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과 제자, 그 1만 겁의 인연

2010. 1. 15. 21:3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오매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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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끄 루이 다비드, <소크라테스의 죽음> 1787년, 129.9×195.9 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스승과 제자, 그 1만 겁의 인연

 

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곳을 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뿐이다.”

 

대숲에 어지러이 부는 바람만이 가득한 화면으로 시작되는 한국영화 <달콤한 인생>의 오프닝 장면의 내레이션은 바로『육조단경 六祖壇經』29則에서 혜능대사께서 던진 화두인 <비풍비번 인자심동 非風非幡, 仁者心動>였습니다.

 

어느 듯 기축해가 다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맘 때 쯤이면 가는 한 해를 되돌아보고 잠시 멈추어 지난 삶을 반추해 보게 됩니다. 매 순간 숨가쁘게 달음질쳐 왔지만 늘 그렇듯 무언가 중요한 것을 여전히 놓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여 허허롭기만 합니다. 사랑하는 이가 있어 그에게 사랑한다는 말 건넬 수 있고, 한 해의 마지막과 시작에 찾아가 뵐 스승님이 계시다면 더없이 행복한 일이겠지요.

 

여기에 18세기 프랑스 화가 자끄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 1748년– 1825년)의 그림 한 점이 있습니다. 이 그림의 제목은 <소크라테스의 죽음>입니다. 다비드는 절제된 신고전주의의 화풍으로 이제 막 죽음을 맞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Σωκρáτη, 기원전 470년 경 - 기원전 399년)와 그의 죽음을 바라보는 제자들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곧 닥쳐올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소크라테스 주변으로 존경하는 스승과의 이별을 안타까워하는 제자들의 슬픔이 다양한 포즈로 형상화되어 있습니다. 소크라테스에게 잔을 건네는 붉은 옷의 제자는 차마 스승을 바로 쳐다볼 수 없어 자신의 흐르는 눈물을 한 손으로 누르며 손에 든 독배를 건네고 있습니다. 반쯤 흘러내린 붉은 의상 아래 울먹이는 어깨가 서럽습니다. 또한 홀로 뒤돌아서 통곡하는 화면 우편의 한 제자의 하늘을 향해 펼쳐진 절망의 손가락과 좌측 아치형의 복도 벽에 이마를 대고 흐느끼는 제자의 손바닥이 화면 전체에 흐르는 애통함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절망과 상실감에 사로잡혀 얼굴을 가리고 울먹이거나 자신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고 있습니다. 아치형 복도 너머의 계단으로는 죽음을 뒤로 하고 총총히 일상으로 돌아가는 몇몇 지인들도 보입니다.

 

소크라테스 곁에 앉아 그의 무릎에 한 손을 얹고 눈동자를 맞추며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이도 있습니다. 그가 소크라테스의 친구이자 제자였던 크리톤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다'(Dura lex, sed lex)라는 말로 유명합니다. 하지만 플라톤의 대화록 중 <파이돈Φαίδων>에 따르면, 사실 그가 남긴 마지막 유언은 “오, 크리톤.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내가 닭 한 마리를 빚진 게 있네. 기억해 두었다가 꼭 갚아주게."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의학의 신이자 치유의 신이었던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육체를 벗어난 정신의 자유로움에 관련된 은유이기도 합니다.

 

생과 사가 교차하는 이 순간에 침대 발치에 두 손을 모우고 고개를 숙인 채 고요히 사색에 빠진 듯 보이는 이가 바로 플라톤(Πλάτων, 기원전 427년-기원전 347년)입니다. 마치 고대 신화 속에 나오는 영웅마냥 건장한 체구의 소크라테스가 당당히 위로 치켜든 손가락은 일반적으로 사사로운 감정에 연연해 않는 현자의 냉철한 이성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아마도 플라톤만이 자신의 스승 소크라테스의 손가락이 지니는 진정한 의미를 파악했던 모양입니다. 다비드의 화폭에서 ‘현상너머의 실재’의 파악이라는 절실한 마지막 가르침이 스승에게서 제자에게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다비드는 이러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게 반짝이는 흰빛 의상을 입혔습니다.

 

이 그림을 보면서 석가모니와 가섭존자의 이야기가 자연스레 떠올랐습니다. “영산(靈山)에서 범왕(梵王)이 석가에게 설법을 청하며 연꽃을 바치자, 석가가 연꽃을 들어 대중들에게 보였다. 사람들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였으나, 가섭(迦葉)만은 참뜻을 깨닫고 미소를 지었고 이에 석가는 가섭에게 정법안장(正法眼藏:사람이 본래 갖추고 있는 마음의 묘한 덕)과 열반묘심(涅槃妙心:번뇌와 미망에서 벗어나 진리를 깨닫는 마음), 실상무상(實相無相:생멸계를 떠난 불변의 진리), 미묘법문(微妙法門:진리를 깨닫는 마음) 등의 불교 진리를 전해 주었다.”(네이버백과사전)

 

‘뭇 사람 속에서 그 사람을 천 번 백 번 찾았네 衆裏尋他千百度’라고 하는 고인의 싯귀를 연구실 한 켠에 두고서 이따금 눈길을 준다는 한 국문학자의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석가의 연꽃과 가섭의 미소, 소크라테스의 손가락과 플라톤의 명상의 경우처럼 인간의 삶 속에서 훌륭한 스승과의 만남만큼이나 행복한 일이 또 있을까요? 불가에서도 스승과 제자는 1만 겁의 인연이라고 한다지요.

 

3년 전 우연히 뵙게 된 사진 속 청화 淸華 큰스님의 맑은 미소가 세상에 대해, 사람에 대해 냉소적이기만 했던 한 중생의 삶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연이 짧아 살아 생전에 친견한 적 없지만 스님이 지으시던 미소만으로 그 때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향기에 이끌리어 봄철 꽃마냥 행복감, 조금 더 정확히는 안도감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청화스님께서 쓰신 『가장 행복한 공부』(시공사 2003년)를 읽게 되었습니다. 동과 서를, 철학과 과학을 넘나드시는 스님의 통찰력있는 글은 매혹적이었습니다. “... 모든 상을 떠나고 허망 무상한 현상을 떠나서 영원한 것, 또 생사를 초월하고, 더함도 덜함도 없는 일체 존재의 근본인, 그러한 생명의 본체를 알기 위함이다.”(앞의 책, p.78) 서양철학에 어설피 익숙한 중생에게 스님이 들려주시는 불교사상과 접목된 이 소크라테스의 ‘무아경’ 이야기는 이해의 새로운 지평이었습니다. 스님께서 들려주시는 철학과 종교, 혹은 종교와 종교 간에 걸림없는 ‘진여불성(眞如佛性)’과 ‘일상삼매(一相三昧)’에 관한 말씀은 쉬우면서도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용어지만 그것이 아마도 ‘환희심(歡喜心)’ 으로 불리는 그 무엇이었나 봅니다.

 

새해와 묵은 해가 오고 가고 있습니다. "연년시호년(年年是好年)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이라."

 

청화 큰스님의 높은 가르침의 향기를 품은 도반님들을 뵈면서 큰스님께서 몸소 보여주셨던 염불선의 수행을 지속해 나갈 것이며 위없는 깨달음을 얻고자 합니다. 천지가 무너져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자리, 행복과 광명이 충만한 자리를 찾고 싶습니다. 오늘도 수릉엄삼매도(首楞嚴三昧圖) 앞에서 마음모아 서툰 108배를 올립니다. 인생의 큰 스승을 만나고 수승한 도반님들을 만나 함께 수행하며 공부할 수 있어 마냥 행복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환희장마니보적불

 

 

 

숭산스님 -만고강산 청풍유수

 

제공 - 국제선원 무상사(042-841-6084)
기획 - 불교춘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