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불기도의 힘은 이루지 못함이 없다

2010. 1. 24. 20:26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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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살아온 세월 동안 모두가 수없이 많은 만남과 사건과 사고로 한때는 가슴아파하고 어떨 땐, 뛸 듯이 기뻐하면서 오늘 이때까지 살아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모든 닥쳐오는 좋은 일, 궂은 일, 가슴 아픈 일이라는 큰일들에 대해서 가만히 관찰해보면 결코 우연이 아닌 일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엊그제, 실종 일 년 만에 구리시에서 사체로 발견된 부평의 주부의 이야기를 전해드리면서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오비이락(烏飛梨落)이라하는 속담은 선연이든 악연이든 전생의 선악의 인연으로 인한 필연들이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혜안이 없는 중생들인지라 필연을 우연으로 여겨 지나쳐 버리고 우연을 필연으로 착각해서 악연으로 이끌어가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지난 2003년 2월 23일 부평에 사는 42세 된 주부가 지인을 만나고 온다며 나갔는데 소식이 없어 가족들이 실종신고를 냈고 일 년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는데 실종 1년 만에 낡은 폐수처리용 수조 안에서 사체로 발견됐고, 그 범인은 30살 된 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범죄가 일어난 모든 시기와 정황을 보게 되면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우연의 일치인지라 제가 보기에는 과거 생의 악연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범인 조씨의 자백으로 살인사건의 전모가 서서히 드러났는데, 2003년 2월 24일 새벽 죽은 주부는 친구가 사는 인창동 아파트에 들렀다가 인근 호프집에서 술을 마시고 부평의 집으로 가다가 너무 취한 나머지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는 상태로 친구와 헤어진 뒤 잠시 쉬었다 가야겠다고 생각한 그 여자는 주변 아파트 상가 1층 계단에 앉아 있게 되었고 이것이 엄청난 불행의 시작이었습니다.


당시, 그 상가 지하에는 이삿짐센터에서 일하던 조 씨가 살고 있었는데, 이날따라 새벽까지 잠이 오지 않았던 그는 잠깐 바람이나 쐬고 와야겠다는 생각으로 슬리퍼를 신고 계단을 올라갔는데, 1층 계단에 웬 여자가 스커트를 입고 술에 취한 채 앉아 있었고, 노총각에 미혼이었던 조씨는 야심한 시각 홀로 계단에 앉아 있는 여자를 보곤 순간적으로 욕정을 일으켜 만취상태였던 여자가 방어능력이 없을 것으로 판단하고 성폭행하기로 마음먹고 부축해주겠다며 여자에게 접근했고 그녀를 자신이 머물던 지하 숙소로 끌고가 강제로 몹쓸 짓을 하려들자 여자가 소리를 지르며 강하게 반항하자, 당황한 조 씨는 여자의 입을 막고 목을 조르다가 급기야 동네 정육점이 문을 닫으면서 가게에 두고 간 칼로 여자를 마구 찔러 살해하게 됩니다.

불과 몇 분 사이에 벌어진 살인이었습니다.


제가 법회시간에 소재로 이런 말씀드리는 것은 바로 이것이 우연처럼 보이는 우연을 가장한 전생의 악연들이라는 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그 날, 부평에서 구리시까지 가게 됐으며 왜 하필 그 시간에 주부가 만취 상태로 아파트 계단에 있었으며, 왜 하필이면 범인은 그날따라 잠이 쉽게 오질 않아 바람 쐬러 나오다 만취된 여자를 만나 살인까지 이르게 되는 악연이 만들어졌냐는 것입니다.


성수대교 붕괴 시에 왜 하필이면 교각이 끊어지는 딱, 그 시간에 지나가야 했으며, 다른 때 다 놔두고 왜 하필이면 그날 무너지는 삼풍백화점엘 가서 불행의 주인공들이 됩니까? 

이것이 바로 필연과 우연, 인연 속에서 선연도 만나고 악연도 만나게 되는 인연법속에서 삶의 희 노 애락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이샬리로 길을 가다가 언덕을 오르자 고개 너머에 커다란 망고가 열린 나무에 앉아있던 까마귀가 인기척에 놀라 푸드득하고 날아가자, 커다랗게 잘 익은 망고열매가 뚝! 하고 떨어집니다.

그 때 하필이면 망고열매가 떨어지는 그 밑으로 뱀이 지나가다가 떨어지는 망고열매에 대가리를 정통으로 맞아 그 자리에서 죽게 됩니다. 바로 오비이락이라는 것이지요.


이걸 보게 된 제자들도 참 어이없어하던 중, 부처님을 항상 가까이서 모시던 아난이 대중을 대표로하여 부처님께 묻게 됩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는 지금 너무도 희한한 경우를 목격하였습니다.

방금 저희들의 인기척에 놀란 까마귀가 날아가자 떨어지는 망고 열매에 지나가던 뱀이 머리를 맞아 죽었습니다.

그런데 세존께서는 중생의 모든 희, 노, 애락들은 인과에 의하고 인연에 의한다고 하셨는데 지금 저희가 본 저 상황도 인과에 속하고 인연에 속하는 것입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아난을 돌아보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렇다.! 저것도 바로 인과이고 악연이니라.”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 삶의 행, 불행과 희노애락의 답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세존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저 까마귀는 전생에 산비둘기였고, 저 뱀은 전생에 산돼지였느니라.

저 뱀이 산돼지였을 적에 산비탈을 뛰어가다가 굵은 자갈을 잘못 밟자 자갈이 비탈을 굴러가다 하필이면 비탈사이에 집을 짓고 살던 산비둘기의 집을 덮쳐 산비둘기의 갓 태어난 새끼들과 알들이 깨어져 죽게 되었느니라.

그 원결이 쌓여 그때의 산비둘기는 지금의 까마귀가 됐고 그때의 산돼지는 지금의 뱀이 되어 그때의 악연을 되받게 된 것이니라.

비구들이여, 이 세상의 모든 삶은 이와 같이 인연과보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때문에, 너희는 팔정도와 육바라밀을 기둥삼아 쉼 없는 정진을 해야 한다.” 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건의 피해자인 주부가 부처님의 팔정도의 가르침을 귀동냥이라도 했더라면 새벽시간까지 몸을 이기지 못할 정도로 술에 취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른 견해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정견(正見)이 있었더라면, 당연히 바른 견해를 가짐으로서 바른 생각을 할 수 있는 정사(正思)를 행했을 것이고 정어(正語)와 정업(正業)으로 일상의 행위들을 바른 생각과 말, 나아가 몸과 마음과 말의 신구의(身口意) 삼업을 청정히 하면서 바로 사는 정명(正命)의 바른 생활을 했더라면 그런 악한 인연을 피해갔거나 가볍게 넘어갔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고 당일의 행적들이 팔정도는커녕, 상식의 기본을 벗어난 상황이었기에 그러한 횡액을 당하게 된 것이라 여겨집니다.


사생으로 태어난 업보중생 가운데에서 그래도 가장 수승하다는 사람의 몸을 받은 우리들은 참으로 다행한 일인 것입니다.

저기 밖에 있는 개들이나 날아다니는 새들이 이러한 인연법을 알아들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 마음이 부처가 될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불성 중생심인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이 마음 안에는 팔만대장경을 만들 마음도 들어있고, 예수님처럼 될 수 있는 마음도 들어있고, 부처님처럼 될 수 있는 가능성도 모두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소중한 사람의 몸을 받아가지고도 유한한 삶 속에서 허송세월을 해버리고 만다면 이 또한 얼마나 허무하고 허망한 인생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부단히 정정진(正精進)을 해야 하고 순간순간 스스로를 자각하면서 바른 생각이라는 정념(正念)을 그림자처럼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면 일상의 생활에서 번뇌와 망상이 나올 수 없는 정정(正定)의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일상의 생활에서 매사를 올바르게 보는 것이 전제 되지 않는다면 올바른 생각도, 올바른 행동도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정견이 우선되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끝없는 인연과보의 굴레에서 허덕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바쁜 현실생활에서 버스나 전철만 타도 옆 사람과 부딪쳐야하고 가까운 가족과 형제간에도 서로 뜻이 맞지 않아 갈등 속에서 살아가야하는 현대인들에게 정견으로 정신집중하고 살라는 주문은 너무 어려운 주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항상 말씀드리는 것이 바로 염불수행을 생활화하라는 것입니다.

기도 중에 염불처럼 좋은 것이 없습니다.

염불을 하게 되면 과거생의 악연도 인과도 두려울 것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과거 생만이 아니라 금생에 지은 죄업도 능히 참회시킬 수 있는 자비참법을 읽어보시게 되면 독경을 하거나 기도를 하게 되면 호법선신이 그 사람을 옹호하고 지켜준다는 부처님의 말씀이 여실히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어떤 악연이 다가와 해코지를 할 수 있겠습니까?

염불은 자신의 본성이 부처임을 믿고 자기 마음 가운데서 부처를 찾는 것입니다.

이것은 염불뿐만 아니라 불교의 모든 수행의 목표이기도 하지만, 염불이 좋은 점은 이행도(易行道)에 있습니다.


이행도란 실행하기 쉽고 증득하기 쉽다는 뜻으로 염불을 통해 소원이 성취되고 장애가 사라지며 나아가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고, 극락왕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리되는 이치는 불보살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보호하는 자비심과 우리가 불보살님을 그리는 마음이 존재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살아가는 속에서 주처정토를 이루지 못한 사람이 죽어서 어찌 왕생정토를 갈 수 있겠습니까?


정토(淨土)란 한마디로 성불(成佛)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이 잘 갖추어져 있는 곳으로 그곳에 태어난다면 성불(成佛)이 보장되는 곳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불자들은 육도를 돌고도는 윤회의 천상(天上)에 나기를 바라기보다 정토(淨土)에 왕생하여 윤회로부터 해탈하고 부처를 이루기를 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토로 가는 지름길이 염불수행인 것입니다.

염불수행을 하면 부처님의 광명으로 아무리 두터운 무명업장도 무너져 내리게 되고 나의 본래 면목을 발견하게 되면 스스로 정토에 왕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행생활을 했을 때 우리에게는 성수대교의 참사도 삼풍백화점의 비극도, 우연처럼 일어나는 과거생의 악연도 피해갈 수 있고, 큰일은 작아지고 작은 인과는 저절로 소멸되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이렇게 좋은 염불을 한번 해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염불을 통하여 염불수행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세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신(信)이라, 모든 수행에 있어 가장 근본은 발보리 심과 신심이라고 했습니다.

둘째는 원(願), 셋째는 행(行)인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신(信), 원(願), 행(行) 3자량(自量)이라 하는데, 신이란, 아미타불과 극락정토의 실존을 믿는 것이고, 원이란, 그곳에 가겠다는 원을 세우는 것이며, 행이란, 실천으로 염불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은 자신의 본성이 곧 부처임을 믿는 것이고, 염불을 통해 그것을 발견할 수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정토왕생을 위해서는 신, 원, 행의 3자량이 필요하며, 그 중에서도 信은 기본인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이 가장 중요하고 다음으로 발심이 중요하며, 마지막으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가는 실천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 염불을 마음으로 생각하고 입으로 부르는데 통하므로, 心念과 口稱 둘로 나누어, 관념염불 : 아미타불을 관념, 관찰하며(마음으로 생각하는 것) 구칭염불 : 칭념하는 것으로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법회에 나오셔서 지금껏 하신 기도가 바로 염불은 염불인데 어느 날 조주 선사에게 한 수좌가 묻기를 평상심이 도라고 하셨는데 그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하고 묻자 조주선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자네 말이 맞긴 하네만, 자네들은 밥 먹을 때도 오만가지 생각을 해가며 밥을 먹지만 나는 밥 먹을 때는 밥 먹는 생각 외에 는 다른 생각이 없다네, 했습니다.

오늘 기도하시면서 여러분들께서는 불보살님들의 자비스런 상호를 떠올리며 지극하게 거룩한 그 명호를 관념과 구칭을 일념으로 하셨습니까?

일체가 자기가 짓고 자기가 받는 자작자수인 것입니다.

성불하십시오.

염불기도법문(공업 속에서 닦아나가는 별업의 힘)

 

내일 일은 그만두고 잠시 후에 자신에게 어떤 일들이 벌어질 것인가는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현주소일 것입니다.


항상, 하는 말이 지 배부르고, 등 따뜻하고 주머니 넉넉하면 세상이 눈 아래로 보이는 게 중생심인지라 잘나갈 땐 가진 건 교만으로 가득차서 살아들 가는 게 대부분의 범부들의 삶일 것입니다.


세상을 온통 혼자서 다 걱정하고 근심하고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은 정말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부처님 말씀처럼,  아니, 예수님의 말씀처럼 예수님의 가르침이라는 코드에 맞게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싶습니다. 

전번에도 말씀드린 대로 우리는 이분법적인 두 가지 신앙생활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게 대부분이라고 말씀드렸지요?


법당 안에서만, 절에 와서만 불자가 돼서는 안 된단 말입니다.

한 치 앞도 모른다는 정치판보다도 더 깜깜한 한 생을 우리는 살아가고들 있는 것입니다.


몸이 좀 불편해서 종합검진을 받았더니 그 흔한 어떤 암이라는 진단이 떨어질지, 멀쩡히 길 가다가 쌩쌩 달리는 차에 처박힐지 아무도 모른단 말입니다.


이렇게 불확실한 삶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인데다 자신의 내면에 대해서나 자기 삶에 대해서 자신의 노후에 대해서 자기를 바로 보는 힘들이 없기에 내면은 나약할 대로 나약해져서 손쉽게 찾는 건 오직 “믿습니까? 믿습니다! 아멘! 할렐루야!”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본디 “아멘”이라는 뜻은 초기 그리스 구약성서에서는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하는 뜻이었고, 영문성서에서는 “설교자의 말에 동의하고 진실을 인정”한다는 의미였고, “할렐루야”는 신을 찬양한다는 의미에 불과합니다.

여러분들도 제 법문 도중에 꽤 괜찮고 마음에 와 닿는 대목이 나오시면 아멘! 하고 소리도 좀 내보세요.

여기에는 지가 짓고 지가 받는다는 인연과보라는 자연의 법칙이자, 우주의 질서인 “자작자수”라는 의미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습니다.

어찌 천지자연의 이치가 무시된 채, 인간의 자유의지는 전혀 인정되지 않고 오직 전지전능하다는 신의 뜻에 의한다면 지금 우리나라의 정치 현실이나 이토록 살기 어려운 현실들이 다 신의 뜻이란 말입니까?

심지어 탈레반의 인질들도 누구는 죽고 누구는 살아온 것도 다 전지전능한 신의 뜻이란 말입니까?


지금 우리가 이렇게 힘든 시기를 살아가는 것은 사실은 “공업(共業)”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공업이란, 제각기 공동으로 선악의 행위를 하고, 그에 따라 동업으로 고와 낙의 과보를 받으므로 제각기 지은 공동의 행위를 공업이라 합니다.

이 시대의 대한민국, 이 시대의 세계의 흐름에 싫던 좋든 우리는 함께 공존하고 있기에 동업중생으로 오존층이 파괴되거나 자연환경이 훼손됨으로 그 피해를 함께 겪게되고 세계경제의 흐름에 따라 우리 살림살이도 변화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힘든 것도 사실은 대통령이라는 대표자를 뽑는데 선거라는 절차를 거쳤지만, 대다수가 지금의 대통령을 선택했기에 대다수가 그 선택에 대한 결과를 겪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동업의 반대되는 업으로 중생들이 제각기 다른 업인(業因)을 지음으로 제각기 다른 과보를 받게 되는 업(別業)도 있습니다.


지금 제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별업인 것입니다.

IMF가 왔더라도 남 다 힘들 때, 그때 기회를 잡은 사람들도 있었고 지금 힘들다고 해도 잘나가는 사람도 있다는 말입니다.


중생의 인과는 때와 시기가 다가오면 그리되는 것입니다.

온갖 농작물과 과일들이 절기라는 시기에 따라 빛깔과 맛이 익어가는 이치와 하등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살아가는 속에서도 과거 다겁생에 지은 온갖 인과와 업으로 인한 장애를 소멸하고 업력을 맑히고자 자비참회기도를 실천수행 하고자 발원하고 그도 못한다면 오고가며 염불수행을 해서라도 공업 속에서도 스스로 별업을 닦으시자고 2회에 걸쳐 법문을 해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드리는 것이 바로 염불참회수행을 생활화하자는 것입니다.

기도 중에 염불참회처럼 좋은 것이 없습니다.

염불을 하게 되면 과거생의 악연도 인과도 두려울 것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과거 생만이 아니라 금생에 지은 죄업도 능히 참회시킬 수 있고 소멸할 수 있는 것 입니다.


참회의 방법으로는 108참회의 도 있고 염불이나 독경사경 등을 통해 참회하는 참법과 참회참법(懺法)의 총서라고 할 수 있는 자비참법참회의 의식문을 읽으며 그 절차에 따라 참회하는 “자비도량참법”이 있는데 자비참법 책을 읽어보시게 되면 독경이나 기도를 하게 되면 호법선신들에게 그 사람을 옹호하고 지켜주라고 부촉하시는 부처님의 말씀이 여실히 있고 부처님의 부촉에 따라 우리를 지켜주겠다는 호법선신들이 서원이 있습니다.

그렇게 염불참회수행을 하는 그런 사람에게 어떤 악연이 다가와 해코지를 할 수 있겠습니까?

염불은 자신의 본성이 부처임을 믿고 자기 마음 가운데서 자성불을 찾는 것입니다. 아니, 찾고자 서원을 세워야 하고 실천수행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염불뿐만 아니라 불교의 모든 수행의 목표이기도 하지만, 염불이 좋은 점은 이행도(易行道)에 있습니다.


이행도란, 실행하기 쉽고 증득하기 쉽다는 뜻으로 염불을 통해 소원이 성취되고 장애가 사라지며 나아가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고, 극락왕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리되는 이치는 불보살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보호하는 자비심과 우리가 불보살님을 그리는 마음이 존재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살면서 주처정토를 이루지 못한 사람이 죽어서 어찌 왕생정토를 갈 수 있겠습니까?


정토(淨土)란 한마디로 성불(成佛)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이 잘 갖추어져 있는 곳으로 그곳에 태어난다면 성불(成佛)이 보장된 곳이라고 합니다.

바로 여러분들의 가정들이 정토인 것입니다.


천상에 태어난다 해도 “천인오쇠”라 천상에서 살아갈 시기가 다 끝나게 되면 천인의 복락이 다해서 육도윤회의 세계에 다시 떨어질 때 나타나는 다섯가지 징조가 천인오쇠인데,“증일아함경"서는 花冠이 저절로 시들어지고 옷에 때가 묻고, 겨드랑이에서 땀이 나고, 제 자리가 즐겁지를 않고, 왕녀가 배반을 한다고 했는데, “열반경”에서는 이 다섯가지를 말하기를 옷에 때가 묻고, 머리에 꽃이 시들고, 몸에서 나쁜 냄새가 나고, 겨드랑이에서 땀이나오고, 제 자리가 즐겁지를 않다고 했습니다.

또, “구사론”을 보게 되면 더욱 자세하게 천인들의 천상수명을 “소쇠상”과 “대쇠상”으로 구별해서 나오는데 다섯가지의 소쇠상은 옷과 장엄구들이 듣기 싫은 소리를 내게 되고, 자기 몸에서 나오던 광명이 흐려지고, 목욕하는데 물방울이 몸에 묻게 되고, 다니기 좋아하던 본성이 움직이기 싫어 한 곳에 머물게 되고, 가만있던 눈이 자주 깜빡거리게 되는 변화가 일어나지만, 더 나아가 대쇠상을 보게 되면  티끌에 천상의 옷이 더러워지고 꽃다발이 시들고, 겨드랑이에서 땀이 나고, 몸에서 나쁜 냄새가 나고, 제 자리가 즐겁지 않게 된다고 했습니다.


사람중생들도 늙어 갈 날이 다가오게 되면 이런 현상들과 비슷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자들은 육도를 돌고도는 윤회의 천상(天上)에 나기를 바라기보다 정토(淨土)에 왕생하여 윤회로부터 해탈하고 부처를 이루기를 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토로 가는 지름길이 염불수행인 것입니다.

염불수행을 하면 부처님의 광명으로 아무리 두터운 무명업장도 무너져 내리게 되고 나의 본래 면목을 발견하게 되면 스스로 정토에 왕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행생활을 했을 때, 우연처럼 일어나는 과거생의 악연도 피해갈 수 있고, 큰일은 작아지고 작은 인과는 저절로 소멸되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이렇게 좋은 염불을 해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염불을 통하여 염불수행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세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합니다.

첫째는 신(信)이라, 모든 수행에 있어 가장 근본은 발보리심과 신심이라고 했습니다.

둘째는 원(願)과, 셋째는 행(行)인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신(信), 원(願), 행(行) 3자량(自

量)이라 하는데, 신이란, 아미타불과 극락정토의 실존을 믿는 것이고, 원이란, 그곳에 가겠다는 서원을 세우는 것이며, 행이란, 실천으로 염불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은 자신의 본성이 곧 부처임을 믿는 것이고, 염불을 통해 그것을 발견할 수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정토왕생을 위해서는 신, 원, 행의 3자량이 필요하며, 그 중에서도 信은 기본인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이 가장 중요하고 다음으로 발심이 중요하며, 마지막으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가는 실천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 염불을 마음으로 생각하고 입으로 부르는데 통하므로, 심념에 속하는 관념염불은 아미타불의 상호와 가피력을 마음으로 생각하고 떠올려 관념과 관찰을 하면서 그 명호를 입으로 칭념하는 구칭염불로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기도하시면서 여러분들께서 지금껏 하신 것이 바로 염불기도인 것입니다.


이런 기도법을 더욱 세분한다면, 4種 念佛이라해서 칭명염불(稱名念佛)과 관상염불(觀像念佛), 또 관상염불(觀想念佛), 그리고 실상염불(實相念佛)로 구별하는데, 稱念은 입으로 불명을 외우면서 마음으로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을 말하고, 稱名은 단순히 입으로만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것으로 稱名念佛은 소위 구칭에 해당되는 단순히 입으로만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것이고, 觀像念佛법당불의 자비상호를 떠올려 관념하면서 염불을 하는 것을 말하고, 觀想念佛은 부처님의 자비상호와 자비공덕을 마음으로 떠올리며 하는 염불을 말하는 것입니다.


가장 수승한 염불법인 實相念佛은 자신의 자성불과 일체만유의 진실한 자성인 법신을 마음으로 떠올려 생각하며 결정코 서원을 세워 자성청정을 확신하면서 하는 염불을 실상염불이라 하는 것입니다.


또, 염불에는 마음이 고요하게 안정되어 지극하게 기도하定心念佛과 온갖 생각들이 쉼없이 생겼다 사라지는心念佛이 있고, 고성염불의 열 가지 십종공덕이 있듯이 소리의 크고 작음으로 大念聲 念佛小念聲 念佛로 나누어지고, 또 한 부처님의 명호만을 칭념하는 稱名定行(왕생정토를 원하는 사람의 아미타불 명호염불)과 “천불명호경”나오는 천불부처님의 명호를 일컫는 稱名雜行의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렇게 염불수행의 지름길을 말씀드림으로 해서 이제 여러분들께서 염불을 하실 때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아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극락에 왕생정토이든 사바세계 신심 있는 집안의 정토에 왕생하려면 다섯 가지의 바른 행업이 있어야만 하는데 이것을 오종정행 또는 오정행이라고도 합니다.


그 다섯 가지는 讀誦觀察, 禮拜稱名, 그리고 讚歎供이 살아생전에 지극하게 실천수행이 됐을 때, 비로소  왕생정토와 사바정토가 인과로 자기 것이 되어 다가오는 것입니다.

어지러운 오탁악세의 공업 속일지라도 스스로의 별업은 자기 스스로 닦아가는 것입니다.


성불하십시오.

살아있는 신앙을 주는 염불과 서원 

마부노호 선원들이 납치억류에서 풀려나 인천공항에 도착해 국민들께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고 국민들 덕분에 풀려나게 됐다고 땅바닥에 대고 국민들을 향해 큰 절을 올렸습니다.

이것이 사람으로서 도리인 것입니다.


마부노호 선원들은 선교도 거짓봉사도 아닌 생업에 종사하다가 아무런 잘못도 없이 납치됐지만 마치 죄지은 사람들처럼 죄스러운 모습으로 나라 땅을 밟았고, 아프칸의 인질들은 선교와 봉사라는 깃발을 치켜들고 종교탄압이라고 일 저지르더니 비싼 세금으로 풀려나서도 하나님 일을 했다고 떳떳하다고 고개 숙이지 말라던 인두껍들의 모습과는 무척 대조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어제 오후, 갑작스레 방문하신 처사님의 이런저런 질문에 답을 해드리다가 이번 법문에 이 질문을 주제로 삼아 꼭 우리 불자들게 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작년 여름부터 두 부부가 더위도 마다하지 않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절을 하고 온갖 기도문을 지극하게 하시던 분들인지라 내심 장하게 생각하고 있던 터였는데, 차 한 잔 대접하면서 듣게 된 질문에 이거 큰일이다! 싶어 질문을 주제로 이런 말씀을 법문에 해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처사님의 질문인 즉, 집안에 불상이나 불화(탱화)를 모시고 기도를 하고 싶은데 어떤 사람이 말하길, 그리되면 집에 모셔둔 불상들 잡귀가 들러붙어 도리어 좋지 않다고 하는데 정말이냐? 고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금 여러분들도 그러한 말들은 어디선가 들으셨던 기억들이 날 것입니다.

이름난 기도처나 큰절에 가거나, 절에 좀 다녔고 아는 소리께나 하시는 보살님들이 집에서는 지장기도는 하면 안된다는 둥, 신중기도는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둥, 이런 말들을 자랑스럽게 내뱉는 경우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십자가는 어떻습니까?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일과 그의 수난과 죽음이 가져다주었다는 구원의 은총과 그리스도교도의 신앙을 동시에 나타내는 상징물이듯, 서양종교를 따르는 사람들은 자랑스럽게 자신의 대문 앞에 붙여두고 심지어 안방에도 걸어둡니다.

그렇다면 그 십자가에도 잡귀가 들러붙어야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태어나서 자란 집안도 4대가 천주교 집안인지라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속죄하신다고 고통스럽게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린 채, 매달린 형상을 방안에서 쉽게 보고 자랐습니다만, 서양종교를 따르는 사람들은 자랑스럽게 그런 형상들을 걸어두면서도 피한방울 안 흘리시고 여법하게 계시는 남의 종교의 불상은 우상이라고 하고 있으니 이것 또한 웃기는 중생심에 불과한 것입니다.


부처님의 마음 법문으로 그런 예수님의 십자가상을 바라보게 되면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마음이 일체를 만들어내는 요술단지이듯,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문명의 이기들도 다 이 한마음이 동해서 생각으로 나타나 지금의 문화와 문명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중생은 마음 안에 팔만사천 가지의 고를 가지고 있기에 부처님께서는 팔만사천가지의 고와 번뇌에 답을 해주다보니 팔만장경이 존재하게 됐듯, 팔만사천가지의 고와 번뇌도 다 이 마음이 삐딱하게 동해서 만든 원인이요 결과인 것이며, 여기에 해결책을 제시하신 부처님의 팔만사천“지혜답”도 다 불심에서 나왔듯, 결국 이 한마음 안에 문제와 답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이루어 자신의 고향에 돌아가 카필라성의 모든 왕족과 백성들을 불교에 귀의시켰으나 당신을 출산하면서 돌아가신 어머니인 마야부인은 붓다를 이루기 전에 돌아가셨는지라 제도할 길이 없어 천안으로 마야부인영혼이 가신 곳을 살피다 보니 도리천에 계신지라 어머니를 제도시켜드리고자 보신으로 화현하시어 욕계 6천의 두 번째인 도리천에 올라가 계시는 동안 매일 아침 부처님을 뵙고 담소를 나누며 가르침을 받던 우전국왕이 부처님을 뵙지 못하는 아쉬움이 지나쳐 병으로 몸져눕게 되자, 그 나라의 가장 유능한 조각가를 불러 부처님과 똑같은 형상을 만들라 했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자, 왕의 병은 더욱 깊어져 갔고 이때, 도리천에서 욕계를 살피시던 부처님께서 이 사실을 알고 제석천을 시켜 조각가로 내려가 전단향 나무로 부처님의 형상을 조각해주자 왕은 그리움이 사무친 상사병이 다 나았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도리천에서 석 달 동안 마야부인에게 천상의 경이자 윤회를 벗어나는 효도의 경인 지장보살 본원경을 설해드리고 보계를 타고 욕계에 내려오시는데 이때 부처님의 형상을 조각했던 불상이 하늘로 치솟아 욕계로 내려오는 부처님께로 다가가 합쳐지면서 사라지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일부러 중생의 몸으로 태어나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어 부처를 이룰 수 있다는 가능성을 중생인 우리에게 몸소 보여주고자 마야부인의 태중을 빌어 오셨던 것이고, 생사육신의 유한함을 그대로 나타내셔야 함에 따라 도리천의 3천년, 인간세계의 56억 7천만년이 지나 미륵불이 출현하실 때까지의 “무불시대”를 걱정하시고 불멸 후, 무불시대엔 이와 같이 나의 형상을 조성하여 의지하라는 유훈에 따라 부처님상은 조성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부처님 상을 집에 모셔두면 귀신이 붙는다는 둥, 한다면 이것은 입으로 짓는 악구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형상을 조성하는 조각가를 불교에서는 불모(佛母)라 부릅니다만, 이런 불모가 부처님의 상을 조성해두기만 했다면 이것은 종교적인 성물이나 조각품, 예술품에 불과할 것입니다만, 그 불상의 내부에 사람의 오장육부와 같은 복장물이 모셔지고, 점안의식을 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부처님께서 남기신 유훈에 따라 무불시대를 지켜주는 부처님을 대신하는 부처님의 성상인 것입니다.


이런 성상에 어찌 삿된 기운이 침범한다는 삿된 악구에 놀아나서야 되겠습니까?

우리 불자들이 이젠 좀 깨어야 합니다. 제대로 알고 알려고 들어야 하고 알았으면 실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전왕처럼 집에서 부처님 상을 모시고 싶다면 얼마든지 모시십시오.

절대로 그런 삿된 이들의 악구에 휘둘리지 마십시오.

다만, 무불시대에 부처님을 대신해주는 부처님의 성상을 집안에 모셔두겠다면 마음자세부터 달라져야 하고 일상의 생활이 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성상을 모셔둔 집안에서 음주가무에 불고기에 복날이라고 삼계탕에 갈비찜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해댄다면 이것은 부처님을 모욕하는 것밖엔 되질 않을 것입니다.

또, 부처님의 성상을 모셔두고 부부싸움을 한다든가 이웃이나 형제간의 험담을 한다든가 온갖 중생의 모습을 그 앞에서 해댄다면 이 또한 모시지 않음만도 못한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더구나, 중생의 욕심에 점안까지 해서 모셔두고 싶어 하는 마음에 점안까지 해서 부처님의 성상을 모시게 된다면 그 얼마나 정성이 깃들어야 하겠습니까?

작은 방에 기도실이라도 꾸며서 가족들 마다 집 밖을 나설 때나, 명절에 큰일이 있을 때나 각자가 마음에 힘든 일들이 있을 때, 부처님이 모셔진 방에 들어가 삼배라도 하고 집을 나선다면 어쩐지 든든할 것이고, 또 자식들에게 줄 용돈도 그냥주질 말고 집에 모셔진 부처님의 성상에 공양을 올리고 발원을 하십시오.

“이 공양물을 제 자식이 거두어 보람된 곳에 쓰이도록 해주십시오.” 하는 발원을 하고 자녀들은 역시나 절을 올리고 그 용돈을 가지고 나간다고 해보십시오. 이것이 바로 지혜로운 교육인 것입니다.

적어도 종교를 가지고 살아간다면 신앙을 가지신 분들이라면 이러한 지혜가 넘쳐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종교요, 신앙인 것입니다.

불법은 바로 이렇게 살아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처님의 “지혜법”을 창고에 처박아두고 써먹을 줄을 몰라서 문제인 것입니다.


또, 관광지에서 사온 불상을 집에 모셔두자니 껄끄럽고 점안을 하자니 부담스럽다면 이런 방법도 있는 것입니다.

제 어릴 적, 기억으로는 천주교는 묵주를 사거나 십자가를 사게 되면 신부님에게 가지고가 소위 “방사”라는 것을 하게 됩니다.

신부님은 성물을 두 손에 들고 약간의 기도문을 하신 뒤, 성물 위에 한 손으로 십자가를 긋고 돌려주게 됩니다.

그러면 어쩐지 믿음직스러워진다고 합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의 탱화나 성상을 모셔두고 싶으시다면 가져오십시오.

굳이 점안이라는 거창한 의식을 하지 않고도 제가 광명진언과 다라니를 관해 염불해드리고 증명해드리겠습니다.

요즘 같은 핵가족 시대에 집안에 어른이 없는 덩치 큰 올챙이들이나 우물 안의 개구리들끼리 모여 사는 가정마다 집안에 부처님의 성상을 모셔두고 산다면 얼마나 든든하겠습니까?


고려불교를 지나서 유교가 이 땅을 지배하게 되면서 지배계급으로 서야하는데 “불법은 사성평등사상”이라 귀천이 없는 가르침이었으니 불교사상을 백성들에게서 배척시켜야 했기에, 교묘하게도 집안에 불상이 있으면 귀신 붙는다더라, 애 못 낳는 여자가 석불의 코를 떼어다가 갈아서 미역국에 넣어 먹으면 잉태한다더라 하는 말로 일반 민중들

에게 불교를 배척시키다 보니 그 당시에 불교가 지금의 기독교처럼 집집마다 불상을 모셔두고 있었고 한집 건너 사찰이었던 불교가 민중에게서 멀어져가게 됐던 것입니다.


경주 남산엘 가보시면 지금도 콧등이 날아가 석불들이 많습니다.

아시겠지요? 이제 제대로 아시고 신행생활을 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또다시 말씀드리는 것이 바로 염불참회수행을 생활화하자는 것입니다.

염불을 하게 되면 어딜 나가든지 항상 든든한 마음으로 누군가가 지켜주신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됩니다.

이렇게 마음이 안정되어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과거생의 악연도 인과도 두려울 것이 없어지게 되고 과거생 만이 아니라 금생에 지은 죄업도 능히 참회시킬 수 있고 소멸할 수 있다고 전번에 말씀드렸듯이, 이 오탁악세의 무불시대에 법당에서 “법당불”을 친견하고 염불을 통하여 자신의 본성이 부처임을 믿고 자기 마음 가운데서 “자성불”을 찾는 것입니다.


각자가 이 “자성불”을 찾아내서 돌고도는 윤회의 천상(天上)에 나기를 바라기보다 정토(淨土)에 왕생하여 윤회로부터 해탈하고 부처를 이루기를 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생은 난득이요, 불법은 난봉이라 하지만 우리가 불자가 됐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완성을 위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이러한 완성의 지름길이 염불수행인 것이고, 염불수행을 통해 자성불의 광명이 빛을 발하게 되면 아무리 두터운 무명업장도 무너져 내리고 앞길에 장애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전번 법회 때, 이렇게 좋은 염불을 해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에 대해서 말씀드렸듯이, 염불수행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세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고 했지요?


세 가지 신(信), 원(願), 행(行) 3자량(自量)이라 하는데 아미타불과 극락정토의 실존을 믿는 믿음과, 그곳에 가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실천으로 염불을 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기도를 하실 때는 먼저 발원과 서원을 하십시오.

발원이란 여러분들이 천수경을 하실 때 “여래십대발원”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대표적인 발원인 것입니다.

또, 천수경 안에 “발 사홍서원”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께서는 절에만 가면 죽어라 하고 중생들의 소원과 같은 발원만 해대지 정작 서원은 없단 말입니다.

이것도 해주십시오, 이것도 됐으면 좋겠습니다. 하는 발원들만 하지, 정작 부처님을 위하고 자신의 업장소멸을 위해서 행해야 할 서원들은 없단 말입니다.

절은 소원을 들어주는 곳만이 아니라 중생들의 업장을 녹여주고 소멸시켜주는 곳이란 말입니다.


서원을 사홍서원처럼 크게 생각하고 부담스럽게 여기지 마십시오.

여래께서는 중생들이 헤아릴 수 없는 일체중생들을 위한 마하의 발원을 하시지만, 우리 중생들의 발원은 그저 가족들의 안녕과 화목과 행복일 것입니다.


허나, 이런 모든 발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스스로 서원을 한가지씩은 실천해야합니다.


서원이라 해서 그것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내 안에서 가장 미워하는 사람에게 생겨나는 미운 마음을 갖지 않겠다는 것이 서원인 것이며, 내 주변의 가족들에게 올바른 불법을 몸소 실천에 옮겨 보여주겠다는 것들이 서원인 것입니다.


작은 서원이라도 세워 실천해 갈 때, 우리 안에서 불법은 살아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성불하십시오.

염불을 통해 부자가 되는 법

서민경제는 바닥인 요즘, 큰 바다와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에서는 부자가 되는 비결이 없는 가를 찾아보았습니다.


안 쓰고, 안 먹고, 자린고비로 아끼고 살면 졸부는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아끼고만 살면서 곳간지기로 살다가 덜컥 병이라도 들거나 죽게 되면 돈 모으면 다 되는 걸로, 행복이 방 안에 들어올 줄로만 알고 살았지만, 그러는 동안에 주변에 인심 다 잃어버리고, 동기간에 우애 깨지고, 죽게 되면 주변 사람들은 저렇게 죽을거면서 재물에 눈멀어 살다가 어찌 가누, 하면서 손가락질이나 해대고 영안실에는 찬바람이 쌩쌩 분다고 합니다.

가진 것 없이 너무 없이 살아도 안 되지만, 죽을 때 갖고도 못가는 재물에 노예가 되어 살다가 받게 되는 무지의 결과일 것입니다.

말기 암 환자들이나 대부분 의지할 곳 없는 시한부 환자들을 위해 온 몸으로 보살행을 실천 수행하시는 충북 청원군 미원면 대신리에 있는 호스피스촌 정토마을원장 능행 스님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돈에만 미쳐가고 있어요.

그 돈이 결국 우리를 미치게 하는 줄도 모르고,.....” 젊은 총각이 돈만 벌면 예쁜 여자 만나 결혼도 하고 집도 장만하고 행복하게 살줄로 알고 건축업으로 돈 좀 모았는데, 그러는 동안에 정작 몸을 돌보지 않아 췌장암으로 죽어가는 사연도 있고 별의별 사연을 다 겪어내는 스님의 독백입니다.


여러분들이 그토록 간절하게 기도하고 의지하는 관세음보살님을 반야심경에서는 관자재보살로 달리 불리어집니다. 

관세음 보살님이라 부르던 관자재라 부르던 그 앞에는 볼 관자 (觀)를 꼭 붙입니다.


왜냐? 관세음보살님은 이 세상을 보시는데 있어 보는 관(觀)이 자재(自在) 한 분이시기에 그렇게 불립니다만, 중생들은 살면서 부딪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인관관계도 그렇고 재물에 대해서나, 애정에 대해서나 그 모든 것들에 대해서 자재하지 못하고 탐 진 치 삼독에 뿌리를 내리고 전도몽상이라 뒤바뀐 헛된 생각에 매여 오욕을 만들어내는 오온의 노리개 감이 되어있기에 능행스님의 말대로 우리는 미쳐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지금 정치하는 사람들도 다 미쳐가고 있지 않습니까?

뻔히 보이는 거짓말도 염치 불구하고 아니라고 발뺌을 하는 그 속내는 무엇 때문에 그럴까요?


그래서 사기꾼이 판치는 세상에서 삿된 업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해,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서 부자가 되는 법을 함께 공부해보고자 오늘 시간을 갖겠습니다.

부자가 되시고 싶거들랑, 잘들 들으세요.


천지자연의 법칙은 인연과보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를 않습니다.

그렇기에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을 법계(法界)라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깨달음이란 단어에 대해 너무나 크게만 생각하고 깨달음은 곧 붓다라는 고정관념으로 굳어져 있습니다만, 붓다가 되는 큰 깨달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이란 생활 속에서 벌어지는 인과의 이치를 바로 보는 눈을 갖게 해주는 작은 깨달음도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지혜로운 가르침은 탐진치 욕구본능에 눈이 가려진 중생들에게 자연의 섭리이자 우주의 질서인 인과의 이치를 알려주고 이 이치를 삶에 적용하여 삶을 참되게 경영하면서 살아가도록 해주는 살아있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재물을 모으는데도 이러한 이치가 있다고 했습니다.

재물을 모으기 위해서는 현실을 정확히 보는 관자재한 지혜가 있어야하고, 끊임없는 노력과 고난을 극복하는 강한 의지와 검소함이 있다면 부는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활 자세는 금생의 습관과 의지만으로 되기 보다는 전생에부터 훈습되어진 업력에 길들여져 있어야만 가능할 것입니다.


똑같은 땅인데도 콩 심은데 콩 나오고 팥 심은데 팥 나오듯이 자신의 아뢰야식의 업력 속에 의지와 검소함과 인과의 지혜가 훈습이 되어져 있어야만 금생에서도 쉽게 생활화되고 실천되는 것입니다.


과거 생에 바른 법을 만나 바른 이치를 배우고 좋은 근본을 지니게 되면 금생에도 그런 인연을 짓게 되는 것입니다.

싯달타 태자가 태어날 때 예언자가 말하기를 전륜성왕이 태어나셨다고 했지만 깨달음의 길로 향했기에 인간 최고의 경지인 부처를 이룬 것입니다.

며칠 전, 아침마당에 부자학을 강의하고 다니는 교수님이 나오셔서 강의하는 것을 들으니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사회는 자기는 부자가 되려고 하면서 부자를 시기하다 못해 미워하는 경향들이 많다고 합니다.

육, 이오 전쟁 때 정작 북한군의 손에 죽은 사상자보다도 같은 동네 못 살던 사람들에게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는 말도 있습니다.

오죽하면 사촌이 논을 사면 안 아프던 배가 뒤틀린다고 하질 않습니까?

이게 바로 중생심의 못된 심보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전혀 딴 길로 가는 데바닷다의 후손이 되는 무지의 짓입니다.


경제학의 제1 법칙은 교환의 법칙인데, 주면 무엇인가 받게 되고, 지금 못 받더라도 다음 언제라도 꼭 받게 되어 있다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인과의 법칙인 것입니다.

발달했다는 현대과학과 문명이 부처님의 말씀을 그대로 증명해주는 것입니다.


도선사에 계셨던 청담 스님이 예전에 말씀하시기를 “사람은 누구나 1,000만원씩은 갖게 되어 있는데 그 복을 찾아 먹지도 못하고 다 흘리고 다녀서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나누어지는 것이다.”라고 말씀했다고 합니다.

왜, 그렇게 알게 모르게 흘리고 다니기에 우리 살아가는 것이 요 모양 요 꼴 밖에 안 되나 싶습니다.


청담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사춘기 이전의 복은 다 부모 복이고 사춘기 이후에 자기 복을 갖게 되는데 그때부터 어떻게 마음을 쓰는가가 그 사람의 인생을 그의 복을 좌지우지 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른 봄에는 천 가지 만 가지 새싹을 뜯어 나물을 무쳐먹어도 독성이 없지만, 봄이 조금만 지나도 함부로 먹을 수 없습니다.

심지어 먹을 수 있는 나물들까지도 억세어져서 먹기 힘들고 못 먹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전생의 훈습된 업력이 나타나고 인과가 서서히 드러나기에 그러는 것을 현대학문에서는 자아가 발현해서 그렇다고들 합니다.


일천년 전, 중국의 도교 사상가들이 지은 위경인 “지장보살 발심시왕 인연경”에 보게 되면 사람의 영혼은 “3혼 7백”이다 해서 사람의 정신작용을 혼(魂)이라 부르고 사람의 형체에 의지한 영(靈)을 넋 또는 백(魄)이라 부르며 윤회의 주체가 하나의 영혼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태광업혼신식(胎光業魂神識)”이라해서 난자와 정자가 딱 만났을 때 제1혼이 들어오고, 유정전혼신식(幽情轉魂神識)이라, 엄마 몸에서 딱 떨어져 나와서 ‘응애’ 할 때 제2식이 들어오고, 상령현혼신식(相靈現魂神識)이라 3혼은 빨리 들어오는 사람, 늦게 들어오는 사람, 그리고 영 들어오지 않는 사람도 있는데 일반적으로 ‘이유 없는 반항기’인 사춘기에 들어온다고 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3혼은 하늘로 흩어지고 7백은 흙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돌아가는 곳을 무덤 묘자를 써서 “묘(墓)”고 하는데 혼이 돌아가는 곳은 사당 묘자를 써서 “묘(廟)”라고 하고, 백이 돌아가는 곳은 무덤“묘(墓)”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묘는 ‘백’이 아닌 ‘혼’만 모시는 곳이라는 뜻에서 사당 ‘묘(廟)’자를 써서 종묘(宗廟)라고 합니다.


청담스님은 우리의 세 가지 혼 중 1, 2혼은 전생의 업식이라 할지라도 세 번째의 상령현혼신식 혼은 우리가 마음을 어떻게 먹는가에 따라 틀려진다고 하셨습니다. 


또, 열반하신 고광덕 스님은 살아생전에 한번 친견한 인연은 있었습니다만, 광덕스님의 말씀에 의하면 사람들에게는 공통된 소망들이 일곱 가지가 있는데,

1. 우정을 주고받고 싶은 소망,

2. 자기 존재를 인정받고 싶어 하는 소망,

3. 꾸준히 향상하고 진보하고 싶어 하는 소망,

4. 남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 하는 소망,

5. 풍족해지고 싶어 하는 소망,

6. 구속 받지 않고 자유롭고 싶어 하는 소망,

7. 평등 속에서도 특별한 대접을 받고 싶어 하는 소망들이 공통적으로 바라는 소망이라고 했습니다.


또, 부자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본디 ‘부’라고 하는 것은 애착이나 탐심, 인색함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봉사란 남이 필요로 하는 것을 아낌없이 나눠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절대로 공짜가 없는데 내가 길을 가다 거지에게 1,000원을 주더라도 1,000원 이상의 만족감을 얻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반대로 남에게 악심을 갖게되면 그만큼 자기에게 장애가 오게되는 것입니다.

광덕스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부자가 되려면 알고 지내고,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이 이루고 싶어 하는 7가지 소망을 만족시켜줄 수만 있으면 경제학의 교환의 법칙 이론대로 그런 자기에게도 무엇인가 소득이 생기게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부자되는 법칙입니다.


우리가 얄미워하는 전형적인 부자, 인색함과 탐심으로 얼룩지고 탐심으로 재물만 모은 사람은 부자처럼 보일 뿐이지 진정한 부자가 아닐 것입니다.

아침마당의 교수님이 말하기를 그런 부자들은 하루도 편한 잠을 못 잔다고 합니다.

그런 부를 이룬 사람은 3생(生)에 걸쳐 화(禍)가 될 부를 가지고 있을 뿐일 것입니다.

단지, 전생의 복덕을 금생에 까먹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경제학의 교환법칙이 아니라 부처님께서 고구정녕이 일러주신 인과법의 도리를 걸림 없는 관자재한 지혜의 눈으로 살펴서 인색하게 부자 되려 하지 말고 먼저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베풀지 않고 부자 되려는 생각으로는 부자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전생에 잘 지은 농사로 금생에 누리고 살지만, 금생에 박복한 탐심에 젖어 살게 되면 다음 생은 인과대로 가는 것일 뿐입니다.


베푼다는 것은 꼭 물질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오늘 여러분들께서 오셔서 기도하신 공덕을 이 순간에도 푸줏간에서 죽어가는 온갖 축생들과 이 순간에도 불치병으로 죽어가는 환자들을 위해 지극한 마음으로 발 회향하는 발원을 하신다면 그것 또한 돈으로 바꿀 수 없는 공덕 나눔인 것입니다.


때문에, 여러분께서 기도를 하실 때 항상 발원을 하셔야 합니다. 그럼 발원을 어떻게 하느냐?

발원 중에 가장 수승한 발원은 바로 여러분 자신들이 다겁생래에 어떤 이름 어떤 모습으로 살았던 내가 살기위해 저질러온 온갖 업을 소멸하는 “업장소멸” 발원이 가장 크고 무겁고, 힘들고 어려운 발원이기에 그 발원에는 마장도 많고 기도수행에 힘이 들지만, 성취에 다다르면 일체로 부터 자유로워지고 모든 것이 생각만 해도 이루어지고 하루하루가 참으로 즐거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혼자만 기도공덕 성취의 만족감에 떨어지지 말고 일체중생들의 업력들이 소멸되어지기를 발원하고 회향되어지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염불공덕에서, 공덕의 의미는 범어로 구나(求那Guna)라는 뜻인데 좋은 일을 쌓은 공과 불도를 수행한 덕을 이르는 말이나, 공덕을 해석하는 데는 여러 의미가 있어, 복덕과 같은 의미로 쓰이기도 하고, 善을 행하는 이를 도와 복되게 함으로 복이라 하고 복의 덕이므로 복덕이라 한다고 하지만, 공은 베푸는 것을 뜻하고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을 덕이라고도 합니다.


이렇듯 힘들여 기도하고 회향하는 것을 힘쓸 공자를 써서 공덕이라 하고 이 힘든 씨앗을 주변에 뿌림으로써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을 덕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환의 법칙이자 인과도리인 것입니다.

이것이 모여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성불하십시오.

정신과 육체는 쓰지 않으면
녹 쓸고 기능이 죽는다.

! 

 
용불용설(用不用說 .USE AND DISUSE THEORY)
프랑스 진화론자 레마르크가 주장한 학설로
생물은 환경에 대한 적응능력이 있어
자주 사용하는 기관은 발달하고
반대로 사용치 않는 기관은 퇴화해서
점점 기능을 못하게 되고 없어진다는 학설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뉴질랜드의 키위라는 새.
뱀 등의 천적이 없고 풍부한 먹이 때문에

 

 

날 필요 없이 평화로운 태평세월이 흐르니
날개가 퇴화해 없어지고 날지 못하는 불쌍한 새가 되었다.

 

 
동물계의 섭리로 우리 인간에게 적용되는 내용으로는
머리를 쓰지 않으면 우리의 두뇌가 녹 쓸게 된다.

 

여기서 우리 인체에 대한 적용에서 근육뿐만이 아니고
뇌기능에도 똑 같이 적용된다는 데에 주목해야 한다.
 
무언가 배우고 창작하면서 뇌기능을 활성화하지 못하면
뇌기능은 뇌세포가 계속 줄어들면서 기능의 장애를 받는다.
 
치매나 알츠하이머 같은 질병도
뇌기능의 비정상에서 오는 질병이 아닌가.
 
그래서 건강한 뇌 활동을 위해서 권장되는 것들이
글쓰기, 책읽기, 게임하기, 컴퓨터 외국어 배우기 등이다. 
 
그 중에서 으뜸이 글쓰기, 창작적인 글쓰기.
무슨 내용이라도 자신이 생각하고 자신이 쓴 글이 제일이다.
 
 
잘 쓴 글이 아니라도 쉽게 자신의 생각, 의견, 감정을
겸손하고 진솔하게 쓰는 습관을 가지면 좋다.
  
 
조금씩, 날마다, 꾸준히 가 글쓰기의 3원칙이다.
모방을 하드라도 매일 짧게라도 계속 써야한다.
 
가장 쉬운 글이 가장 어렵다. 헤밍웨이의 말이다.
그래서 가장 쉬운 글이 가장 잘 쓴 글이 된다.
 
책읽기(독서)도 마찬가지, 매일 조금씩이라도 읽어야한다.
승리를 위해 빠른 두뇌회전이 필요한 게임도 즐기면 좋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무언가 배우기.
그중에서도 컴퓨터와 외국어 배우기가 으뜸이 아닐까.
 
일흔 나이에 무슨 공부? 라는 생각은 포기와 패배를
스스로 불러들이는 바보 같은 생각이다.
 
 
나이 들수록 무엇이라도 배우면서
사고력과 기억력을 되살려야한다. 
 
 
컴퓨터나 외국어를 배우면 사고력도 높이고
교육장을 찾아 나서는 활동력이 건강에 도움이 된다.
 

 

 

 

 

거기다가 평생 할 수 있는 생활체육 한 가지
걷기나 등산, 자전거타기, 배드민턴 등 무어라도 즐기자.
 

 

 

활기찬 신체운동과 창작적인 뇌 활동이 함께 할 때
우리들 육신은 이상적인 건강채로 다시 나게 된다.

 

 

 
쓰지 않으면 녹 쓴다.
녹 쓰면 움직일 수 없고 기능이 죽는다. 

 

부지런히 운동하고 사랑하고
무언가 배우면서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유다.  
생명의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