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법기도를 통한 진정한 자기변화

2010. 1. 17. 23:2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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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들이 사는 사바세계와 서방 극락세계의 중간에 있는 불국토의 수효를 헤아리면 서쪽으로 십만억불토가 있으니 십 만억의 불국토를 지나면 아미타부처님이 계시는 극락세계가 있다고 설해져 있지만, 사실은 십 만억이라는 거리는 다겁생 동안 훈습에 길들여져 살아온 중생심들이 십악을 십선으로 바꾸기가 얼마나 어려웠으면 한 가지 악업이 한 가지 선으로 바꿔질 때마다에 일 만억 불 국토라 이름했겠습니까?

 

한 가지 악업을 지켜내는 소극적인 계행보다도 보다 적극적인 보살행으로 죽이지 않기보다는 죽어가는 것을 살리고 부정적인 신구의 삼업을 안 짓기보다는 적극적인 보살선행으로 열 가지를 다 이루어 갈 때 바로 평상심이 보살행으로 닦여져 십 만억 불토를 지나온 주처정토의 그 자리일 것입니다.

하지만 중생심은 얼마나 허약한지 자비참법 제 1권의 단의에 나오는 대목을 말씀드리겠습니다.(자비참법 제 1권, 단의부분 낭독)

 

“ 오늘 이 도량의 동업대중들이여 ! 일심으로 자세히 들으라. 인과의 관계로 감응하여 나게 되는 것은 필연한 도리여서 어긋남이 없건만, 중생들의 업행이 순일하지 않고 악과 선을 번갈아 쓰느니라.

 

업행이 순일하지 않으므로 과보에도 정미롭고 거치른 것이 있어서 귀하고 천하고, 선하고 악한 일이 한결같지 않으며 만 가지 차별이 있느니라.

 

차별이 있으므로 본래의 행을 알지 못하고 알지 못하므로 의혹은 어지러이 일어나, 정진하고 계행을 지키는 사람은 마땅히 오래 살아야 할 것인데 도리어 단명하고, 도살하는 사람은 단명해야 할 것인데 도리어 장수하며, 청렴한 선비는 부귀해야 할 것인데 오히려 빈곤하고 도둑질하는 사람은 곤궁해야 할 것인데 도리어 잘 산다고 하느니라.

 

이러한 의혹은 어느 사람인들 그런 생각이 없으랴마는 이런 모든 것들이 과거의 업으로 받는 과보인줄을 알지 못하는도다.

반야경에 이르기를 “부처님의 경전을 읽는데도 남이 나를 천하게 여김은 과거에 지은 죄업으로 나쁜 갈래에 떨어질 것이로되 지금 다른 사람의 천대를 받는 연고로 전세의 죄업이 소멸된다.” 고 하셨거늘 중생들이 이 경의 말씀을 믿지 않고 지금 열심히 살고 있는데도 박복하다고만 생각하고 주변을 원망하는 이런 의심을 하는 것이니 이것이 다 무명의 망념으로 뒤바뀐 생각을 내는 것이니라.

 

또, 삼계의 안에는 모두 고통이요, 삼계의 밖이라야 낙인줄을 믿지 않으므로 세간에 물든 일들을 낙이라 하나니 만일 세간이 낙이라면 무슨 연고로 그 낙이 영원하질 않고 다시 고통을 받는가.

음식을 과도하게 먹어도 병이 생기고, 내지 의복에서도 근심과 걱정이 생기나니, 겨울에 베옷을 입게 되더라도 그나마 고마운 생각이 일지는 않고 원망이 앞서며 여름에 솜옷을 보기만 해도 괴로운 생각이 깊어지나니, 세상이 낙이라면 어째서 근심걱정이 생기겠는가. 그러므로 음식과 의복도 참으로 낙이 아니리라.

(이 대목은 자족할 줄 모르는 중생심)

 

또, 권속이 낙이라 한다면 마땅히 항상 즐거워서 그지없이 노래하고 웃어야 하거늘 어찌하여 잠깐 동안에 무상하여 문득 죽어 가는가.

 

지금까지 있다가 없어지고 저 때까지 있던 것이 이제 없어지면 땅을 치고 하늘을 우러러 울부짖고 창자가 끓어지는 듯하고 한번가면 만겁에도 돌아오지 않느니라.

이런 것들은 괴롭기 한량이 없건만 중생들이 전도된 생각으로 이것을 낙이라 여기고 세간에서 벗어나는 것은 괴로움이라 여기느니라.” ∼∼云云 ∼∼

 

또, “지금 이 경을 읽거나 참선을 하여 부지런히 고행을 하다가 몸이 조금 아프거나 피곤하면 문득 말하기를 경 읽고 참선하다가 이렇게 되었다. 고 말을 하지만, 만일 이나마 이런 수행을 하지 않았더라면 벌써 죽었을 지도 모르는 것이며 이런 수행을 하는 연고로 오늘까지 이른 것을 알아야 하느니라.”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여러분들이 백일기도에 동참하고 또 몇몇 분들은 자비 참법을 지극하게 봉행하여 신구의 삼업으로 지어온 열 가지의 십악을 참회하는 마음으로 자비참법을 열 번을 수행했다 쳐도 다겁생에 알게 모르게 지은 죄가 더 크다면 지금의 이러한 작은 기도로 모두 소멸시킬 수는 없지만, 이 나마라도 했기에 그래도 지금의 내가 있고 우리 가족들이 무탈하다는 생각으로 불보살님 전에 지극하게 감사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어느 정도의 기도성취에 이르시게 되면 불보살님들이 자신을 옹호해주시는 명훈가피를 스스로 느끼게 되고 스스로 체험하게 되실 것입니다. 기도의 가피는 여실한 것입니다.

 

다시 제 3권의 “현과보”를 읽어드리겠습니다.

3권 현과보의 顯은 나타나고 드러날 顯자입니다. ∼云云∼(제 3권 현과보 독송)

 

길흉화복이 모두 마음으로 짓는 것이고 백년동안 깜깜했던 방도 촛불하나에 어둠이 물러가고 밝음이 오듯이 내 안에, 내 것이라고 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이 마음 안에 한 자루의 초를 켜는 것을 바로 참회라고 하는 것이니 진실로 지극하게 참회하면 모든 죄를 다 멸한다 했습니다.

 

참회는 인도의 참마(참마)를 줄인 말이고 회(회)는 참마의 번역으로 스스로가 범한 죄를 뉘우쳐 용서를 구하는 것이지만 참회에는 삼종참법과 삼품참회가 있습니다.

 

첫째는 작법참(作法懺)이라 해서 규정된 작법에 따라 부처님 앞에서 참회를 하는 것을 말하고, 둘째는 취상참(取相懺)이라 해서 定에 들어 참회의 생각을 하면서 불보살님이 오셔서 정수리를 만져주는 듯, 상서로운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며 성죄(性罪)와 차죄(遮罪)가 멸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세 번째는 무생참(無生懺)으로 마음을 바로하고 단정히 앉아 무생 무멸의 실상을 관하면서 무명의 번뇌를 끊는다는 세 가지의 참법이 있습니다만, 이번 자비참법기도를 하신 분들과 지금껏 해온 참회기도에 동참해온 분들은 바로 작법참을 하신 것입니다.

 

죄를 참회하는데는 관무량수경에 아홉가지의 구품참회가 있지만 줄여서 세 가지의 삼품참회가 있으니첫째 상품참회(上品懺悔)는 온 몸의 털구멍과 눈으로 마치 피눈물이 흐르는 듯 참회하는 것을 말하고, 중품참회(中品懺悔)는 온 몸에서 땀이 나고 눈에서 피 눈물이 흐르는 듯 하는 참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의 하품참회(下品懺悔)는 온 몸에서 열이 나고 눈으로 눈물을 흘리는 참회를 말합니다.

이번 자비참법의 기도를 수행해 오신 분들은 그 동안 이런 경험들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평생 동안 가는 절마다 인연지어 수많은 불사에 동참해서 공덕을 지으면 공덕으로 끝날 뿐이고 평생을 입으로 아미타불을 부르면 뭘 합니까?

언제나 자기 몸뚱어리에 걸리고 내 자식들에게 걸려서 헤어나질 못하는 삶은 중생심에서 허덕거리기는 하등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진실로 내 마음을 비우고 내 생각을 부정을 긍정으로 어둠을 밝음으로 입다 못했을 때를 항상 생각하면서 지금 여기에도 만족하고 자족하며 내일 준비하는 삶이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삶일 것입니다.

 

자비참법의 열 번의 수행으로 기도를 마치시는 여러분들과 그동안 백일기도에 동참해오신 모든 분들은 신구의 삼업으로 지어온 열 가지의 죄업들이 한 번의 자비참법마다 한가지씩의 악업이 소멸되었을 것이니 서쪽으로 십만억불토가 바로 열 가지의 죄업들이 소멸되어 십악이 십선으로 바뀌는 자리가 바로 주처정토요, 십만 억이라는 거리가 사실은 본래자리임을 알아차리시기를 바랍니다.

 

성불하십시요.

 

참 나란 누구인가?

중생은 배고파 가출해둘 중 하나로 자수성가를 하거나 범죄자로 전락하고 마는데 거꾸로 세상의 모든 즐거움과 부귀와 환락과 권위와 한 생의 한갓 꿈에 지나지 않을 가족에 대한 애착을 다 버리고 한 밤중에 출가해서 인간의 몸으로 부처를 이루시어 여래 응공 정변지 명행족 선서 세간해 무상사 조어장부 천인사 불세존으로 불리시며 가출에 있어 시공을 초월하고 시대를 초월해서 무한한 존경을 받으시는 대표적 성공 케이스인 싯달타 태자가 태어나신 석가탄신일입니다.

 

사실 오늘 같은 날은 법문을 생략해도 되는 날입니다만, 그래도 혹시나 오실 분들이 계시리라 여겨 근대 한국불교계에서 선승으로 알려지셨던 스님들의 일화를 들으시는 가운데 이 한 몸의 헛것을 둘러싸고 있는 껍데기의 경계를 깨닫는 계기가 되셨으면 해서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돼지 껍데기가 맛있는 요리라는 광고도 있지만 중생의 허영심을 충족시켜주는 값만 비싼 죽어있는 명품 껍데기가 아니라 희노애락 우비고뇌의 여덟 빛깔의 칼라로 살아있는 나를 둘러싼 채, 부부간에도 형제간에도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욱 조심스럽게 대해야 하는 이것, 목숨처럼 여기고 조금만 흠집을 내도 얼굴빛이 달라지고 멱살잡이를 하고 사는게 중생들의 일반적인 삶이지만, 네 가지 견해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라는 네 가지 상으로부터 벗어나 버린 도인 스님들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어느 날 경허스님이 제자인 만공과 함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선사가 만공을 돌아보며 말하길, 만공당 !단청불사(丹靑佛事)를 좀 해야겠다.

우리 권선(勸善)을 하자, 허니 제자인 만공스님은 스승님의 말인지라 예! 하고 대답을 했고, 두 사람이 권선문을 만들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탁발을 해서 돈을 모은 후 경허스님이 말하길, “이만하면 불사하기에 넉넉하겠군.”하고는 경허스님은 제자 만공을 데리고 주막으로 들어가 술을 청하고는 한참이나 술을 마시던 선사의 얼굴이 취기와 겨울 추위 탓으로 붉으락푸르락해지고 주변에서 수근거리자 그때까지 아무런 말이 없던 만공이 취기가 올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스승님의 얼굴에다 주변 손님들의 눈치도 심상치 않은 듯하고 자신도 심기가 불편해져서 경허스님에게 말하길, “스님 단청불사하신다고 권선을 하시더니 부처님을 팔아서 술을 마시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하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자, 만공을 건네다 보던 경허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늘 말했지 않느냐? 내가 법당이며 부처님이라고, 내 얼굴을 봐라. 이만하면 단청불사가 훌륭하지 않느냐?” 했더랍니다.

 

제가 항상 말씀드렸다 싶이 마음이 부처라면 몸은 곧 마음 부처를 모셔둔 법당인 것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 모두가 법당 한 채씩 가지고 있어 아침 마다 아니면 수시로 미용실이나 피부 맛사지다 하면서 법당은 잘들 가꾸면서 정작 자기 안에 모셔둔 자성불이라는 마음부처를 가꾸는데는 인색하단 말입니다.

 

듣기로는 마음이 부처로다, 또, 마음 밖에서 다른 법을 찾지 말라 하는 구두선은 많이들 들으셨을 겁니다.

 

하지만, 중생의 마음이 부처라고 한다면 우리의 일상생활은 부처님 사시는 세계처럼 돼있어야 하건만, 우리의 현실은 광우병 쇠고기 파동에 시달리고 멀쩡하게 길 가던 학생을 지가 살기 싫다고 죽여버리지를 않는가, 평생을 기도생활로 살고계시면서 몇 생을 환생하셨다는 달라이 라마가 계시는 티벳이 중국에 침략을 당해서 저렇게 많은 세월 동안에 힘들게 인도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계시질 않나, 처처에 불교사원과 불상이 있는 민주정치가 들어설 찰나에 군부독재가 들어서 힘들게 살아가는 미얀마에 저렇게 자연재해가 일어나 불쌍한 서민들만 죽어 자빠지니 이게 우리 사는 중생계인데 그 이유가 어디에 있기에 세계가 미쳐 돌아가기 시작할까요?

 

경허스님이 천장사에 머물 때였습니다.

스님은 홀로 계신 어머님을 절에 모셔와 같이 살았는데, 인근에서 스님의 소문을 듣고 대중들이 날마다 들끓었는데 선사는 한마디도 법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보고 있던 경허스님의 어머님은 속으로 애가 타들어 갔는데, 사람들이 자신의 아들이 큰 스님이 되었다고 무리를 지어 몰려오는데 정작 자신의 아들인 선사는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한마디도 하지 않으니 자신의 자식을 자랑하고픈 어머님의 마음은 애가 탈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루는 단 둘이 있는 시간에 아들인 경허스님에게 청하기를, “사람들이 저렇게도 너를 보려고 오는데 한마디 법문이라도 해주면 어떻겠니?” 하고 넌지시 말을 하자, 스님은 아무런 말이 없다가 “어머님이 그렇게 소원이시라면 그렇게 하지요.” 하고는 시자에게 말하길 몇날 며칠 내가 법문을 할 것이니 신도들에게 알리라 하자, 선사가 법문을 한다고 하니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는데 그 중에는 궁에서 나온 상궁나인이나 벼슬아치들도 있었습니다.

 

선사가 법당으로 나아가 사람들 앞에서 법상에 상당(上堂)하여서는 한참이나 아무런 말이 없었다.

 

사람들은 선사의 입에서 어떤 좋은 법문이 나올지 마치 새끼 새가 어미 입을 바라보듯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윽고 선사가 앉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옷을 하나씩 벗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 생각에는 처음에는 겉옷만 벗는가 했는데, 결국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는 알몸이 됐고, 그러자 아낙네들과 상궁나인들은 흉측한 꼴을 봤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돌리고 사람들의 입에서는 놀라는 탄성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놀란 사람이 바로 스님의 어머님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남들이 큰스님이라고 불리는 당신 자식의 행동이 너무나 놀라고 부끄러워서 법당을 뛰쳐나가버렸습니다.

 

그때 그것을 본 선사는 혼잣말을 하듯이 “거참 이상하네, 어머니는 이제 이 자식이 자식으로 보이지 않고 남자로 보이는가 보군.” 그리고는 벗었던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고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법당에서 내려왔다고 합니다.

 

경허스님의 이러한 온 몸으로 법을 설하신 법문에 무엇을 느끼십니까?

여러분들 같으시면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부처 눈에는 처처가 다 불도량으로 보이고 돼지 눈엔 모든게 먹을 것으로만 보일 것입니다.

돼지에겐 요즘은 사료 한바가지겠지만 예전에 구정물 한바가지가 더 값어치 있을 것이고 개에겐 뼈다귀 하나가 목숨을 걸 일이지만,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은 돈과 명예, 거기다 수입 좋은 투기까지 온갖 탐욕이 바글 거리기에 지옥이 넘쳐나고 지옥가기 전에 지 살던 곳들을 지옥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굳이, 무학대사와 이성계의 한담이 아니더라도 중생은 모든게 제 눈에 안경이고 제 눈 높이로 일체 사물을 사량분별해서 뜻대로 되면 즐겁다고 들뜨고 뜻대로 안되면 스스로가 괴롭고 힘들어져 가는 것입니다.

 

경허스님의 법맥을 이은 만공스님이 수덕사에 계실 때였습니다.

고봉(古峰)스님은 술에 취하는 날이면 스승인 만공선사를

자주 헐뜯었습니다.

 

“만공, 그게 무슨 도인이야? 알기를 개떡을 알아?”하는 주정을 자주로 했는데, 그 날도 고봉스님이 거하게 취해있는데 만공스님이 제자인 고봉스님의 방 앞을 지나다가 이 소리를 들었습니다.

 

선사가 방문을 활짝 열어 제치며 소리를 치기를, “고봉! 내가 자네한테 잘못한 게 있는가? 왜 욕을 하나!” 하자,고봉스님이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며 만공스님에게 말하길, “스님 제가 왜 스님에게 욕을 합니까?

저는 만공에게 욕을 한 것이지 스님에게 욕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 만공과 내가 같은가 다른가?”하고 묻자, 이에 고봉스님이 만공스님을 향해 “할(喝)!”하고 소리쳐버렸습니다.

 

그러자 만공스님은 미소를 지으며 말하길, “취했구만, 어서

자게.” 하고는 방문을 닫아주고 가시더랍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그 연세가 들도록 하구 많은 세월 동안에 누구라는 이름으로 주민등록증에 온갖 문서에 그 이름들이 써가며 살아왔고, 아침마다 세수하고 화장하고 면도하면서 거울에 들여다보인 이 몸이 진정한 자기입니까?

 

아니면, 이 몸을 이날 이때까지 동서남북으로 끌고 다니고 온갖 것에 분별을 일으켜 끄달리게 만들어 희노애락과 우비고뇌로 이 한 몸을 괴롭게 만들어 온 그 한 물건이 진정한 자기입니까?

 

단하천연선사의 이야기를 끝으로 진정한 자기를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단하천연(丹霞: 739∼824)선사의 고향이나 본관, 성씨에 대해서는 분명한 기록이 없습니다.

법명은 천연(天然)으로, 어릴 때 유교(儒學)과 묵자(墨子)를 공부하여 구경(일반적으로 사서 :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을 말하고, 삼경: 시경, 서경, 역경을 말하는데, 삼경에 춘추와 예기를 합해 오경이라 부르지만, 여기서의 구경은 중국의 고전인 아홉가지 경서로 삼경은 같지만 예기춘추(禮記春秋), 효경(孝經), 논어(論語), 맹자(孟子), 주례(周禮)를 말합니다.)통달했었다고 합니다.

 

단하천연스님이 출가하기 전에 소위 고시준비생이었는데 방(龐)거사와 함께 과거시험을 보러 낙양(洛陽)으로 가는 도중에 주막에서 행각(行脚) 하는 스님을 만났습니다.

 

그들과 차 한 잔을 마시게 되었을 때 스님이 출가 전의 단하스님에게 묻기를 “수재(秀才)는 어디 가시오?” 하자, 예! 과거를 보러 갑니다.” “거 참, 공부가 아깝구나! 어째서 부처를 뽑는 곳으로 가지 않는가?” 하자, “부처를 어디서 뽑나요?” 하고 묻자, “강서(江西)에 마조(馬祖)스님께서 지금 생존하시어 많은 설법을 하고 계시는 데 도를 깨친 이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소. 그 곳이 부처를 고르는 곳이오.”하자, 두 사람은 전생부터 착한 인연을 심은 선연이 있는지라 둘이 의논하기를 우리가 과거시험에 합격했다 해도 늙음과 죽음은 피하질 못하는 것이니 영원히 사는 법을 찾아보자 하고선 즉시 길을 떠나 마조 선사를 뵙고 절을 하니 마조선사가 말했다.

 

“여기에서 남악(南嶽)으로 7백리를 가면 석두희천(石頭希

遷)장로가 돌 끝에 앉아 계신다. 그리로 가서 출가하라.”하

고 받아주질 않았습니다.

 

두 수재가 그 날로 길을 떠나 석두 선사를 찾아가니 석두선사가 묻기를 “어디에서 왔는가?” “강서에서 왔습니다.”“무엇하러 왔는가?” 수재가 마조 선사가 한 말을 그대로 옮기니 석두선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부엌에서 채공노릇이나 하면서 반찬이나 만들어라.” 부엌에서 일을 한 지 2년이 지나자, 하루는 석두선사가 내일 아침에 수재의 머리를 삭발시킬 요량으로 그 날 저녁에 동자(童子)들이 문안을 드리러 왔을 때 말하기를, “들어라. 내일 아침 공양을 마친 뒤 법당 앞의 한 무더기 풀을 깎아야겠다.”하자, 이튿날 동자들은 제각기 낫과 괭이를 들고 나왔으나, 수재만은 머리 깎는 칼과 물을 가지고 와서 석두 선사 앞에 꿇어앉았다.

 

선사가 고개를 끄덕이고 웃으며 그의 머리를 깎아 주었다.

머리를 깎고 나니 수재의 정수리가 봉우리처럼 볼록 솟았는데 석두 선사가 이를 어루만지며 말하길 “천연스럽구나.” 하자, 수재는 머리를 다 깎고 나서 석두선사에게 절을 하면서 말하길, “이름을 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석두선사가 물었다.

“내가 언제 네 이름을 지어 주었드냐? 하고 물으니 조금 전에 “천연”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하고 천연덕스럽게

말을 하자” 이에 석두선사는 더욱 그를 사랑하여 많은 가르침을 주었고, 마침내 천연은 석두 선사의 법을 잇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단하 선사는 생각을 활짝 풀어 놓고 행각 길에 올라 자유자재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선사가 행각을 하다가 날이 어두워 낙양의 혜림사(慧林寺)에 잠시 몸을 의탁했습니다.

겨울인데다 그날따라 날이 매우 추웠는데도 그 절의 원주가 너무나 구두쇠라서, 행각승인 선사의 방에는 군불하나 때지 않고 그냥 자라고 했습니다.

하도 방이 추워서 선사는 바깥으로 나와서 땔 것이 있는지 찾아보았지만, 땔만한 나무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법당에 가보니 목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사는 목불을 꺼내다 쪼개서 불쏘시개로 쓰자, 연기 냄새를 맡은 원주가 선사의 방에 와서 물었다.

“무얼 때시오?” “목불을 쪼개어 때고 있소.” 그러자 원주스님은 펄쩍 뛰며 “아니 부처님을 불쏘시개로 때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소?” 그러자 선사가 천연스럽게 말하기를 “부처님을 다비해서 사리를 얻으려는데 무엇이 잘못되었오?” 하자, 원주가 더욱 화를 내며 “아니, 나무로 만은 부처에 무슨 사리가 있단 말이오?” 하자, 선사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사리도 않나오는 부처가 무슨 부처라고, 펄쩍뛰고 그러시요 하자, 원주가 꼬리를 내렸다고 합니다.

이 일을 두고 어떤 스님이 진각(眞覺)대사에게 물었다.

 

“단하는 목불을 태웠고 그 절의 원주는 펄펄 뛰었는데 누구의 허물입니까?” 진각대사가 말하길, “원주는 부처만을 보았고 단하는 나무 토막만 태웠느니라.” 했답니다.

 

여러분 법당에 계시는 등신불이 부처님 그 자체는 아닙니다. 하지만, 법당불을 통해 내 안에 들어있는 자성불이 깨어나 진실로 부처를 볼 줄 알아야하고 부처를 이루기 위해서 살아가는 가는 용기와 지혜가 있어야 세세생생 악도에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 한생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 또 명심하고 살아들 가시길 바랍니다.

 

오즉해서 서양종교에서도 예수님 믿으면 천국 간다고 하잖아요. 죽으면 천당이든 지옥이든 어딘가는 가게 되니깐 그런 소리들을 하잖겠어요.

 

성불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