어 낮은 들판까지 시차를 가지고 골고루 광명을 전해준다는 말씀이 떠오릅니다.

 

헌데도 중생들은 정작 자기 자신의 근기는 되돌아 볼 줄을 모르고 부처님의 지혜를 담아갈 자기 그릇의 크기도 모르고 자신들이 깨끗이 닦여진 준비된 그릇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도 없이 나라는 그릇이 덜 닦여지고 냄새가 남겨진 그릇인줄도 모른 채, 눈만 뜨면 무엇인가를 발원하고 원하는 욕구를 채우고자 온갖 기도에 매달려 지극정성으로 매달리다 보면 자신의 간절한 의업의 파동에너지와 불보살님들의 가피력으로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중생들이 유한한 삶 속에서 유루의 욕망이나 욕구의 성취인 것이고 다음 생에 하늘에 오르는 것만이 신행생활의 전부는 아닌 것입니다.

 

초발심엔 뭣 모르고 인연지은 불교일지라도 “아뇩다라샴먁삼보리”라는 무상정등정각의 초월적인 부처님의 지혜를 배우겠다고 마음을 낸 불제자라는 우리들이 부처님의 궁극적인 가르침을 온 몸과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가는 세월 속에 생노병사 네 가지의 고통과 또 다른 네 가지의 근본 고통까지 四苦八苦라는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끝없는 윤회고를 전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처님께서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하셨던 멧세지인 윤회하는 삶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봐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절대적으로 부정을 하셨던 정해진 업이라고 하는 자신의 운명이나 팔자나 업이라는 단어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으로 이것은 “부파불교의 해탈론”에 해당된다고 할 것입니다.

부파불교에 대해서는 제가 전번에 말씀드렸지요?

 

부파불교의 해탈론은 “번뇌를 끊어서 해탈에 이른다.”는 점을 가장 강조했던 것으로, 둘째 주 법문에 제가 말씀드린 대로 불교에서 말하는 업이나 윤회 좋은 업을 쌓아서 하늘세계에 태어나 편안히 사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업을 청정이 해서 마침내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해탈에 그 목적이 있기에 불교의 업이나 윤회설은 인도적인 단순한 “생천사상이나 기독교의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예천불지” 사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당시 인도인들로서는 이러한 “궁극적인 해탈을 추구하는 불교의 견해”를 쉽게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부처님은 차제설법(次第說法), 즉 단계적인 가르침을 펼치셨던 것이고, 그릇된 욕망이 바로 괴로움의 근본이라는 것을 가르쳐서 그들의 마음을 청정이 하도록 한 다음, 마음이 청정해졌을 때 비로소 부처님은 사성제와 팔정도의 가르침을 통해 그들이 진리에 눈 뜨도록 했던 것이라고 말씀드린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이러한 해탈론을 “단혹증리론(斷惑證理論)”이라고도 하는데 괴로움의 근본 원인인 미혹을 끊어서 진리를 깨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진리는 허위에 반대되는 개념인 학문적인 학설 따위가 아니라 부처님께서 누누이 말씀하셨던 존재의 실상에 대한 참된 이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온갖 괴로움의 원인이자 온갖 미망과 미혹근본 원인이 되는 무명(無明)이란 무엇인가를 밝혀본다면 무명은 다름 아닌 “나라는 아상에 빠진 채, 소아적인 사고와 탐 진 치 삼독의 욕구에 끄달려 물질로부터 헤어나지 못하는 대부분의 중생들이 살아가는 삶으로 연기와 무상과 무아의 실상을 깨닫지 못한 어둠의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이 무명이 바로 뿌리가 되어 자기중심적인 생각들로 가득한 중생심의 본질이 되는 것입니다.

 

중생심에는 승속이 따로 없고 성속이 차별이 없으나 수행과 자각을 통해 자신의 본질을 보기 시작한다면 무명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연속극을 보시다가 끝에 가서 어찌될 것인지 결말을 어느 정도 알게 되면 별 재미없어지듯, 자각을 통해 자신의 삶의 속에서 욕구의 흐름과 번뇌의 본질을 알게 되면 그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온갖 업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 무명과 번뇌란 원래 클레샤(Kleśa)란 말로서, “물들다. 더럽혀지다.”라는 의미인데 “입아비달마론에서는 이 번뇌를 심신을 소란케 하고 적정을 방해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부파불교에서는 가장 무거운 근본 번뇌를 구체적으로 열 가지로 나누어 십혹번뇌(十惑煩惱)라고 했습니다.

 

미사혹(迷事惑)이라 해서 존재의 실상에 대한 미혹번뇌로 선천적인 다섯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탐욕(貪), 성냄(瞋), 어리석음(痴), 아만(慢), 의심(疑)이라고 합니다.

 

미리혹(迷理惑)이라 해서 바른 견해에 대한 미혹으로서 자기 몸의 실체가 있다는 견해(身見)와 사후 세계에 대한 그릇된 견해(邊見), 인과에 대한 그릇된 견해(邪見), 그릇된 소견을 옳다고 고집하는 견해(見取見), 금하고 있는 율법에 대한 그릇된 견해(戒禁取見) 등의 후천적인 다섯 가지 그릇된 견해를 말합니다.

 

이 열 가지 근본 번뇌 중에서 후천적인 다섯 가지의 사견은 연기의 진리와 사성제 등을 잘 관찰하면 쉽게 끊을 수 있으나, 탐진치만의라는 선천적인 미사혹의 다섯 가지 번뇌들은 끊기 어려운 것으로 이것은 지적인 이해나 알음알이로는 끊을 수 없고, 수행을 통한 자각이 이루어짐으로 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열 가지 근본 번뇌를 뿌리로 하여 지말번뇌(枝末煩惱), 즉 팔만 사천 번뇌와 백팔 번뇌 등이 중생들의 일상에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순간까지도 여기에 응해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백팔번뇌라고 할 때, 108이란 숫자는 우리의 감각기관인 여섯 가지의 안이비설신의 6근(根)과 좋다, 싫다, 좋지도 싫지도 않다는 세 가지의 느낌을 곱하고(6×3=18), 여기에 한 가지 기관이 작용하는 데도 다른 6근이 모두 연관되어 있으므로 다시 6을 곱해보면 (6×3×6=108) 108번뇌가 된다고 합니다만, 이러한 번뇌 망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대 자유인이 된다는 것이지만, 겨우 이러한 백팔번뇌 따위로 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해서 이러한 것들이 해탈업이 과연 될수가 있는가에 대해 혼자서 자문해볼 때가 많습니다.

 

다음 법회 때에는 해탈업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성불하십시요.

 

업에 대한 세번 째

 

어제 건봉사 다비장에서 만났던 스님이 전화가 왔었습니다.

 

서울에서 최면공부가 끝나고 다시 간성에 내려왔노라는 대화 끝에 공부하는 날 빙의에 떨어져 엄청 힘들어 하는 50대의 남자에게 깊은 최면을 걸고 빙의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3 천억 겁 전의 악연까지 나오면서 온갖 짐승들의 원결과 심지어 곤충들의 원결까지 몸짓 묘사를 하더니 끝에는 사람귀신들까지 나오더라는 겁니다.

 

그걸 곁에서 지켜본 스님이 정말 무섭더라면서 건봉사에서 다비식을 했던 스님을 보더라도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냈다 하기에, 제가 하는 말이 스님이 최면을 배워 중생제도에 활용하겠다는 의도는 좋으나, 그렇게 빙의에 들어간 사람들의 공통적인 점은 삶 자체가 지나치게 힘들었거나, 힘들거나, 자신의 의지로 어쩌지 못하는 환경의 요인으로 쇠약해질대로 쇠약해진 심리구조를 가진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스로 환에 떨어져 있거나 빙의의 대상이 되는 것인데, 최면을 통해 빙의된 영가들을 찾았다 해도 정작 빙의인 자신이 흐트러진 심지를 굳건하게 하지 못하면 별 효과가 없고 빙의자의 심약해진 심지를 향해 그 동안의 수행을 통해 얻어진 집중력으로 단 한방의 할을 하던지 스님의 수행력에 빙의된 영가들이 스스로 빠져나가도록 자신의 수행력이 뒷받침 되어야한다고 통화했었습니다.

 

허준선생의 스승이었던 유 의태 선생이 말하길 죽어가는 환자의 방에 上醫가 들어오면 저승사자가 문 밖으로 나가버리고 中醫가 들어오면 자리를 비켜주고 下醫가 방에 들어오면 환자 곁을 지키고 있다가 혼을 데리고 간다고 하잖습니까?

 

부처님을 대 의왕이라고 하듯이 석가여래의 분신불인 약사여래 부처님을 향해서 법회 때마다 공양을 올리고 예경을 합니다.

 

약사여래께 예경을 하고선 十二大願接群機 一片悲心無空缺 凡夫顚倒病根深 不遇藥師罪難滅 (십이대원접군기 일편비심무공결 범부전도병근심 불우약사죄난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열두 가지 대원으로 중생들을 만나 오직 불쌍히 여기는 마음 빈틈없으니 범부의 뒤바뀐 생각으로 병의 뿌리 깊으나 약사여래 못 만나면 죄 없애지 못하리,”하는 대목입니다.

 

약사여래불의 본래의 명호는 “약사유리광여래불”니다.

열두 가지 원을 세워서 그 원을 성취하여 약사여래 부처님이 되셨고 중생을 제도하시게 되었는데 그 十二大願은 무슨 서원인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는 : 광명보조(光明普照)라 : 내가 성불하면 광명이 온 세계의 중생들에게 두루 비추어 모든 중생들이 나와 같이성불해지기를 발원했고, 둘째는 수의혹변(隨意或辨)이라 : 내가 성불할 때, 몸이 유리와 같이 빛을 발해 그 광명으로 중생들의 모든 일들이 뜻과 같이 공덕이 원만해지기를 발원하셨으며, 세상에 더러운 것이 없고 밝은 세상이 이룩되어 모든 중생들이 불편 없이 살 수 있게 되길 원을 세우셨고,

 

셋째는 시무진물(施無盡物)이니 : 내가 성불하면 무궁무진한 지혜를 갖추어 일체중생이 나의 방편력으로 인해 모두 덕이 높아 편견이 없는 견문이 열리도록 하리라 하였고 중생들이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주고 부족함이 없도록 해주겠다는 발원이 세 번 째이며,

 

네 번째는 안립대승(安立大乘)이라 : 내가 성불하면 중생들이 사도에 빠지지 않고 부처님의 바른 길로 가도록 인도하되, 소승으로 가는 자가 있다면 대승으로 인도해 모든 중생이 정각을 이루어 대승에 머물게 하리라 서원하였고,

 

다섯 번 째는 구계청정(具戒淸淨)라 : 내가 성불할 때, 중생들이 부처님의 청정한 계율에 따라 수행하여 함께 성불하되, 설혹, 파계하더라도 나의 명호를 들으면 삼악도에 들지 않도록 하겠다는 대원을 세우셨으며, 모든 중생이 계를 지키게 하여 자리이타를 실천하여 살기 좋은 정토세계를 만들겠다는 서원을 세우셨고,

 

여섯째는 제근구족(諸根具足)이라 : 내가 성불하면 이 세상에 신체 불구자가 없게 하고, 업보로 장애자가 되어 고통 받는 자가 있더라도 내 이름을 들으면 즉시 병고에서 구원받도록 하겠다는 원을 세우셨으며, 중생들이 궁핍으로 인하여 괴로움 없이 살아가도록 하겠다는 원을 세우셨고,

 

일곱째는 제병안락(際病安樂)이니 : 내가 성불하면 병들어 신음하는 사람이 있거나, 어떠한 어려움과 고난에 처해있는 중생이라도 그가 나의 명호를 한번만 듣는다면 아무리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라도 심신이 곧 편안해져 부처님 세계에 안주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발원을 세우셨으며,

 

여덟째는 전여득불(轉如得佛)이라 : 내가 성불할 때, 중생들에게 마장액난과 병마가 전혀 없도록 하리라 하였으며,

 

아홉째는 안립정견(安立正見)이니 : 내가 성불할 때, 중생이 마귀의 유혹이나 외도의 속임수에 빠지거나 나찰이나 짐승축생 마귀 같은 일체의 것들이 침노하지 못하도록 지켜 줄 것이며 바른 길로 인도하여 그릇된 소견을 버리고 부처님의 바른 지견이 열려 부처님 정법에 의지하도록 하겠다는 발원을 하였으며,

 

열 번 째는 제난해탈(際難解脫)이라 : 내가 성불하면 나쁜 왕의 치세로 고난당하는 백성이 있을 때에는 모두를 구제하겠다는 원력을 세우셨으며 국법을 어기고 죄를 지어 고통을 받거나 모함이나 실수로 감옥에서 벌을 받으며 괴로워 할 때 내 이름을 들으면 그 마음에 고통과 고난이 사라지고, 복덕과 위력을 성취하도록 하겠다는 발원을 하셨으며,

 

열한 번째는 포식안락(飽食安樂)이니 : 내가 성불하면 배고파 굶주리며 고통 받는 중생이 있거나, 굶주림을 면하려다 잘못을 저질렀을지라도 내 명호를 듣고 마음으로 참회하여 계율을 지키면 맛있는 음식을 실컷 먹을 수 있도록 하고, 모든 중생의 굶주리고 목마름을 배부르고 만족해지도록 복록으로 보살피겠다는 열한 번째 서원을 세우셨으며,

 

열두 번째는 미의만족(美衣滿足)이라 : 내가 성불하면 가난에 쪼들리고, 해충과 추위와 더위로 고통 받는 자가 있다해도 그들이 나의 명호를 듣고 일심으로 기원하면 중생들의 숙생에 모든 업장이 진멸하고 의식주 등을 수용하는데 만족하도록 해주겠다는 열 두 가지원력이 바로 약사유리광여래부처님의 서원인 것입니다.

 

또, 약사여래부처님을 공경하고 간절히 명호주력을 하게 되면 네 가지의 공덕이 생기게 되는데, 그 첫 번 공덕은 계율을 파하고 악업을 일삼다 악도에 떨어진 자일지라도 약사유리광여래의 명호를 듣거나 염송하면 구제되고 해탈을 얻게 된다고 하며, 그 번째 공덕은 약사유리광의 명호를 열심히 부르는 자는 다음 생에 동방만월 세계에 가서 나게 되고 현세에서는 모든 병이 완치되며, 세 번째 공덕은 병고가 많거나 업보가 무거워 삼재의 재난이 따르고 障碍가 한량없는 이도 약사여래의 명호를 부르면 모두 벗어 날 수 있다고 하며, 네 번째 공덕은 살생을 많이 한 사람이 그 과보로 수명을 짧다 해도 수명을 延長하고 약사여래를 염송하면 일체 橫厄을 면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약사여래 부처님은 중생의 병고를 치료해 주시고 박복한 중생의 衣食住를 가피하여주시는 부처님으로서 신라 때부터 약사여래 신앙이 있었습니다만 불법과 인연이 희박하여 저 변방에 태어나는 사람들이거나, 지금 북한 주민들을 이 대목에서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도 이러한 불보살님들의 서원이 전해져 있더라면 소원이자 희망이라는 빛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이 땅의 우리는 사느니 못 사느니 해도 그래도 행복하다고 봅니다.

 

어제 밤 우연히 TV를 보다보니 소위 귀신과 잠자리를 같이 한다는 사람들에 대한 취재파일이 있어 잠시 시청했었습니다.

귀신과 잠자리를 같이 하는 것을 귀접(鬼接)이라고 하는 것인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그 대상들이었습니다.

계속 보다보니 심지어 거기에 빠져 중독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소위, 오컬리스트라고 불리우는 영매인 무당들 중에도 배우자가 아예 없거나 있다 해도 자신의 남편과는 동침을 하지 않고 귀접을 하는 경우들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일반인들이 그렇게 많은 줄은 깜짝 놀랬습니다.

 

심리학자들은 여러가지 학설을 내놓고 귀접에 대해서 나름대로 학설을 말했지만, 학자들은 자신들이 직접 겪어보지도 않았으면서 “이럴 것이다.”라는 가설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약사여래의 열 가지 원의 내용을 보거나 귀접을 한다는 사람들의 현상도 모두가 업감연기에 의해 인연과보로 봐야 할 것인가 혼자서 곰곰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악인악과(惡因惡果) 선인선과(善因善果)에 대해서 과보를 받는 주체는 도대체 누구이며 어떻게 과보를 받을 당사자에게 다겁생래에 지은 업이 연결이 되느냐 하는 겁니다.

 

우리가 탐(貪)·진(瞋)·치(痴)를 삼독심이라고 하지만 뭔가를 이루고자 하는 의욕도 삼독심의 근원이 될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까 말씀드린 약사여래의 열두 가지 서원도 중생을 위한다고는 하지만, 욕구일지도 모릅니다.

 

깨달음을 얻겠다는 것도 논리상으로는 욕심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중생을 위한다는 명분에 의해 서원(誓願)이라 말합니다.

 

진심을 일으키지 말라고 하지만 나쁜 일을 보고는 분노해야 합니다. 하지만 나쁜 일에 대한 판단은 자기주관이기보다는 사회통념이나 사회상식이 전제되어 일으켜야 할 분노와 버려야 할 분노를 분명히 구별된 후에 진심에 대해서 말해야 할 것입니다.

 

어리석지 말라고 합니다. 어리석지 않다는 것은 모든 것을 다 알아야 한다는 것인데, 세상 만물의 이치를 범부중생들이 어찌 다 알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삼독심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우리의 업이 어떻게 다겁생을 돌며 지금의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는가는 다음 주에 나머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성불하십시요.

 

스스로 지옥과 윤회를 벗어나는 공부법

 

전번 칠석기도 때, 몇 분 보살님들이 오셨기에 해드렸던 간단한 소참법문을 다시 해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산신기도다, 용왕기도다, 칠성기도다 하는 기도들은 불교가 이 땅에 전래되기 전에 우리 민족 고유의 토속적인 신앙으로 자리 잡고 있던 자연을 경외하고 더불어 살아가고자 하는 순수한 영혼의 심성들이 하늘을 주관하는 칠성과 물을 주관하는 용왕과 대지를 주관하는 산신이라는 하늘과 땅과 물을 지배하는 지배자들로서 숭배했던 게 아니라 자연과 더불어 공존하고자 하는 심성의 발로였던 것을 현대 종교에서는 토템이니 애니미즘이니 샤먼이니 하면서 그 나라 민족들의 정체성이나 민속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유식한 외국인들이 자기들의 자연과학식으로 해석하고 분석한 분류 방법으로 기준을 정해서 무속신앙이다 라고 해댔던 것을 기독교 사관이 이 땅에 수입되고 현대 교육을 받게 된 알량한 지식인들은 그런 말들이 진리인양 우리 것을 무시하고 우리 것은 다 고루하고 퇴보한 것들로 치부하는 어리석음을 지금껏 갖고 있었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이제 자연환경이 무너지면서 서서히 그 재앙들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음을 여실히 보고 있습니다.

 

물론 불교가 이 땅에 전래됬을 때, 이러한 민속신앙이 치성한 상황에서 불교화시켜 포용하는 방법으로 대지를 주관하는 산신과 하늘을 주관하는 칠성과, 물을 주관하는 용왕이라는 하늘과 땅과 물을 주관하는 신령들이라 하여 법당 뒤에 삼성각이라 해서 따로 전각을 세워 모셔두고 그런 토속신앙의 대중들에게 불교를 전하고자 했던 때문에 이러한 삼신신앙이 불교화 됐다고 종교사회과학자들은 말을 합니다.

 

그러나 조금 위험한 발상입니다만, 저는 그렇게 보질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도를 깨치신 후, 7일간의 침묵을 거쳐 삼칠일간 혼자서 우주법계에 대한 진리의 세계를 설하셨던 것이 화엄경이라고 알고들 계실 것입니다.

 

또, 우리가 조석으로 칠정례의 예불을 드리면서 “천백억화신석가모니불” 하면서 예경을 드립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석가여래께서 중생을 제도하시고자 시공을 초월해서 천 백억의 화신의 몸을 나타내신다 대목과 “관세음보살님의 천수천안” 등의 의미를 우리는 되새겨 보아야 할 것입니다.

 

나의 교만심을 제도해주고자, 나의 어리석은 집착과 애착을 끊어주고자 남편의 몸을 빌려, 또는 자식의 몸을 빌려 아내를 통해 불보살님들은 화신과 분신과 응신의 모습으로 순경계와 역경계로 우리 곁에 다가와 분노와 배신감과 불타는 갈애로 번뇌하는 내 마음 안에서 자리잡고 있는 가족 간의 갈등을 바라보게 되는 지혜를 주고 있음을 알게 될 때 우리는 그 순간부터 마음의 평화와 안락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천 백억의 화신과 분신과 응신의 모습을 갖고 계신다는 석가모니부처님을 보십시요.

만고불변의 진리 당체를 형상화시킨 청정법신의 비로자나 부처님의 모습과 한량없는 원과 행의 과보로 인해 나타나신 석가모니 부처님의 화신이자 응신이자 보신이신 노사나 부처님의 모습과, 오취의 중생들을 제도하고 알맞은 대상의 모습으로 화현하는 석가모니부처님의 모습을 말입니다.

 

때문에, 이러한 논리로 본다면 관세음 보살님과 문수보살님, 지장보살님 등, 온갖 불보살님들,칠성님과 산신님과 용왕님 등, 모두가 다 중생을 제도해주고자 근기에 맞게 변화되어 나타나신 여래의 화신인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까지도 마호멧까지도 석가모니 부처님의 화신으로 볼 정도의 불교 종교관과 불교적 세계관을 이 시대의 불자들은 자신 있게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짱뚱이 뛰니 꼴뚜기도 뛰드라고 일본에서 독도가 지네 땅이라고 해대니 중국애들은 이어도가 지네 영토라고 우기고 있잖습니까?

자기 것은 자기가 지켜야지 왜 우리가 미국에서 우리 것임을 소리쳐달라고 눈치 봐야 하는지를 모르겠습니다.

 

우리 불자들도 중생을 근기에 맞게 제도하고자 나타나시는 이러한 천백억화신의 석가모니 부처님의 화신이자 분신이며 응신이라는 경전 상의 이론으로 무장을 해서 불자들을 선교하려드는 기독교인들을 되려 불자로 만들려는 기백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때문에 이번 칠성기도 때, 중생들의 현실적인 삶에서 복과 덕을 주관하신다는 일곱 분의 칠성님을 간절히 청해서 발원했던 그 분들의 역할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분이 자손들에게 만덕을 주신다는 북두제일의 탐낭성군이십니다.  둘째 분은 중생들에게 다가오는 온갖 장애와 온갖 난을 멀리 하도록 해주신다는 거문성군셋째 분이 중생들의 업과 장애를 다 소멸시켜 주신다녹존성군이 계시며, 넷째 분은 중생들이 구하는 것, 원하는 모든 것을 다 구해지고 얻어지도록 해주신다는 문곡성군다섯째 분은 중생들에게 다가온 백 가지의 장애를 다해서 없애주신다는 염정성군여섯째 분으로 중생들의 복덕이 구족해지도록 해주신다는 무곡성군이 계시며,  일곱째 분은 아무리 재물이 많고 명예가 있다해도 건강이 무너지고 말면 아무런 소용이 없듯이 중생들에게 가장 소중한 수명과 무병장수를 주신다는 파군성군이라는 일곱 분의 화신이 계신 것입니다.

 

이렇게 일곱 분의 칠원성군님은 지극히 현실적인 중생들의 염원을 구족하게 해주시는 분들이건만 이번 칠성기도 때 동참 하신 분들이 별루여서 그동안 기도들을 많이들 하셔서 더 원하는 게 없나보다 생각했습니다.

 

백중기도 회향일이 금요일 인지라 백중법문은 그 때 하기로 하고 전번에도 제가 잠시 언급했던 최면을 배우시는 스님의 이야기를 들려드렸습니다.

 

그 스님께서 전화가 와서 제게 묻기를 수행을 잘했다던 스님도 죽으면 영가가 되어 다른 사람에게 주착하는 경우도 있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하길, 그동안 스님이 봐오셨듯이 사람들에게 빙의라 하고 접신 들렸다 해서 다른 영가가 씌운 것을 많이 보셨겠지만, 어찌 사람의 혼만 사람에게 붙겠느냐, 재물을 가득히 쌓아두고, 써보지도 못하고 평생을 아끼고만 살던 사람이 죽으면 그 혼이 남겨진 재물에 주착이 되어 떠나지 못하고 주변을 맴돌다가 사람에게 주착이 되기도 하지만, 평소에 사람을 잘 믿지 못하던 습성이 있어 사람에게 빙의되질 못하고 집안에 터전잡은 쥐나 고양이의 몸에 실려 밤낮으로 들락거리고 눈에 불을 켜고 밤마다 돌아다니게 되고, 심지어 낯선 개의 몸에 주착이 되어 그 집에 굴러 들어와 제 집 마냥 지키고 낯선 사람이 오면 으르렁거리고 하는 게 다 그런 영가들이 축생들에게 주착되어서 그리된다고 옛날 큰스님들께 들었던 바라고 해주었더니 그 스님의 말이 어떤 남자 환자가 왔는데 최면이 깊이 들어가자 어떤 스님의 혼이 나왔는데 제방의 선원에서 안거도 많이 하고 평생을 참선을 했노라고 하더랍니다.

 

그렇게 참선공부를 한 스님도 죽어서 그렇게 주착이 될 수 있냐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제 대답은 당근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제가 드리는 말씀을 잘 들으십시요.

 

전번에 살아생전에 인과를 짓고도 극락에 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드렸지요.?

한 호흡 들이마시고 내쉬는 동안에 나무아미타불을 일념으로 집중해서 백팔 번을 쉬지 않고 염불하기를 이레동안만 하신다면 극락에 바로 가실 수 있다고 법문해드린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게 어려우시다면 지금부터 제가 드리는 말씀을 잘 들으시고 그대로 따라서 수행하신다면 이 목숨이 끊나고 나서 전도 몽상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쩌다 기도라도 좀 해 볼려고 맘을 내서 틀고 앉아 있으면 불과 몇 분의 시간이 흐르기도 전에 평소에는 전혀 떠오르지도 않았던 누구와 싸웠던 기억, 불쾌했던 추억, 장보러가서 콩나물집 할매와 다퉜던 일들, 작은 집 동서와 맘 상했던 불쾌한 기억들이 억수로 떠오르기 시작하게 됩니다.

 

바로 이런 것들이 정화되지 않고는 죽은 다음에 우리의 영혼은 지향성에 의해 실 끊어진 연처럼 살아생전에 온갖 것들과 온갖 인연들에 대한 불쾌, 유쾌한 기억들과 앙금이 된 번뇌와 갈애의 기억들이 자기 스스로 살아생전에 만들어 가졌던 불길들이 자신의 영혼을 태우는 지옥 불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현실 속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을 만났을 때 내면에서 겪는 마음 고통들이 금생에 살아생전에 털어내지 못하고 죽게 되면 평소에 전혀 기억도 없던 것들이 잠재의식 속에서 드러나 자신의 영혼을 살아생전에 스스로 만들었던 온갖 번뇌와 갈등으로 만들어 가졌던 증오심과 마음의 불길들이 죽어 영혼을 스스로 만든 지옥불에서 벗어나질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생전에 마음의 번뇌와 증오와 집착과 애착을 벗어버리지 못한 그런 영혼들에게 이렇게 백중날에 부처님의 무상법문을 들려주어 이생에 대한 애착과 집착과 번뇌의 불길을 다 잠재우고 털어버리고 해제라 벗어나라는 뜻으로 백중기도를 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산 중생들, 지금 이 자리의 여러분들이나 저나 살아 있는 현재의 우리는 그나마 얼마나 다행스런 일입니까?

제게 이런 법문을 들으며 스스로를 살아생전에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수행법을 새겨들을 수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듣고도 하지 못함은 자신의 탓입니다.

 

수도꼭지로 나온 물을 호스를 통해 항아리에 넣을 때, 물이 뱅뱅 돌 때는 항아리 바닥에 무엇이 가라앉아 있는지 전혀 볼 수 없지만 물을 다 받고 고요히 잠긴 항아리 속을 들여다보면 바닥이 훤히 보이면서 밑에 잠긴 자갈이나 모래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나 참선을 좀 해볼라치면 평소에 휘돌아 감던 안이비설신의라는 육근이 육경을 대하면서 온갖 분별을 일으켜 사물과 현상을 정확히 볼 수 없도록 했지만 고요히 의식이 가라앉으면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이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온갖 분별과 기억과 추억과 잠재의식들이 드러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때, 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잠재의식들을 있는 그대로 두고 화두일여로 한다고 해서 바닥에 있는 잠재된 기억들이 물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을까요? 답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떠오르는 잠재의식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또다시 그 기억에 빠져 든다면 헤어날 길이 없지만, 그러한 모든 잠재의식들이 떠오를 때 마다 서로가 원결이 맺혔던 맺었던 간에 그 대상을 향해 진실로 축원해주고 떠 오른 그 원결이나 잠재의식이 소멸될 때까지 지극하고 간절하게 마음 안에서 한 티끌도 남지 않을 만큼의 지극 간절한 축원을 해주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지옥의 불구덩이도 면할 수 있고 심지어 소멸시켜버릴 수도 있으며 어두움을 향한 지향성을 끊어버리고 인연업보의 고리를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다겁생래의 온갖 맺힌 인연들을 향해 간절하고 지극하게 축원해줄 수 있는 그렇게 해줄 수 있는 기도법이 무엇일까요?

바로 기도 때마다 제가 강조하는 자비참법기도입니다.

 

자비참법기도를 꼭 힘들게 절을 해야 하기 때문에 몸이 불편해서 마음은 간절해도 못 하신다는 분들은 생각을 바꾸십시요.

왜 금강경이나 법화경은 사경도 잘하고 독경도 잘들 하시면서 자비참법은 소리 내어 독송을 할 생각을 못하십니까?

 

기도는 쌍촛대 벌려놓고 청정수 떠 놓고 해야만 하는 게 아닙니다.

기도하려는 내 마음이 간절하고 지극하다면 그걸로 족한 것입니다.

 

성불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