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란 무엇인가?

2010. 1. 14. 21:4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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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안읍성/순천 

                

기도입제에 대한 법문을 해드릴까 합니다.

 

우리는 그나마 다행스럽게 축생이나 미물의 몸이 아닌 사람중생으로 태어나긴 했지만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이 약육강식이요 적자생존이라는 먹이사슬 구조에서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중생계도 역시나 업보 중생인지라 재물이든 권력이든 기업이든 개인이던 간에 가진 것이 있고 없음에 따라서 약육강식의 업보중생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현실일 것입니다.

 

며칠 전에 거사님들 세 분과 자리를 함께하면서 나온 질문이 “스님 사람에게 진짜 운명이라는 것이 있습니까?” 하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때 제 대답은 “예! 있습니다.”였고 그 다음 질문이 “살아가는데 운명이 얼마만큼의 영향을 주는 것입니까?” 하기에 제가 말하길 “살아가는데 운명은 80%밖에 안 되고 나머지 20%는 인연입니다.” 하고 말씀드렸습니다.

 

중생이 다겁생을 살아 오가면서 알게 모르게 이익을 취하고 자기 목숨을 연명하고자 나보다 작은 것들의 생명을 업으로 취하고 살았으니 그 인과가 모여 지금 이 순간까지 각자가 살아가는바 삶의 질과 인생을 오르고 내리는 동안 성공과 실패의 온갖 질곡으로 희노애락, 우비고뇌가 벌어지는 현실일 것입니다.

 

중생은 자신의 사업이든 가정의 대소사이던 잘나갈 때는 그리 큰 근심걱정 없기에 교만하지는 않더라도 기도에 별로 무관심하게 살아가는 게 중생심이지만, 만약, 한 가족이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한다거나 불치의 병으로 판명이 날 경우, 완치가 힘들다는 의사의 판명이 나온다면 가족은 물론이고 당사자 또한 눈앞이 깜깜해지면 당장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순간부터 인간의 의지는 한계를 느끼며 나약하고 약해지는지라 자기가 평소 가까이 했던 종교에 매달리며 기독교인은 하나님에게, 크리스챤은 천주님에게, 불자들은 사찰에서 불보살님에게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고자 간절하게 기도하고 매달리게 되며 종교가 없던 사람도 종교를 찾게 될 것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이루지 못할 상황에서는 그 어떤 초월적인 대상을 향해 간절히 갈구함으로써 그 어려움을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우리 중생심인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능력을 벗어난 어떤 어려움에 빠졌을 때, 불자들은 불보살님을 향해서 지극하고 간절한 기도를 절절한 마음으로 행함으로써 기적과 같은 가피를 입어 그 어려움에서 헤어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다른 종교인들은 소위 은혜를 받았다고 자신의 기도체험을 주변에게 알려 함께 해보자고 간증하러 다니기 바쁘지만, 우리 불자들은 워낙에 점잖으신지라 불보살님들의 대자대비하신 기도가피를 체험하고도 부처님처럼 눈 딱 내리감고 나만 알면 돼! 하는 식으로 기도가피력을 널리 알려 신심을 북돋아 주는데 인색하기만 합니다.

 

중생은 업보로 살아가는 업보중생인지라 마음이 불안하고 안정되질 못하고 평상심을 잃어버리거나 혹은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기도라도 해서 어찌 해볼까? 하는 생각을 일으키더란 말입니다.

잘나갈 때는 별로 신심도 없다가 본인이나 가족이 다급한 상황에 처할 경우에 매달리게 되는게 대부분 중생심일 것입니다.

 

어제 오후에 두 부부가 오셨었습니다.

그런데 말씀은 사업이 아주 절박하고 힘든 시기가 너무 오래간다고 하면서도 정작 기도는 얼마나 해보셨냐는 제 질문에 답이 걸작이었습니다.

“너무 빠지게 될까봐 못했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데요.

 

기도 정진은 어느 종교에서나 가장 신성한 종교의례 입니다.

물론 이성적인 신앙생활이 아닌 지나친 믿음으로 가정도 팽개치고 오로지 하나에 빠져들면 눈먼 맹신에서 미친 광신에까지 이르고 소망이 지나치면 기복에 빠져들게 되고 사랑이 지나치면 자기들끼리만의 집단적 에고에 빠져들게 되는 것은 잘못된 신앙인 것이고 또 기도라는 신비주의에 빠져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새 옷을 사 입고 즐겨 입다가 유행지나고 계절지나 보푸러기 일어나 허접해지면 새 옷일 때 애지중지하던 맘은 간곳없이 미련 없이 버려 버리듯, 유한한 생을 예정하고 있는 이 몸뚱어리를 위해서는 지극정성 온갖 시봉을 다해 좋다는 비싼 수입화장품에 온갖 명품 옷으로 휘두르면서도 정작 이 몸뚱어리의 주인인 내 마음이 주인공이라고 하면서도 정작 이 주인공을 위해서는 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더란 말입니다.

 

가장 중요한 진정한 나, 거울에 비친 이 모습의 내가 아니라 자성이 청정한 주인공을 씻어 주고 닦아주고 꾸며주는 것이 바로 기도인 것입니다.

 

하지만, 기도를 함으로써 안 되는 일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고 지지리도 공부 못하는 자식이 일류대에 쑥 들어가는 오직 나만을 위한 이기적인 그런 요상한 신행생활은 잘못된 신앙으로 그런 신행생활을 하는 것을 기복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나라는 주인공이 다겁생을 돌고 돌며 알게 모르게 내 마음 밭에, 내 업의 바다에, 내 운명이라는 화선지에 어지럽게 저질러온 온갖 어두운 잡초를 말끔히 제거하고 깨끗이 지우는 정화작업이 바로 기도인 것이고 지극 간절하고 힘들게 기도한 기도의 발원공덕을 일체 중생들에게 회향할 수 있을 때, 자신의 선업은 증장되고 공덕의 씨앗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다만, 이렇게 기도를 하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면, 우선 현실에서 자신의 일상의 마음가짐이 달라지고 몸에서 나오는 에너지가 달라지고 삶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바로 현훈가피와 명훈가피의 힘이 자기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거지도 때깔이 깨끗한 거지는 대접도 받지만, 지저분한 거지는 다들 피해버립니다. 불보살님들 또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평소에도 자신의 신구의 삼업을 끊임없이 정화하고기도하는 사람에게 불보살님들의 가피는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 가피는 불보살님의 서원력을 얻어 내는 것이기에 매일매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법화경 보문품에 “선남자야, 만약에 한량없는 백 천만 억 중생이 여러 가지의 고뇌를 받을 때 이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듣고 일심으로 그 명호를 부르면, 관세음보살이 그 음성을 듣고 모두 해탈케 하느니라.”하고 나옵니다.

하지만 관세음보살은 법당에 모셔진 성화나 성상에서 보여지는 금빛 찬란하고 화려한 모습이기 보다는 중생의 근기에 맞게 중생의 가장 가까이에서 중생스스로 깨닫도록 해주기 위해 천수천안에 천백억화신의 여러 백 천 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 모습은 말 안 듣는 자식의 몸에 실려 나의 교만을 꺽어 주고자 나타날 수도 있으며, 지지리도 속 썩게 만드는 배우자가 되게 만들어 나를 불보살님 앞에 인도해주는 모습으로도 나타날 수 있는 것이며 아주 편안하고 넉넉한 도반의 모습으로 나타나 나를 불법에 인연되도록 해주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운명의 20%를 지탱해주는 인연법인 것입니다.

 

하지만 중생은 그런 관세음보살이 자신의 곁에 와서 깨우침을 주고자 해도 보는 눈이 없고 받아드리는 지혜로운 지극함이 없기에 보이는 모든게 원수로만 보이는 것입니다.

모든 인연과보의 열매는 열매가 맺기까지의 과정이 있는데 나무 한 그루 심어 놓고 느닷없이 열매가 맺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사람중생들입니다.

 

내가 스님 말 듣고 이 만큼 기도를 했는데 왜 안되냐고, 한다면 얼마나 업이 지중했으면 아직도 안되고 있는가는 깨닫지는 못하고 부처님을 원망하고 주변을 원망해서는 답이 안 나온다는 것입니다.

하찮은 고추는 봄에 심어 여름에 수확하고 과일 나무는 몇 년을 기다려야 첫 수확이 있게 되듯이 정성스레 가꾸며 결실을 기다리는 현명한 사람처럼 일상에서 늘 쉬지 않고 기도정신 수행을 하시면 불보살님의 가피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곁에 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자성이 청정하고 심외무법이라,” 마음 밖에 다른 법이 없으니 내가 있음으로 삼라만상이 존재하고 내 안에 팔만사천의 온갖 번뇌와 답이 들어있듯이 부처님이나 불보살님은 먼 곳에 계신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계신 불보살님께 가피를 청하는 기도가 어찌 타력이 될 것이며 기도로써 미움도 원망도 질투도 시기심도 일체 부질없는 중생심의 내 마음을 허공처럼 깨끗이 비워 버리면, 바로 그 마음속에 자성불은 함께 하시기 시작하는 겁니다.

 

“즉심시불”이라 마음이 부처로다 하듯이 본래 중생에게 불성이 있으나 중생심이 오욕락의 훈습에 길들여져 탐 진 치 삼독에 쉽게 빠져 들기에 자성불이 빛을 발하지 못하는 것일 뿐입니다.

 

기도를 함으로써 자신의 내면은 정화되고 업은 소멸됨과 동시에 기도의 시작과 끝에 일체 중생에게 기도의 공덕을 함께 나누려는 발원을 하는 순간에 소극적인 자기 정화의 기도는 적극적인 대공덕의 씨앗을 뿌리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행자가 되어 일상을 기도하는 마음자세로 생활하게 되면 자신의 내면이 평안해짐은 물론 가족 모두가 삶의 질이 달라져 갈 것이며 자신은 업력으로 인한 온갖 장애를 소멸함과 동시에 일체중생에게 기도의 공덕을 회향하는 발원을 하는 순간 우리는 동체대비의 부처님의 현훈가피와 명훈가피력이 항상 함께 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의 원력은 바로 내 안에 내재된 자성불의 생명력을 일깨우는 소리인 것입니다.

 

성불하십시요.

 

 백중기도 입재법문

반갑습니다. 오늘은  백중기도 입재일입니다.

 

기름 값은 천정부지요, 물가는 하루가 다르게 오르고 있는데도 모두를 위해 나라정치 잘해달라고 뽑아 놓은 대통령은 국민의 건강권을 무슨 이유와 어떤 이득을 얻기 위해선지 젤 먼저 미국에 팔아 먹어버리고 이렇게도 시끄러운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으니 이게 지금 그토록 입에 발린 말로 해대던 국민을 섬기는 정분가 싶기만 합니다.

 

거기다 대통령이 기독교인이라고 요소요소에 그 잘난 장 자리 차고앉은 기독교인들의 불교에 대한 처신은 차별을 넘어서 아예 없애고자 하는 오해 받을 짓들을 서서히 해대고 있습니다.

 

이게 다 물질이 최고라는 사고에 젖어 들어 국민 대다수의 경제우선주의가 험 많은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아 준 결과가 작금의 현실을 대변하고 있으니 물질만을 쫓는다는 것이 우리의 삶에 얼마나 무서운 시행착오를 가져오는지를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부터 백중기도가 시작되는 날입니다.

백중기도 때가 되면 가끔 이런 말을 하는 분들을 대할 때는 그저 답답하게 여겨지기만 할 뿐입니다.

 

“작년에 백중천도 재를 해드렸는데 또 해요?” 하고 묻는 분들이 있고 또, 기도도 돈이 있어야 하는데 부담스럽다고 하는 분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절이고, 교회고, 성당에도 돈 없으면갈 수 없다고들 합니다.

하기야, 돈 싫어하는 사람들이 어디 있습니까마는 부처님께서나, 예수님께서 지금의 대한민국에 와 계신다면 21세기 한국의 종교인들을 보게 되면 뭐라고 하실까 하는 황당한 생각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그런 생각들을 하신다면 그것은 자신이 가진 것이 없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잘못된 가치관입니다.

물론, 현실세계에서는 경제가 바로 현실이지만, 적어도 종교단체에서 만큼은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종교단체에서는 헌금 낸 액수를 대자보로 해서 입구에 붙여놓기도 하고 헌금액의 대소 과다에 따라 단체 내에서 소임도 본다고 하니 예수님께서 정말 후학들을 잘못 가르쳤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누누이 말씀드렸던 재물이 들어가지 않는 일곱가지의 보시가 있다고 했듯이 가진게 없고 돈이 없으면 몸과, 입과, 생각만으로도 얼마든지 그 날 하루를 타인을 위해서 봉사와 보시와 헌금을 할 수 있는 것이고 그렇게 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힘쓰고 힘들 功字, 덕 德字가 되는, 몸으로 무한공덕을 지을 수 있는 것을 몸으로 짓는 공덕을 하찮게 생각하고 재물보시를 더 크게 생각하고 자기 스스로를 비하하는 잘못된 우리의 신행 자세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사찰도 제대로 유지되고 운영하는 데는 물질이 필요는 하지만, 그것이 우선이 되어서는 종교는 병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고로 살아온 저이기에 아직까지 이렇게 살아가지만 그래도 제 마음 만은 어디 큰 절 주지 못잖습니다.

 

백중기도인 우란분재(盂蘭盆齋)는 불·법·승 삼보에 대한 지극한 믿음과 나를 이 세상에 존재하도록 해주신 부모에 대한 효도를 실천하는 행사이며, 이러한 기도를 행함으로써 내 자신의 무수겁동안에 지어온 신구의 삼업과 금생에 살아가는 앞길을 막고 있는 업으로 인한 장애와 다겁생의 악연의 고리를 정화시켜서 보다 나은 새 삶을 만들어 가기 위한 효도의 법석(法席)이자 자신을 새롭게 만들어 주는 자기 정화의 기회인 것입니다.

 

백중기도는 살아계신 부모님이나 이승을 하직한 부모님께 불효했던 행위를 참회하고 자신의 일상을 뒤 돌아보며 그런 자기 변화의 계기가 되어주는 지혜로운 삶의 이정표를 볼 수 있도록 등불이 되어주시는 불법승 삼보에 대해 감사의 공양을 올리는 날로 한마디로 도랑치고 가재 잡듯 은혜를 갚고 빚도 갚는 날이란 말입니다.

 

이 좋은 날을 그저 단순하게 천도재만 지내드리는 날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백중을 달리 불러서 우란분재, 또는 우란분절라고들 하는데, 이 말은 인도어에서 유래된 말로 “우란분”이라는 단어와 “재”의 합성어로 한문으로 번역하면 “도현(倒縣)”이라는 말이 되고, 도현은 거꾸로 매달렸다는 뜻으로, 지옥에서의 삶이 이와 같다고 합니다.

 

요즘 광우병 소에 대한 뉴스나 토론 장면을 보다보면 미국의 도축장 시설이 문득 문득 보일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 보면 목이 잘리고 깨끗이 털이 뽑힌 채, 내장은 다 빠지고 가슴은 열어젖힌 채, 거꾸로 매달려 있는 소의 전신을 보게 됩니다.

그런 장면이 나오면 저는 눈을 감고 합장하고 나무아미타불을 해주면서 저게 바로 지옥세계에서 거꾸로 매달렸다는 도현이겠거니 하면서 기도를 해줍니다.

 

이처럼, 지옥·아귀·축생이라는 삼악취에서 괴로움을 겪고 있을 인연영가들을 위해 살아있는 후손들이, 그들의 정토왕생과 피안과 차안의 모든 주인공들이 부처님의 바른 인과법을 알게 되기를 간절한 발원하는 49일간의 기도주간인 것입니다.

 

이런 기도하는 모습을 자식들에게 보여주고 실천함으로써 내가 우란분의 주인공이 됬을 때를 대비한다는 생각도 해 봄직도 한 것입니다.

 

초심에 蛇飮水하면 成毒이요 牛飮水하면 成乳라, 뱀이 개울물을 마시면 독을 만들게 되고 소가 개울물을 마시면 우유를 만들게 된다고 했지만 세상이 바뀌어 미국 목축업자라는 인간들의 이기심으로 요즘 소들은 우유보다도 프리온을 만들어 내버립니다만, 사람의 마음은 물과 같은 것입니다.

 

여름휴가에 바닷가에 가면 하얀 파도를 보고 시원함을 느끼고 시원하게 얼린 얼음냉수에 더위가 가셔지고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엔 우울증 환자들에겐 아주 위험한 날이 되지만,

현상은 인연에 따라 달라 보이지만 본질은 똑 같은 물에 불과한 것입니다.

 

맹물에다 설탕을 타면 설탕물이 되어 단맛을 내고, 소금을 타면 소금물이 되어 짠맛을 내게 됩니다.

물에 독을 타게 되면 독물이 되어서 그 물을 마시면 사람이 죽게 됩니다.

똑 같은 금이지만 인연 따라 팔찌도 되고 목걸이도 될 뿐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마음으로 부처님을 향하면 역시나 인연따라 내 안의 자성불은 그대로 온전한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49일 동안 우리는 위패의 주인공들인 일체 선망부모와 마음에 걸리는 일가친척 영가뿐만이 아니라, 금생에 살아오면서 인연 맺어진 유주무주 인연무연의 일체 영가들에게 무주상 무주착의 무상의 도리를 일러드려 일체 불급한 연을 정리하여 홀연히 가벼운 영이 되도록 해드리는 최대의 작법공덕의 날이자, 모두가 금생만이 아니라 다겁생래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알게 모르게 지었던 그 모든 업들을 49일간의 기도공덕으로 정화시키고 소멸시켜버리는 날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오늘로 해서 49일간의 공덕산에 오르는 여행이 시작된 것입니다.

모쪼록 이 49일 동안 집안에서 주부는 가족들의 업을 조금이라도 소멸해주기 위해서라도 남의 살을 음식의 재료로 덜 쓰시고 아예 안 쓰면 더욱 좋고 거사님들은 삼겹살 소주집에도 두 번 갈 것 한번만 가시는 49일 간의 공덕행에 동참해주시길 바랍니다.

 

성불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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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노인의 고백 / 이해인 


하루 종일

창 밖을 내다보는 일이

나의 일과가 되었습니다


누가 오지 않아도

창이 있어 고맙고

하늘도 구름도

바람도 벗이 됩니다


내 지나온 날들을

빨래처럼 꼭 짜서

햇살에 널어두고 봅니다


바람 속에 펄럭이는

희노애락이

어느새 노을빛으로

물들어 있네요


이왕이면

외로움도 눈부시도록

가끔은

음악을 듣습니다


이 세상을 떠나기 전

내가 용서할 일도

용서받을 일도 참 많지만

너무 조바심하거나

걱정하진 않기로 합니다


죽음의 침묵은

용서하고

용서받은 거라고

믿고 싶어요


고요하고 고요하게

하나의 노래처럼

한 잎의 풀잎처럼

사라질 수 있다면

난 잊혀져도

행복할 거예요

 

 


(시집, '작은 위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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