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앞길은 자기가 닦아야 합니다.

2010. 1. 15. 21:15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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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보조 지눌스님과 그 누님의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

 

보조지눌(普照知訥: 1158 - 1210)국사는 고려 중기대 스님으로 속성은 정(鄭)씨이고 법명은 지눌이라합니다.

호는 목우자(牧牛子), 시호는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로 불리는데 8살에 출가하여 1182년에 승선(僧選)에 뽑혔던 스님인데 그 출가에 참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져 오기에 여담으로 전해드립니다.

 

태어날 때부터 허약하고 병이 잦아 백방으로 약을 구하여 썼으나 효험이 없자, 아버지는 동네 뒷산 절에 올라가 불전에 기도를 올려 병만 낳으면 자식을 부처님에게 바치겠다고 맹세하고 집에 돌아오자 씻은 듯이 언제 그랬냐는듯이 병이 나아 잘 놀고 있어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저 어린 것을 절로 보내기에는 너무 마음이 아파 다시 미루고 있었더니 몇 개월 지나 또 아프자 다시 동네 뒷산 절에 올라 기도를 하고 내려오자 또다시 낫고 하기를 네 번째에 결국은 절에 보내기로 결정하고 8세 때 부모가 정해준 대로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사굴산파(사堀山派)에 속했던 종휘(宗暉)스님에게 출가를 시키게 됩니다.

 

전라남도 청량사(淸凉寺)에서 육조단경(六祖壇經)을 열람하다가 “진여자성(眞如自性)이 생각을 일으키매 육근(六根)이 보고 듣고 깨달아 알지만, 그 진여자성은 바깥 경계들 때문에 물들어 더럽혀지는 것이 아니며 항상 자유롭고 자재하다.”는 구절에 이르러 문득 깨닫게 됩니다.

바로, 심성(心性)의 본바탕을 발견한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당시의 불교계는 선종과 교종의 대립이 심각해 서로의 우열을 논하면서 시비만을 일삼았던 시절인데, 보조스님은 선과 교가 모두 부처로부터 비롯된 것인데 어찌 서로 담을 쌓고만 있는가를 의심하다가 엄경 여래출현품에서 “여래의 지혜가 중생의 몸 가운데 있건만 어리석은 범부는 스스로 알지 못하도다.”라는 구절에 이르러 크게 깨닫고, “부처의 말씀이 교가 되고 부처의 마음을 조사(祖師)들께서 전한 것이 선이 되었으니, 부처나 조사의 마음과 말씀이 서로 어긋나지 않거늘 어찌 근원을 생각지 않고 아는 것에만 집착하여 부질없이 쟁론을 일으키며 헛되이 세월만 소비하고 있는가.”하는 선교일원(禪敎一元)의 원리로 원돈관문(圓頓觀門)의 사상을 세워 부처의 마음과 말씀이 둘이 없는 원칙에서 선교불이(禪敎不二)의 원리를 세워 당나라 규봉종밀(圭峰宗密)화상의 저술인 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에서 선교합일의 이론을 정립하여, 서로 분열하고 있던 선교양종에 대하여 선교합일 회교귀선(會敎歸禪)이라는 우리나라 불교의 특수한 종지를 세우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의 송광사에서 불교 중흥을 위한 결사를 하게 되시는데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라는 결사문에서 마음을 바로 닦음으로써 미혹한 중생이 부처로 전환될 수 있음을 천명하였고, 그 방법은 정(定)과 혜(慧)를 함께 닦는 정혜쌍수에 있다고 했습니다.

 

정과 혜의 두 가지는 한 마음이라는 일심위에 통일되어 늘 균형을 지녀야 된다고 본 것인데, 이것은 한 부처의 가르침이 선교양종·정혜이파(定慧二派)로 분열되어, 정과 혜가 한마음 위에 통일될 때 온전한 불교공부가 된다는 것을 망각한 채, 시비를 일삼아왔던 당시 불교계 수행법에 대한 깊은 자각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스님의 이러한 결사운동은 정법 불교로의 복귀 작업이었고, 결사문은 부패하고 타락된 당시의 불교현장을 이념적 또는 형태적으로 혁신하고 재건하기 위한 일대 선언서였던 것입니다.

 

10여 년 동안 송광사를 중심으로 새로운 선풍을 일으키시다가 1210년 3월 27일 대중들과 함께 선법당(善法堂)에서 문답을 끝낸 뒤 주장자로 법상(法床)을 두 세 번치고 “천 가지 만 가지가 모두 이 속에 있다.”는 말을 남긴 다음 법상에 앉아 입적하시게 됩니다.

 

주장자를 친 그 자체에 천만 가지가 들어있지 않고 주장자를 칠 때, 보이지 않는 소리를 보이지 않는 귀로 들어 마음이 분별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보조스님의 말씀대로 천만가지 이치를 명확히 알 것이지만, 그 소리를 듣고 단 하가지라도 분별을 일으킨다면 어쩔 수 없는 중생에 불과하단 말입니다.

 

당시에는 자기 아는 것으로 인한 시비 분별이 일고 있었지만, 요즘 세상은 물질을 수반한 온갖 재물 신으로부터 오는 유혹을 이겨내는 자기 수행이 더욱 절실한 세상이 되어 버렸으니 보조스님께서 요즘 세상에 계셨더라면 어떤 결사가 일어나야할 지 싶습니다.

 

바로 이런 스님이 보조스님이셨는데, 스님에게는 누님이 한 분계셨는데, 스님이 누님에게 항상 염불을 하라고 할 때마다 그 누나가 말하기를, “내게는 부처님같이 훌륭한 아우가 있는데 염불공부를 해서 뭐해? 내가 그 힘든 도를 않 닦더라도 다른 사람까지 제도해 주는 아우가 있는데 나 하나쯤 좋은 곳으로 제도시켜주지 않을건가?” 하고 말하고는 매냥, 노는데만 정신이 팔려 있더란 말입니다.

 

보조스님은 말로써는 누님을 제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다른 방법을 쓰기로 했는데, 어느 날 누님이 절에 오는 것을 미리 알고 스님은 방에 진수성찬을 가득 차려 놓고는 누님이 들어오자 국사는 한번 힐끔 쳐다보고는 말하길, “누님 오셨습니까? 앉으십시오. 막 공양을 하려던 참입니다.” 하고는 스님은 혼자서 음식을 맛있게 들고는 상을 물려버렸습니다.

 

전에 없던 일로 누님은 섭섭하고 노여운 감정이 일어나서 말하기를 “스님이 오늘은 왜 이러나? 무슨 말씀입니까, 누님?” 하고 시침을 뚝 떼자, 누님은 화난 목소리로 말하길, “무슨 말이라니? 나는 그만 집으로 갈라네.” 하고 돌아서자 “진지나 잡숫고 가셔야지 먼 길을 그냥 가시면 시장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하자 누님은 더욱 화가 난 목소리로, “밥을 줄 생각이 있으면서 이제까지 있었나? 몇 십리를 걸어온 사람을 보고 음식을 먹으면서도 한번 먹어 보라는 말도 없으니 그게 사람이 할 짓인가?” 하고 화를 내자 보조스님은 정색을 하고 말하기를, “아니 누님, 제가 이렇게 배가 부르도록 먹었는데 누님은 왜 배가 아니 부르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누님은 기가 차다는 듯이, “밥은 자네가 먹었는데 어찌 내 배가 부르단 말인가?”하고 받아치자 보조스님은 때는 이때다 싶어서 말하기를 아니 누님은 항상 말하기를 “제가 도를 깨치면 누님도 제도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동생이 배부르면 누님도 배가 불러야 하지 않겠습니까?”하자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가? 밥은 창자로 들어가고 염불은 마음으로 하며 정신이 극락을 가는 것이니 밥 먹고 배부른 것과는 다른 것이 아닌가?” 하자 스님이 얼른 받아치기를 “그렇습니다. 누님, 제가 음식을 먹어도 누님이 배부르지 않듯이 내 마음으로 염불을 하면 내 영혼은 극락을 가도 누님은 갈 수 없습니다. 누님이 극락에 가고 싶으면 누님의 마음으로 염불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죽음을 대신하지 못하는 것처럼 극락도 대리극락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말을 마치고 스님은 누님의 점심상을 차려오게 하고 말하기를, “누님, 이 동생이 제도해 줄 것을 믿지 말고 누님의 지극정성으로 염불하는 마음을 내시어 내생에 극락으로 가도록 하십시오.” 했더랍니다.

 

그 날 이후로 보조스님의 누님은 지성으로 염불을 하며 수행했다고 합니다.

 

입구에 간이화장실 옆에 자두나무에 떨어진 자두는 꿀벌이나 작은 벌레들의 달콤한 양식이 되고 원빈이가 흘린 밥은 개미들의 넉넉한 겨우살이 식량이 되고 원빈이 물그릇에 고인 물은 목마른 새들에게 목을 축여줄 수 있고 베어진 나무그루터기는 지친 나그네에게 편안한 자리를 줄 수 있듯이 세상에는 아무리 하찮은 것일지라도 존재하는 이유가 다 있는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 대하는 모든 사물과 현상을 통해 지혜를 찾고 볼 수만 있다면 그 자리에는 이미 부처나 예수나 조사가 다 분시구에 불과한 것입니다.

 

설거지 하는 싱크대 수돗물에서 막힘없는 용심의 지혜를, 깨끗해지는 그릇에서 청정을, 걸레질 속에서 맑아지는 마음을 찾고 볼 수 있는 정신세계에 도달하신다면 그리고 일상에서 그대로 생활화가 된다면 그 자리는 바로 평상심이 바로 도인 것이란 말입니다.

 

그런 자리에 먼저 터파기 공사를 하기 위해선 염불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성불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