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禪)에서의 중도(中道)/성철스님

2010. 1. 14. 21:58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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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근본사상]



     2. 불교 최고 원리는 중도(中道)

 

    (2) 선(禪)에서의 중도(中道)

    그러면 선종(禪宗)은 또 어떠했던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육조스님께서 입적(入寂)하실 때에
    제자들에게 최후 유촉(遺囑)으로써 누가 묻지 아니하는데
    스스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無問自說]「너희들은 보통 사람들과는 달라야 하니
    내가 멸하고 난 뒤에도 각각 한 곳의 스승이 되어야 한다.
    내가 지금 너희들에게 법문하는 방법을 가르쳐
    선종의 근본 종지를 잃지 않게 하겠노라.
    모름지기
    삼과법문(三科法門)동용삼십육대(動用三十六対)를 들어서 말하리니
    나고 듦에 양변을 떠나고 일체 법을 설할 때에 자성을 여의지 말라.
    혹 어떤 사람이 와서 너희에게 법을 묻거든 말하되,
    모두 쌍(双)으로 하여 다 대법(対法)을 취하고
    오고 감에 서로 원인이 되어 마침내는 두 법을 모두 없애어
    다시 갈 곳이 없게 하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나오든지 들어가든지 간에 양변을 떠나라」 하신 그 근본 뜻은
    「무슨 법문을 하든지 양변을 떠나서 법문을 해야지
    양변에 머물러서 법문해서는 안된다」고 하신 말씀이며
    그렇게 하면 불법(佛法)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말씀하시되 「쌍(双)으로 하여 다 대법(對法)을 취한다」고 하신 것은
    누가 법을 물어오면 예컨대, 누가 있음(有)을 물으면
    없음(無)을 들어 쌍(双)으로 대답하여
    언제든지 대대(對對)로 말하라는 것입니다.

    「가고 옴에 서로 원인이 되게 하라」 하신 뜻은
    있음(有)이란 없음(無)이 있기 때문에 있음(有)이 있고,
    없음(無)이란 있음(有)이 있기 때문에 없음(無)이 있다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세간의 법은 모두가 상대법이어서
    독립적으로는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상대법이란 결국은 생멸법입니다.
    생멸법은 불법이 아니기 때문에
    구경에 가서는 두 법[二法]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
    곧, 양변을 떠나 버린다는 것입니다.

    「다시 갈 곳이 없게 하라」 하신 뜻은
    그래서 상대법이 다시는 발도 못 붙이게 뿌리를 뽑아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있음(有)과 없음(無)을 완전히 버릴 것 같으면
    오고 감에 서로 원인이 되어서 중도(中道)를 이룬다고 하는 것입니다.
    양변을 완전히 떠나는 것이 중도이므로 양변에 머문다면,
    있음에 머물든지 없음에 머물든지 간에
    한쪽으로 머물러 집착하게 되면 그것을 변견이라고 합니다.
    변견이란 세간의 생멸법이지 불법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법은 양변을 떠나 중도를 성취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에게 설법을 할 때에도 중도에 의거해서 설법을 해야지
    중도를 벗어난 설법을 하면
    불법의 종지(宗旨)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육조단경 가운데서도 돈황본(燉煌本)이 가장 오래되었다고 하는데
    글자는 몇 자 틀리는 것이 있어도 그 뜻은 위와 같습니다.
    그래서 육조스님의 최후 유촉이 중도에 있다는 것은
    어느 학자도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생각하여 볼 것은
    내가 지금까지 선(禪)과 교(敎)를 나누어서 많이 설명했는데
    교(敎)에서도 중도를 근본으로 삼았고,
    교(敎) 밖에 따로 전했다고 하는 선(禪)에서도 중도를 근본으로 삼았으니
    선과 교가 다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근본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교(敎)는 교시불어(敎是佛語)라 하여 <교(敎)는 부처님의 말씀>
    말로써 말을 전한다는 것[以言伝言]이며,
    선(禪)이란 선시불섬(禪是佛心)이라 하여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한다는[以心伝心]것이 다른 것이지
    부처님의 근본 진리는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가에서도 선가에서도
    불교의 근본을 중도에 두었던 것입니다.

    그 이후 선가에서도 역사가 흘러 오가철종(五家七宗)으로 나뉘어져,
    조사스님네가 많이 나오고 깊은 법문이 많았지만 그 표현방법은 틀려도
    육조스님의 유촉과 같이
    중도라는 근본 종지를 벗어나서 설법을 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육조스님의 유촉을 충실히 실천한 사람들입니다.

    조동종의 개초(開租)인 동산(洞山)선사가 지은 오위송(五位頌)이 있는데
    그 끝머리에 있는 말을 인용합니다.

    「있음(有)과 없음(無)에 떨어지지 아니하니 누가 감히 화답하리오」
    (不落有無誰敢和)
    「도무지 일체의 있음(有)과 없음(無) 등의 견해가 없고
    또한 없다는 견해도 없는 것이 불법을 바로 보는 견해라고 한다」
    (都無一切有無等見 亦無無見 名正見)


    있다(有), 없다(無)고 하니
    있다 없다는 한 쌍만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를 들어 말하는 것이니 변견을 버린다는 뜻입니다.
    왜 하필이면 있음과 없음을 말하느냐 하면
    이 있음과 없음이라는 것은
    모든 일체의 견해가 이 두 가지에 귀착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변견을 말할 때 대표적으로 있음과 없음을 예로 많이 드는 것입니다.

    또 일체의 있음과 없음의 두 견해 등이
    없다고 하면 또 없다는 것에 집착하게 되니
    없다는 그 생각이 있으면 그것도 변견이므로
    없다(無)는 견해도 또한 굳이 고집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조스님의 제자 되는 대주(大珠)스님의 말씀입니다.

    「있음(有)과 없음(無)을 보지 아니하면
    곧 바로 부처님의 참 모습을 보느니라」
    (不見有無 郞時見佛質身)

    「마음에 이미 양변이 없으면 가운데(中)도 또한 어찌 있을 것인가.
    다만 이렇게 얻은 것을 중도(中道)라 이름하니
    참으로 여래의 길이니라.」
    (心旣無二辺 中亦何有龍 但得如是者 卽名中道 眞如求道)


    내가 법문할 때마다 중도, 중도하니
    어디 말뚝 박히듯이 박혀있는 것으로 생각할지 모르나
    자로 선을 긋듯이 분명하게 한가운데라는 것이 아닙니다.
    표현하자니 ‘가운데(中)’라 하는 것입니다.
    가운데서도 설 수 없는 그것을 억지로 이름 붙여 가운데라 하는 것이지
    가운데에 설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그
    것도 집착이며 변견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조동종에서도 양변을 떠난 것으로 구경법을 삼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육조대사, 백장선사, 대주선사, 동산선사 등
    선종의 대표스님들의 어구를 인용했는데,
    이런 큰스님들도 불법(佛法)의 근본을 말할 때는
    양변을 떠난 중도(中道)를 밝히신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선(禪)과 교(敎)를 통해서
    중도(中道)가 불교의 최고 원리라고 함에는 일치하나
    중도를 표현하는 방법에는
    선과 교가 틀린다는 것에 의아심을 가질런지 모르겠습니다.

    천태종은 양변을 다 막고 두 법을 다 버친다[双遮二辺 双照二諸]고 하고,
    청량스님은 쌍차쌍조(双遮双照)라고 했는데,
    선문(禪門)에서는 양변을 떠나는 것만 얘기하고 있으니
    쌍차(双遮)만 말하고 쌍조(双照)는 말하지 아니한 것이 아닌가?
    중도를 반만 표현한 것이지,
    전체를 표현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고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쌍차(双遮), 양변을 막는다는 것을 양변을 떠나는 것을 말하며,
    쌍조(双照), 양변을 비춘다는 것은 양변이 완전히 융합하는 것을 말합니다.
    양변이란 모두 변견인데 변견을 버리면 중도(中道)입니다.

    하늘에 구름이 걷히면 푸른 하늘에 해가 그대로 드러나고,
    해가 완전히 드러나 있으면 구름이 완전히 걷힌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름이 걷혔다는 것은 해가 드러났다는 말이며,
    해가 드러냈다는 것은 구름이 걷혔다는 말과 같습니다.

    쌍차(双遮)란 양변을 완전히 떠나니 구름이 걷혔다는 말이고,
    쌍조(双照)란 양변이 서로 융합한다는 말이니
    결국엔 해가 드러나 비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구름이 걷혔다는 것은 즉 해가 드러난 것이며,
    해가 드러났다는 것은 구름이 걷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쌍차가 쌍조며 쌍조가 즉 쌍차입니다.

    부처님이나 예전 조사스님들이
    쌍차로서만 얘기할 때도 있고, 쌍조로서만 얘기할 때도 있어
    그때 그때의 입장에 따라 그 표현방법이 전혀 틀린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쌍차라 하면 쌍조의 뜻이 내포되어 있고,
    쌍조라 하면 또한 쌍차의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한쪽으로 집착하여 쌍차만 말한다고 해서 쌍조를 모르는 사람이 아닌가?
    쌍조만 말한다고 해서 쌍차를 모르는 사람이 아닌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한다면
    내 법문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쌍차보다는 쌍조에 대한 이해가 더 어렵습니다.

    현수대사는 쌍차쌍조(双遮双照)를 쌍민쌍존(双泯双存)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쌍민(双泯)이란 쌍차(双遮)로써 양변이 다 없어지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며,
    쌍존(双存)이란 쌍조(双照)로서 양변이 다 있다는 것입니다.
    양변이 완전히 없어지면 양변이 완전히 있다는 것이며,
    생멸하는 양변이 다 없어질 것 같으면
    불생불멸하는 절대적인 양변이 성립된다는 것입니다.

    표현을 달리해 보면
    전체를 부정(否定)하면 전체를 긍정(肯定)하는 것입니다.
    쌍존(双存)이란 생멸 변견의 견해와는 틀립니다.
    생멸의 생존은 있음(有)과 없음(無)이 서로 통하지 못하고
    상극 모순된 현상 그대로이니
    있는 것은 영원히 있고 없는 것은 영원히 없다고 생각합니다.
    불은 영원히 불이고 물은 영원히 물이므로
    서로서로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정된 후의 긍정으로서의 쌍존(双存)이란
    양쪽이 다 있으면서 서로 융통한다는 것입니다.
    있음이 즉, 없음이며 없음이 즉, 있음이어서
    완전히 서로서로 상통하여 원융무애하므로 서로 융합하는 것입니다.
    물질적으로도 물을 불로 쓸 수 있고
    불을 물로 쓸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도 서로서로 각기 상극된 변견을 고집하면 서로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언제든지 내가 옳다 하고
    저는 언제든지 제가 옳다고 하므로 융화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도의 입장에서 서로서로 시비를 다 버린다면 서로 통하게 되는 것이니
    사회적으로도 모든 상극모순의 투쟁은 영원히 없어지고
    진정한 행복과 평화가 실현될 것입니다.
     


    《註》

    -. 삼과법문(三科法門)
    삼과법문이란 「음(陰)」과 「계 (界)」와「입(入)」을 말한다.
    음(陰)이라 함은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의 오음(五陰)과
    입(入)이라 함은 밖으로 육진(六塵)인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과
    안으로 육문(六門)인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를 합하여

    법문을 함에 있어 서른여섯 가지의 상대되는 법을 들어
    양변을 여의어 설법하라고 하신 것이다.   


    * 법문 출처 : 해인지 <해인법문>
                       대한불교 조계종 홈페이지

    서로 기대어 살아가는 우리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볼 때가 있습니다.
    이 지구상에 발 딛고 살아가는 사람
    그 어느 누구도 나와 무관한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 시대에 태어나
    같이 살아간다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인연이라는 생각을...
    이런 생각을 할 때면 나는
    주위 사람들을 너무 소홀히
    대하지는 않았나 반성하게 됩니다.
    아주 커다란 인연의 끈으로
    만난 사람을 소중히 여기지 못한
    내 못남을 스스로 꾸짖는 것이지요
    빌 오히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에
    참으로 많은 에너지를 얻는다.
    특히 어떤 사람을 사랑할 때마다
    많은 에너지를 얻게 된다.
    또한 거기서 받은 에너지의 일부를
    다른 누군가에게 제공한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서로 어깨를 기대고 체온을 나누며
    살아야 하는 존재인가 봅니다.
    사람의 손이 따스한 체온을 나누며
    서로 깍지를 끼고 살아가라고
    다섯 손가락으로 이루어져 있듯이...
    ["행복 비타민"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