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 18. 20:30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오늘부터는 염불을 통해서 끝없는 윤회를 벗어나는 지름길이라는 제목으로 법회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부처님의 불법에는 종파가 없이 모두가 일불제자이나, 이 땅에 불교가 전래한 가장 긴 역사를 갖고 있는 한국불교를 대표한다는 불교종단이 조계종인데다 저 또한 조계종도이기에 조계종의 종지에 대해서 말씀드리면서 법장을 열고자 합니다.
먼저, 대한불교 조계종에서 대한이라는 말은 대한민국의 종단이라는 국적성을 나타내고, 불교는 불교종단임을 나타내는 것이고 천7백년의 역사와 전통을 가진 한국불교사에서 적지 않은 종파가 출현했지만 그 가운데 조계종(曹溪宗)의 종맥(宗脈)이 가장 길뿐만 아니라 조계종은 신라 말 고려 초에 민족의 정신문화를 혁신하였던 구산선문(九山禪門)을 기원으로 통일신라 후기, 불교가 교학에 치우쳐 승풍이 정체되었을 때 도의(道義)국사가 중국에서 선법을 전수하여 온 이래 선풍이 크게 일어나 불교계와 민족사회가 쇄신하게 되었고 고려조에 구산선문이 흥망을 거듭하며 통합된 것이 바로 지금의 조계종(曹溪宗)입니다.
고려시대 대부분의 종파들이 중국 종명을 그대로 사용했지만, 조계종은 중국에는 없는 한국불교의 고유한 종명으로 고려시대에 형성된 조계종은 억불정책의 조선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부침을 거듭하다가 1941년 조선불교조계종으로 재건되었고, 해방 이후 1962년에는 일제의 잔재였던 대처승을 승단에서 정화하여 통합종단인 대한불교조계종으로 재출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종단의 사상의 핵심이 되고 주(主)가 되는 것을 높여서 부르는 종지(宗旨)라는 하는데, 종단의 핵심적인 교의와 취지를 말하는 것으로 석가세존의 자각각타 각행원만(自覺覺他 覺行圓滿)을 근본교리로 하고 직지인심, 견성성불, 전법도생(直指人心. 見性成佛. 傳法度生)을 종지로 하고 있습니다. (대한불교조계종 종헌 제 2조).
자각각타는 자신도 깨닫고 타인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것을 말하며, 각행원만은 깨달음을 자타가 원만하게 이루어지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조계종의 세 가지 종지(宗旨)는 여기서부터 입니다.
직지인심(直指人心)은 직접 사람의 마음을 대상으로 수행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은 자신이 본래 가지고 있는 불성, 성품의 본질을 깨닫게 하여 부처를 이루게 한다는 것으로, 모든 중생에게는 부처님이 될 수 있는 씨앗이 있으므로 미혹함이나 의심을 없애버리고 자기 자신의 본래의 모습을 깨닫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전법도생(傳法度生)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펴는 동시에 부처님과 역대 조사(祖師)의 오묘한 법을 세상에 전하여 모든 중생을 바른 길로 인도하고 불법으로 제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대한불교조계종의 종지는 이러한 깨달음을 성취하는 것은 나 혼자만 할 것이 아니라 남도 그 깨달음의 세계에 이르도록 함으로써 모든 중생이 고통이나 미혹함을 버리고 부처를 이룰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법의 시대에는 똑똑한 사람과 못난 사람, 잘난 사람과 잘나지 못한 사람 등, 천차만별의 중생들이 모인데다 종교 또한 다양함 속에서 살아가는 이 말법시대에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깨닫기 위해서 직지인심이라는 간화선만이 견성성불의 전제조건이 될 것인가를 살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근기도 다양하고 학식도 다양하고 모두가 천층만층의 업을 가지고 있는 이 말법의 시대에 오로지 이것밖에 다른 것이 없다는 식으로 “화두만이 이 시대를 구원할 것이다.”는 식으로 간화선에서만 답을 찾으려 든다는 것은 유일신 사상과 하등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견성을 해서 부처를 이룬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부처가 되자는 것인데, 왜 그렇게 어렵게만 가려고 할까요.
제가 전번 시간에 말씀드렸지요. 영명선사가 “사료간”에 이르기를, 참선수행도 하고 염불수행도 하면 마치 머리에 뿔 달린 호랑이 같이 현세에서는 큰 스승이 되고, 내세에서는 부처나 조사가 되리라.
참선은 닦지 못했다 해도 염불을 열심히 한다면 만인이 염불을 해서 만인이 모두 극락에 왕생하나니 극락에서 아미타불을 친견한다면 어찌 깨닫지 못함을 걱정하리요.
참선만 닦고 염불은 전혀 하지 않는다면 열 명 중에 아홉명은 잘못된 길로 빠지나니 선정 중에나 몸을 바꿀 때, 망경계가 나타나면 잠깐 사이에 본심을 잃고 흘러 따라가 버리리.
참선과 염불 모두를 닦지 않는다면 지옥의 불타는 쇠침상에 누워 불타는 구리기둥을 안게 되리니, 이런 사람들은 만겁이 지나고 천생을 지나도록 믿고 의지할 인연을 하나도 만나지 못하리라.
아미타불을 친견하여 영원히 윤회를 벗어나 있는 마당에 깨닫지 못함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영명선사께서는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제가 오늘부터 전해드리려는 인광대사(印光大師) 스님은 중화민국 이십구년(中華民國 二十九年) 약 사십년 전 스님인데 젊은 시절에 유학을 좋아하여 이학파(理學派)라 하는 정호(程顥)·정이(程頤)가 창시하고 주희(朱熹)가 집대성했다는 정주학(程朱學)을 공부하면서 유생(儒生)들이 불교를 비방한 글을 보고 자기도 그것을 본 따서 불교를 비방하는 글을 써보았는데 갑자기 눈병이 나서 앞을 볼 수가 없게 되자, 가만히 생각해 보니 외람되이 성인의 가르침을 비방하여 그 죄로 인해 앞을 못 보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 자신의 잘못 함을 뉘우치고 마음속으로 부처님께 참회를 드렸더니 이상(異常)하게도 눈병이 곧 낫게 되어 전과 같이 앞을 보게 되자, 불법이 절대로 허무한 것이 아님을 절실히 느끼고 불법의 진리를 좀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여러 경전공부하기 시작했는데 경전을 보는 도중에 크게 발심이 일어나 스물한 살에 종남산 연화동에 도순장로에게 출가를 하게 됩니다.
그 후, 용서거사(龍舒居士)가 쓴 정토문(淨土文)을 보고는 생사를 해탈(解脫)하여 속히 불도를 성취함에는 염불법(念佛法)외에는 다른 수승한 방법이 없음을 알고 법우사라는 절에서 육년 동안 불철주야 염불(念佛)을 하고 마침내 염불삼매(念佛三昧)를 증득(證得)하셨던 분입니다.
이러한 인광대사님께서 실체적 수행경험으로 남겨주신 인광대사의 정토법문을 들려드리겠습니다.
“옛 사람들이 말씀하시기를 “사람 몸 얻기 어렵고(人身難得), 문명의 한 가운데 태어나기 어렵고(中土難生), 부처님 법 듣기 어렵고(佛法難聞), 생사윤회 끝마치기 어렵다(生死難了)”고 하셨소.
우리들은 천만다행으로 사람 몸 얻어 문명의 한 가운데 태어났고, 부처님 법까지 듣고 있소. 다만 불행히도 죄악이 많고 업장이 무거워 스스로 미혹을 끊고 삼계를 벗어나 생사윤회를 벗어날 힘이 없으니 몹시 부끄러울 따름이오.
그런데 또다시 천만다행으로, 우리 여래께서는 철두철미한 대자대비심에서 임기응변의 대방편의 권법(權法)을 설하셨소.
천하의 모든 중생들에게 업장을 짊어진 채 극락왕생할 수 있도록, 정토법문을 열어놓으신 것이오. 이를 보고 듣는 것은 정말로 행운 중의 막대한 행운이오.
무량겁 이래로 착한 뿌리를 깊이 심어온 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이처럼 불가사의한 법문들 들으며, 나아가 단박에 진실한 믿음을 내어 극락왕생할 수 있겠소?
내가 듣건데, 정토는 부처님의 본래 회포를 궁극적으로 다 털어놓으신 법문으로, 일체의 선종, 교종, 율종 등의 법문을 훨씬 초월할 뿐만 아니라, 이들을 모두 총망라한다고 하오. 간략히 말하자면 한 마디 한 구절이나 한 게송 한 경전으로 남김없이 포괄하지만, 자세하게 널리 말하자면 비록 삼장 12부의 심오한 교법이나 오종 역대조사들의 미묘한 논설로도 다 해석할 수 없다오.
설령, 천하의 모든 중생이 함께 정각을 이루어 광장설(廣長舌)을 드러내고 신통력과 지혜로 한 티끌 한 찰나마다 쉼 없이 치열하게 말한다고 할지라도 어떻게 다할 수 있으리오. 진실로 정토법문이 본디 불가사의하기 때문이라오.
경전을 한번 보시오.
화엄경은 삼장 가운데 임금이라고 일컬어지는데, 맨 끝 편에서 십대원왕으로 귀착되지 않소?
또 법화경은 심오하고 미묘하여 모든 경전의 으뜸이라고 꼽히는데, 듣는 즉시 극락왕생하여 등각(等覺)보살과 가지런한 지위에 오른다고 설하지 않소?
그러니 천경만론(千經萬論)이 도처에서 정토에 귀의하도록 가리키는 것도 모두 유래가 있지 않소?
그래서 문수보살이 극락왕생을 발원하고 보현보살이 권장려하며, 여래께서 대집경(大集經)에서 “말법시대에는 이 법문이 아니면 중생을 제도할 수 없다.”고 수기하셨소.
용수보살도 십주비바사론에서 “행하기 쉬운 길이니 빨리 생사윤회를 벗어나라.”고 간명하게 보이셨소.
역대고금의 성현마다 한결같이 정토로 귀향하는 것을 권장함이 어찌 터무니없겠소?
진실로 부처님의 한평생 설법이 모두 염불법문의 주석(註釋)이나 다름없소.
교법은 부처님 말씀이고, 참선은 부처님 마음이며, 계율은 부처님 행실이오.
실제로는 마음과 말씀과 행실의 세 가지를 결코 서로 떼어 구분하기가 어렵소.
다만 각자 전문으로 치중하는 내용에 따라 교종, 선종, 율종의 명칭을 붙인 것에 불과하오.
그 가운데 오직 정토법문만은 그 출발이 범부중생들의 불도입문을 안내하는 방편으로 비롯되었으나, 실질상으로는 모든 종파 수행이 궁극 귀결점이 되는 독특한 가르침이라. 그래서 아비지옥에 떨어질 극악죄인도 맨 끝자리나마
참여할 수 있고, 부처와 다름없는 깨달음을 증득한 보살들조차도 극락왕생하기를 발원한다오.
여래께서 세상에 계실 때는 천만 근기의 중생들을 다 함께 교화시켜 모든 갈래의 가르침이 하나로 융합되어 있었소. 그러나 부처께서 열반하신 뒤 법을 전하는 제자들이 각각 자기가 가장 뛰어난 한 가지 법을 선택하여 중생들이 근기에 따라 한 법문으로 깊이 들어가(一門深入) 모든 법이 궁극적으로 서로 하나로 통함을 깨닫도록 인도하신 것이오.
비유하자면 제망(帝網)의 천개의 구슬이 각자 서로 혼합되지 않으면서도 한 구슬이 천 구슬에 두루 비쳐지고 천 구슬이 모두 한 구슬에 모여들어 서로 연결되나 뒤섞이지는 않고, 각자 독립되어 있으나 서로 떨어지지는 않는 것과 같소.
현상적인 자취에 얽매이는 자는 일체의 법이 법마다 따로 떨어져 있다고 말한다오. 그렇지만 본질적인 이치를 잘 깨닫는 자에게는 일체의 법이 법마다 서로 원융회통하게 되오.
마치 성의 4대문이 열려있고 사람들이 자기에게 가까운 문을 출입하는 것과 같소. 문은 비록 다르지만 성안을 드나드는 것은 다를 리가 없소.
만약 이러한 이치를 깨닫는다면 어찌 오직 모든 부처님과 조사들이 설하신 몹시 심오한 가르침만 근본 지리에 도달하고 마음을 밝혀 성품을 보는 법이라고 집착할 수 있겠소?
세간의 오음(五陰), 육입(六入), 십이처(十二處), 십팔계(十八界), 칠대(七大) 등 모든 것이 하나하나 근본진리에 도달하고 마음을 밝혀 성품을 보게 하는 법이 될 것이오.
나아가 이러한 모든 것이 각각 그 자체 진리이고 근본이며 마음이고 성품이라오.
그래서 능엄경에서는 오음, 육입, 십이처, 십팔계, 칠대가 모두 여래장이며, 미묘한 진여성품이라고 말씀하시는 게요. 이렇게 본다면 어느 한 법도 불법 아닌 게 없고, 어느 한 사람도 부처 아닌 이가 없게 되오.
그런데도 어찌하여 우리 중생들은 구슬을 옷 안에 가지고서도 이를 알아차리지 못한단 말이오.
보배를 품 안에 품고서 걸식하는 중생의 곤궁은 너무도 어처구니없고 억울하기 짝이 없소.
여래의 마음을 지니고서 중생의 죄업을 지으며, 해탈의 법을 가지고서 윤회의 고통을 받고 있으니 어찌 슬프지 않으리오.
불법 가운데 방편법문이 많으며 참선을 하거나 교리를 공부해도 모두 생사해탈할 수 있는데 왜 굳이 염불을 꼭 하라고 권하겠소.
왜냐하면 참선이나 교리 공부 등은 모두 완전히 자신의 힘에 의지하는데 염불법문은 부처님의 원력 가피를 함께 의지하여 훨씬 확실히 보장되기 때문이오.
바다를 건너는 일에 비유하자면 자력에 의지하는 참선이나 교리 공부는 홀로 헤엄치는 것과 비슷하고, 부처님의 가피력에 의존하는 염불은 큰 여객선을 타는 것과 같소.
몸소 헤엄치다 보면 거센 파도에 휩쓸리거나 기력이 다해 침몰할 염려가 크지만 큰 여객선을 타면 저편 목적지에 틀림없이 닿게 될 것이오.
이 두 가지의 안전성과 효율성은 누구나 쉽게 비교할 수 있으리다.
결론을 말하면 자신의 힘에 의지하는 참선으로 도를 깨닫고 생사윤회를 끝마치기란 근기가 아주 뛰어난 대가가 아니면 정말 쉽지 않소.
반면에 염불로 정토왕생을 구하는 법문은 단지 믿음과 발원만 진실하고 간절하며 수행을 굳게 지속해가면 생사를 벗어날 수 있게 되오.
참선과 염불은 근본 이치상으로는 둘이 아니지만, 구체적인 수행현실을 따지자면 하늘과 땅의 차이가 난다오.
참선은 확철대오하고 완전히 증득하지 아니하면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 없소. 그래서 일찍이 위산(爲山)선사도 이렇게 말씀하셨소.
“돈오의 올바른 인연을 만나야만 비로소 홍진을 벗어나는 점진적인 계단에 들어서며, 매 생애마다 퇴보하지 않는다면 부처의 단계도 틀림없이 기약할 수 있다. 처음에 마음이 인연 따라 어느 순간 자성을 단박 깨달을 수 있지만 시작도 없는 오랜 옛날부터 쌓여온 업습의 기운은 그렇게 단박에 모두 사라질 수 없다.
그 업습이 의식에 나타나는 것을 말끔히 제거해야만 비로소 생사를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이는 마치 밥을 먹을 때 첫 술에 배부를 수 없는 것과 같으 이치라오. 천하의 선지식들이 열반의 경지를 증득하지 못하는 것도 그 공덕이 성인과 가지런하지 못하기 때문이오. 그래서 오조(五祖) 계(戒) 선사는 소동파(蘇東坡)로 태어나고, 초당(草堂) 청(淸) 선사는 노공(魯公)으로 다시 출생한 거라오. 예로부터 확철대오 하고서도 완전히 증득하지 못한 대종사들이 이처럼 수없이 많소.
이는 정말로 오직 자력(自力)에만 의지하고 부처님의 자비가피를 구하지 않은 탓이오. 미혹이나 업장이 말끔히 제거되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한, 결코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오.
반면에 정토염불은 믿음과 발원과 수행의 삼요소만 갖추면 업장을 짊어진 채 극락정토에 왕생할 수 있으며, 한번 왕생하면 생사윤회를 영원히 벗어나게 되오.
이미 깨달아 증득한 사람은 곧장 부처의 후보자리에 오르게 되고,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이라고 할지라도 불퇴전의 경지를 증득하게 되오.
어떤 이들은 이렇게 의심할지 모르오. 아미타불이 극락세계에 안거하고 있고, 시방세계가 끝없고 수없이 많으며, 한 세계마다 염불하는 중생들 또한 끝없고 수없이 많을텐데, 아미타불이 어떻게 한 몸으로 동시에 시방허공의 끝없고 수없는 세계에서 염불하는 일체 중생들을 두루 빠짐없이 맞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이는 우리가 평범한 중생의 지식견해로 부처의 경지를 추측하려는 데서 비롯된 어리석은 질문인데, 한 가지 비유로 그 미혹을 풀어보겠소.
달 하나가 하늘에 떠서 천만 강물에 제 모습을 각각 드리울 제, 달이 무슨 특별한 마음을 쓰겠소? 하늘에 단지 하나의 달 뿐인데, 큰 바다와 강물 및 작은 시냇물은 물론 작게는 한 바가지 한 방울의 물에도 온전한 달의 모습이 한결같이 비춰지오.
게다가 한 강물의 달이라도, 한 사람이 쳐다보면 하나의 달만 그에게 보이지만, 백 천만 억의 사람이 백 천만 억 곳에서 그 한 강물의 달을 보면, 각자에게 하나의 달씩 똑같이 보이지 않소?
또 백 천만 억 사람이 각각 동서남북 각 방향으로 움직이면, 달 또한 각자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똑같이 움직이고 그들이 멈추면 달도 따라 멈추어 선다오.
그러나 오직 물이 많고 고요할 때만 달이 나타나고 물이 흐리거나 움직이면 달은 이내 숨어버리니 달은 정말 스스로 취사선택하는 바가 전혀 없소.
달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물이 혼탁하거나 물결치며 흐르기 때문에 달의 모습을 받아 비추지 못하는 것이오.
중생의 마음은 바로 물과 같고 아미타불은 달과 같소.
중생이 믿음과 발원을 함께 갖추어 지성으로 염불하면 부처가 그에 감동하여 응답을 보인다오. 마치 물이 맑고 고요하면 달의 모습이 저절로 비추어지듯이 반면 마음이 청정하지 못하거나 정성스럽지 못하고 탐진치와 어울리면, 부처와는 서로 떨어질 수밖에 없소. 마치 물이 혼탁하거나 움직이면 달이 빠짐없이 비추어 주더라도 그 모습을 드리울 수 없는 거와 같소.
달은 세간의 빛깔있고 형상있는 물건인데도, 오히려 이처럼 미묘하고 신비스러움을 간직하고 있소. 하물며 번뇌와 미혹을 깨끗이 제거하고 복덕과 지혜를 원만히 갖추어 마음은 허공을 다 감싸고 도량은 시방법계를 두루 포용하는 아미타불이야 오죽하겠소?
그래서 화엄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소.
“부처님 몸 법계에 충만하여 일체 중생 앞에 두루 나투시네. 인연 따라 나아가 두루 감응하면서도 항상 이 보리좌(菩提座)에 머무시네.”
그러므로 모든 법계에 두루 감동하고 호응하더라도, 실제로 부처님은 마음을 움직이거나 생각을 일으킨 적이 없으며, 오고 가는 모습도 없다오. 단지 인연이 무르익은 중생들에게 부처님이 와서 그들을 맞이해 극락왕생하도록 이끄시는 것을 보여 주는 것 뿐이오. 위와 같은 의심을 일으키는 자가 정말 한둘이 아니기 때문에 특별히 비유로 대강의 요지만 간추려 바른 믿음을 낼 수 있도록 권장 격려하는 거라오.
사실, 관세음보살은 이미 아주 오래전에 성불하시어 정법명(正法明)이라는 호칭을 얻으셨소. 단지 그분의 자비심이 너무도 간절하신 까닭에 비록 상적광토(常寂光土)에 안주하시면서도 실보(實報), 방편(方便), 동거(同居)의 세 국토에도 모습을 나투시는 것이오.
또 비록 항상 부처님 몸을 나투시면서도 동시에 보살, 연각, 성문 및 인간, 천상 등 육도 중생의 몸으로도 두루 나타나신다오. 그리고 비록 항상 아미타불을 모시면서도 동시에 끝없는 시방 법계에 두루 색신을 나투시고 계실 따름이오.
그래서 흔히 말하는 대로 단지 중생들에게 이익만 있다면 달려가 도와주지 않음이 없소.
마땅히 어떤 몸으로 제도해야 할 중생에게는 곧장 바로 그 어떤 몸으로든 나투어 설법을 해주시는 것이오.
흔히 보타산(普陀山)은 관세음보살이 몸을 나투신 곳이라고 일컫소. 그런데 이는 중생들에게 정성을 바칠 구체적인 곳이 있다는 믿음을 주시기 위해 특별히 이 산에 자취를 보이신 것뿐이오.
어찌 관세음보살이 보타산에만 계시고 다른 곳에는 안계실 수 있겠소?
달 하나가 물에 뜨면 모든 강물에 모습이 비치기 마련이오. 작게는 한 그릇의 물이나 한 방울의 물에까지 각각 온전한 달의 모습이 나타나오.
다만, 물이 흐리거나 움직이면 달의 모습이 분명치 못할 뿐이오. 중생의 마음도 물과 같아서 오로지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염송하면, 염송하는 즉시로 보살이 은연 중 그윽히 나타나 가호해 주신다오.
그러나 만약 마음이 지성스럽지 못하거나 오롯이 일념을 이루지 못하면 관세음보살의 보호 구제를 받기가 어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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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하여 인광대사께서 남겨놓으신 정토 법문을 들려드렸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정토염불은 믿음과 발원과 수행의 삼요소만 갖추면 업장을 짊어진 채 극락정토에 왕생할 수 있으며, 한번 왕생하면 생사윤회를 영원히 벗어나게 되오.” 이 대목을 가슴깊이 새기시길 바랍니다.
가족 모두가 이차인연으로 성불하시길 바랍니다.
한 생각에 해탈을 이루게 하는 염불수행
새로운 정치권에 서민들의 생활은 혹시나가? 역시나! 로 여전히 물가는 제자리 걸음이고 살기 팍팍하기만 한 세상입니다.
제가 항상 드리는 말씀이지만 네 가지로 생명을 받아 태어나는 중생은 모두가 인연과보로 인한 업연중생이지만 현실의 삶은 동시작업의 현장인 것입니다.
사람중생들이 만물의 영장으로 축생이나 미물들과 차별세계가 존재하는 이유는 미물은 본능과 욕구에 지배를 받아 살아가지만 지각이 발달한 사람중생은 본능과 욕구가 있다 해도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선악을 구별하고 선악의 인연과보를 지을 수 있기에 만물의 영장인 것입니다.
하지만, 요즘 세상은 인면수심에 축생만도 못한 인간중생들이 수두룩하게 주변에 널려진 사바세계일 것입니다.
이 속에서 우리는 매일 매일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말이 있듯이 이승에 태어나 맹구우목(盲龜遇木)에 천재일우(千載一遇)의 인연으로 맹자정문(盲者正門)이나 맹자직문(盲者直門)이라는 말이 있듯이 선연을 만나 부처님 법과 인연을 지어 믿음과 발원과 수행의 삼요소만 갖추면 업장을 짊어진 채로 극락정토에 왕생할 수 있고, 한번 왕생하면 생사윤회를 영원히 벗어나게 되는 정토왕생염불 법을 듣게 되니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전 번 시간에 좀 길었지만 40년 전에 생존하셨던 중국정토종 13대 조사이신 인광대사(1862-1940)께서 남겨주셨던 정토법문을 전해드렸지만 이번 주에도 한 생각에 해탈을 하게 하는 염불의 중요성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인광조사의 극락도(極樂圖) 서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염불은 한 생각에 해탈하는 길로 어떤 중생이라도 염불하면 해탈한다.
정토법문은 이 마음이 부처되고 이 마음이 부처임을 가르치는 법문이다.
선종에서 말하는 직지인심이라는 바로 마음을 가리킴도, 이 마음으로 부처님을 생각하고 이 마음으로 부처님을 이룬다는 정토의 가르침만은 못하다.
정토법문은 위아래 가운데 모든 근기의 중생들을 함께 끌어안고 율종, 선종과 같은 여러 종파들을 다 아우르는 법문이다.
정토법문은 만물을 윤택하게 하는, 때맞춰 내리는 단비와 같고 모든 강물을 다 받아들이는 큰 바다와 같다.
이 법문 가운데서 흘러나오지 않는 것이 없고, 삼승(三乘)과 오성(五性)을 한데 아울러 모두 참 진리를 얻게 하고 성인과 범부를 함께 이끌어 정토에 이르게 한다.
그래서 구계(九界)가 모두 귀의하고 시방세계가 함께 찬탄하고 경전마다 이 가르침을 밝히고 논장마다 이 가르침을 펴니, 이는 가르침 위의 가르침이고 위없는 일승의 큰 빛이라 이를만하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구계(九界)와 삼승(三乘)과 오성(五性)에 대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구계는 10계중에서 사리에 명철하고 원만한 지혜를 갖춘 불과(佛果)를 제외한, 무명의 망집을 벗어나지 못한 지옥계, 아귀계, 축생계, 아수라계, 인간계, 천상계, 성문계, 연각계, 보살계를 말합니다.
삼승은 성문승과 연각승과 보살승을 말하는데 여기서 승(乘)은 물건을 실어 옮기는 의미로 부처님의 가르침은 뗏목과 같아 중생을 실어 피안의 열반언덕에 이르게 해준다는 뜻입니다.
고집멸도의 성문승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이를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을 말하고, 12인연의 연각승은 스승에게 의지하여 깨달음을 얻지 않고 천지만물의 자연순리를 관하여 깨달음을 얻는 이를 말하고 보살승은 육바라밀에 의지하여 스스로 깨달음을 얻는 수행자를 말합니다.
그럼 오성(五性)이란 무엇인가하면 이 오성이 참 재미있습니다.
이 오성은 오성각별(五性各別)이라고도 하는데 중생의 성품에는 선천적으로 보살정성(菩薩定性)과 연각정성(緣覺定性), 성문정성(聲聞定性), 삼승부정성(三乘不定性), 무성정(無性有情)이라는 다섯가지의 구별이 있다는 것입니다.
보살정성은 본래부터 선천적으로 부처가 될 무루종자를 갖춘 사람을 말하고 연각정성은 벽지불이 될 무루종자를 갖춘 사람을 말하고 성문정성은 아라한이 될 무루종자를 갖춘 사람을 말하는 것이며 삼승부정성은 뭣이냐면 두 가지나 세 가지 종자를 함께 갖춘 사람을 말하는데 여기는 네 가지의 차별이 있지만 생략하고 무성유정이란 무엇인가면 성문연각 보살이 될 무루종자는 없고 다만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인승(人乘)이나 천상에 태어날 천승(天乘)이 될 유루종자만을 갖춘 사람을 무성유정이라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무루종자는 8식이라는 아뢰야식에 감춰진 선천적으로 갖춰진 성품종자를 말하고 유루종자란 선천적으로 번뇌의 씨앗을 가지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각자 자기 자신이 어디에 해당되는지를 살펴보시고 스스로의 수행의 목표를 정해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인광대사의 염불법문에 이르기를 어떻게 한 생각에 부처를 이룬다는 것인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아미타부처님의 48대원에 “일체중생들이 결정코 바른 깨달음을 이루도록 하겠다(決定正覺願)”는 원력과 “내 이름을 열 번만이라도 부르면 반드시 정토에 태어나게 하겠다(十念往生願)”는 원력에 있다고 합니다.
“결정코 바른 깨달음을 얻게 하겠다.”는 決定正覺願이라는 원력이 무엇인가하면, 극락정토에 태어난 이는 이미 지은 업장의 무겁고 가벼움에 가릴 것이 없이 한결같이 바른 깨달음을 이루도록 하겠다는 원을 말합니다.
그럼 어떻게 정토에 갈수 있는가?
바로 十念往生願이라 “열 번만이라도 지극하게 아미타불을 부르면 반드시 정토에 태어나게 하겠다.”는 원력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아미타부처님은 과거 원력보살로 수행하실 때 “내가 만약 성불하면 시방중생이 나의 국토에 태어나기를 소원하고 내 이름을 열 번만 부르면 정토에 태어나게 하리라.
만약 한 중생이라도 정토에 태어나지 못한다면 나는 결코 깨달음을 이루지 않으리라,”는 원을 세우셨던 것입니다.
시방세계의 중생이란 사람뿐만이 아닙니다.
중음세계의 중생이든 나아가 짐승, 아귀, 지옥중생 할 것 없이 신령하고 밝은 깨달음의 성품은 그대로이니 부처님을 그리워하고 부처님을 생각하면 반드시 부처님의 손에 이끌려 정토에 태어나 성불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중음세계의 중생은 그 영성이 생전보다 아홉 배가 밝으니 이 같은 영성으로 지극하게 아미타불을 부르면 아미타불의 원력을 타고 한 생각 사이에 정토에 태어나 깨달음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중음세계가 아무리 험해도 아미타불만을 부르면 벗어날 수 있는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성불하기에 가장 쉽고 빠른 길은 밝고 깨끗한 마음으로 아미타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다.
중음신에게 보이는 온갖 밝은 빛, 기쁨과 성냄의 모습을 나투는 여러 성상과 나찰, 맹수, 우박 같은 현상은 모두 살아생전에 가졌던 스스로의 의식이 바뀌어 나타난 모습들인 것입니다.
살아 있을 때 중음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죽어서 위에서 말한 여러 가지 경계를 만나면 그런 경계들의 참 모습을 알지 못해 자성불을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를 구제할 기회를 놓쳐 윤회의 구렁텅이에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참으로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만약 지극한 마음으로 아미타불을 염불하고 서방정토에 태어나기를 간절히 구하면 문득 허망 된 의식의 흐름이 끊어지고 변화해 나타난 허망한 경계들이 사라지게 되니, 아미타불은 결코 스스로 세우신 서원을 저버리시는 법이 없으니 부르는 소리를 따라 바로 오시고 이끌어 정토에 태어나게 하신다.
부르는 중생이 비록 삼천 대천 세계의 큰 불로 가득 찬 곳에 있다 하더라도 아미타부처님의 원력이 활활 타는 불꽃 바다를 뛰어넘어 정토에 태어나 바로 깨달음을 이룬다.
또 죄업이 깊고 무거운 중생이 아미타불을 부르기만 하면 과연 구제될 수 있는가?
그것은 스스로에게 달렸으니 그대로 믿고 정토에 태어나기만을 바라고 지극한 마음으로 아미타불을 부른다면 틀림없이 구제될 수 있다.
관무량수경에 이르기를, “어떤 중생이 오계. 팔계. 구족계. 같은 청정한 계율을 깨뜨리고 살면서도 참회하는 마음이 없다면 죽어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죽어서 지옥세계가 눈앞에 펼쳐질 때 대부분은 이제는 영영 지옥을 피할 길이 없겠구나. 하고 체념해 버린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런 때라도 후손들이 지극하게 끊임없이 염불을 해준다거나 좋은 기도법사의 스승을 만나 광명이 끝없는 아미타불의 공덕과 서원을 찬탄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아미타부처님을 그리워하고 염불하면 팔십억 겁의 죄업이 모두 사라져 버린다.
무서운 지옥불은 맑고 서늘한 바람이 되어 가지가지 하늘 꽃을 흔들고 그 꽃마다 아미타부처님께서 부르는 중생을 맞아 주시니 한 생각에 극락정토의 연꽃 속에 태어난다.
이와 같이 죄업이 무겁고 깊어 지옥, 아귀, 축생, 같은 삼악도에 떨어져 끝없는 괴로움을 받을 이라도 후손들의 염불 공덕에 인연지어 한 생각 속에 팔십억 겁의 죄업을 없앨 수 있다.
그리하여 아미타불의 원력을 타고 극락정토에 태어나, 길이 윤회의 바다를 건너 바로 깨달음을 이룬다.
그러니 지옥에 떨어질 중생이라도 죽어 지옥세계가 눈앞에 펼쳐질 때 지극한 마음으로 아미타불을 염불하면 한 생각에 깨달음을 이루게 됨이 결코 허망한 말이 아님을 뚜렷이 알아야 한다.
부처님은 인과법은 털끝만큼이라도 어긋나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죄를 지어 지옥에 떨어질 이가 어떻게 아미타불을 부르는 한 생각으로 무서운 인과의 그물을 벗어날 수 있는가?
아미타불을 생각하고 부르는 일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결코 우연이거나 뜻밖의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불가사의한 인연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덕의 씨앗이 무르익어야 피어난다.
지옥불 앞에서도 아미타불을 염불 하는 마음이야말로 무르익은 인연이요. 공덕의 끝이 아닌가.
이 대목은 우리가 원을 세우고 기도를 했건만 이루어짐이 없다고 실망하거나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더라도 자신의 기도원력이 부족했음으로 탓하고 더욱 지극하게 기도하는 마음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과 조사님들은 한결같이 말씀을 하시기를, “염불하는 공덕은 금강을 먹는 것과 같아서 기운과 힘이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
팔만 겁 전에 길을 가던 나그네가 큰 호랑이를 만났다.
나그네는 너무 다급한 나머지 “나무불(南無佛)”하고 외쳤지만, 이 한마디 염불공덕으로 팔만 겁이 지난 뒤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아라한과를 이루었다고 한다.
염불수행자는 결코 염불공덕을 의심 하지 말고 나고 죽음을 생각하는 참 마음으로 용맹염불 해야 한다. 염불이야말로 금강식(金剛識)인 것이다.
염불문은 늙은이에게나 맞는, 낮은 수행법이 아닌가?
정토법문을 전혀 모르고 하는 말이다. 이것은 지혜 있고 공덕을 짓는 사람이 할 말이 아니다.
왜 그런가. 정토법문을 믿고 수행할 수 있는 이는 수많은 생을 통해 수행 공덕을 쌓는 큰 지혜인으로 낮은 근기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량수경에 이르기를 “이미 복과 지혜를 닦지 않은 이는 이 정토 법문의 가르침을 들을 수 없다.” 하셨고 또 “어떤 선남자 선 여인이 아미타부처님의 이름을 듣고 기쁜 마음을 일으켜 우러러 아미타불께 귀의하고 염불수행 한다면 이런 이는 작은 근기가 아님이라. 그런 사람은 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제자 가운데 가장 으뜸가는 제자임을 알아야 한다.”고 하셨다.
참으로 정토법문을 듣고 맑은 믿음으로 받들어 실천하는 이는 헤아릴 수없이 많은 지난 생에 수없이 많은 부처님께 공하고 수행한 복덕과 지혜가 크고 깊은 이들로써 으뜸가는 부처님 제자인 것이다.
부처님조차도 찬탄하신 이 법문을 얕잡아 보는 일은 참으로 삼가고 삼가야 할 일이다.
염불기도의 수승한 공덕은 화엄경이나 법화경에서도 잘 밝혀주고 있고 무량수경에서는 극락세계와 아미타불의 원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고 아미타경에서는 근기가 서로 다른 중생들이 염불수행으로 빠짐없이 구제를 받는 불가사의한 경계를 알 수 있으며 대세지보살염불원통장과 화엄경의 보현보살행원품에서 말하길 시방세계의 모든 큰 보살들이 깨달음의 과위에 올라서고 나서 염불법문의 뛰어남을 알고 한마음으로 염불하고 부처를 이루어 모든 중생들에게 염불해서 극락정토에 태어나길 가르치심을 알 수 있다.
이같이 수승한 염불법문을 만나게 된 것은 얼마나 큰 행복인가! 이생에 이같이 으뜸가는 법문을 만났으니 무너지지 않는 믿음과 간절한 원을 세우고 한마음으로 아미타불을 부르면서 정토에 태어나길 희망하자. 이생에 만난 이 귀중한 인연을 헛되이 지나쳐서는 안 된다.” 하고 인광대사는 염불기도공덕의 수승함을 누누이 밝히고 있습니다.
自作自受라, 나이 드신 보살님들은 잠자듯이 가시고 싶거들랑, 젊은 보살님들은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싶거들랑, 오늘 이후로 과연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잘 아실 것입니다.
성불하십시요.
다음 주에는 이렇게 수승한 염불의 방법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육도윤회를 벗어나는 일상의 염불수행 법
무상한 세월 속에 우리는 가고 있는데 가는 곳이 어딘지는 아시죠?
결국에 공수래공수거라고 하지만 현실은 어떻게든 물가는 내려가고 가정경제도 살아나 국가정경제도 원활하게 돌아가야 하건만 현실은 그렇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새 정권에서 보건복지부장관이 된 김성이 씨는 “사회복지정책과 믿음”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미국민 대부분이 지닌 신앙심이 경제적 불황을 극복하면서 사회복지정책을 성공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힘이 됐다”고 언급하고 대한민국은 “외환위기 이래 사회복지정책을 추진했으나 성공에 대한 믿음과 신이 우리를 돌봐줄 것이라는 신앙심이 부족했다”고 말하고 “특정 이데올로기를 뛰어넘는 확고한 믿음과 이를 뒷받침 할 신앙심이 사회복지정책과 서비스의 성패를 결정짓는다.”고 주장하면서 예수님만 믿으면 가난한 사람도 다 부자가 되고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된다는 식으로 미국 환상주의적인 표현을 했습니다만, 그렇게 찬양하는 미국에서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3초에 한 번씩 일어나는 강도사건에 1분에 한 번씩 발생하는 강간, 살인 총기사고는 집계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빈번해 해마다 총기사고로 죽는 사람이 4만 명 이상이 되는 것은 신앙심이 지나쳐서 일까요?
카트리나가 휩쓸고 간 미국의 뉴올리언즈에 대고 미국의 보수기독교인들이 말하길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처럼 뉴올리언즈를 벌하셨다고 했지만, 범죄 조직이 다 떠난 뉴 올리언즈에는 금년에 살인사건이 단 한건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자유의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모든 것을 신의 뜻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식으로 신의 종이 되기를 자처하는 종교는 마약과 같다고 하질 않습니까?
서양에서는 이런 종교심을 이용해서 남의 나라를 침략해서 그 나라의 좋은 것은 다 빼앗고 그들의 손에는 성경책 하나만 들려주고 스스로 위안을 삼도록 하는 식으로 지배해 왔던 것입니다.
침략 중에 가장 무서운 것이 바로 문화 사상의 중심인 종교 침략인 것입니다.
무력이나 경제의 침략은 사람들이 반감도 가질 수 있고 반항도 할 수 있지만 종교를 이용한 문화와 민족혼을 병들게 하는 침략은 스스로 병이 드는 줄도 모르고 죽으면서도 자기 것을 다 빼앗아간 침략자들이 전해준 신에게 의지하고 살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죽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그들이 전해준 신이 선과 악을 주관하는 전지전능한 신이라면 내 것을 빼앗지도 못하게 해야 하고 빼앗기지도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프랑스 사람들이 가장 즐기는 요리 중에 프랑스에는 유명한 “삶은 개구리”요리가 있습니다.
이 요리는 손님이 앉아 있는 식탁 위에 버너와 냄비를 가져다 놓고 직접 보는 앞에서 살아있는 개구리를 냄비에 넣고 조리하는 것입니다.
이때, 물이 너무 뜨거우면 개구리가 펄쩍 튀어나오기 때문에 맨 처음 냄비 속에는 개구리가 가장 좋아하는 온도의 물을 부어 둡니다. 그러면 개구리는 따뜻한 물이 아주 기분 좋은 듯이 가만히 엎드려 있습니다.
아주 느린 속도로 서서히 가열하기 때문에 개구리는 자기가 삶아지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기분 좋게 잠을 자면서 죽어가게 됩니다.
우리들의 삶이 이와 같을지도 모릅니다.
세월은 이렇게 쉼 없이 가고 있고, 영원하지 않는 우리의 유한한 생도 하루하루, 매일매일 이생의 끝을 향해서 가고 있건만 우리는 매일 매일 발등에 떨어지는 생활고와 현실이라는 것들에 떠밀려 당장 생활에 큰 불편함이 없고 큰 걱정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대로 살고는 있으니깐 이만하면 되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으로 일상을 보내고 있다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편안하게 죽어가는 냄비 속의 개구리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도 이렇게 법당에 나와 일요법회를 참석하고 생각으로 입으로 행동으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지극하게 기도를 했다고 해서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을 주지 않습니다.
다만 복을 구하는 길을 알려주실 뿐인 것입니다.
역시나 모두가 행복을 바란다고 행복이 각자에게 주어지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우리에게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은 알려 주십니다.
무조건 믿기만 한다면 경제가 살아나고 복지정책이 성공한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어쩌면 침략자들이 다 뺏어가면서 들려주는 전지전능하다는 허상의 신이라는 거짓과 같을 것이고 거기에 속아서 살아가는 것은 프랑스 요리에 나오는 개구리와 같을 것입니다.
자연의 섭리이자 우주의 질서라고도 할 수 있는 인연과보의 원리가 무시되고 오로지 믿기만 하면 다 해결된다는 식의 가르침은 행함도 없이 떡이 생기기를 바라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
목이 마르면 스스로 물을 찾거나 우물을 파서 물을 마셔야하듯 스스로의 복은 스스로 복 씨를 뿌려 밭을 일궈 가꾸어가야 할 것입니다.
인과의 가르침을 철저하게 몸소 실천하셨던 부처님 말씀에 따라 생각하고 말하고 행할 때 복은 저절로 굴러들어오는 것입니다.
절대로 부처님은 우리에게 복 그 자체를 주지는 않습니다. 다만, 생각과 말과 일상의 행동을 겸손한 마음으로 간절히 가꿔나갈 때 그 복을 만드는 길을 밝혀주실 뿐이란 말입니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는 것보다도 어렵다는 성경말씀은 잘들 알면서도 교회를 세습하고자 하는 것도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세상부귀영화를 다 주어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과 하등 다를 바 없겠지만, 그 행복을 온전히 찾고 지키는 것은 자식의 몫일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일상생활 가운데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가족들의 마음 안에 인과법이라는 등불을 밝혀주고 부처님의 지혜로움을 심어주는 신행생활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시겠죠.?
그럼 오늘은 인광대사께서 남겨주셨던 염불을 수행하는 요령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광대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진실한 믿음과 간절한 발원을 함께 갖추었으면, 이제 염불의 기본 실천수행을 닦아야 하오.
믿음과 발원을 선행 안내자로 삼고, 염불을 기본수행으로 삼는 것이오.
믿음과 발원과 수행, 이 세 가지가 염불법문의 필수요건이라오. 수행이 있어도 믿음과 발원이 없으면 왕생할 수 없고, 반대로 믿음과 발원만 가지고 수행을 안 하면 역시 왕생할 수 없소. 믿음과 발원과 염불수행 세 요건이 솥의 발처럼 빠짐없이 함께 갖추어져야만, 극락왕생이 틀림없이 결정되오.
왕생할 수 있는지 여부는 온전한 믿음과 발원의 유무에 걸려있고 구품연화의 품위 고하는 전적으로 부처님 명호를 일념으로 염송한 깊이에 달려 있소.
염불의 기본수행은 각자 자기의 신분에 따라 정하며, 어떤 특정의 방법 하나에 집착해서는 안 되오.
자신에게 특별한 일이나 부담이 없는 사람 같으면, 마땅히 아침부터 저녁까지, 다시 저녁부터 아침까지, 앉고, 눕고, 서고, 말하고, 옷 입고, 밥 먹고, 대소변을 보건 간에 모든 때와 모든 장소에서, “나무아미타불”이라는 한 구절 위대하고 거룩한 명호를 항상 마음과 입에서 떠나지 않도록 염송하는 것이오.
손과 입을 깨끗이 씻고 의복을 단정히 입었으며 장소가 청결하기만 하면, 소리 내어 낭송하든 조용히 묵상하든 어떻게 해도 괜찮소.
그러나 잠자리에 들었거나, 옷을 벗고 있거나, 목욕하거나, 또는 대소변 보는 때 및 더럽고 지저분한 곳에서는 소리를 내어서는 안 되고, 단지 묵송하는 것이 좋소.
이런 경우에 묵송해도 염불공덕은 한가지며, 소리를 내면 부처님께 공경스럽지 못한 게 되오.
그렇지만 이러한 때와 장소에서는 염불할 수 없다고 잘못 생각해서도 안되오.
단지 소리 내어 염불할 수 없다는 것 뿐 임을 염두에 두시오.
특히 잠자리에 들어 소리를 낼 것 같으면,단지 공경스럽지 못할 뿐만 아니라,기를 손상시킬 수 있으니 꼭 유념해야 하오. 또 염불은 장기간 끊임없이 지속해야 하오.
새벽에 부처님을 향해 예배를 드리고, 먼저 아미타경 한번과 정토왕생주(발일체업장근본득생정토다라니)를 세번 독송하오.
그런 뒤 “아미타불금색신”으로 시작되는 8구절의 찬불게를 송하고, “나무서방정토극락세계대자대비아미타불”을 한번 염송한 뒤, 이어 “나무아미타불” 여섯 글자 명호만을 천 번 또는 5백 번을 염송하오.
염불할 때는 주위를 돌면서 하되, 돌기가 불편하면 꿇거나 앉거나 서거나 모두 괜찮소.
염불이 끝날 때는 다시 본래자리로 돌아와 꿇어앉아,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 청정대해중보살”을 각각 세 번씩 염송한 다음, 정토문을 염송하며 극락왕생을 발원회향하면 되오. 정토문을 염송하는 것은, 글의 뜻에 따라 마음을 내자는 것이오.
만약 마음이 글의 뜻에 따라 서원을 일으키지 않으면, 내용 없는 빈껍데기 글이 되고 말아, 실질이익을 얻을 수 없소.
정토문 염송이 끝나면, 삼귀의를 염송하고 부처님께 예배드린 뒤 물러나오는데, 이것이 아침공과(아침기도)라오. 저녁때도 이와 똑같이 하면 되오.
만약 예배를 많이 하고 싶은 경우에는, 염불을 마치고 제자리에 돌아올 때 부처님께 마음껏 절을 올리고, 세 보살을 세 번씩 염송하며 아홉 번 예배드린 뒤 회향 발원하면 되오. 아니면 공과가 모두 끝난 뒤, 자기 형편껏 예배(절)하는 것도 괜찮소.
단지 간절하고 지성스럽게 해야 하오.그저 대충 해대거나 방석을 너무 높이 깔면, 공경스럽지 못하게 되오.
만약 일이 많고 바빠서 한가한 여유가 없는 경우에는, 새벽에 세수와 양치질을 한 뒤, 부처님이 계시면 세 번 예배드린 다음, 몸을 단정히 하고 공경스럽게 합장하여 “나무아미타불” 명호만을 염송하시오.
이때 한번 호흡이 다하는 동안을 한번 염불로 하여 열번 호흡까지 반복하고, 짧은 정토문을 염송하거나 “원생서방정토중”의 4구 게송을 염송한 다음, 부처님께 세 번 예배드리고 마치면 되오.
부처님이 안계시면 서쪽을 향해 정중히 문안드린 다음, 앞에서 말한 대로 염불하면 되오. 이것을 십념법이라 하는데 송나라 때 자운참주가 국왕과 대신 등 정무가 번잡하여 수행할 겨를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특별히 세운 방편이라오.
어째서 한 호흡이 다하도록 염불을 시키는가 하면, 중생들의 마음이 산만하여 전념할 겨를이 없기 때문이라오.
이렇게 염불할 때는 호흡을 빌려 마음을 추스르므로, 마음이 산만해지지 않게 된다오.
그러나 각자 호흡의 장단에 따라 자연스럽게 해야지, 억지로 호흡을 길게 늘려가며 염불을 많이 하면 절대 안 되오. 억지로 하면 기를 손상시키기 때문이오.
또 십념에서 그쳐야지, 이십 념, 삼십 념 까지 너무 많이 해도, 기를 손상시키기 쉽소. 산만한 마음으로 염불하면 왕생하기 어렵다오.
이 염불법은 마음을 한곳에 집중시킬 수 있어서, 일심으로 염불하여 결정코 왕생하자는 뜻이오. 염불의 횟수는 적지만, 그 공덕은 자못 깊소.
아주 한가하거나 몹시 바쁜 경우에 각각의 염불법이 제시되었으니, 반쯤 한가하고 반쯤 바쁜 사람은 스스로 자기 형편에 맞춰 적당한 수행방법을 마련하면 될 것이오. 라고 인광님은 염불법에 대해서 나름대로 방법을 말씀하셨습니다.
서산대사는 선가귀감에서 말씀하시기를 “나무아미타불”은 윤회를 벗어나는 지름길이다, 고 말씀하시면서 육조 혜능스님은 “부처는 자기 성품 속에서 이룰 것이지 자기 밖에서 구하지 말라” 고 가르치신 바가 있다. 이 말씀은 본심(本心)을 바로 가르친 것이다.
이치대로만 말한다면 참으로 그렇지만, 현상으로는 아미타불의 사십팔원(四十八願)이 분명히 있고 극락세계가 확실히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일심으로 열 번만 염불하는 이도 그 원의 힘으로 연꽃 태속에 가서 나고 쉽사리 윤회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삼세의 부처님들이 다같이 말씀하시고, 시방세계의 보살들도 모두 그 곳에 태어나기를 발원했던 것이다.
더구나 옛날이나 지금이나 극락세계에 왕생한 사람들의 행적이 분명하게 전해오고 있으니 공부하는 이들이 잘못 알아서는 아니 된다.
아미타(阿彌陀)란 우리말로 “끝없는 목숨(無量壽)” “끝없는 광명(無量光)”이란 뜻으로, 시방삼세에 첫째가는 부처님의 명호이다.
옛 어른이 말씀하기를 “염불 한 소리에 악마들은 간담이 서늘해지고, 그 이름이 저승의 문서에서 지워지며 연꽃이 금 못에 나온다.”하였으며, 또한 “어린애가 물이나 불에 쫓기어 큰 소리로 부르짖게 되면 부모들이 듣고 급히 달려와 구원하는 것과 같이, 사람이 임종할 때에 큰 소리로 염불하면, 부처님은 신통을 갖추었으므로 반드시 오셔서 맞이해 갈 것이다.
부처님의 자비는 부모보다 더 지극하고, 중생의 나고 죽는 고통은 물이나 불의 피해보다도 더 심하다.” 라고 하였다.
만일 누가 말하기를 “자기 마음이 정토 (淨土)인데 새삼스레 정토에 가서 날 것이 무엇이며, 자기 성품이 아미타불인데 따로 아미타불을 보려고 애쓸 것이 무엇인가?”라고 한다면, 이 말이 옳은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저 부처님은 탐하거나 성내는 일이 없는데, 그럼 나도 탐하거나 성내는 마음이 일지 않는가?
저 부처님은 지옥을 연화세계로 바꾸기를 손바닥 젖히듯 하신다는데, 나는 죄업으로 지옥에 떨어질까 오히려 겁을 내면서 어찌 그걸 바꾸어 연화세계가 되게 한단 말인가?
저 부처님께서는 한량없는 세계를 눈앞에 놓인 듯 보시는데, 우리는 담 너머의 일도 모르면서 어떻게 시방세계를 눈앞에서 본단 말인가.
그러므로 사람마다 성품은 비록 부처이지만 실제 행동은 중생이다. 그 이치와 현실을 말한다면 하늘과 땅 사이처럼 아득하다.
규봉선사가 말하기를 “가령 단박 깨쳤다 할지라도 결국은 점차로 닦아가야 한다.” 고 하였으니 참으로 옳은 말씀이다.
그러면 다시 자기 성품이 아미타불이라는 사람에게 물어보자.
어찌 천생으로 된 석가여래와 자연히 생긴 아미타불이 있는가? 스스로 헤아려 보면 그냥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임종을 당해 숨이 끊어지는 마지막 큰 고통이 일어날 때에도 자유자재할 수 있겠는가?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한 때에 만용을 부리다가 길이 악도에 떨어지는 후회막급을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또 “마명보살이나 용수보살이 이미 다 조사이면서도 분명히 말씀하여 왕생하는 길을 간절히 권했거늘, 나는 어떤 사람이라고 왕생을 부정하겠는가?”
“나무아미타불” 여섯 자 법문은 윤회를 벗어나는 지름길이다. 마음으로는 부처님의 세계를 생각하여 잊지 말고, 입으로는 부처님의 명호를 똑똑히 불러 산란하지 않아야 한다.
이같이 마음과 입이 서로 합치되는 것을 염불(念佛)이라 한다고 서산대사께서는 선가귀감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참선은 이신난행(易信難行)이라했고 염불은 난신이행(難信易行)이라고 했습니다.
풀어서 말씀드리면 참선은 믿기는 쉬우나 행하기는 어렵고 염불은 믿기는 어려우나 행하기는 쉽다는 말입니다.
모든 사람이 화두를 붙들고 있다고 깨우치는 것도 아니고 그 깨침의 세계가 염불해서 정토에 가는 것보다 낫지도 않습니다.
그러기에 나무아미타불 하고 염불을 하면 사람들은 80억겁의 업장이 소멸되고 설사 업장이 있다해도 정토에 왕생하여 윤회를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염불수행의 공덕은 한량없지만, 대표적인 염불수행의 열 가지 공덕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법문을 맺겠습니다.
다라니잡집경(陀羅尼雜集經)에 보면, 염불하는 이는 염불십종공덕이라 해서 열 가지 공덕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모든 하늘 신장들이 밤낮으로 수호하고, 둘째는 관세음보살과 같은 25보살이 항상 보호하시며, 셋째는 시방제불이 호념하시고, 아미타불은 광명을 놓아 비추어 주시며, 넷째는 모든 악귀들이 침범치 못하며, 다섯째는 수재, 화재, 풍재와 도적과 횡사(橫死)가 없으며, 여섯째는 전생 죄업이 소멸하고 죽인 원수가 해탈을 얻어 다시 보복이 없으며, 일곱째는 꿈이 항상 좋고 꿈에 아미타불을 간혹 뵙게 되며, 여덟째는 마음이 기쁘고 기력이 좋아지고, 일체 하는 일이 뜻대로 되며, 아홉째는 모든 세상 사람들로부터 예배와 칭찬을 받으며, 열번째는 목숨 마칠 때를 당하여 두려운 생각이 없고 바른 생각이 나타나 아미타불과 모든 보살들이 금대(金대)로 맞아 주어 서방정토에 왕생하여 미래제가 다하도록 좋은 낙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또, 고성염불 십종공덕이라 해서 큰 소리로 염불하면 열 가지 공덕을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첫째공덕은 (一者功德 能排睡眠)라 혼침이 적어지고, 둘째공덕은 (二者功德 天魔警怖) 천마를 놀래고 두렵게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공덕은 (三者功德 聲偏十方)온 세계에 그의 소리가 울려 퍼지고, 넷째공덕은 (四者功德 三途息苦)지옥, 아귀, 축생계가 다 삼악도의 고통 중에 쉬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섯째 공덕은 (五者功德 外聲不入)염불소리 외에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고, 여섯째 공덕은 (六者攻德 念心不散)염불하는 마음이 흩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곱째 공덕은 (七者功德 勇猛精進) 용맹정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덟째 공덕은 (八者功德 諸佛歡喜) 모든 부처님께서 환희하게 되고, 아홉째 공덕은 (九者功德 三昧現前)삼매가 현전한다는 것입니다.
열 번째 공덕은 (十者功德 往生淨土)라 서방정토에 왕생한다는 것입니다.
염불수행의 대표적인 공덕은 극락정토에 왕생하는 공덕이라고 할 수 있지만 염불수행을 닦게 되면 일상생활에서 생겨나는 공덕으로는 이른바 대어만족(大魚滿足), 해상안전(海上安全), 사운융성(社運隆盛), 사업번영(社業繁榮), 가내안전(家內安全), 신체견고(身體堅固), 개운출세(開運出世), 상업번영(商業繁榮), 당병평유(當病平癒), 액난소제(厄難消除), 소재초복(消災招福), 양연만족(良綠滿足), 출산무난(出産無難), 학업숙달(學業熟達), 시험합격(試驗合格), 오곡성숙(五穀成熟), 교통안전(交通安全) 등을 말하지만, 사실 일상의 모든 것들이 달라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좋은 공덕을 자기 것으로 만들 것이냐, 말 것이냐는 자작자수라 자기하기에 달렸다는 것을 명심하시고 가족들의 편안함과 가정의 원만함을 원하신다면 무엇을, 어떻게, 왜? 해야 할 것인가를 마음에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성불하십시요.
번뇌를 벗어나는 염불행자의 올바른 마음가짐
안양 초등생 유괴 살인범인의 뉴스를 들으면서 도대체 대학교육까지 받은 저 사람의 업은 어떠했기에 저런 일을 저지르게 됐고, 죽은 아이들은 전생에 어떤 악연이 있어 그런 일을 당해야 하고, 아이들의 부모는 어떤 악연이 있었기에 저렇게 가슴에 묻는 비극의 아픔을 겪어야 했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요즘입니다.
고려 중기에 혜심스님이 편찬한 선문공안집인 선문염송 20則에 촉루내고(觸漏乃敲)라는 선문이 있는데 부처님 당시 부처님의 주치의라고 할 수 있는 기바사문에 대해 나오는 이야기가 있어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기바는 마가다국 빔비사라 왕의 아들인 무외왕자와 아름다운 유녀 바라발제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마갈타국으로 알려진 이 마가다국은 부처님 당시 중인도의 강국으로 고대 인도의 문화 중심지로 불교와 자이나교의 발상지로 부처님의 초기 활동의 대부분은 마가다국에서 이루어졌었고 부처님 열반 후에도 불교의 중심지였습니다.
빔비사라왕은 고행림에서 수행하시는 싯달타를 찾아와 그대가 나의 신하가 된다면 나라의 반을 주겠다는 제의를 했으나, 부처님은 거절하게 됩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후에 빔비사라왕은 부처님께 귀의하게 되고, 왕이 재가신도가 된 이후, 정사가 건립되어 나무 밑이나 동굴 속에서 안거(安居)에 들던 스님들이 정사(精舍)를 중심으로 수행하게 되는 초기불교 교단형성과 발전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됩니다.
마가다국의 수도는 왕사성(경전에서는 라자그리하, 현재는 라지기르)으로 법화경을 설하신 영취산(靈鷲山)과 최초의 가람인 “죽림정사(竹林精舍)”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 재세 시에 자주 머물면서 설법한 초기불교의 정사 가운데 마가다국 왕사성의 “죽림정사(竹林精舍)”와 함께 불교 최초의 양대가람(兩大伽藍)인 “기수급고독원”이 있지요?
코살라국 기타(祇陀Jeta)태자의 소유였던 동산을 사위성의 수달다(須達多Sudatta)장자가 동산을 뒤덮을 만큼의 금(金)을 주고서 이 동산을 사들였으며, 이러한 그의 신심(信心)에 감동한 기타태자가 동산의 온갖 나무를 보시해서 함께 정사를 건립했다고 기타태자의 동산과 나무를 의미하는 기수(祇樹)와, 장자는 고독한 사람들에게 많은 보시를 베풀었기 때문에 “급고독(給孤獨)”이라는 별칭을 얻고 있었기에 수달다 장자를 의미하는 급고독을 합해서 이 정사를 “사위성기수급고독원”이라고도 했는데 “왕사성의 죽림정사(竹林精舍)”와 함께 불교 최초의 양대가람(兩大伽藍)이었던 것입니다.
마가다국 빔비사라 왕의 아들인 무외왕자와 아름다운 유녀 바라발제 사이에서 태어나자마자 그 어미가 길에 버린 것을 아버지인 무외 왕자가 데려다가 기바(耆婆)라고 이름을 짓고 궁중에서 기르게 됩니다.
주웠을 때 목숨이 붙어 있었다고 해서 “목숨”이라는 뜻인 “기바”라고 했는데 열다섯 살이 되자 무외왕자가 기바에게 말하기를 “너도 이제 제법 컸다. 그러니 언제까지 궁중에서 놀기만 해서야 되겠느냐?” 하자, 기바가 말하기를 “예, 저도 무슨 기술을 배울까 생각중입니다.”하고 대답은 했는데 막막했습니다.
며칠을 고민한 끝에 의술(醫術)을 배우기로 하고 “득차시라 국에 반가라”라는 유명한 의사를 찾아가 스승으로 모시게 됩니다.
스승으로 모시고 7년 동안 온갖 의술을 익혔지만, 앞으로 얼마나 더 공부를 해야 하는지 궁금해 스승을 찾아가서 묻게 됩니다.
그러자, 빈가라 명의는 대바구니 한 개와 약초캐는 도구를 주면서 말하기를, “너는 이 득차시라 국의 사방 백리의 땅을 두루 다니면서 약이 되지 않는 풀만을 캐어오라.” 하자, 기바 스승의 분부를 받고 온 땅을 두루 돌아 다녔으나 모두가 약이 되는 풀 뿐이고 ,약이 되지 않는 풀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 대목이 중요합니다. 모든 것들의 존재의 가치)
어떠한 풀을 캐보아도 그 풀의 어느 한 부분에는 약이 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한 푼어치라도 쓸모가 없는 풀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빈 대바구니를 들고 스승에게 되돌아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스승님, 분부대로 사방 백리의 땅에 나는 풀이란 풀은 모조리 살펴보았지만 약이 되지 않는 풀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어떠한 풀이라도 그 속에는 약이 되는 성분이 들어 있었습니다.”하자, 반가라 명의는 이 말을 듣고서는 무릎을 치면서 말하기를 “너는 이제야 말로 참된 의사가 되는 안목을 얻었다. 너는 내 의술의 전부를 터득했으니 내 곁을 떠나도 좋다. 모두들 나보고 세상에서 제일가는 의사라고 하지마는 내 뒤를 이를 사람은 너 밖에 없구나.” 하고 기바를 인정해주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기바는 스승님께 깊이 감사의 예를 올리고, 고향 마가다국으로 왔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느 장자 부인의 병을 고쳐주기도 하고 고향에 와서는 빔비사라 왕의 치질도 고쳐 주고 그 밖에도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게 되는데 스님들의 계율을 모아놓은 “사분율”이라는 책을 보게 되면 기바의 의술이 나옵니다.
부처님 당시에 뇌수술이나 장폐색 수술이 행해졌다고 한다면 믿기지 않으실 것입니다만, 기바가 행한 최초의 뇌수술에 대해서 소승불교(小乘佛敎)의 계율서인 사분율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왕사성에 한 장자가 있어 항상 두통을 앓고 있었다.
고치는 의사가 없었다. 많은 의사들이 진찰을 하고 여러 가지 처방을 내렸지만 모두 얼마 살지 못하고 곧 죽는다고 말했다. 어떤 의사는 일년 후에 죽는다고 했고, 어떤 의사는 7개월 후에 죽는다고 했으며, 또 어떤 의사는 7일 후에 죽는다고 했다. 그때 이 장자는 부처님의 제자중 병을 잘 다스리는 기바라는 명의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기바를 찾아가 인사드리고 말했다.
“기바여, 나의 병을 고쳐주시오. 그러면 황금 백냥을 드리겠습니다”그러자 기바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장자여, 나는 당신의 병을 고칠 수 없습니다. 병은 지극정성으로 고쳐지는 것이지 돈이나 흥정으로 고쳐지는 것이 아닙니다. 고향으로 돌아가 그 돈으로 편하게 지내십시오.” 치료를 거절당한 그 장자는 왕을 찾아가 자신의 병을 호소하며 기바로 하여금 자신의 병을 치료하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왕은 기바를 불러 그 장자의 병을 고쳐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리하여 기바는 그 장자의 집을 가서 장자에게 어떻게 아픈지 병이 언제 처음 발생했으며, 증세가 어떤지 여러가지를 묻더니 장자에게 말했다.
“장자여, 나는 당신의 병을 고칠 수가 있겠습니다” 그리고 기바는 며칠 동안 그 장자의 집에 머무르면서 장자에게 계속 음식을 짜게 먹게 하였다.
심한 갈증을 느끼고 있는 장자에게 기바는 술을 주어 인사불성이 되도록 취하게 한 뒤, 몸을 묶어 움직이지 못하게 하여 자리에 똑바로 앉혔다. 잘 드는 수술 칼로 머리를 절개하여 뼈를 열고 골의 내부를 볼 수 있게 하였다.
썩었거나 단단해진 부분을 절제한 후 깨끗하게 닦아내고 유밀을 머리속에 넣고 다시 뼈를 붙이고 머리를 가죽으로 된 실로 봉합하고 상처가 잘 낫는 좋은 약을 발랐다.
수술을 마친 기바는 수술하는 것을 지켜본 장자의 친척들에게 절개해 낸 머리 부분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벌레가 먹은 것 같고 돌같이 단단해진 이것이 장자가 두통을 앓은 원인입니다. 이제 그 원인을 제거했으니 장자는 두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이제는 안심하셔도 됩니다. 장자가 깊은 잠에서 깨어나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입니다.” 하는 대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대품 법의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장폐색 수술도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어느 때 바라나사 장자의 아들이 근두놀이를 하다가 병을 얻었는데 소화가 안 되고, 대변도 잘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몸이 말라비틀어지고 피부색이 점점 누른색으로 변했으며 혈맥이 팔다리와 온몸에 튀어 나왔다.
기바는 바라나시에 있는 장자의 집으로 가서 그의 몸을 살펴보고 만져보며 진찰하고는 옆에 있는 사람들을 물리치고 장막을 치게 하고 주위를 깨끗하게 소독하고 장자의 아들을 움직이지 못하게 기둥에 묶었다. 잘 드는 칼로 뱃가죽을 째고, 꼬여 있는 창자를 들어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어머니에게 보이면서 “이것이 병의 원인이다”고 설명하여 주었다.
기바는 꼬여 있는 창자를 풀어 원래대로 하고 배를 봉합하고 고약을 발랐다. 얼마 후 장자의 아들은 예전과 같이 잘 먹고 대변도 잘 보게 되었다.”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기바가 행한 의술은 기바의 뛰어난 천재성에 의한 것이지만 근본정신과 방법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사성제의 실천이었던 것입니다.
병(苦)이 생긴 원인과 병의 상황(集)을 정확하게 판단하여 가장 적절한 처방(道)을 내리면 병은 낫게(滅)되듯이,사성제는 온갖 마음의 병은 물론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어디에도 적용되는 만병통치 실천방법인 것이라는 말입니다.
아사세가 아버지 빔비사라 왕을 살해한 뒤 뉘우치는 모습을 보고 부처님께 귀의시키기도 했던 기바사문은 음향을 잘 분별하였는데 세존께서 그와 함께 무덤 사이를 지나다가 여섯 개의 해골을 보시고 그 중의 하나를 가리키며 물으시되 이는 어디에 태어난 해골인가? 하고 묻자, 이에 기바가 대답하길 “지옥에 났습니다.” 다시 또 한 해골을 가리키며 “이는 어디에 태어난 것인가”하시니 기바가 대답하되 “그는 축생에 태어난 것입니다.”하였다. 세존이 세 번째 다른 해골을 가리키며 묻되, “이는 어디에 태어났는가.” 하시니 기바가 대답하길 “이는 아귀에 태어났습니다.”하였다.
세존이 다시 네 번째의 해골을 가리키면서 묻되 이는 어디에 태어난 것인가? 하시니 기바가 대답하되 “이는 인간에 태어났습니다.”하였다. 세존께서 다섯 번째의 해골을 가리켜 묻되 이는 어디에 태어난 해골인가 하시니, 기바가 대답하되 이는 하늘세계에 태어났습니다.”하였다.
세존이 다시 한 해골을 가리키며 묻되 이는 어디에 태여난 해골인가 묻자 기바는 “그 태어난 곳을 알지 못하겠습니다.”하였다.
아라한과를 이룬 부처님의 주치의로서 사람이 죽어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천상에 태어나는 것까지 다 아는데 그 다음에 태어나는 곳을 알지 못하는 까닭은 왜 였겠습니까?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는 곳까지는 천상의 하늘세계인 색계이지만, 무색계는 눈으로 볼 수 없고 귀로 들을 수 있는 곳이 아닌 부처의 세계이기에 의사인 기바는 감별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선종의 일체의 법문은 모든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득해야만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 있지만 아미타염불법문은 미혹을 끊은 사람이 왕생하면 법신(法身)을 곧장 증득하고 미혹과 업장을 짊어지고 왕생하더라도 이미 성인의 경지에 들어서게 된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중생들에게 설법하심은 오직 생사윤회를 벗어나도록 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참선은 상근기를 지닌 사람만이 일생에 생사를 마칠 수 있지만, 근래에 그런 도인이 어디 쉽습니까?
하지만 염불법문은 어떤 종류의 근기와 성품을 타고난 중생이든지 모두 현생(現生)에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여 생사 윤회를 끝마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렇게 좋은 염불을 하는 “자성미타”를 만나는 염불행자의 마음가짐은 어떻게 가져야 하는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는 무손해심(無損害心)이라, 누구를 저주하거나 누구에게 벌을 주라고 기원하는 마음으로 염불하지 않고, 둘째는 무핍뇌심(無逼惱心)이니, 심신이 안정되어 모든 중생에게 대비(大悲)한 마음을 항상 일으켜서 중생을 고통으로부터 해탈시키겠다는 마음으로 염불하는 것이고 세 번째는 수호심(守護心)이라, 부처님이 말씀하신 정법을 아낌없는 신명으로 수호하고 사랑한다는 마음으로 일상의 신행생활을 하는 것이고 네 번째는 무집착심(無執着心)이니, 항상 지혜로써 일체의 법을 관찰하여 어느 한 가지 사물에 고집하여 집착하지 않는 것을 말하고 다섯 번째는 기정의심(起淨意心)이라, 세간의 모든 이익과 명리에 연연하지 않고 항상 스스로 만족할 줄 아는 청정한 마음을 내는 것을 말합니다.
여섯 번째는 무망실심(無忘失心)이니, 정토(淨土)에 태어나기를 구하여 어느 때나 부처를 생각하고 염(念)하여 잠시도 불종지(佛種智)를 놓지 않고 일념으로 간절히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일곱 번째는 무하열심(無下劣心)이라, 항상 평등한 마음으로 행동하여 모든 중생을 존중하고 공경하며 경만(輕慢)한 마음을 내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여덟 번째는 생결정심(生決定心)이니, 염불하는 사람의 마음은 세속의 잡다한 일에 쏠리지 않고 오로지 위없는 무상보리(無上菩리)를 성취하고자 일심으로 전념하는 것을 말하고, 아홉 번째는 무잡념심(無雜念心)이라, 닦고 익히며 갖가지 선한 마음을 일으켜 일체 번뇌와 잡념을 모두 떨쳐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열 번째의 기수념심(起隨念心)은 염불을 열심히 한 공덕으로 비록 부처님의 상호를 보았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거룩한 상에 애착하는 마음을 내지 않고 무념한 가운데 항상 부처님을 염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염불행자가 가져야할 열 가지의 마음가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염불행자의 수행법은 어떤 것이 있는가.
“무량수경에는 삼배왕생의 길”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 상배는 출가사문이 되어 보리심을 발하고 한결같이 아미타불을 염하며, 여러 가지 공덕을 닦아 극락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사람이라 했습니다.
둘째, 중배는 재가의 신자로서 마땅히 위없는 보리심을 내고 한결같이 아미타불을 염하며 보시, 지계 등 선근 공덕을 쌓아 이것을 회향하여 극락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사람을 말하고 셋째, 하배는 여러가지 공덕을 쌓지는 않더라도 마땅히 위없는 보리심을 발하고 생각을 오로지하여 다만 열 번만이라도 아미타불을 염해서 극락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상중하배 염불행자의 공통점은 모두 보리심을 발하고 일념으로 염불해야 하며, 그 외에 공덕에 따라 상배와 중배, 하배로 나뉘어지는 것입니다.
또, 관무량수경에서는 극락왕생의 수행법으로 먼저 세 가지의 복을 닦으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첫째, 부모에게 효도하고, 스승과 어른을 받들어 섬기며, 자비로운 마음으로 살생하지 않고, 지성으로 열 가지 선업을 닦는 것이다.
둘째,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여 여러 가지 계율을 지키며, 거동과 예의를 바르게 하는 것이다.
셋째, 보리심을 일으켜 깊이 인과의 도리를 믿고 대승경전을 독송하며, 한편 다른 이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힘써 권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백 천만가지를 알고 있다해도 일상에서 한 가지를 실천하는 것보다는 못하다고 했습니다.
네 가지 모습으로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들의 생명은 어디로부터 왔겠습니까?
그것은 다만, 우리가 계절 따라 옷을 갈아입듯이 불생불멸의 주인공들이 억겁의 윤회의 쳇바퀴에서 생사를 바꿔가며 다만 옷을 갈아입고 살아갈 뿐인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법문을 듣고도 자신과 더불어 가족들의 업력을 정화시키고 윤회를 벗어나는 무량대복을 성취하기 위해서라도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는 다들 잘 아실 것입니다.
우리가 지은 악연과 업력은 한 치 앞도 모르는 일이기에 우리가 손가락질하고 천하에 나쁜 짐승보다도 못하게 여기는 양의 초등학생 살해범인 정씨 같은 후손이 우리 집안에는 인연되는 일이 없도록 모두가 선업을 짓고 선근을 쌓으시길 축원드립니다.
성불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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