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의 일상 행위와 윤회의 관계

2010. 1. 20. 18:29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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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이니 법문을 생략하고자 했으나 생전에 효행을 다 하고 이제 49일간의 중음의 몸을 받으신 어머님을 위해서 매주 일요법회 겸, 재를 올리러 오시는 가족들을 위해서 눈이 열리고 귀가 드리도록 해드리기 위해서 오늘 법문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 그제는 57세에 별세하신 거사님을 위해 잠실 아산 병원에 가서 시다림을 해드리고 어제가 발인이라 새벽부터 움직여 용인 선산에 잡아드린 산소에 마지막을 모셔드리면서 자주로 봐온 일이지만, 참 많은 것을 생각하는 며칠인데다, 염습시간을 잡아준지라, 꼭 제가 해주기를 바라는 모친의 염원으로 염습장에 들어가 염불과 왕생발원을 해드리면서 수의를 입히는 과정에서 수의 속에는 내의를 입히지 않고 한지로 감아드림과 좌우에 주머니도 없는 수의를 바라보며 길지 않은 생에 남부러울 것 없이 살다 가셨지만 가는 망자를 바라보며 또다시 무상의 도리가 절절하게 느껴지는 며칠간 이었습니다.

 

이 자리에 오늘 이 순간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우리 자신들도 모르는 생사의 길이건만, 모두들 “나는 아직 저 일을 당할 때가 아니다.” 란 생각들을 공통적으로 하고 살아갑니다.

 

한 치 앞도 모르고 살아 가기에 그런 오류를 범하고 자신은 아직은 젊다는 착각 속에서 사는 게 우리들일 것입니다.

 

누구나 한번쯤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의문도 가져 보셨을 것이고 禪家에 “부모미생전의 본래면목(父母未生前의 本來面目)”이라는 1700 공안 중에 하나가 있듯이 부모님에게 이 몸 받기 전에 나는 누구였던가? 하는 의문도 품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12 연기법에 의지해서 존재하게 됐듯이 남녀가 한 지붕 밑에 가정을 이루면 인연종자가 입태와 출태라는 과정으로 유전자에 의해 이 한 몸뚱어리는 부와 모의 특징을 고루 소유하게 되지만, 이 몸을 이 나이까지 끌고 오면서 온갖 喜怒哀樂에 휘둘리면서 살아오게 하는 주인공은 심경 내용대로 나거나 죽지도 않고, 더럽거나 깨끗하지도 않은 채, 더하거나 덜하지도 않고, 다겁생을 돌고 돌아온 공계의 무아세계에서 또렷하게 존재해온 자아의 업연으로 지금 각자가 살아가는 현실일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라는 여섯가지 분별식의 요동으로 지금 이 나이까지 인생을 만들어 왔지만, 이 여섯 가지 육식과 일곱 번째 의식인 말나식(末那識)이라는 칠식의 중간단계에 1899년 꿈의 해석에서 프로이드는 잠재의식이라는 리비도(Libido)가 있다했지만, 불교의 유식론에는 일곱 번째 분별식인 말나야 식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덟 번 째의 아뢰야식(阿賴耶識)이 있고, 구청정(無垢淸淨)의 보살 지위인 아홉 번째의 암마라식(菴摩羅識)과 부처님 경지의 열 번째 식인 건률타야식(乾栗陀耶識)이라고 하는 열 가지의 잠재된 능력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불급중생이시삼무차별”이라는 이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라는 세 가지가 하등의 차이가 없다고 화두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1880년대 독일의 니체도 “신은 죽었다”면서 초인주의를 주장했던 것이 바로 이러한 맥락일 것인지도 모릅니다.

1850년대 발명의 왕이라는 에디슨이 말하길 천재는 1%의 영감에 99%의 노력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누구에게나 찾아서 사용도 못해보고 죽을 때 함께 가져가 버리고 마는 감춰진 99%의 영감이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고 마음 한번 어찌 쓰냐에 따라 부처도 될 수 있고 중생으로 머물러 지낼 수 있는 것입니다.

생각 한번, 마음 한번 제대로, 올바로 가지고 살아간다면 부처처럼, 보살처럼 살아가는 인생을 만들어 갈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어디 있을까요?

말씀드렸듯이 수의에는 주머니도 없었고, 수의 속 몸뚱이에는 팬티 런닝은 커녕, 내복 한 벌도 걸치지 못하고 한지에 싸여지고 마는게 마지막 가는 길이더란 말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생노병사라고 하지만, 시작에서 종말로 가는 일회성의 삶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겁(永劫)에 다겁생을 걸쳐 끊임없는 탄생과 소멸을 거듭하는 윤회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고, 모든 중생들의 삶은 우연적 사건이나 초월적 존재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행위인 업(業)에 의해 지금 살아가는 현주소가 바로 업보윤회인 것입니다.

 

부처님은 아함경에서 업종자가 되는 중생의 행위와 윤회의 상관관계에 대해 네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실 때,

바사익왕이 부처님을 찾아와 묻기를 “브라만 종족은 항상 브라만의 집안에 태어나고, 왕족은 항상 왕족의 집안에 태어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제가 항상 말씀드리지 않습니까?

하늘을 나는 까마귀나 까치나 길거리의 개들의 생명의 주인공은 영원히 저렇게 태어나라고 정해진 게 아니라고 말씀드렸지요? 우리도 계절따라 갈아입는 옷이 다르지 않습니까?

 

왕의 이 질문에는 이생에서 이룩한 부귀한 삶의 조건들이 내생에도 계속되기를 바라는 욕망이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중생의 삶은 크게 네 가지 종류로 나뉘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밝은 곳에서 밝은 곳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둘째는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셋째는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넷째는 어두운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첫째, 어두운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가는 삶이란 무엇인가? 먼저 어두운 곳이란 하천하고 빈궁한 곳에 태어나거나 귀먹고 눈멀며 벙어리와 같이 불구의 몸으로 태어나 노예와 같이 비참하게 사는 삶을 말한다.

그리고 만일 그가 몸과 입과 마음으로 나쁜 업을 더 짓는다면 이생에서 받는 고통으로 끝나지 않고 죽은 뒤에 다시 지옥에 떨어지는 고통을 받는다. 이런 삶은 마치 “뒷간에서 나와 다시 다른 뒷간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기 때문에 어두운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는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둘째,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으로 가는 삶이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비록 현세에는 위에서 열거한 것과 같이 불행한 삶을 살지만 그것에 좌절하지 않고 몸과 입과 마음으로 착한 업을 닦는다면 목숨이 다한 후에는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 천상에 태어나게 된다. 이런 사람은 “땅에서 일어나 평상에 오르고, 평상에서 일어나 수레에 오르며, 수레에서 일어나 말에 오르고 말에서 일어나 코끼리에 오르며, 코끼리에서 일어나 궁전에 오르는 것과 같기 때문에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으로 들어가는 삶”이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셋째,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는 삶이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현세에는 행복하게 살지만 내세에는 불행해지는 삶을 말한다. 왕족의 집안이나 부유한 집안에 태어나며, 창고에는 재물과 보물이 가득 차 있고, 외모는 단정하고 위엄 있는 것이 밝은 곳의 삶이다.

하지만 현생이 행복하다고 해서 내생의 행복을 보장받지는 못한다. 비록 현생에 행복한 삶을 살더라도 신구의(身口意) 삼업으로 나쁜 업을 짓는다면 그도 예외 없이 지옥에 떨어지는 과보를 받는다.

이런 삶은 “마치 궁전에서 내려와 코끼리 위에 떨어지고, 코끼리에서 내려와 말에 오르고, 말에서 내려와 수레에 오르고, 수레에서 내려와 평상에 앉고, 평상에서 내려와 땅에 떨어지고, 땅에서 떨어져 똥구덩이에 떨어지는 것과 같은 삶이므로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는 삶”이 되는 것과 같다.

 

역시나 제가 말씀드리지 않습니까?

작년에 마티즈 타던 사람이 사업 잘돼서 금년에는 벤츠를 타게 되듯이 전생에 선업과 복력을 많이 지은 사람은 금생에 잘 나가지만, 금생에 다시 교만해져서 박복한 짓을 하게 되면 부도나서 허름한 자전거나 타게 된다고 말입니다.

 

넷째, 밝은 곳에서 밝은 곳으로 가는 삶이란 무엇인가?

밝은 곳이란 왕족이나 풍족한 집에 태어나 재물과 보물이 한량없으며, 몸이 건강하고 얼굴이 단정하여 위엄 있는 것을 말한다. 만약 이 사람이 여기에 안주하지 않고 몸과 입과 마음으로 선업(善業)을 행한다면 목숨을 마친 후에도 천상의 기쁨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삶은 마치 “이 궁전에서 저 궁전으로 가고, 코끼리에서 코끼리로 옮겨 타고, 말에서 말로 가고, 수레에서 수레로 가며, 평상에서 평상으로 가는 것과 같으므로 이를 밝은 곳에서 밝은 곳으로 가는 삶이라고 하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지의 태란습화(胎卵濕化)로 생명이 태어나지만 생명의 종류가 무수하고 그들이 짓는 업이 다양하므로 중생들이 살아가는 윤회의 길도 무수히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한 날 한시에 때어난 쌍둥이도 부모 곁을 떠나 살아가게 되면 서로 살아가는 복력이 다르고 한 뱃속에서 나온 자식들도 형제간에 좋아하는게 다르고 복력이 다르고, 심지어 부모와 자식의 좋고 싫어함이 다르니 이것을 뭐라고 설명할 것입니까?

 

이런 물음에 대한 답은 바로 업보윤회설(業報輪廻說)입니다.

하지만 무수한 생명들이 받게 되는 수많은 윤회의 길도, 윤회의 방향을 결정짓는 것은 살아생전에 스스로 짓는 인 것입니다.

 

이 업이라는 것에는 자기의 업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며, 지금 어떤 행위를 하는가에 따라 자신의 삶과 다음 생의 복력과 윤회의 방향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欲知前生事이면 今生受者是요, 欲知來生事이면 今生作者是라고 하질 않습니까?

 

한 생각을 긍정으로 바꾸지 못하고 번뇌와 집착으로 미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무지와 무명을 걷어내지 못한다면 현실만이 아니라 업보윤회를 끝없이 거듭하게 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알려고 노력하고 일상생활 속에서 실천하려는 삶이 되어 간다면 우리들은 이미 밝고 청명한 부처의 세계에 가까이 가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긍정의 마인드를 자각하고 일상에서 선업을 행할때, 죽어서가는 내생이나 내년과 같은 내일도 밝은 곳을 향한다는 부처님의 말씀처럼 사지육신 멀쩡하고 아직은 건강한 이 몸이 있을 때, 부지런히 정진하고 살아 있음에 감사하면서 불만족이 생길 때마다 이보다 못했을 때를 생각하면서 항상 밝고 긍정의 삶을 살아가는 불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불하십시요.

내일은 기도 회향입니다.

부처님 세계에는 없는 말씀입니다만, 부와 적이라는 소위 입춘부와 삼재부는 해마다 입춘에 새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약효가 일년짜리 라는 말입니다.

허경영이 좋아하는 오링테스트를 해봐도 사실이 그렇답니다.

번뇌의 악취를 벗어나 정토의 선취를 가는 지름길

 

꽃샘추위는 있겠지만 겨울이 갔다고 생각하니 마음은 가볍지만, 실물경제가 더욱 팍팍하기만 합니다.

 

배부르고 등 따시면 세상인심도 넉넉하고 범죄도 줄어들 것이건만, 새 대통령이 나오고 아직 취임을 안해선지 경제는 나아질 기미가 안보이고 있습니다.

인내와 끈기로 좀 더 기다려봐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법문은 전주에 이어 중생들이 살아생전에 지어온 업연에 따라 모여드는 모일 취(聚)자를 쓰는 육취 중에 선취가 있어 천상, 인간, 신들의 세계인 수라세계와 삼악가 있어 지옥취, 아귀취, 축생취의 삼악취가 있지만,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에게 악취에 떨어지는 행위와, 선취에 나아가는 행위와 열반에 이르는 법을 설하신 장아함경 제 十권, 제 二분에 나오는 삼취경(三聚經)의 나머지 부분을 전해드리겠습니다.

 

“비구들이여, 또 악한 세계로 향하는 일곱 가지의 법과 선한 세계로 향하는 일곱 가지의 법과 열반으로 향하는 일곱 가지의 법이 있다.

 

어떤 것이 악한 세계로 향하는 일곱 가지의 법인가.

살생과 주지 않는 것을 갖는 것과 음탕한 것과 거짓말과 두 말과 욕설과 꾸밈말이다.

 

어떤 것이 선한 세계로 향하는 일곱 가지의 법인가.

살생하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으며 음탕하지 않고 속이지 않으며 두 말하지 않고 욕설하지 않으며 꾸밈말 하지 않는 것이다.

 

어떤 것이 열반으로 향하는 일곱 가지의 법인가.

일곱 가지의 각의(覺意)를 말한다.

염각의(念覺意), 택법각의(擇法覺意), 정진각의(精進覺意), 의각의(椅覺意), 정각의(定覺意), 희각의(喜覺意), 사각의(捨覺意)다.

 

또 악한 세계로 향하는 여덟 가지의 법과 선한 세계로 향하는 여덟 가지의 법과 열반으로 향하는 여덟 가지의 법이 있다.

 

어떤 것이 악한 세계로 향하는 여덟 가지의 법인가.

여덟 가지의 사행(邪行)을 말한다.

사특한 소견, 사특한 뜻, 사특한 말, 사특한 행동, 사특한 생활, 사특한 방편, 사특한 생각, 사특한 정(定)을 말한다.

 

어떤 것이 선한 세계로 향하는 여덟 가지의 법인가.

세상의 바른 소견, 바른 뜻, 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생활, 바른 방편, 바른 생각, 바른 정을 말한다.

 

어떤 것이 열반으로 향하는 여덟 가지의 법인가.

여덟 가지의 현성의 도(道)를 말한다. 바른 소견, 바른 뜻, 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생활, 바른 방편, 바른 생각, 바른 정이다.

 

또 악한 세계로 향하는 아홉 가지의 법과 선한 세계로 향하는 아홉 가지의 법과 열반으로 향하는 아홉 가지의 법이 있다.

 

어떤 것이 악한 세계로 향하는 아홉 가지의 법인가.

아홉 가지의 뇌(惱)를 말한다.

사람이 있어 이미 나를 침노해 괴롭혔다. 지금도 나를 침노해 괴롭힌다. 장차도 나를 침노해 괴롭힐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것을 이미 침노해 괴롭혔다. 지금도 침노해 괴롭힌다. 장차도 침노해 괴롭힐 것이다.

내가 미워하는 자를 이미 사랑하고 공경했다.

지금도 사랑하고 공경한다. 장차도 사랑하고 공경할 것이다.

 

어떤 것이 선한 세계로 향하는 아홉 가지의 법인가.

아홉 가지의 무뇌(無惱)를 말한다.

그가 이미 나를 침노했는데 나의 번민이 무슨 이익이 있으랴. 이미 번민하지 않았고 지금도 번민하지 않으며 장차도 번민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자를 저가 이미 침노했는데 나의 번민이 무슨 이익이 있으랴.

이미 번민하지 않았고 지금도 번민하지 않으며 장차도 번민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미워하는 자를 저는 이미 사랑하고 공경했는데 나의 번민의 무슨 이익이 있으랴.

이미 번민하지 않았고 장차도 번민하지 않을 것이요 지금도 번민하지 않는다.

 

어떤 것이 열반으로 향하는 아홉 가지의 법인가.

기쁨과 사랑과 기꺼움, 즐거움, 정(定), 실다운 지견, 버림, 욕심없는 무욕과 해탈이다.

 

또, 악한 세계로 향하는 열 가지의 법과 선한 세계로 향하는 열 가지의 법과 열반으로 향하는 열 가지의 법이 있다.

 

어떤 것이 악한 세계로 향하는 열 가지의 법인가.

열 가지의 불선(不善)을 말한다.

몸의 살생, 도둑질, 음탕과, 입의 두말, 욕설, 거짓말, 꾸밈말과, 뜻의 탐욕, 질투, 사견(邪見)이다.

 

어떤 것이 선한 세계로 향하는 열 가지의 법인가.

열 가지의 선행(善行)을 말한다.

몸으로 살생, 도둑질, 간음을 하지 않고, 입으로 두말, 욕설, 거짓말, 꾸밈말을 하지 않으며, 뜻으로 탐욕, 질투, 사견을 가지지 않는다.

 

어떤 것이 열반으로 향하는 열 가지의 법인가.

열 가지의 곧은 길을 말한다.

바른 소견, 바른 뜻, 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생활, 바른 방편, 바른 생각, 바른 정, 바른 해탈, 바른 지혜다.

 

모든 비구들이여, 이와 같은 열 가지의 법은 너희들을 열반으로 이르게 할 수 있다.

이것을 삼취(三聚)의 미묘한 바른 법이라 한다.

 

내가 여래가 되어 모든 제자들을 위하여 마땅히 해야 할 일은 모두 갖추지 않은 것이 없다. 너희들을 걱정하기 때문에 법을 설하는 것이다. 너희들도 또한 마땅히 스스로 그 몸을 걱정하라.

 

나무 밑에 한가히 있으면서 깊이 생각하기를 게을리 하지 말라.

지금에 노력하지 않고 지내다가 뒷날에 죽음이 다가올 적에 후회한들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면서 받들어 행했다.

이것이 바로 장아함경 제 十권, 제 二분에 있는 삼취경 안에 들어있는 미묘한 세 가지 법의 청정하고 범행이 구족한 삼취법(三聚法)으로, 비구들에게 악취에 떨어지는 행위와, 선취에 나아가는 행위와 열반에 이르는 법을 설해주신 말씀입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해가 떳으면 석양이 찾아오고 달이 뜨듯이 사람의 한 생도 오고 싶어 오지 않았다해도, 가고 싶지 않더라도 결국에는 가야하고, 살아가는 것도 자신의 생각대로 되어지는 것은 없지만, 평소에 “내 맘대로, 니 맘대로”라는 말이 있듯이 자신의 마음만큼은 아무도 구속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살아가면서 내 마음만큼은 내가 주인이기에 스스로 마음의 부자가 되고 마음만큼은 여유롭게 가지고 사십시다.

 

삼취경을 마무리 하면서 많은 것을 기억하기 보다는 바로 첫 머리의 이 대목만이라도 기억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삼취법의 세계란, 한 법은 악한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요, 또 한 법은 선한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요, 셋째 법은 열반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어떤 것이 악한 세계로 나아가는 법인가.

 

이른바 인자한 마음이 없고 독해(毒害)하는 마음을 품는 것이다. 이것이 장차 악한 세계로 향하는 한 가지 법이다.

 

또, 어떤 것이 선한 세계로 나아가는 한 법인가.

이른바 악한 마음으로써 중생을 해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장차 선한 세계로 향하는 한 가지의 법이다.

 

세 번째, 어떤 것이 열반으로 나아가는 한 법인가.

이른바 능히 정근하여 신념처(信念處)를 닦는 것이다.

이것이 장차 열반으로 향하는 한 가지의 법이다.”

 

다음 주에는 1862년에 태어나 1940년에 입적하신 중국 정토불교인 연종의 13대조사로서 현실에서 당신의 염불수행의 정수를 우리에게 보여주신 인광대사의 법어힐록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영명선사의 사료간에 이르기를,

참선수행도 하고 염불수행도 하면 마치 머리에 뿔 달린 호랑이 같이 현세에서는 큰 스승이 되고, 내세에서는 부처나 조사가 되리라.

 

참선은 닦지 못했다 해도 염불을 열심히 한다면 만인이 염불을 해서 만인이 모두 극락에 왕생하나니 극락에서 아미타불을 친견한다면 어찌 깨닫지 못함을 걱정하리요.

 

참선만 닦고 염불은 전혀 하지 않는다면 열 명 중에 아홉명은 잘못된 길로 빠지나니 선정 중에나 몸을 바꿀 때, 망경계가 나타나면 잠깐 사이에 본심을 잃고 흘러 따라가 버리리.

 

참선과 염불 모두를 닦지 않는다면 지옥의 불타는 쇠침상에 누워 불타는 구리기둥을 안게 되리니, 이런 사람들은 만겁이 지나고 천생을 지나도록 믿고 의지할 인연을 하나도 만나지 못하리라.

 

이와 같은 것이니 금생에 이 몸 받았을 때 인연의 소중함을 다시금 새기시고 정진하시길 바랍니다.

 

성불하십시요.

꼬일대로 꼬여 악취로 향하는 중생들의 세계

화요일이면 봄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해 새싹이 나오고 기러기는 북쪽으로 날아간다는 우수절기입니다.

 

헌데도 춥기만 한 날씨인데다, 근래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예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보니 부처님께서 남기셨던 말씀들이나 일체 중생들에게 불성이 있다했고 마음이 부처로다 했던 옛 선사들의 소중한 말씀들이 현실을 아득바득하게 살아가는 중생들에게는 다 먼 나라 이야기로만 들리지나 않을까 걱정스런 요즘입니다.

 

그토록 입에 거품 물고 예수님의 종이 대통령으로 당선되기를 바랐던 기독교인들의 소망대로 돈 많고 귀하신 장로께서 주님의 은혜로 대통령이 되셨는데 전지전능하시다는 예수님께서는 취임도 하시기 전에 사회 전반에 걸쳐 이렇게 뒤숭숭한 선물들을 이 땅에 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대한민국은 이미 짝퉁이 천국이라도 되어 있어야 할 건데 말입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길을 가시는데, 소위 달릿이라고 불리는 똥을 치우던 불가촉천민의 한 청년이 황급히 자리를 피하려하자, 부처님께서 그 청년을 불러 세웁니다.

 

“너는 나를 보자 왜 도망을 치려하는가?” 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그 청년이 말하기를 “저는 천민인데다 똥을 푸던 중인지라 황송해서 그랬습니다.” 하고 말합니다.

 

부처님께서 그 청년에게 말하기를 신분이란 권력을 가진 자들이 만든 거짓일 뿐이다.

사문들에겐 그런 차별이 있을 수 없듯이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다. 그런 거짓된 차별에 속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그 청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의 신분에는 높낮이가 없음은 알겠습니다만, 제 직업은 어쩔 수 없이 천하지 않습니까? 라고하자, 부처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천하고 귀함은 다른 것이 아니다. 국왕이나 대신이라 할지라도 국민을 괴롭히고 남을 괴롭히는 자는 천한 인간이고 남을 위하고 자기를 위하는 사람은 고귀한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두 잘 알고 계시듯이 국보 1호인 숭례문에 불을 낸 사람은 2005년 자신의 집(약 99㎡)을 아파트를 짓는 건설사에 2억8000만원에 팔기로 계약을 맺었으나 알박기가 되어 파기당한 뒤, 공시지가 9600만원에 고양시에 도시계획도로로 강제 수용되자 70이 넘은 채씨는 국보 1호에 불을 질렀었고, 불탄 숭례문 앞에서는 68세 되는 정모 할매는 가짜 제사상을 차려놓고 숭례문에 조의금을 강요해서 챙기다 들켜 시비가 이는 그 상황에서 그런 정씨 할매의 조의금을 슬쩍하는 노숙자가 있었으니 세상은 개그 같은 요지경속입니다.

 

어쩌다 이렇게 대한민국에 천한 사람들만 많아지는 세상이 되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요지경의 세상, 혼탁한 공업의 휘둘림 속에서 그래도 선업의 인연을 짓고자 이 자리에 오신 선남자 선 여인들이 계시니 스스로 짓는 별업을 선업으로 가꾸실 수 있도록 부처님의 금과옥조 같은 말씀을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장아함경 제 十권, 제 二분에 나오는 삼취경(三聚經)을 들려드리겠습니다.

이 삼취경에는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악취에 떨어지는 행위와, 선취에 나아가는 행위와 열반에 이르는 법을 설하신 말씀이지만, 이 혼탁한 시대를 살아가는 불자들에게도 필요하리라 봅니다.

 

부처님의 말씀인 경전에는 “여시아문 일시 불 재사위국기수급고독원 여대비구중천이백오십인 구 이시(如是我聞 一時 佛 在舍衛國祇樹給孤獨園 與大比丘衆千二百五十人 俱 爾時)” 하고 서술이 됩니다.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누구에게, 어떻게. 왜? 라는 현대적 서술의 원칙이 명확하게 지켜지듯 부처님께서 직접말씀 하셨다는 근거가 분명함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삼취경 역시나 그렇습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이렇게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은 사위국의 기수 급고독원에서 큰 비구 대중 천 二백 五十인과 함께 계셨다.

 

그 때 세존은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너희들과 더불어 미묘한 법을 연설하리라. 이 미묘한 세 가지 법의 의미는 청정하고 범행을 구족하였다. 이것을 삼취법(三聚法)이라 한다.

 

너희들은 자세히 듣고 깊이 생각하여 그것을 기억하라. 마땅히 너희들을 위하여 설명하리라.”

 

“삼취법의 세계란, 한 법은 악한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요, 또 한 법은 선한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요, 셋째 법은 열반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어떤 것이 악한 세계로 나아가는 법인가.

이른바 인자한 마음이 없고 독해(毒害)하는 마음을 품는 것이다. 이것이 장차 악한 세계로 향하는 한 가지 법이다.

 

또, 어떤 것이 선한 세계로 나아가는 한 법인가.

이른바 악한 마음으로써 중생을 해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장차 선한 세계로 향하는 한 가지의 법이다.

 

세 번째, 어떤 것이 열반으로 나아가는 한 법인가.

이른바 능히 정근하여 신념처(信念處)를 닦는 것이다. 이것이 장차 열반으로 향하는 한 가지의 법이다.”

 

다시, 두 가지의 법이 있어 악한 세계를 향하며 또, 두 가지의 법이 있어 선한 세계를 향해 나아가며 다시 두 가지의 법이 있어서 열반을 향해 나아간다.

 

어떤 것이 악한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두 가지 법인가.

一은 계를 허는 것이요 二는 견(見)을 부수는 것이다.

 

어떤 것이 선한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두 가지 법인가.

一은 계를 갖추는 것이요 二는 견을 갖추는 것이다.(설명)

 

어떤 것이 열반을 향해 나아가는 두 가지 법인가.

一은 그치는 것이요 二는 관하는 것이다. (설명)

 

다시 악한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세 가지 법이 있고, 선한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세 가지 법이 있으며 열반을 향해 나아가는 세 가지 법이 있다.

 

어떤 것이 악한 세계로 향하는 세 가지 법인가.

그것은 세 가지의 불선(不善)의 근본을 말한다.

탐욕의 근본과 성냄의 근본과 어리석음의 근본이다.

 

어떤 것이 선한 세계로 향하는 세 가지의 법인가.

탐욕이 없는 선의 근본과 성냄이 없는 선의 근본과 어리석음이 없는 선의 근본이다.

 

어떤 것이 열반을 향해 나아가는 세 가지의 법인가.

세 가지의 삼매를 말한다.

공(空)삼매와 무상(無相)삼매와 무작(無作)삼매다.

공삼매: 온갖 것은 인연에 따라 생기는 것이기에 아(我)와 아소(我所)도 그 실체와 자성이 없는 것이라고 관찰하는 삼매를 말하고 / 무상삼매: 열반은 상(相)이 없는 것이라고 관찰하는 행(行)과 함께 일어나는 정심(定心)을 말합니다.

무작삼매: 무원삼매(無願三昧)라, 모든 법을 관찰하고서 바랄 것이 전혀 없는 관혜(觀慧)와 같이 일어나는 정심(定心)을 말합니다.

 

또 악한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네 가지의 법이 있고 선한 세계로 나아가는 네 가지의 법이 있으며 열반으로 향하는 네 가지의 법이 있다.

 

어떤 것이 악한 세계로 향하는 네 가지의 법인가.

정답지 않은 말과 성내는 말과 두려운 말과 어리석은 말이다.

 

어떤 것이 선한 세계로 향하는 네 가지의 법인가.

정다운 말과, 성내지 않는 말과, 두렵지 않은 말과, 어리석지 않은 말이다.

 

어떤 것이 열반으로 향하는 네 가지의 법인가.

四념처(念處)를 말한다. 신념처(身念處), 수념처(受念處), 심념처(心念處), 법념처(法念處)이다. (설명)

(5정심관을 수행한 이가 닦는 관법으로 ➀신념처는 부모에게 받은 이 육신이 부정하다고 관을 하는 것. ➁수념처는 우리가 일상에 낙이라고 하는 음행과 자녀와 재물 등을 보고 참다운 낙이 아니라 착심과 욕구를 일으키는 고통의 근원으로 여겨 관하는 것, ➂심념처는 우리의 마음은 변하지않고 항상 하는 것이 아니라 이익이나 기호에 따라 늘상 변화 생멸하는 무상한 것이라고 관하는것, ➃법념처란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실로 자아인 실체가 없다고 여기는 무아관을 말하지만, 이 네가지를 따로 따로 관찰하는 수행법을 별상념처관이라 하고 함께 관찰하는 수행을 하게 되면 총상념처관이라고 합니다.)

 

(五정심관은 마음의 허물을 정지시키는 다섯가지의 관법수행으로 탐욕을 다스리기 위해 육신의 부정한 모양을 관하는 부정관, 진심이 많은 이가 일체중생을 관하고 닦는 자비관, (어리석음이 많은 이가 닦는 12인연이 3세에 걸쳐 인과상속하는 도리를 관찰해서 우치를 제거하는 인연관, 3계를 나누어 관찰하는 계분별관), 나고 드는 숨의 숫자를 세어 마음의 산란을 방지하려는 수식관, 부처님의 공덕과 위의를 관상하는 닦는 관법으로 수기를 받게 된다는 관불관등이 있습니다. 여기에 애욕을 끊고자 육신의 부정함과 무상함을 관찰하는 백골관도 있습니다.)

 

다시 악한 세계로 향하는 다섯 가지의 법이 있고 선한 세계로 향하는 다섯 가지의 법이 있으며 열반으로 향하는 다섯 가지의 법이 있다.

 

어떤 것이 악한 세계로 향하는 다섯 가지의 법인가.

五계(戒)를 부수는 것을 말한다.

살생과 도둑질과 음탕함과 거짓말과 그침없이 술을 마시는 것이다.

 

어떤 것이 선한 세계로 향하는 다섯 가지의 법인가.

五계를 가지는 것을 말한다.

살생하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으며, 음탕하지 않고, 속이지 않으며, (현대적 해석)지나치게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다.

 

어떤 것이 열반으로 향하는 다섯 가지의 법인가.

五근(根)을 말한다. 믿음의 근본, 정진의 근본, 생각의 근본, 선정의 근본, 지혜의 근본이다.

 

또 악한 세계로 향하는 여섯 가지의 법과, 선한 세계로 향하는 여섯 가지의 법과, 열반으로 향하는 여섯 가지의 법이 있다.

 

어떤 것이 악한 세계로 향하는 여섯 가지의 법인가.

여섯 가지의 불경(不敬)을 말한다.

부처를 공경하지 않으며 법을 공경하지 않고 승가를 공경하지 않고 계를 공경하지 않으며 정(定)을 공경하지 않고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것이다.

 

어떤 것이 선한 세계로 향하는 여섯 가지의 법인가.

여섯 가지의 경법(敬法)을 말한다.

부처를 공경하고 법을 공경하며 승가를 공경하고 계를 공경하며 정을 공경하고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열반으로 향하는 여섯 가지의 법인가.

여섯 가지의 사념(思念)을 말한다.

부처를 생각하고 법을 생각하며 승가를 생각하고 계를 생각하며 보시를 생각하고 하늘을 생각하는 것이다.

 

삼취경에 대해서 오늘은 여기까지만 전해드리겠습니다.

 

육조 혜능대사는 깨닫고 나서 하기자성본자청정(何期自性本自淸淨)이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깨닫고 보니 나는 본래가 청정 그 자체로구나,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도리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작업이 필요할 것입니다.

 

인생 칠십을 살아온 할배가 저지르는 짓이나 가짜 젯상을 차려두고 조의금을 챙기는 68세 할매나 도둑의 간을 훔치는 노숙자나 이 모두가 세상을 살만큼 살았다고 할 연배의 사람들이 저지른 일들이니 어찌 젊은 사람들에게 바르게 살라고 할 면목이 서겠습니까?

그러구서두 자신은 모로 기어가면서 새끼 게에겐 똑바로 안걷는다고  야단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살아온 악연들이 모여 이번 율산 야음동에서 일어난 계모에게 맞아 죽는 아이의 악연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다음 생에 죽인 계모와 죽은 아이의 악연이 어찌 만나게 될런지 가슴답답한 어리석은 악연들의 꼬임들입니다.

 

이 모든 사회적 현상들이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악취의 길을  향해 가는  중생들이 보여주는 적나라한 모습들인 것입니다.

부디 지혜롭게 살아가시길 축원드립니다.

 

 
 

 



 
우리 대한민국을 날게 하소서
 

 

    

벼랑 끝에서 새해를 맞았습니다.
덕담 대신 날개를 주소서
어떻게 여기까지 온 사람들입니까?

험난한 기아의 고개에서도 부모의 손을
뿌리친 적이 없고.
아무리 위험한 전란의 들판 이라도
등에 업은 자식을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남들이 앉아 있을 때 걷고
그들이 걸으면 우리는 뛰었습니다.
숨가쁘게 달려와 이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눈 앞인데 그냥 추억할 수는 없습니다.
벼랑 인줄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어찌다 북한이 핵을 만들어도 놀라지 않고.
수출액이 5000억달라를 넘어서도
웃지 않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거짖 선지자 들을 믿은 죄입니까?
남의 눈치 보다 길을 잘 못 든 탓입니까?

 

 

  정치의 기능이 조금만 더 기울어도 시장경제의 지평에 구멍 하나만 더 나도 법과 안보의 울타리 보다 겁 없는자들의 키가 한치만 더 높아져도 그때는 천인단애(千刃斷涯)나락입니다. 비상(非常)은 비상(飛翔)이기도 합니다.

 

싸움 밖에 모르는 정치인 들에게는 비들기의 날개를 주시고, 살기에 지친 서민에게는 독수리의 날개를 주십시오.

 


   주늑 들린 기업인 들에게는 갈메기의 비행을 가르쳐 주시고,
진흙 바닥의 지식인 에게는,종달새의 날개를 
보여 주소서 날게 하소서.
뒤쳐진 자에게는 제비의 날개를,
설빔을 입지 못한 사람은 공작의 날개를,
홀로 사는 노인 에게는 학의 날개를 주소서.
그리고 남남 처럼 되어가는 가족 에게는
원앙새의 깃털을 주소서.

  날자, 날자, 한번만 더 날아보자 지금 우리가 외치는 이 소원을 들어 주소서. 은빛 날개를 펴고 새해의 눈부신 하늘로 일제히 날아 오르는 경쾌한 비상의 시작! 벼랑끝 에서 날게하소서. = 글 이 어령 =

          나라 사랑하는 길이 시원하게 뚫려 있습니다 
          마음과 힘을 모아 힘차게 달려가기만 하면 됩니다
          제발 손을 잡아 주세요
          대한민국은 날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이룻-

          ==========생명의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