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는 이유와 업은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

2010. 1. 26. 20:1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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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중생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 철이 들면서부터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살아오면서 지금 이 순간까지의 인생이 만들어져 왔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지금 살아가는 현실에는 남의 손가락질 받으며 사는 사람들이 더 배부르고, 등 따뜻하게 누리며 더 잘 사는 것처럼 보이는 일이 다반사고, 저렇게 착하게 사는데도 지지리도 못사는 이웃들이 우리 주변에 흔히들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법을 따르는 제자들이라면 인과를 알고 연기법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과 역대의 조사들께서 고구정녕하게 남기셨던 말씀 중에 금생을 살아가며 이리도 힘든 이유는 과거 생에 무지와 무명과 교만으로 뿌렸던 씨앗들이 지금의 인과라는 열매로 맺혀짐을 알아야 하고, 또다시 다음 생을 향해 금생에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새로운 씨앗들을 뿌리고 있음을 진지하고 겸허하게 들여다봐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중생들이 일상에서 알게 모르게 생각과 말과 행위로 지어온 열 가지의 악업을 백일씩 끊어서 참회하는 기도중에 두 번째 백일기도를 회향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다음 주엔 선망조상 영가님들을 천도해드리는 백중 기도를 시작하는 초제가 시작되는 입제일이라고들 알고 있는 날입니다.


백중날을 그저 선망조상이라는 영가들을 위한 날로만 알고들 계시지만, 그날은 살아생전에 못다 해드렸던 효도를 하는 날이자 자신의 지금까지 살아온 선악의 업력을 정화시키는 날이기도 한 것입니다.


경전에서는 목련존자가 막행막식으로 살다 죽어 무간지옥으로 간 어머니를 제도하고자 부처님께 간청하여 알게 된 영가 천도법이라고 알고들 계십니다만, 목련은 어머니를 위한 천도에 앞서 그 효성이 먼저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법문은 전번에도 간략하게 말씀드렸던 소위 제사라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제사란 사전적인 의미로 말하면 신명을 받들어 복을 빌고자 하는 의례라고 하는데,  


옛 부터 동양에서는 천지(天地)·일월성신(日月星辰)을 비롯하여 풍사(風師)·우사(雨師)·사직(社稷)·산악(山岳)·강천(江川), 그리고 선왕(先王)·선조(先祖)를 대상으로 제사를 지내으며, 전국의 이름난 산천에는 해마다 나라에서 직접 제사를 올렸으며, 풍수설(風水說)이 강해진 뒤로는 더욱 산천을 중시하여 제를 올렸다고 합니다.


요즘은 제사라 하면 단지 선조에 대한 의례를 가리키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는데,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제례는 사후세계라는 관념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기에 선조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 가옥에서 필수적인 존재로 되있었고(예: 종로에 있는 종묘) 그러므로 제사는 사람이 죽어도 혼백은 남아 있으므로 살아 있을 때처럼 조상을 모셔야 한다는 조상숭배사상의 유교적 가치관에서 발전해왔던 것입니다.

예서(禮書)에 보게 되면 한국의 보편적인 제례는 사당제(祠堂祭)·사시제(四時祭)·이제(爾祭)·기일제(忌日祭)·묘제(墓祭)라고 하는 5가지가 있습니다.


현재 시행되고 있는 제례의 종류는 음력 매월 초하루나 보름 또는 조상의 생일 등에 낮에 간단히 지내는 제례가 있었지만, 사찰에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고, 명절에만 지내는 것으로 바뀐 차례(茶禮), 매년 사망한 날 닭이 울기 전 제주의 집에서 지내는 기제(忌祭), 매년 시월상달 문중이 모여서 시제답(時祭畓) 비용으로 함께 지내는 시제(時祭) 등이 있습니다.


시제는 묘사라고도 하고, 차례는 성묘를 가는 걸로 대신하고들 있습니다.


그런데 사찰에서 지내는 기제의 순서나 형식을 보면 유교적인 것을 많이 느낍니다.


그것은 부처님 당시의 경전에서는 제사라는 의례가 없었던 것이고 조선시대에 와서 유교적인 형식이 법당에 까지 들어와 혼용하게 됐다고 여겨지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세속에서 지내는 유교적인 기제사의 순서는 어떤지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진설(進設)이라 해서 북쪽에 병풍을 치고 병풍 앞에 신위를 모실 교의를 마련한 다음 상을 차리되, 식어도 괜찮은 음식부터 먼저 차리고, 진설이 다되면 영정이나 미리 써둔 지방을 교의의 신위함에 붙이게 됩니다.


두 번째로는 분향강신(焚香降神)이라 제주는 꿇어 앉아 향을 살라 향로에 꽂고 재배하고, 왼쪽에 있는 집사가 제주에게 강신잔을 주면 오른쪽에 있던 집사가 술을 반잔정도 따라주고, 제주는 모사그릇에 세 번에 나누어 모두 따릅니다. 

모사그릇이 준비되지 않았을 때는 술잔을 향로 위에서 좌에서 우로 세 번을 돌린 다음 퇴주그릇에 따르게 됩니다만, 잔을 올릴 경우에는 왼쪽집사가 강신잔을 받아 오른쪽 집사에게 건네주어 제자리에 놓게 하고 제주는 재배합니다. 

다음은 참신(參神)이라 하여 제주이하 참석자 모두가 4배의 재배를 하게 됩니다.


이제 제상에 잔을 올리는데 초헌, 아헌 종헌, 이라 하여 잔을 세 번 올리게 되는데 초헌(初獻)은 좌집사가 잔을 제주에게 건네주면 제주는 우집사가 따라주는 술잔을 좌집사에게 건네주어 제상에 올리게 합니다.


그 후에 독축(讀祝)이라 하여 제주 이하 모든 사람이 꿇어앉고 참사자중에 한 사람이 축을 읽는 것인데, 예전엔 축문 읽기가 끝나면 곡(哭)을 했으나 지금은 생각도 못하고들 있고 축문 읽기가 끝나면 제주는 두 번 절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헌(亞獻)이라 해서 두 번째 술잔을 올리는 것을 말하는데 주부(主婦)가 올리는 것이 예이지만 주부가 올리기 어려울 때는 제주의 근친자나 장손이 올리고 재배를 합니다. 


세 번째 잔인 종헌(終獻)은 아헌자 다음가는 근친자가 올리며 집안에 따라서는 이때야 적을 올리기도 합니다.


이렇게 하고 나서 개반(開飯)이라 해서 주부나 집사가 메(밥)와 탕 그릇의 뚜껑을 열고, 삽시(揷匙)라 해서 주부나 집사가 시접에 담겨있는 숟가락의 밥 뜨는 쪽이 동쪽을 보도록 한다든지 삽시를 하는 사람과 반대되게 해서 메그릇에 꽂고 젓가락은 시접위에 가지런히 걸쳐 놓습니다.


젓가락의 손잡이도 역시 숟가락과 같은 방식이고, 또 젓가락을 세 번 굴리거나 메 뚜껑에 세 번을 똑똑 찍기도 하고 해서 시접위에 가지런히 놓고 나서 재배를 합니다.


첨작(添酌)이라 해서 제주가 무릎 꿇고 다른 잔 혹은 그릇에 술을 따루어, 종헌자가 다 채우지 않은 술잔에 좌우 집사를 통하여 술잔을 채우도록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는 합문(合門)이라 해서 참사자 모두가 밖으로 나가 문을 닫고 불효를 뉘우치는 뜻으로 부복한(엎드린)채,(대청일 경우 뜰아래로 내려서서) 조상이 진지를 9 숫갈 정도를 드시는 시간 동안 조용히 엎드려 생전의 조상을 생각한 다음, 개문(開門)이라 해서 제주가 기침으로 신호를 하고 조용히 문을 열고 일동과 함께 들어가서 헌다(獻茶)를 하는데 법당에서는 수반(水飯)이라고 해서 숭늉을 갱과 바꾸어 올리고 메(밥)를 조금씩 3번 떠서 말아놓고 정저(잠시 묵념)를 합니다. 

이때, 메에 꽂았던 숫가락은 반드시 손잡이가 집사의 좌측으로 가도록하여 숭늉그릇에 담가 둡니다.


그리고는 철시복반(撤匙復盤)이라, 숭늉그릇에 있는 수저를 거두어 시접에 담고 메그릇의 뚜껑을 덮고 사신(辭神)이라 해서 참사자 일동이 함께 재배를 올리고 신주를 모신 기제사일 경우에는 사당으로 옮겨 모시고, 지방과 축문은 불을 붙여 향로 위에서 두 손에 들고 사르게 됩니다.


다 끝나면 모든 제사 음식을 물리는 철상(撤床)을 하고  옷을 입은 그대로 조상이 드시고 남은 제물을 참사자 모두가 나누어 먹는 음복(飮福)을 하게 됩니다.


대체적으로 이렇게 제사를 지내게 되는데 사찰에서 지내는 방법과는 좀 다른 것을 느끼실 것입니다.

사찰에서 지내는 제사의식이 좀 더 간소화하다고 느끼실 것입니다.


속가에서는 기제를 지낼 때, 기일이 다음날 인데 전날 밤 자정을 기해 지내게 되는 이유는 자시에는 하늘의 문이라는 천문이 열리는 시간인지라 자정에 제사를 지내고 나서 천문이 열린 천상계로 가라는 뜻으로 지방이나 축문을 향로위에서 손바닥에 들고 태우면서 재를 하늘로 날려 보내게 됩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법문의 주제로 삼은 이유는 우리가 단순하게 조상을 기리기 위해서만 제사를 지내는가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는가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해서입니다.


요즘 세상이 엉망이 되어가는 이유는 인과가 허물어져 버린 이기적인 양면성이 문제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자신들의 정체성이 허물어져 버리고 없어져 버렸기 때문인 것입니다.


본디 제사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주기도 하지만 스스로 자기 집안의 정체성을 갖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제사라는 의식을 통해 나는 누구의 자손이고 우리 집안이 비록 권문세가는 아니어도 바르게 살아왔다는 긍지를 갖게 되는 계기가 되는 것인데 그런 정신들이 이제는 찾아볼 수가 없어져 버렸기에 정체성을 심어주는 자식교육은 뒷전이고 여자들은 명절날 차례 지내는게 귀찮고 힘들어 명절이 싫다는 둥, 며느리 병이라는 둥, 하는 말들을 하고들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안 입고, 안 먹고 자식들 사교육비를 감당한다고 심지어 파출부 노릇도 마다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키운 자식들의 정신세계에는 자신과 집안에 대한 정체성이라는 것이 없는지라, 빗나가기 십상인 것입니다.


이제 백중기도를 목전에 두고 우리는 기제사를 지내거나, 천도제를 할 때마다 살아생전에 다 못해드린 불효를 느낄 줄도 알아야하고, 가족들 건사하기에 바빠 자신의 신구의 삼업을 닦을 겨를도 없었던 선조들의 업력을 대신 소멸시켜드리는 효행을 행하고 더불어 조상들만 좋은 선업을 닦게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마음을 낸 자신의 신구의 삼업 또한 닦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제사를 지내는 이유는 첫째로 살아생전에 다 못해드린 불효가 있었다면 이제라도 뉘우치고 효성스럽게 돌아가신 날을 기려 조상님들의 삼업을 닦아드리는 것이 그 첫 번째 이유이고 둘째는 각지에 흩어진 자손들이 그 날을 중심으로 서로 모여 그동안 안부를 묻고 단합과 화합을 하는 것이 그 둘째이고 먼저 말씀드린 대로 세 번 잔을 올리면서 첫 잔에 조상님들의 이름에 손가락질 받지 않고 부끄럽지 않게 잘 살았다는 보고의 의미가 있는 것이 첫잔을 올리는 의미인 것이며, 둘째 잔에는 앞으로도 지켜봐주시라는 발원의 뜻이 있는 것이며, 세 번째 잔에는 저희 자식들도 그렇게 교육 잘 시키겠습니다. 하는 다짐의 의미로 제사를 지내는 것이지 단순하게 돌아가신 날을 기리는 정도의 의미는 아닌 것입니다.


거기다, 부처님의 도량에서 기제를 지내드리게 되면 여기에 두 가지 의미가 더해지게 됩니다.


살아생전에 가족들 건사하느라고 변변히 불법을 만나보기도 어려웠고 적선공덕도 제대로 못 지은 조상님들을 대신해서 선근공덕을 지어드리고 무명업식의 조상님들에게 부처님의 무상법문을 듣도록 해서 무명을 깨쳐 애착과 집착 을 끊고 대 자유의 해탈을 얻도록 해드리는 의미가 있는 것이고, 살아생전에 알게 모르게 지었던 신구의 삼업을 대신 소멸시켜드리는 깊은 뜻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가오는 백중기도의 의미를 더욱 깊이있게 받아들여 참으로 간절하고 지극하게 “나무아미타불”명호를 염불(念佛)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나무아미타불”이라는 뜻은 조상님들을 향해서 영단에 염불을 하게 되면 모든 착심을 다 놓아버리아미타 부처님이 계시는 극락세계로 어서 가시라고 권유하는 뜻이 되고, 자기 혼자 “나무아미타불” 명호를 부르며 기도를 할 때는 나 죽게 되거들랑 극락세계로 가도록 해달라는 발원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도 지극하고 간절하게 염염 생각생각 아미타 부처님을 떠올리며 조상님들의 신구의 삼업을 씻어드리는 백중기도에 정성을 다하시기를 당부드립니다.

아울러 3개월이 넘어 유산된 낙태아나 수자령이라 부르는 인연들이 있다면 이 또한 무시하지 말고 기도에 동참시키시기 바랍니다.


성불하십시오. 

오늘부터 초제가 시작됩니다만, 제가 혼자 생각해도 “참, 이런 건 아니다.” 싶은 말을 무책임하게 해대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제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우리는 태어나 자라면서부터 이분법적인 사고의 교육을 받은지라 일상에서 행동하는 것들이나 생각하는 것들, 그리고 말하는 것들이 대부분 흑백논리에 떨어져 있고 이러는 근저에는 이분법적인 사고와 판단력이 뿌리를 하고 있음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것은 요즘 사찰들이 부처님께서 진실로 전하고자 했던 뜻에는 부합되지 않고 무슨, 무슨 기도와 천도재 위주로 사찰을 운영해간다는 식으로 무책임하게 말들을 합니다.


여러분들이 보시기에 우리절에서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모든 것이 과유불급이라 지나치면 문제이지만, 저는 신도 분들이 오시든 오시지 않던 법문을 준비하고 전해드립니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 또는 한 달 동안 부처님 뵈러 오시지 않으면서 알게 모르게 지으셨던 신구의 삼업으로 지어온 크고 작은 업들을 정화시켜드리고자 이렇게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이 백중기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의 대부분은 백중기도는 그저 죽은 조상귀신들이나 영가를 천도하는 의식이라는 애매모호한 생각으로 여기신다면 그동안 제게서 들으셨던 법문들은 다 부질없는 귀동냥 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귀신들을 위하지 않을 바에는 어찌 보이지 않는 신장님들이나, 불보살님들께 기도할 필요가 있을까요.

예수고, 부처고 간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향해 뭐하러 기도를 합니까?


생각이라는 의업을 일으키는 이 몸 안의 주인공인 마음이라는 것도 찾을래야 찾을 수 없고 볼래야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것이 지금의 내 인생의 역사를 만들어 오고 있는데 이것이 죽음 이라는 과정을 통해 환지본처라, 몸뚱어리는 한 줌 재가되거나 땅에 묻혀 세월 지나 유기질 비료가 되어 몇 백년 후에 후손들이 채소나 과일을 가꾸면 비료가 되어 후손들에게 신토불이로 한 몸이 될 것이지만 이 몸뚱어리를 그토록 부려먹었던, 온갖 시비와 분별로 온갖 업을 지어오게 했던 그 주인공은 여러분들이 반야심경을 봉독하면서 “죽지도 않고 또 왔네!” 하는 각설이 타령처럼 불생불멸이요, 불구부정이며, 부증불감이라고 독송은 잘들하시면서 어찌 불생불멸인 그 주인공의 다겁생래의 죄구를 씻어주는 의식에는 그리들 인색한지 모르겠습니다.


정작 자신도 죽으면 바로 그 경계에 들어갈 것인데 말입니다.


여러가지 기도행위를 하는 것은 자신의 선망조상들을 위하는 것이 대 명제인 것 같지만, 사실은 기도를 하려는 마음을 일으켰으니 자신의 의업이 청정해지기 시작한 것이요. 기도를 하고자 몸이 법당을 찾아 부처님을 참배하고 있으니 신업이 청정해지고 기도시간에 기도를 함께 하다보니 온갖 구업을 짓던 입이 정화되는 시간들인 것입니다.


백중기도 주간을 정해서 기도한다고 하는 것도 사실은 자기 자신을 위한 기도인 것이지 선망조상들을 위해 천도기도를 한다는 것은 하나의 방편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를 함으로써 자신의 마음의 정화는 물론이요, 가정마다 기도로 정화된 선업의 향기짙은 향 한 자루를 꽂아 두는 것이되고 그런 업들이 모이면  우리 사회는 밝아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가 종교 생활을 하는 시간이나 동안에는 모두가 하나님의 선량한 종들이요, 예수님의 후손이요, 부처님의 제자 같은 지극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가도 그 시간이 지나거나 그 장소를 벗어나면 그 뿐인 사람들을 너무나도 많이 보게 됩니다.


이것 또한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에 빠져 있기에 이토록 교회가 극성이고 절마다 기도를 한다고  무슨 때만 되면 프랭카드가 걸리고 심지어 우선은 사찰을 알리고 사람 인연많이 짓고자 하는 의도가 있든 없던 기도비 없이 천도재를 지내준다는 사찰들도 생겨나고 있습니다만, 사찰을 운영하는 비용이 하늘이나 부처님께서 하늘은행 계좌에서 송금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이런 기도 기간을 통해서 첫째로 자신의 신구의 삼업을 청정히 하고 자신을 정화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그렇게 정화된 자신의 영적인 내재된 선업의 힘으로 자신의 가족들에게 참다운 부처님의 정법을 몸으로 보여주고 스스로가 실천해가는 올바른 불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번 백중기도에 더욱 간절하고 지극하게 집에서라도 기도기간을 정갈하게 보내시면서 지심발원하여 불보살님들의 위신력으로 힘을 얻으시어 살아 있는 가족 모두를 위하면서 불생불멸이요, 불구부정이자, 부증불감이라고 하는 선망조상들의 주인공을 위해서 그들의 생전의 죄구를 씻어주고 삼업을 청정히 해주는 의식을 따로 보거나 아니면 이러한 기도를 삿되게 보는 그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고 만질수도 없는 자신의 일상의 팔만사천가지가 넘는 의식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것은 바로 자신의 마음이요, 이 마음이 자신의 자라온 교육과 훈습과 욕구에 끌려 슬쩍 동하면 생각으로 나타나고 이게 굳어지면 주관이 되고 삶의 철학이 되고 고집과 아집의 뿌리가 되어 독선을 불러일으켜 수많은 전쟁으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한 가정을 망치기도 하는 것일 진대, 이 한 마음으로 일어나는 한 생각의 지배를 받아 그 동안 저질러온 온갖 신업과 구업으로부터 우리는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열가지 십악 중에 한 가지 악업이라도 저지르지 않는 것은 소극적이지만 당연한 선업입니다.


죽이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에 더욱 적극적으로 죽어가는 것을 살리는 적극적인 선행은 우리 의식을 한 차원 높고 수승하게 이끌어 주는 것이지만,  요즘 세상은 요지경이라 일부러 방생할 생명거리를 키우고 있고 그걸 사다가 방생하면 밑에서는 다시 건져 올려 팔고 있으니 중생의 업은 이렇게도 흉악해지고 있는데다, 외래종을 방생 잘못하면 우리나라 생태계의 교란을 가져오는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고 있으니 이렇게 천만변화의 먹구름을 일으키는 이 시대에서 자기 자신의 선업을 닦고 가족들의 업을 정화시키며, 죽지도 않고,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는다는 선망 조상 주인공들의 살아 생전의 삼업을 닦아드리는 기도를 우습게 여기거나 자신의 이분법적인 사고로 보이지 않는다고 이미 죽었는데 무슨 필요가 있냐고 하는 어리석음은 혼자서 필요한 것이지 남까지 끌고 들어가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자기 죽어서는 어쩌려고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단편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다 아는 것 같지만 사실은 보이지 않는 세계는 전혀 모르는 것이기에 부처님께서도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라고 했던 것입니다.


왜냐, 말해주어 봐야 중생들에게는 보는 눈들이 없기 때문에 자칫하면 혹세무민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기에 신신당부를 하셨던 것이 바로 요즘 무슨 휴거니 뭐니 하는 것입니다.


이번 백중기도가 8월 27일에 끝나게 되면 잠시 틈을 주었다가 제 3차 “사음중죄 금일참회”라는 열가지 악업 중에 몸으로 짓는 세 번째 업장소멸 기도가 시작되게 됩니다.

그리고 기도 주간의 매월 말일에는 자비참법 철야기도를 하게 됩니다.

자신의 신구의 삼업을 정화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 가족들 모두의 업을 정화시키는 데는 이보다 더 좋은 기도가 없다는 것만 알아주시기를 바랍니다.


또, 이렇게 좋은 기도를 할 수 있는 자비참법기도 책을 법공양을 권선동참해서 누구든 와서 기도 할 수 있도록 사찰에 비치해두고 또, 인연이 되어 오가는 영등포교도소 안의 불자재소자들에게 보내드리고자 하는 생각입니다. 

 

백 사람 중에 단 한 사람이라도 선근을 일으키는 인연을 짓도록 할 수  있다면 우리는 불보살님들의 서원에 합당한 선업을 짓는 것입니다.


법공양에 많은 동참을 바라며 다음 법문은 우리 살아가는 힘의 원천인 업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성불하십시오.

요즘, 인터넷을 보게되면 정부에서 위험지역이라고 가지 말라고 수십번을 넘게 만류하는데도 불구하고 제 3국을 통해 아프카니스탄에 봉사라는 미명으로 선교를 하러가자 정부에서 귀국행 비행기까지 보냈는데도 떠났던 분당의 샘물교회의 신도들이 아프카니스탄의 탈레반 반군들에게 붙들려 생사가 경각에 처해 있다고 합니다.


무지할 만큼 어리석게 현실과 이상을 착각하는 신앙지상 주의자들이 전지전능한 주님의 능력을 외치고 유서까지 써놓고 정부에서 못 가게 하는 것은 종교탄압이라고 소송도 불사하겠다고 외치고 떠나더니 목숨이 경각에 달리자 지금은 정부에서 늦장대처를 한다고 항의를 한답니다.

거기다 한국군을 철수해달라고 하고 있으니 이를 어쩐단 말입니까?


그들이 그렇게도 신봉하는 전지전능한 주님은 그들을 순교? 로 내몰고 있으니 당연히 주님의 뜻으로 받아들여 모두 쓰임이 있어 천국으로 데려갈 차비를 하고 있나봅니다.


중생이 단견에 떨어지면 이렇게 무지하고 어리석어지나 봅니다.  


전번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와 더불어 모두가 아침 녘에 눈 뜨면서 어젯밤에 계획했던 일들에 대한 일상적인 생각이나 자신의 직업에서 일어나는 모든 행위들이 사실은 생각이라는 것에 지배를 받아서 이 몸과 입은 비즈니스를 해야 하고 기쁜 일과 좋은 일과 불쾌한 일과 괴로운 일들을 겪어내야만 됩니다.

이렇게 살아가는게 인생살이일 것이고 대부분의 중생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자 현 주소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상생활에서 항상 기쁜 일과 좋은 일만 일어나기를 바라면서 살아가고 있고, 그저 만나면 좋은 사람, 내게 이로운 사람들을 만나면서 살아가기를 희망합니다만,


그런데 이 세상이 그렇게 뜻대로만 되지 않는다는 데서 우리는 현대병의 가장 큰 원인이 되는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고 괴로워하고 힘들어 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도대체 왜? 우리의 삶은 이래야만 되고, 그렇다면 여기서 벗어나는 방법은 없는 것인가.


1799년에 러시아에서 태어난 “알렉산드르 푸쉬킨”이라는 사람이 “삶”이라는 싯귀에서 말하기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픔의 날이 가고나면 머지 않아 기쁨의 날이 오리니” 하면서 결국에는 서구적인 새옹지마를 끝으로 시가 끝납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운명에 매이지 말라," 일체가 인연과보에 따른다 해도 스스로의 노력으로 업은 달라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의도적으로 업을 짓고 또 쌓아두었다면 그 과보를 받지 않은 채 그 업이 근본적으로 끝난다. 라고 나는 결코 말하지 않는다.

그 업의 과보는 현생에 받든지 아니면 반드시 내세에라도 받고야 만다.”

바로 업과 윤회에 관련된 내용으로 고타마 부처님께서 처음 제자들에게 베풀어 주신 가르침입니다.

이 가르침을 보면 “업”이라는 말이 나오고 그 업은 반드시 결과를 불러들인다고 말씀하고 또, 금생에서 과보를 받지 못하면 내세에라도 결과를 반드시 불러들인다고 밝히고 계십니다.

우리 불자들은 이생이라든가, 또는 내생, 전생이라고 하는 다소 형이상학적이고 초월적인 단어와 개념들을 자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단어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금생 또는 전생, 내생이라는 말이나, 혹은 현세, 숙세, 내세라는 말들이 의미를 가지려면 반드시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이 개념들 사이에 개입되어 있어야 합니다.

전생과 이생을 가르는 것도 죽음이고, 현생과 내생을 가르는 것도 죽음이 있어야만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전생에서 현생, 또는 현생에서 내생으로 넘어가는 것을 불교에서는 윤회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제가 항상 이해가 되기 쉽게 말씀드리는, 오늘 이 현재가 있다면 어제가 있었을 것이고, 죽지 않는 한, 내일은 올 것이고 금년이 있다면 작년도 있었을 것이고 역시나 죽지 않는다면 내년도 있을 것인데 이것을 과거 현재 미래라 한다면 왜 지금의 현생을 살고 있다면 어제나 작년 같은 과거생이 없었을 것이며 내일이나 내년같은 내생이 없겠습니까?

그것은 없는 것이 아니라 뇌의 한계로 다만 인식을 못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토록 빠르다는 전자계산기도 계산 수치한계를 벗어나면 한계초과라며 계산을 못하고 맙니다.

이처럼 우리의 뇌의 영역도 주어진 인식 가능한 현상계에서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만을 인식할 뿐이지 인식의 한계를 벗어나면 없는게 아니지만 인식이 안 되기에 이를 믿지 못하고 미혹할 미자(迷字)를 써서 믿을 수 없다 해서 미신이라고 합니다만, 이것은 범부중생들이 자신들의 인식의 한계는 인정치 않으려는 아집 때문이지 결코 없는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전번에도 말씀드렸듯이 업을 받는 시기에 대해서 말씀드렸었고, 방금 말씀드린 부처님께서 “운명에 매이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업과 윤회에 관해서 부처님의 말씀으로써는 가장 최초의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가 업이라는 말을 얘기하다 보면 업이라는 표현은 분위기가 상당히 무겁고 어둡다는 겁니다.

또 과거전생의 죄업이라는 뜻으로 업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일이 잘 안 풀리고 어려움에 처하게 되면 대부분이 “전생에 무슨 업을 지었길래…” 하든지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렇게 되는 일이 없냐고 한탄들을 하게 됩니다.

업이라는 것이 아주 무겁고, 또 죄스러운 것 등 죄업과 관련된 입장에서 업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실제로 부처님 경전 속에서 업의 가르침은 무겁고 어두움을 던져주는 것도 아니고 과거 예속적인 죄업의 분위기를 이야기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부처님은 가볍고 하얀 업을 이야기하셨고, 과거 예속적이기보다는 미래 지향적인 업을 이야기하셨으며, 죄업(罪業)보다는 복업(福業)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업의 본래 의미인 밝고 가볍고 미래지향적이고 복업으로서의 가르침들이 무겁고 어둡고 과거 예속적이고 죄업으로서의 분위기로 받아들여진 셈입니다.

정반대의 느낌이나 분위기로 업의 의미가 회전된 셈입니다.

희고 가볍고 경쾌하고 착한 업을 지어서 미래에 다시 말해 이생이나 다음 생에서 업을 지은 이후의 시간 속에서 행복하고 즐겁게 살아야 되지 않느냐는 가르침으로서 부처님은 업을 설하셨던 것입니다.

악업을 경계하고 선업을 선양하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업에 대한 가르침을 설할 때는 분명 가볍고 밝은 업을 지어서 미래지향적인 복된 삶을 추구하라는 뜻에서 업을 이야기하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업을 떠올릴 때 또 한 가지 문제가 되는 생각은 업이라고 하는 것을 거부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원리 정도로 이해하는 경향이 많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운명론적인 관점에서 업이라고 하는 말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운명이란 말을 할 때는 어떻습니까?

나로서는 어쩔 수가 없는 것, 혼자 힘으로는 거부할 수 없는 정해진 원리라고 할까요. 그것을 우리는 운명이란 말 속에 담아서 사용합니다.

그것처럼 “업” 하면 거부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원리 즉,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무겁고 정해진 운명 같은 분위기와 무게를 업이라는 말에 부여합니다.

하지만 업이란 전혀 거부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원리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해야 합니다.

나폴레옹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 바람이 분다 닻을 띄워라,” 남들은 바람이 분다고 포구로 돌아오는데 나폴레옹은 되려 거꾸로 바람을 이용하고 바람을 이기자는 식으로 말을 합니다.

운명이나 업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자신의 의지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배 만배 절을 하다가 몇 백배 절을 하고 지치고 더 이상 힘이 들어 그만 두고 싶을 때 거기서 주저앉게 되면 자신의 업은 혹시나 가 역시나 가 되고 말지만, 기어이 지친 몸을 일으켜 세워 정해진 횟수를 통과하게 되면 다해낸 것과 같이 우리가 매월 말에 철야로 자비참법기도로 삼천배의 절을 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인 것입니다.


스스로의 업은 스스로에게 달린 일인 것입니다.

이를 자작자수라 합니다. 그렇게 하여 지혜를 수반한 행위로 자신의 업은 스스로가 바꿀 수 있고 이렇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불보살님들을 향한 지극한 신심과 원력에 따른 가피력인 셈인 것입니다.


요즘 정신없이 주변을 어지럽게 만드는 신앙지상주의에 떨어져 입으로는 주님의 곁으로 간다고 떠들다 막상 목숨들이 경각에 달리니 허겁지겁하는 어리석은 범부중생들의 나약함이 저 지경이란 말입니다.


순교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번에 죽었던 김선일 씨는 목숨이 경각에 달리자 국가도 원망하고 자신의 종교마저도 회의를 갖지 않습니까?

자신의 능력을 오판하는 과대망상으로 아니면 너무 쉽게들 생각하는 관념들이 자신의 생명을 사지로 끌고 간 것입니다. 이런게 바로 어리석은 의업의 결과인 것입니다.

성불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