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기도와 정초신중기도

2010. 1. 28. 21:5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728x90

이렇게 쉼 없이 시간은 흘러가고 간단없이 세월은 지나가기에 옛 사람들이 가는 세월에 대해 말하기를 흐르는 물 같다 해서 흐를 流字물 水字를 써서 유수 같다거나, 화살같이 빠르다 해서 살 같다고들 해도 젊은 시절엔 그저 그렇거니 하고 감이오질 않더니 이제는 제가 가는 세월을 피부로 느껴지고 있으니 참으로 걱정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 금년 1월 들어서부터 카페에 올라온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려다 보니 기왕에 할 바엔 법문의 주제로 삼아 우리절 신도님들도 남은 세월 동안에 정신 좀 차리고 참으로 사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에 대해서도 공부 좀 하시고, 절대명제인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기에 우리도 언젠가는 이생을 달리해야하기에 이 조촐한 법문을 듣거나 읽으시는 모든 인연 닿는 분들께서 법문을 접한 인연으로 다겁 생에 얽혀든 모든 인연들을 모두 제도시켜드리는 선근공덕을 심어금생에 자기 갈 길을 미리 닦아 다음내생을 보장하고 끝없는 윤회로부터 벗어나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오늘 법문의 문을 열고자 합니다.


이러는 저도 물위를 헤젓는 백조라, 여러분들 앞에서 겉으로는 한 경계를 맛본 것 같지만, 사실은 다음 생에 제 갈길 닦기가 바쁩니다.

선객들의 법문에 자주 인용되는 “어떤 스님이 몇 푼어치 되지도 않는 무말랭이를 시골장날 좌판에 놓고 눈만 감고 앉아 지내다가 지나는 누군가가 가격을 물어보거나 석양이 지면 다리를 뻗고 통곡을 하고 울었다고” 하잖습니까.   


왜냐, 이 하루는 지나가면 다시 올 수 없고 세월은 쉼 없이 가기에 자신은 죽어가고 있건만 오늘도 공부를 성취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에 통곡을 했다는데 저는 요즘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마음을 여러분들은 공감을 하셔야만 합니다.

왜냐,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흐르는 시간과 세월에 떠밀려서 인생의 끝을 향해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천도재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도대체 왜, 천도재를 지내는가에 대한 이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의 사후세계를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현대의 의학계에서도 소위 가사상태를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인정하고 있고, 잘났고 잘난 척 하는 사람들도 모두가 겉과 말로는 종교에 귀의해 뭣 뭣처럼,뭣답게 참되게 살아보기 위해 종교를 택했다고들 말하지만, 그 내면에는 죽음에대한 공포와 사후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편안함을 얻기 위함이 더 크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소위 가사상태를 경험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의 이야기나 영매(靈媒)의 입을 통하여 사후세계가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천도재는 사람이 죽은 후, 살아 있을 때는 마음이라 부르고 그 마음이 동하면 생각으로 움직여 이 한 몸뚱이는 죽는 순간까지 온갖 생각과 말과 행동이라는 신구의 삼업을 만들고 살다가 죽게 되면 바로 귀신이요 영혼이라 부르는 것인데 “삼혼칠백”이라 하여 사람의 정신작용을 넋 혼자를 써서 혼(魂)이라 부르고 형체에 의지한 영(靈)을 넋 백자를 써서 백(魄)이라하는데 도교에서는 혼도 3혼이 있고 백도 7백이 있다고 하는데 진(東晉:317~420)의 갈홍(葛洪)이 지었다는 신선방약(神仙方藥)과 불로장수의 비법을 서술한 도교서적인 포박자라는 책을 보면 “사람의 형체가 분산하면(죽음) 몸에 있는 삼혼칠백을 볼 수 있다”고 하였고, “지장보살 발심인연 시왕경”에도 삼혼칠백에 대해서 언급이 있으나 원래 불교에는 이런 용어들이 없고 도교에서 만들어낸 말들이지만, 흔히들 “얼빠졌다, 넋 나갔다”고 많이들 말합니다.

바로 “얼은 혼”이고 “넋은 백”이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단어들이 알 식자, 식(識)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살아있을 때, 제대로들 알고 살아야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죽어서도 제대로 자기 갈 길을 지향성에 의해 제대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소위 무상법문이라는 것이 뭐 별겁니까?

살아있는 사람들이 말로만 노상하는 “마음비우기”라는 것이란 말입니다.


하지만, 마음이 어디 있고 어떻게 생긴지도 모르기에 금강경에도 수보리가 세존께 묻기를 “응운하주 운하항복기심”이라고 하질 않습니까?


마음이 어떻게 생겼고 어디에 있는 줄도 모르는 중생들인 우리들이기에 더 쉽게 말씀드리자면, 한마디“한 생각 바꾸기”란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들을 죽어 천도재를 할 때 업식이 가벼운 영가와 무거운 영가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 보이는 것입니다.

“한 생각 바꾸기”가 살아 생전에 잘 수련되어 일상에 베여있던 영가는 죽어서도 너무도 쉽게 천도가 되건만, 그렇지 못한 영가들에게 필요한 것이 지극정성에 온갖 무상법문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온갖 것에 애착과 집착이 강하게 남은 업식이 무거운 영가는 엄연히 존재하기에 그러한 영혼을 육도윤회(六度輪廻)에서 벗어나 빨리 내생의 좋은 곳에 환생(換生) 하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천도재인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예들이 많지만 이러한 업식이 두꺼운 영가들이 머무는 곳은 죽을 당시의 장소나 죽기 직전 살았던 장소 또는 가장 정들었던 곳에 머무는 것이 대부분인데 가끔 심신이 허약한 사람의 몸 속에 머무는 경우도 있습니다.


만약 사람 몸속에 머물게 되면 악몽을 꾼다거나 환상이 보이고 환청이 들리게 되고 그 부위는 병명 없이 아프게 되고, 사람의 머리에 있을 경우 처음에 두통이 있다가 그대로 놔두면 점점 더 심하게 되고 나중에는 정신병자처럼 되어버리기도 합니다.


또, 엄마 배속의 태아로 죽었거나 어린 나이에 죽은 영혼도 엄마 곁을 떠나지 않으려고 하여 엄마의 몸속에 남아있는 경우도 있고, 젊은 나이에 죽은 영혼은 생에 대한 집착과 자신이 죽은 것이 두려워 금방 이승을 떠나지 못하게 되고, 뜻밖의 사고로 갑자기 죽은 영혼은 죽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확인하려고 가족이나 친지에게 나타나는 경우도 있으며, 원한이나 애정, 재물, 권력 등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는 경우에도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오랜 세월동안 관계있는 주위를 맴돌게 되는 것이기에 천도제가 필요한 것이며, 더구나 요즘 세상 일들이 흉악하게 변해가는 것도 사실은 서양종교에서 자신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준 조상에 대한 효성마저도 미신으로 치부해서 제사조차도 못 지내게 하는 그런 작태들로 후손들이 있는 “유주혼”들이 제사 밥도 못 얻어먹“무주고혼”들이 되어 죽은 다음에서야 철들어 자식들이 자기를 위해 뭔가를 해주기를 바라지만, 살아생전에 자식들에게 가르친 것이 없으니 죽은 자기를 위해 해주는 것이라곤 입으로만 해주는 기도문과 노래 밖에 없어 배고플 수밖에요.

여러분들도 오늘 법회가 끝나고 점심공양 없이 돌아간다고 해보세요. 얼마나 뱃속이 허하겠습니까?

생자와 사자는 따로 노는게 아닙니다.

이 법당 안에 전깃불도 켜져 있지만, 전깃불 있다고 촛불이 별 볼일 없나요? 형광등 켜져 있다고 백열등이 별 볼일이 없나요? 


이렇게 한 공간에 서로 역할을 다하면서 어우러져 있듯이 생자와 사자의 세계는 같이 공존하고 있지만, 서로의 영역의 구별은 분명하기에 영가가 사는 세계는 음(陰)의 세계이고 인간이 사는 세계는 양(陽)의 세계이기에 서로 음양의 기운이 맞지 않고 파장이 다르기에 서로 구별은 있지만, 착심이 강하고 원결이 강한 영가들이 넘어서는 안되는 영역을 넘어 살아있는 사람들의 양의 세계에 에너지를 보내게 되어 음과 양의 부조화로 여러 가지 불행한 일이 일어나고 피해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가들이 진짜로 나쁜지, 나쁘다면 왜 나쁜지도 모르면서 서양종교에서 말하기를 사탄이라고 하기에 나쁘다는 이유로 그러는 자기도 죽으면 사탄이 될 것이건만, 쫓으려 하고 몰아내려고만 하기에 영가는 더욱 좋지 않은 기운으로 주변을 맴돌게 되는 것입니다.

오는 사람도 편안하게 해주고 가는 사람도 편안하게 해준다면 편안함을 느끼는 것은 마음이지 몸이 아니듯, 영가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영가들에게 잘해주면 계속해서 찾아 오기에 잘해주면 안된다고들 하는데, 그처럼 박복해지는 말은 없는 것입니다.


거지도 인심 좋은 집에 자주가고 잘 얻어먹으면 어디서 말이라도 잘해주는 듯이 영가도 똑 같이 보시면 됩니다. 아시겠지요?

그 자체가 공덕이고 복덕행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천도재를 지내고난 후를 보십시다.

천도재로 죽은 영혼이 그 동안의 응결이 풀리어 좋은 곳으로 가게 되면 천도시켜준 사람에게 고마워하면서 천도된 후에도 그 은혜를 잊지 못하고 내생에서 좋은 인연으로 다시 만나게 되고, 그 동안 알 수 없던 불행이 없어지고 원하는 소원이 이루어지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몸속에 붙어있는 영가를 천도시켜 주면 천도재가 끝나는 그 자리에서 아픈 곳이 씻은 듯 나아질 수 있고, “다겁생래 선망조상 제형숙백 자매질손”의 천도재로 집안의 우환이 사라지고 사업실패자는 재기의 기회가 생기고, 결혼 전에 죽은 조상이나 형제자매 혹은 일가친척의 혼령을 천도해 주면 남녀의 애정문제가 저절로 해결되기도 합니다.


엄마 뱃속에서 죽은 태중영가(胎中靈駕)로 인하여 그 집안의 자녀가 무기력 병에 걸리거나 자살충동을 자주 느끼거나 유별나게 고독감에 많이 잠기는 경우가 있고 부모를 미워하고 돈을 아낄 줄 모르고 물쓰듯 써버리는 등 부모의 속을 썩이고 방황하거나 장애를 일으키는 경우들도 태중영가들을 천도시키면 깨끗이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럼, 천도재(薦度齎)를 지내는 불자들의 자세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대부분의 불자들은 薦度(천도)라고 하면 스님들이 기도를 열심히 하면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소위 지옥중생들과 선망조상영가들을 번쩍 들어 올려 극락세계로 보내줄 걸로 생각들 하시고, 또 한번해주는 천도재로 인연영가에 대한 도리를 다 했다고 생각들 합니다. 

이런 생각은 지극히 위험한 생각일 뿐 아니라, 자칫하면 부처님의 연기법(緣起法)을 왜곡하게 됩니다.


천도(薦度)란 쉽게 말해서 “현 상태보다 나은 곳으로의 자리옮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천도란 천혼(薦魂) 또는 천령(薦靈)이라고도 하는데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어주기 위해서, 불보살님들께 재를 올려 영혼들로 하여금 정토나 천계에 태어나도록 하는 의식이 바로 천도재인 것으로, 여기서 천도의 薦字는 천거할 천자이고 도는 법도 度字를 쓰며 재(齋)는 신구의 삼업을 깨끗이 하여 악업을 짓지 아니함을 말하며 원뜻은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것을 말했으나 요사이는 망자를 위해 천도하는 법회를 재라고 합니다.


우리가 제사라고 할 때의 제자(祭)는 "사람과 신이 서로 만난다"는 뜻이 있어 제사 祭字를 쓰는 것입니다. 


천도란 쉽게 말하면, 어떤 사람이 짐수레를 끌고 가다가 수렁에 빠졌을 때, 나오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혼자서는 역부족일 때 누군가가 뒤에서 조금만 밀어준다면 평지에 이를 수 있듯이, 이것이 수렁에서 평지로의 천도인 것이고, 가난한 사람이 깊은 병에 들었으나 병원에 갈 엄두도 못내고 고통받고 있을 때, 친척이 달려와 병원 치료를 받게 한다면 이것도 바로 천도인 것이기에, 그래서 우리는 애착과 원결이 강하게 죽은 영가를 위해서 불보살님들께 재를 올려 영혼들로 하여금 정토나 천계에 태어나도록 독경과 염불을 통해서 영가를 깨우치는 의식으로 영가는 신체가 없어서 식(識)이 맑아져 있어 살아 있을 때 보다 진리의 법문을 더욱 잘 알아들을 수 있기에 영가에게 부처님의 무상법을 들려줌으로써 지난 세상에 대한 애착과 집착을 끊고 점점 좋은 세계로 나아 가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천도재를 지내는 것이며 영가만 좋은게 아니라 본인은 기도를 함으로써 삼업이 청정해지고 기도공덕을 받게 된 영가 또한 좋은 기운을 음덕으로 되갚을 것이기에 서로 좋은 것이 바로 천도제인 것입니다.


49재도 잘 지내 주었고, 매달 지장재일에 꼭 참석하고, 우란분재나, 기회 있을 때마다 천도재에 몇번씩 동참했는데 언제까지 계속해야 합니까?”라고하는 분들이 있습니다만, 대답은 한 평생 살아가면서 인연이 닿을 때 마다 천도재에 동참하라고 하겠습니다.


심지어 본인의 기도 때마다 마음속으로 인연무연의 일체중생들을 위해서 축원을 해주면 더욱 좋은 것입니다.

지금 이 몸의 내가 있기 까지는 무량한 다겁생의 부모와 형제자매가 있었듯이,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길을 가다가 죽은 짐승들의 뼈 무더기 앞에서 잠시 머물러 간절하게 기도를 하자 수행하던 아난이 묻기를 “세존이시여! 저 뼈들은 하찮은 짐승의 뼈에 지나지 않건만 어찌 그리 정성을 다하여 기도를 올리십니까?”하고 묻자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난아 ! 너의 눈에는 짐승의 뼈로 밖에는 보이지 않느냐, 너와 내가 다겁생을 돌고 돌며 부모와 형제로 만났던 이들의 몸이니라.”하셨듯이 그 의미를 새겨본다면, 이 세상 유정이 모두 나의 혈육이요 부모 아님이 없거늘, 매일 천도재를 봉행하여도 오히려 부족한 것이기에 여러분들께 일요일 마다 영단에 시식을 해드리고 함께 공덕행을 짓자고 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노력하고 성실하게 사는데도 불구하고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집안에 우환이 끊이지 않을 때 “도대체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생길까?”라고 한두 번 생각 안 해본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영가로 인한 장애일 경우가 의외로 많습니다.


또 상식적으로 안될 일인데도 꼭 누가 도와주는 것처럼 일이 순조롭게 풀리는 경우도 종종 있었을 것입니다.

 

나를 조상으로 둔 숙세의 인연이 어디에선가 선망부모 및 인연영가를 위하여 천도재를 지내고 열심히 수행정진하고 있는 공덕의 염파가 지금의 나에게 전달되어 그렇게 된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천도제는 단순히 죽은 사람을 위한다는 것 외에도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닥칠지도 모르는 재해를 막고 복을 가져다준다는 의미도 포함되는 것이고, 영가에게는 부정의 세계에서 긍정의 세계로 옮겨다 주는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 주에 49재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말라 하셨던 부처님의 말씀이 있기에 가볍게 끝내려고 했더니 기왕 내친 김에 자세히 말씀드리려다 이렇게 한 달을 이 법문으로 하게 됐습니다.


모두 성불하십시오.

여러분들께서 입춘 날이 뭐 그리 대단하냐고 하실지 모르지만, 입춘이 드는 시각에 법당에 촛불을 켜놓고 바람 한점 없이 가만히 앉아 계셔보면 그 시각 촛불이 팔~랑~하고 움직이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천지자연의 이치는 이렇게 한 치도 틀림이 없기에 천지자연의 일부인 인간들도 한 치도 틀림없이 생노병사에 휘둘리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입춘은 보름마다 바뀌는 24절기 가운데 제일 첫 번째 맞이하는 절기로 양력으로는 언제나 2월 4일경이 입춘이지만 음력으로는 정월에 들기도 하고 섣달에 들기도 합니다.


간혹 정월에도 입춘이 있었고, 섣달에도 입춘이 있어 1년에 입춘이 두 번 드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때를 “다시 봄을 만났다”해서 재봉춘(再逢春)이라고 합니다.

정해년 새해라고들 하지만, 그것은 양력을 사용하는 불기 2551년 혹은 서기 2007년이 왔을 뿐이고, 병술년, 정해년 하는 것은 음력에 기초한 것으로 아직도 음력으로는 병술년 섣달입니다.


병술년은 지나간 정월에도 입춘이 있었고, 섣달에도 또 입춘이 있었습니다.

옛날 중국에서는 입춘 15일간을 5일씩 3후(候)로 갈라서, ① 동풍이 불어서 언 땅을 녹이고, ② 동면하던 벌레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③ 물고기가 얼음 밑을 돌아다닌다고 하였습니다.


당나라의 법률에는 이때부터 양기(陽氣)가 활동하기 시작함으로 입춘 날로부터 추분(秋分,양력 9월 23일경)까지는 비록 중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사형을 집행하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예전엔 입춘 날에 입춘 굿을 하고 봄을 맞이하여 축하한다는 뜻으로 춘축(春祝), 혹은 입춘축(立春祝) 또는 개운(開運), 영춘(迎春), 입춘대길(立春大吉) 만사형통(萬事亨通) 건양대길(建陽大吉)같은 소원을 비는 내용의 입춘첩을 써서 대문이나 기둥 같은 곳에 써 붙이는 날입니다.


입춘, 입하(立夏), 입추(立秋) 입동(立冬) 등 절기가 바뀌하루 전날을 절분(節分)이라고 하는데, 입춘의 하루전날은 겨울로부터 봄으로 옮겨가는 계절의 옮김을 기념해서 이날 해질 무렵 호랑가시나무(엄나무)의 가지에 정어리의 머리를 찌른 것을 집 입구에 세워놓고, “귀신을 때리는 콩”이라고도 하는 볶은 콩을 뿌리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일본의 신사(神社)나 불교사원에서는 “절분제(節分祭)”해서 입춘의 전날 혹은 입춘 당일 실시하는데 일본 화엄종의 총본산인 교토의 동대사(東大寺)에서는 지금도 입춘 전날 밤 “잡신은 밖으로 나가고 행복은 안으로 들어오라”고 외치는 “콩 뿌리기”는 유명하다고 합니다.


입춘은 대체로 그 해의 첫 번째 드는 절기이고 또 새해를 상징하는 절기이니 이날을 기해서 묵은해에 지었던 모든 죄업을 참회하고 나쁜 습관을 버리고 다시는 나쁜 업(業)을 짓지 않으려는 참회발원을 하고 새해에는 좋은 생각을 일으켜 좋은 말을 하고 좋은 행동을 하겠다는 새로운 서원을 세우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음이 물러가고 양이 자라나는 동지절기부터 입춘을 지나 음력 정월 보름까지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나, 집안에 큰일을 이루고자 하시는 분들은 예전부터 불전에 기도를 올려 공덕을 짓고 모든 선대 조상님들의 위패를 모셔 천도재를 크게 베풀어 선근공덕을 지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살생업장을 소멸하는 백일기도를 회향하고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어차피 가만있어도 세월은 가는데 이렇게 10악을 백일씩 끊어서 열 번씩 참회기도를 하게 되면 천일기도가 되는데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그래서 오늘 법문은 모두들 알고계시는 49재라는 의식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불교 상례(喪禮) 중 가장 특이한 것이 불교식 탈상이라 할 수 있는 49재인데, 이는 다른 종교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의식이지만 근래에는 천주교에서도 간단하게 행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가정에 빈소를 차리지 않고 49재 후, 탈상을 바로하기 때문에 사찰에서 49재를 모시면서 빈소역할까지 겸하고 있습니다만, 49재라는 불교의례는 한마디로 하면 우리가 죽게 되면 사망한 그날로 부터 시작하여 49일 동안 ‘중유(中有)’ 또는 ‘중음(中陰)’이라하는 세계에 머물게 되는데 망자는 죽은 지 49일 동안은 이미 목숨(命)은 끊어졌을지라도 정신(性)만은 생전 그대로여서 황망히 떠나온 길에 대한 두려움과 온갖 환영에 시달리게 되지만, 7일마다 중음계에서 깨어나 영혼이 한없이 맑아지는 시기이기에 그 순간에 영가에게 무상법문을 들려주고 이생에 대한 애착과 집착과 원결들을 풀어버리고 놓아버리도록 하여 일체의 착심이 끊어져 한없이 가벼운 영혼이 되도록 해주는 불교식 제사의례를 말합니다.


인간은 죽음을 어떻게 해도 피할 길 없으므로 사후(死後)에는 어떤 일이 있는지에 대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고, 종교마다 사후의 세계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지만, 불교에서는 서양종교와는 다르게 우리의 업식은 사후에 영혼이 윤회(輪廻)를 하게 되는 종자가 된다고 믿고, 몸은 죽어 없어져도 넋은 남아, 다른 몸에 옮아 태어나기를 끊임없이 거듭한다는 것인데, 사실 여부는 각자의 종교나 관점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만, 일단은 죽어서 천국이든 지옥이든 극락이든 연옥이든 어딘가를 간다는 데는 모든 종교가 인정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존재의 실상과 절대 진리를 설파하신 부처님의 불법을 믿고 공부하고 실천하는 불자이기에 불교의 윤회관을 믿고 인정해야하는 것입니다.


서양의 종교 또한, 죽어서 어딘가를 간다는 데는 인정을 하면서도 그 어딘가에 대한 세계관이 다를 뿐이지만, 저 모든 축생인 길짐승 날짐승들의 온갖 것들의 생명들은 죽어서 축생으로만 돌고 돌라는 원칙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가 외출을 할 때, 가는 장소에 따라 입고 가는 옷이 다르고 계절 따라 입는 옷이 다르듯이 우리가 죽게 되면 생전의 지은 바 업을 따라 다음 생에 갈아입을 옷이 정해지는 것을 윤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명제를 우리는 인정하고 오늘은 49재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부모형제가 상(喪)을 당하면 절에서 49재를 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막상 절에서 49재를 하면서도 49재를 왜? 하는지 그 의미를 모르는 분들이 많습니다.

대부분, 막연히 돌아가신 분의 극락왕생(極樂往生)을 기원하고 빌어주는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중생의 삶이란 자신이 인연지은 생전의 업식에 따라 끝없는 윤회 속에서 생노병사(生老病死)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고, 이를 깨달은 자는 선업(善業), 즉 바람직한 카르마(업)을 짓게 되고, 그렇게 하면 삼선도의 세계에 태어나거나 인간의 세계에 다시 태어난다 해도 좋은 인연을 만나 좋은 환경에서 자라게 되거나 아예 윤회를 벗어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죽은 자가 살아 있는 동안 이러한 깨달음을 알지 못하고 나쁜 카르마(업)를 많이 짓다 죽게 되면 육도(六道)를 헤매게 되고, 특히 망자가 죽은 지 49일 동안은 이미 목숨(命)은 끊어졌지만 정신(性)만은 생전 그대로여서 황망히 떠나온 길에 대한 두려움과 온갖 환영에 시달리며 보내게 되기에, 망자가 생전에는 많은 죄업을 지었지만 이 49일의 기간을 어떻게 보내는지에 따라 다음 생에 받을 인과 연이 달라지기에 이생에 대한 끊지 못한 착심과 생전의 악업들을 얼마나 정화하여 어느 곳에 환생을 할 수 있게 하느냐 하는 중요한 문제가 달려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49재는 영가에게 불법(佛法)을 들려주고 무상(無常)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해주고 윤회의 길에서 다음 생을 받게 되는 연을 지어주는 더 없이 소중한 의식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남아있는 가족들은 망자를 위하여 부처님께 축원하고 명복을 기원하는 마지막 배려라 할 수 있지만, 이는 망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는 재에 동참하는 순간에 자신의 삼업(생각과 말과 행동)은 청정해지고 선근의 기도공덕을 쌓게 되는 것이며 재에 참석하는 인연으로 자신 또한 무지와 무명이 밝아지고 무상심심의 불법과 인연 짓도록 해주는 지혜로움이 있는 것이지, 전설 따라 삼천리도 아닌 21세기에 명부의 열시왕들이 49일 동안 매 7일마다 한번 씩 망자의 생전에 지은 업을 심판하여 벌과 상을 주므로, 그날마다 재를 지내줌으로써 부처님의 가피 아래 벌을 면하고 좋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데 명부시왕 중, 지하의 왕으로 알려진 염라대왕이 심판하는 날이 바로 49일째 되는 날이기 때문에 49재를 지낸다는 우스꽝스러운 희극은 이젠 벗어나야할 것입니다.


인간은 태아(胎兒)의 상태로 있는 열 달 동안 엄마의 자궁 속에서 “아메바”에서 “인간”에 이르는 모든 과정의 형태를 거치게 되는데, 인간은 죽음을 맞이하여 사후세계로 들어가게 되면 다시 환생하기 전에 심령(心靈)적으로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태아상태일 때는 육체적으로 10개월을, 사후세계에서는 영적으로 존재의 49개의 정거장에 해당하는 진화와 태화의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탄생, 즉 입태의 10개월은 의학적으로 알 수 있지만, 사후세계의 49일은 정신세계에 있으므로 아직까지는 과학적으로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49일이라는 기간은 여러 종교에서도 순환의 중요한 숫자인 7에 기초하고 있지만, 49일은 상징적인 숫자이지 꼭 49일 이후에 환생한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후 100일 되는 소위 백재(百齋)라 부르는 8재가 있고, 1년 소상(小祥)인 9재가 있는 것이고 삼년탈상의 대상(大祥)인 10재가 있는 것입니다.

49재는 죽음을 맞이한 날부터 계산하여 49일 동안 하게 되는데, 불교에서는 음력을 사용하고 자시는 다음 날의 시작이기 때문에 자시(子時 밤 11시∼1시)에 죽은 경우에 재를 지내는 49일의 시작을 다음 날로부터 산정하는 것이 맞지 않는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실제로 삼일장(三日葬)인 경우 자시에 죽었을 때, 다음 날로 시작하여 사흘째 발인(發靷)하기도합니다.


이 때문에 많이들 오해하나 49재는 특이하게도 양력으로 계산하여 비록 밤 11시 45분에 돌아가셨어도 그 날로부터산정하게 됩니다.


재를 올릴 때 가족들이 청하면 마지막 재 때에 스님이 직접 영가법문을 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의례는 주로 부처님 말씀인 불경을 가지고 독경(讀經)을 합니다.


천수경, 무상계, 반야심경, 장엄염불, 금강경 등이 주로 49재에 독송하는 경전으로, 그 내용은 물거품 같은 육신(肉身)과 허상(虛想)에 매이지 말고 참된 자기(自己)를 깨달으라는 것이 주된 독경의 내용이고, 그 외에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아미타경과 지장보살에게 모든 죄업을 참회하는 마음으로 지장경을 독송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하여 스님의 염불과 독경소리를 듣고 깨달은 영가는 지난 생을 차분히 돌아보면서 부질없이 집착하였던 스스로의 모습을 참회하게 되고, 마침내 공과 무상을 바로 깨달아 새로운 세계로 환생을 맞을 준비를 하게 된다고 합니다. 


티벳 사자(死者)의 서(書)에서는 49 재에 대해 말하기를 49라는 숫자는 7의 제곱(7 X 7)인데, 윤회계(輪廻界)에는 일곱 세계의 환영이 있는데, 이는 일곱 개의 행성으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각각의 행성에는 진화의 일곱 단계가 있으므로 49개가 되는데, 윤회계는 우주의 현상계(現象界)를 뜻하며, 그 반대어는 니르바나(열반)로 이 니르바나는 현상을 초월한 곳에 있으며, 우리가 흔히 깨달았다고 하는 표현이 열반에 도달했다고도 합니다만,


니르바나, 곧 열반이란 “니르”는 불어서 끈다는 의미이고 “바나”는 소위 가스버너, 석유버너 하듯이 불길이 활활 탄다는 의미를 뜻합니다.

그래서 활활 타는 번뇌와 욕구의 불길을 수행을 통해서 끈다는 뜻이 바로 열반, 니르바나의 근본 뜻입니다.


그런데 죽으면 살아있을 당시의 번뇌와 욕구가 사라졌다 해서 스님들이 죽으면 열반에 들었다는 표현도 합니다.

의식절차에 따라서 상주권공재(常住勸供齋)와 각배재(各拜齋)·영산재(靈山齋) 등으로 나뉘는데, 이 중 상주권공재가 가장 기본적인 의식이며, 여기에 명부신앙에 대한 의례를 더한 것이 각배재이고 번화신앙을 가미한 것이 바로 영산재인데, 영산재는 의식이 장엄하여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있기도 합니다.


49제의 유래를 보게 되면 49재(四十九齋)는 부처님 당시인 근본불교에서는 이런 의례자체가 없었습니다.


49재라는 의식은 인도의 불교에서 성립된 것이 아니라 6세기경 중국에서 생겨난 의식으로 유교적인 조령숭배(祖靈崇拜) 사상과 불교의 윤회사상이 절충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원래 불교의 무아설(無我說)에 따르면 개인의 생전행위 자체에 대한 업보(業報)는 그 사람 개인에 한정되며, 어떤 방법으로도 자녀나 그 후손 누구에게도 전가될 수가 없으며 전가시킬 수도 없다고 할 수 있지만, 무아설과 달리육도(六道)윤회의 사상적 해석에 따르면, 모든 중생은 육도를 윤회하고 있으므로 가족들이 망자가 삼악도에 들어가지 않도록 해주는 기도행위가 49재라는 것입니다. 


유교사상은 삼년 탈상까지 죽은 이의 영혼을 위하여 그 후손들이 정성을 다하여 효성스럽게 재를 올리면, 죽은 부모나 조상이 후손들의 공덕에 힘입어 보다 좋은 곳에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고, 또 그 조상의 혼령이 후손들에게 음복을 주어 후손들에게 양덕으로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경전상의 근거를 찾아보면 지장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지장보살님이 말씀하시되, 장자여! 내가 지금 미래 현재 일체중생을 위해 부처님의 위력을 이어서 간략히 이 일을 설하리라. 

미래 현재 모든 중생들이 명을 마칠 때에 다다라서 한 부처님 이름이거나, 한 보살의 이름을 얻어 듣게 되면 죄가 있고 없음을 불문하고 다 해탈을 얻으리라. ~ 중략~ 죽어서 모든 이가 7.7 49일 안에는 업보를 받지 않았다가 49일이 지나면 비로소 업에 따라 과보를 받나니, 만일 죄인이 이 과보를 받으면 천백세 중에 헤어날 길이 없나니 마땅히 지극한 정성으로 49재를 베풀어 공양하되 이같이 하면 목숨을 마친 이나 살아 있는 권속들도 함께 이익을 얻으리라” 라는 구절을 비롯하여, 법화경(法華經) 사상과 지장경(地藏經), 아미타경(阿彌陀經), 약사여래경(藥師如來經) 등의 사상에 근거해서 봉행하는 의식이라고 할 수 있으며, 불교의 윤회관이 중국의 시왕사상과 결합하면서 생겨난 의식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와 같은 사십구재는 우리나라 불교의 특징인 동시에 우리나라 고유의 민족의식으로 자리잡아 생명존중과 조상공경의 의식으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49재 기도를 모시면서 사찰에 기도비만 내면 다 되는 것으로 알고들 있습니다.

그래서 재 때만 와서 기도에 동참만 하면 다 되는 줄로 알고들 있으나 예전처럼 집에다 상청은 모시고 조석으로 상식은 올리지 못한다 해도 적어도 불자라면 하루에 한번은 집에서 아미타경을 독송해드리거나 하다못해 망자의 이름을 불러주고 반야심경이라도 한편독송해주는 정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럼 49재의 절차는 어떻게 진행되는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시련(侍輦)이라 해서 동구 밖에서 영가를 맞아들이고, 대령(對靈)이라 해서 영가를 간단한 대접을 하여 휴식하게 한 다음, 관욕(灌浴)이라는 불보살님께 인사를 드리기 위해서 영가를 목욕시켜드리는 의식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신중작법(神衆作法)이라 해서 재를 지내는 도량을 잘 수호하도록 모든 신중을 맞아들이게 됩니다.

그 다음이 상단권공(上壇勸供)을 해서 불단에 공양을 올리며 법식(法食)을 베풀고 나서, 영단에 관음시식(觀飮施食)이라 하여 영가를 대접하는 일반 제사의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법성게를 독송하며 봉송(奉送)이라하여 불보살을 먼저 배송(拜送)하고, 영가도 왕생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성불하십시오.


오늘 법문은 시달림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1월 한 달을 천도의식에 관련하여 말씀드렸습니다만, 사실은 맨 먼저 오늘 법문의 주제인 시달림이 법문의 서두로 설해드렸어야 했는데 이제사 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부처님의 정법에 의지하여 설해지는 천도제와 장례의식에 대해서  마무리가 될 것입니다.


그럼, 시달림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다른 종교와는 다르게 불교에는 아주 수승하고 독특한 장례 의식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드릴 시다림(尸陀林)이란, 망자를 위해 장례 전에 행하는 의식으로 원래 인도의 시타림(sitavana 寒林)에서연유된 말로 말 그대로 추운 숲, 시체를 버리는 곳이란 뜻입니다. 


시타림(尸陀林)이란 본래 부처님 당시 인도 마갈타국의 도성인 왕사성에서 조금 떨어진 숲의 이름으로 왕사성과 인근 사람들이 죽은 이의 시신을 버리던 곳이었습니다.


당시, 마갈타국의 빈천한 사람들의 장례풍습으로 사람이 죽으면 이 숲에 시신을 갖다 놓았고 영축산의 독수리들이 떼 지어 날아와서 시신을 먹어치우는 형태의 조장(鳥葬)이 널리 행해졌다 합니다.


그래서 이 숲에는 항상 죽은 이의 시신이 여기저기 널려있었기 때문에 숲 속에 감도는 공기가 항상 음습하고 칙칙하고 찬바람이 돌았으므로 한림(寒林)이라고도 불렸답니다.

그런데 뜻이 바뀌어 우리나라에서는 망자를 위하여 설법하는 것을 시다림이라고 하고 이를 시다림법문이라고합니다. 

신라시대 이후부터 관습화되어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성행했고 오늘날에도 불자와 스님들은 장의의식으로 행하고 있습니다.

시신을 버리던 숲의 이름이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스님들이 상을 당한 신도의 집에 가서 죽은 이를 위해 염불하고 설법하고 여러가지 의식을 집전하는 것을 이르는 말로 바뀌었고 망자를 위한 의식은 신라시대 이후로 관습화되어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성행하였고 오늘날에는 불교의 장례법으로 일반화 되었던 것입니다.


그럼 어디에 근거해서 시다림이란 의식이 행해지게 됬는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귀찮거나 성가신 사람에게 시달린다는 표현을 하는데 그 말이 바로 여기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주변에서 흔히 쓰는 이 ‘시달림’이라는 말은 바로 불교의 ‘시타림(尸陀林)’에서 나온 것입니다.

시다림은 범어의 시타바나(Sitavana)를 음역한 것으로 시타는 “차가운(寒)”이라는 뜻이고 바나는 “숲(林)”이라는 뜻이기에 한림(寒林)이라고 했고 시타림은 요즘 말로는 공동묘지인 것입니다.


사분율에 보면 시타바나는 중인도의 마갈타국 왕사성 북쪽에 있는 숲으로 시타림은 당시에 공포의 장소였으며 질병이 무성한 곳이었고, 후일 나라에서 이 시다림에 죄인들을 추방시켜 살게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고행의 장소로 이 시다림을 이용했다고 합니다.(저도 공동묘지 관리실을 빌어 살아본 적이 있었습니다.) 


열 두가지 두타행 가운데 오정심관이라 하여 무상관(無常觀)을 닦기 위해 무덤 곁에서 산다는 총간주(塚間住)는 바로 이 시다림에서 생활한다는 뜻으로, 새의 먹이가 되도록 버려진 시체 더미에서 사는 것을 수행의 한 방법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이런 곳에서 살도록 한 이유는 육체의 허망함을 깨닫고 욕망을 없애기 위한 극단적인 수행방법이었지만, 시신들 사이에서 지내야 하는 수행자들은 극심한 공포에 시달려야 했을 것입니다.

시다림이 “시달린다는 뜻”으로 전환된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합니다. 


죽은 사람은 수행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무소유를 생명으로 삼는 수행자들에게 의복을 제공하는 고마운 존재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비구들은 버려진 시체더미를 뒤져 죽은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을 의복으로 삼았기에 스님들의 옷을  분소의(糞掃衣)라고 불렀던 것이며 해탈도론 2권에서 말하기를 “무덤사이나 쓰레기더미나 시장이나 도로에 있는 것을 주워서 자르고 빨아 염색하고 가리고 이어서 재봉하여 입고 수지하는 것을 주인이 없는 것이라 하여 잘라내고 남은 것이거나 소나 쥐가 물어버린 것, 혹은 불에 타버린 것이거나, 사람이 던져버린 것, 시신을 덮은 옷이나 혹은 외도의 옷등을 세상 사람들이 버린 것이라고 한다.”고 했고, 보시를 받기도 했지만 죽은 사람의 옷은 임자가 없기 때문에 무소유 정신에 어긋남 없이 부처님 당시 수행자들은 시신과 함께 살면서 온몸으로 생과 사의 구분 없음을 배웠다고 합니다. 


당시 인도의 장의법은 부자들이 하는 시신을 화장하는 다비와 더불어 조장(鳥葬), 풍장(風葬)이 있었고, 다비는 부처님 이후 불교 고유의 장의법으로 정착됐으나, 현재 인도에는 갠지스 강물에 던지는 수장(水葬)이 일반적인 장의법으로 정착되어있습니다만,


티벳에서는 여전히 풍장과 조장이 존재하고 있는데 시신을 태우거나 새의 먹이로 던지는 풍습은 인도나 티벳은 지금도 화장을 할 나무를 구하기도 힘들었거니와 경제력 없는 하층민들은 이러한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으며 또, 그들의 사상에는 이미 죽은 시신에게는 윤회를 하게 되는 자아였던 영혼이 중요한 것이지, 지수화풍의 사대로 환귀본처하는 이 육신은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지 않았기에 이러한 장례법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몸은 지(地) 수(水) 화(火) 풍(風) 4대로 구성되어 있어 인연이 다하면 원래의 모습대로 흩어진다는 사상에 근거하여, 인간의 몸은 일시적으로 뭉쳤다 흩어지는 존재이기 때문에 몸에 집착하는 것은 헛된 망상일 뿐이라는 것을 가르쳐주고자 했던 것이며 하지만 인식과 달리 몸에 대한 애착, 죽음에 대한 공포는 쉽게 버리기 힘들기에서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에게 묘지에서 살도록 한 것입니다.

시신이 썩어서 흉측하게 변하는 모습을 보면서 육체를 탐하는 애욕을 끊고 결국은 사라져 한 점도 남지 않는 과정을 지켜보며 죽음의 무상함을 느끼도록 했던 것이며 부처님 당신도 그렇게 살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묘지에서 시체를 보면서 수행하는 방법을 부정관(不淨觀)이라고 하는데 부정관에는 9가지의 단계가 있는데, 대념처경에 보면 그 수행법이 묘지로 가서 시신의 모습을 보면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관찰하는데 모발, 손톱, 간, 폐, 위장, 비장, 콩팥, 오장, 땀 뼈, 골수, 뇌, 소변, 대변, 눈물, 숨 쉬는 것 등 인간 육체의 전반에 걸쳐 하나 하나의 부분을 관찰하고 시신이 점차 부풀어 오르면서 뼈만 남고 그 뼈마저 사라져가는 것을 보고 육체의 허망함을 관찰하도록 합니다.


오정심관 중에서 부정관은 수행의 초기 단계에 들어선 사람에게 주로 하도록 했으며, 부정관은 또 탐욕과 애욕이 많은 사람들에게 인생의 무상함을 깨우쳐 탐욕과 애욕에서 벗어나게 하는 수행법으로,  평소에 가지고 있던 탐욕과 남을 미워하는 마음이 없어지게 되며 싸우고자 하는 마음과 도적질을 하고자 하는 마음과 안으로 자신만을 높이는 아만심과 이기심 등이 없어지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부정관을 잘못 닦게 되면 염세관을 갖거나 심지어 자살하는 부작용도 있을 수 있으므로 부정관의 참뜻을 잘 알고 행해야 합니다.


부정관은 스리랑카 태국 미얀마 등 남방불교 권에서는 지금도 수행의 중요한 방법으로 이용되고 있지만, 고대 인도에서처럼 시체를 그대로 묘지에 버리는 장례법이 없어졌기 때문에 묘지에서의 관찰은 불가능하기에 대신 태국에서는 스님들에게 의과대학의 인체 해부시간에 견학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고 합니다.


시체의 썩어 가는 과정을 직접 관찰하면서 수행을 할 수는 없으나, 전신의 해골을 전시해 놓아 백골관을 할 수 있게 준비해 놓은 수행처가 태국에서는 일반화 돼있습니다.

태국의 동북지역의 한 수행처에는 백골과 함께 생전의 사진이 걸려 있으며 또, 방콕에 있는 한 수행처에는 죽은 시체 네 구를 백골이 아닌 미라로 만들어서 수행자들이 관찰할 수 있게 해 놓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시다림은 공동묘지의 공포와 죽음 직후의 슬픔을 중생의 생사초월을 위한 큰 법문으로 승화시킨 숭고한 뜻이 있었던 것입니다.


불교는 다른 종교와 달리 극락세계가 일정한 장소 한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시방세계 어느 곳이나 부처님이 안 계신 곳이 없으나, 특히 동서남북의 사방세계의 관념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오방 부처님을 안내해 주고 어느 곳으로 가든지 걱정하지 말고 그곳의 부처님께 귀의하도록 일러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방례(五方禮)란 상당히 동양의 역학사상을 불교에 접목시켰다고 볼 수 있는 동·서·남·북·중앙에 있는 부처님들께 예배드리고 영가를 대신하여 예를 올리는 것입니다.


불교는 하늘에 있는 천국만을 향하는 서양종교와 달리 소위 시방세계라 하여 동서남북의 사방과 그 사이인 간방과 하늘과 땅의 상하를 다 가리켜 광대무변이라 극락세계가 일정한 장소인 한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시방세계 어느곳이나 계시기에 부처님 안 계시는 곳이 없다는 오방세계의 관념 속에 망자에게 오방의 부처님(중앙의 화장세계(華藏世界)인 노사나불(盧舍那佛), 동방만월세계(滿月世界)의 약사불(藥師佛), 서방극락세계(極樂世界)의 아미타불(阿彌陀佛), 남방환희세계(歡喜世界)의 보생불(寶生佛), 북방무우세계(無憂世界)의 부동존불(不動尊佛))안내해주고 어느 곳으로 가든지 걱정하지 말고 그곳의 부처님께 귀의하도록 일러주는 의미로 오방례를 하는 것입니다. 


그 의식의 내용을 보게 되면 먼저 무상의 원인과 결과를 밝혀 영가로 하여금 착심을 초월하도록 일러주는 법문으로 화엄의 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 법화(法華)의 보문품(普門品)과 원각경의 보안보살장의 내용이 들어있는 무상계를 독송하여 무상의 원리를 깨닫도록 법문을 일러주고 삭발과 목욕에 이어 세수와 세족으로 유체를 청결히 하고 속옷과 겉옷을 입혀주는 착군(着裙)과 착의·복건을 쓰는 착관(着冠)을 행하고 정와나 정좌를 칭하여 기도문을 하게됩니다.


모든 의식을 집행할 때에는 거기에 알맞은 법문이 있게 되는데 정좌나 정와 편에서는 영단에 기도할 때 마다 들어보셨던 “영명성각묘난사 월타추담계영한~ 云云 했던 “영가시여! 신령스러운 빛이 홀로 드러나 근진(根塵)을 벗고 또렷하게 나타나 있으니 문자와 언어에 구애될 것이 없도다 참다운 성품은 물듦이 없이 본래부터 원만하니 단지 망념만을 여의면 곧 부처님의 경지이로다.”하는 법문을 해주게 되고 그리고 안좌게를 한 다음 상황에 따라 다음날 입관하게 될 때까지 영단에 여러 독경을 독송해드리게 됩니다. 

염습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영정 앞에 상식만을 올려드리고 독경 만을 해드리는 것입니다. 


다음날, 망자의 염습이 끝나면 정식으로 망자를 위한 간단한 제(祭)를 올려드리고 영결식을 한 뒤 화장이나 매장에 이르는 의식을 더함으로써 시다림이라는 의식이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또, 망자를 위해 전번에 말씀드렸던 49재를 지내드리고자 하게 되면, 장지에서 망자의 영정을 집으로 모셔가는 것이 아니고 사찰로 모시게 되는데 그 때의 의식을 반혼(返魂)이라 하여 이때 반혼재를 하게 됩니다.


불교신자들은 가족 중에 망자가 생기면 평소 잘 아는 스님이나 사찰에 연락하게 되고, 스님은 상가(喪家)를 방문하게 되는데, 이 때 “시다림을 간다고” 합니다.

즉, 망자를 위한 의식을 행한다는 뜻입니다.


저는 언제든지 불러만 주신다면 불문곡직하고 가겠습니다만, 실제로 부유한 신자들이 아니면 스님들의 시다림 법문을 청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때문에 스님을 부르지 못하는 집에서는 금강경 독경 테이프로 대신하기도 하지만, 생전에 독실했던 불교신자인 가족을 떠나보내면서 스님의 법문을 들려주지 못하면 가족들의 마음은 아플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우리절의 신도들끼리 상조회를 결성했으면 하는 것입니다.


신도들끼리 상조회를 조직해서 시다림을 하는 법을 배워 서로 돌아가며 장의봉사를 베푸는 것입니다.

제가 앞장을 서겠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슬픔에 잠겨있는 유족들에게 큰 힘을 주게 되고, 경전을 듣고 망자가 극락왕생 했을 것이라는 편안함을 얻게 될 뿐만 아니라 독경은 유족들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줘 여유를 찾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주는 것이 참다운 신행생활이요, 불자로서의 든든한 의지처를 서로 나누는 것 일진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별의 별 소리들을 다하고 다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는 자식의 탄생을 기뻐하며 새끼 딸린 축생을 보약삼아 보신하는 어리석음이나, 문상가면 귀신이 따라온다는 둥, 하는 그런 어리석음 말입니다.


이제 우리절의 신도 분들께서는 이러한 혹세무민하는 무명 중생들의 입방아에 놀아나지 마시고 진심으로 공덕행과 복덕행을 실천하시기를 바랍니다.


성불하십시오. 

먼저, 전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우리가 가장 중요시 여기는 49재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49재(四十九齋)라는 의식의 진행절차는 원시불교인 인도의 불교에서 성립된 것이 아니라 6세기경 중국에서 생겨난 의식으로 유교적인 조령숭배(祖靈崇拜) 사상과 불교의 윤회(輪廻) 사상이 절충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불교의 무아설(無我說)로 본다면 개인의 생전의 행위 자체에 대한 업보(業報)는 그 사람 개인에 한정되며, 어떤 방법으로도 자녀 또는 그 후손 누구에게도 전가될 수가 없으며 전가시킬 수도 없다고 할 것입니다만,


소위, 종교는 불교적이면서 생활의 규범은 유교적으로 교육받아온 우리 조상들은 불교적 유교사상으로 49일 동안에 죽은 이의 영혼을 위하여 그 후손들이 정성을 다하여 재를 올리면, 죽은 부모나 조상이 후예들의 공덕에 힘입어 보다 좋은 곳에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고, 또 그 조상의 혼령이 후손들에게 복을 준다는 조상과 후손을 이어주는 가교의 뿌리사상을 심어주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불교에서도 무아설과 달리 육도(六道)의 사상적 해석에 따르면, 모든 중생은 육도, 즉 천상(天上)·인간(人間)·축생(畜生)·아수라(阿修羅)·아귀(餓鬼)·지옥도(地獄道) 등 여섯 세계를 윤회하고 있으므로 죽은 가족이 이 중 이른바 삼악도(三惡道; 지옥·아귀·축생)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망자를 위해 기도의 공덕을 지어주는 행위가 49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49재란 불교에서 사람이 죽은 다음 7일마다 재(齋)를 올려 부처님의 진리의 가르침을 읽어 전해주어 죽은 이가 그 동안에 불법을 깨닫고 살아생전의 모든 것들에 대한 애착과 집착과 아쉬움과 서운함과 원결을 풀어버리고 다음 세상에서 수명이 한량없고 빛이 한량없는 아미타부처님이 주재하신다는 극락세계에 태어나거나 다시 사람으로 좋은 곳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천도의식인 것입니다.


지장경을 보면 사십구재에 관한 경전상의 근거를 볼 수 있습니다.

“지장보살님이 말씀하시되, 장자여 내가 지금 미래 현재 일체중생을 위해 부처님의 위력을 이어서 간략히 이 일을 설하리라.

장자여 미래 현재 모든 중생들이 명을 마칠 때 다 달아서 한 부처님 이름이거나, 한 보살의 이름을 얻어 듣게 되면 죄가 있고 없음을 불문하고 다 해탈을 얻으리라. ~ 중략 ~ 죽어서 모든 이가 49일 안에는 업보를 받지 않았다가 49일이 지나면 비로소 업에 따라 과보를 받나니, 만일 죄인이 이 과보를 받으면 천 백세 중에 헤어날 길이 없나니 마땅히 지극한 정성으로 49재를 베풀어 공양하되 이같이 하면 목숨을 마친 이나 살아 있는 권속들도 함께 이익을 얻으리라” 라는 구절을 비롯하여 법화경(法華經) 사상과 지장경(地藏經), 아미타경(阿彌陀經), 약사여래경(藥師如來經) 등의 사상에 근거해서 봉행하는 의식이라고 할 수 있으며, 불교의 윤회관이 중국의 시왕사상과 결합되고 유교적인 효사상 까지 합해지면서 나타난 천도의식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십구재는 우리나라 불교의 특징인 동시에 우리나라 고유의 효사상과 뿌리공동체 보전을 위한 민족의식으로 자리잡아 생명존중과 조상공경의 의식으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우리가 알고 있는 천도의식이라는 것을 하게 되면 시식(施食)이라는 단어도 나오고 제(제사 제 祭)재(공경할 재 齋)라는 말도 나오는데 시식이라는 말은 먹을 것을 베푼다는 의미이고, 제사의 제는 신과 인간이 접한다는 뜻이며, 사찰에서 말하는 소위 각종의 재는 엄숙히 공경하게 행하는 의식을 말합니다.


천도의식(薦度儀式)이라는 말뜻은 천거할 천(薦) 법도 도(度)자를 써서 “법도에 맞게 영가를 천거하여 천거된 망자의 영혼을 좋은 곳으로 내보내기 위한 의식이다.” 라고 알아주시면 되겠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천도의식의 진행을 알아본다면 주로 독경·각종법회·시식·불공 등으로 행해지며 그 종류도 49재·100일재·연년기제·소상·대상 등 정기적 천도재와 수륙재, 특별히 필요에 따라 시설하는 부정기적인 천도재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소위 참선을 한다는 사람들은 말하기를 절집이 무슨 무당집이냐, 부처님의 진리만을 설해야지 사찰에서 천도재나 하고 각종 재를 지내며 무속화 된다고들 말들을 합니다.


그런 말들을 하는 이들을 보면 참 한심한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조석으로 부처님 전에 기도하고 사시에 공양을 올리는 것 자체가 바로 재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중생들을 위해 진리를 설해주신 부처님 전에 감사의 예를 올린다는 의미라고들 하지만, 그 자체가 바로 재이기 때문입니다.


참선을 한다는 사람들은 참선 외엔 아무 것도 필요 없다고 하면서 사찰을 운영하는 살림 사는 주지들은 잘사는게 아니라고 폄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이 비바람을 피하고 등 따뜻하게 편히 좌복 위에 앉아 공부하고 온갖 대중공양물을 공양 받고 편히 공부할 수 있는 것은 누구의 수고로움인지를 헤아리지 못하는 어리석음과 같은 단견에 떨어진 소견들인 것입니다.


일체 중생이라는 말들을 쓰면서도 그 일체 안에 유주와 무주까지 포함되고 있음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의 소치인 것입니다.


중생은 자기 눈높이로 모든 것을 사량하려 들기에 인간중심의 사고나 판단에 빠지는 것이며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의 가치인 냥, 착각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절에 가보면 스님들은 영가들에게 올린 과일이나 음식은 지혜종자를 끊는다고 안 먹는 경우들이 있습니다만, 이 또한 얼마나 우스운 꼴입니까?


지혜종자를 끊는 것은 분별없이 마셔대는 술이나 계율에 어긋나는 생활의 자세이지 남들 다 청해서 법석을 열고 종종진수를 차려 “어서드십시오.” 하고는 정작 주인인 스님은 그 음식을 안 먹겠다.?


그러면 일체중생계의 다른 세계에서 오신 영가들께서 편히 공양을 드실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들께서 손님을 청하시고 드시라고만 하면서 정작 본인은 안 드신다면 그 얼마나 우스운 꼴입니까?


속가에서 제사를 지내고 음복을 하면 그 후손들은 다 지혜종자가 끊어졌게요.?


우리는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어리석은 단견으로, 아무런 의심 없이 남들이 그러니까 나도 그런 생각에 빠져드는 오류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일체 중생이라는 말들은 곧잘 쓰면서 어찌 진정한 일체의 의미를 실천하지 못할까요.?


그것은 가슴으로 알기보다는 머리로만 알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도리를 아셨다면 이번 정초기도에 지극한 마음으로

기도 기간에 법당엘 못 오시더라도 집에서라도 지극함과 간절함으로 발원문을 손수 지어 기도 전에 발원문을 읽고 반야심경 한편이라도 독송하시길 재차 말씀드립니다.


이제 아까 말씀드린 대로 재를 올려 모든 기도를 할 때마다 시식(施食)이라는 것을 하게 되는데 이 시식이라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시식이란, 망자를 천도하여 극락정토에 왕생시키기 위해 재를 올리고 법식(法食)을 주면서 법문을 들려주고 경전을 읽어 주며 염불을 해 주는 의식, 또는 스님에게 재식(齋食)을 공양하는 것과 아귀(餓鬼)에게 음식을 베풀어 먹이는 의식 등을 말합니다.


그 유래는 소아귀경(召餓鬼經)이라는 경에 “아난존자가 길을 나섰다가 돌아올 때 갠지스 강가에서 아귀들이 불타 죽는 것을 보고 처소에 돌아와 부처님께 여쭈니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다라니의 법식으로 그들에게 시식을 베풀면 모든 귀신들이 주림을 벗고 포만을 얻어서 해탈할 수 있다.”고 한데서 연유한 것입니다.


일반의 재의 경우 그 의식절차는 먼저 죽은 이의 영가를 맞아들이는 시련(侍輦)을 하고, 먼 곳에서 온 영가에게 우선 간단한 다과를 대접하고 예불하게 하는 대령을 행하고, 다음으로는 영가가 세세생생에 걸쳐 지어온 생사업보의 때를 씻고 법문을 듣는 관욕을 해줍니다.


이어서, 시식을 통하여 법식(法食)을 베풀어주는데 이때 이런 큰 잔치에 일체의 아귀·유주무주 고혼도 함께 청하여 법식을 받도록 해줍니다.


그리고 끝으로 봉송 편에서는 불전에 하직인사를 하고 유족의 인사를 받고 극락으로 돌아가도록 해주는 것이며, 우리가 49재가 끝나고 나면 소위 영가의 겉옷과 속옷 한 벌과 세면도구 일체와 신발과 대야를 준비하여 봉송하면서 소대에 가서 살라줍니다.


우리가 자녀 중에 타지에 나가 공부하고 있을 때, 계절에 따라 소포로 옷가지를 보내주었고 학비는 송금했던 시절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와 하등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이승을 떠나 저승 세계에 계신 가족들을 위해 이런 것들을 보낼 방법은 바로 형상을 태워서 재로 만들어 보내는 방법을 택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호마법이라 하여 소대를 만드는 법이 있습니다만, 여기에서 망자의 옷가지를 불에 살라주고 태우지 못할 것은 대야에 담아 사르는 불 위에서 마음속으로 망자를 위해 염불을 해주면서 좌에서 우로 세 번을 돌리고 내려놓은 뒤, 봉송이 끝나고 모든 의식이 끝나면 남은 물건들은 영가를 대신하여 사찰에서 일용하여 영가가 이마저도 공덕을 짓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또, 시식의 종류로는 전시식(奠施食)·관음시식(觀音施食)·화엄시식(華嚴施食)·구병시식(救病施食)이 있습니다.


제사 지낼 奠자를 쓰는 전시식(奠施食)은 일체의 외로운 영혼을 지장보살의 위신력에 의탁하여 음식을 베푸는 것으로 영혼에 올리는 불교식 제사의례로서 모든 의식이 그러하듯이 반드시 시식 전에 불보살님들께 귀의하고 그 가피를 구하는 일반적인 의식을 하고 나서 하단(下壇)에서 행하게 됩니다.


관음시식(觀音施食)과 화엄시식(華嚴施食): 관음시식은 선망부모·친족·일체 고혼을 위해서 불교의 사대명절인 불탄일·성도일·열반일·백중일과 삼대재일(49재·백일재·기재), 그 밖에 좋은 날을 택해서 행하는 것이며, 화엄시식은 관음시식과 마찬가지이나 화엄신앙을 바탕으로 하고 초하루나 보름에 간단히 의식을 집행하는 것이며 주로 스님들의 재를 대표한다 할 것입니다.


구병시식(救病施食): 업으로 인했거나, 원결로 인해 몸이 아픈 사람을 위해서 귀신들에게 베푸는 시식으로 옛 사람들은 병의 깊이와 원인을 잘 판단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귀신의 침범으로 병이 생겼다고 생각하여 굿을 하여 물리치거나 시식을 하여 귀신을 쫓아내는 기도를 했습니다.


지금도 기독교에서는 “심령대 부흥회”다 뭐다 하면서 귀신 쫓는 안수를 한답시고 손톱으로 긁고 때려서 실신시키다 죽게 되는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만,


아난존자에 의하여 비롯된 불교의 시식은 배고픈 귀신들에게 법식(法食)을 통해 포만을 알게 하는 의식이지 귀신을 쫓아내거나 겁을 주는 행위가 아닌 것입니다.


또, 유교와 도교에서는 귀신을 불러 응징하기도 하고, 또 귀신의 포악으로 사람이 당하는 일도 종종 있으며, 무속에서는 귀신의 원한을 풀어주거나 무섭게 하여 쫓아내거나 무경으로 귀신을 가두는 의례를 행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불교의 천도의식 중에 향화청 이나 가영을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빚진 사람 원수가 되어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 그치지 못했기에 지금 시식을 베풀어 법식을 제공하오니, 무릇 깨달아 원한을 푸소서.”


영혼에게 드리는 노래인 향화청이나 가영(香花請, 歌詠)의 내용을 보면 구병시식의 뜻이 전생의 빚을 갚고 원한을 푸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성불하십시오.

그동안 1월과 2월은 49재나 천도제 등에 대한 법문으로 일관하여 대순진리나 다른 종교의 사람들에게 혹세무민 당하시는 일들이 없도록 자세히 일러드린 바이니 족하다 여깁니다.


이제 정해년 신년을 맞이하여 정초기도를 회향하는 마당에 진실로 불자로서 지혜로운 신행생활을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가장 기초적인 마음자세이건만, 사실은 가장 취약한 지라 모두들 살아가시다 어려운 환경에서 벌어지는 경계나 상황에서 주저앉고 마시기에 오늘 이 법문으로 일상의 신행기도를 왜 하는가? 일상의 기도를 하게 되면 어떠한 가피력이 있는가를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얼마 못가 잊혀지고 말겠지만,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사한 고 윤장호 하사를 추모하는 애도의 뜻이 매스컴에 연일 보도되고 있습니다.


헌데, 제가 보는 관점이 달라서인지는 모르나 인터넷에 올라온 윤하사의 나이를 보니 27살 신유생 닭띄였고, 아버지는 65세 계미생 이었지만, 어머니는 59세 기축생 소띄였습니다.


한 집에 삼재가 둘이란 말입니다.

윤하사의 집안이 어떤 종교인지는 모르지만, 우연의 일치라고 해야 할까요?

여러분들께서 생각하시고 판단해보시길 바랍니다.


이렇듯 경제적으로 가진 것 넉넉하고 우리는 배부르고 등 따뜻하고 편안하면 세상에서 자기가 젤 잘났고 예수고, 부처고 다 별 볼일 없겠지만, 세상은 천지자연의 순행의 이치에 따라 다만 순리일 뿐이고 인간이라는 중생은 아무리 잘났다고 자기가 제일 잘난 것처럼 폼 잡아도 시시각각 다가오는 늙음과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질병과 죽음을 뱃 속에 담고 다니면서도 지 잘난 착각 속에서 온갖 교만과 아집과 편견으로 자기만의 울타리를 쳐놓고 그 안에서 안주하면서 자기와 뜻이 맞으면 희희낙락거리고 생각이 다르고 뜻이 다르면 웬수처럼 여기며 온갖 구업들을 지어대는 것이 요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자화상일 것입니다.


전사한 윤하사의 집에서도 자식을 전장에 보내놓고 어찌 가진 종교가 없었을 것이며 어찌 기도하지 않았겠습니까?


자식을 둔 부모의 마음에 지극하고 간절하게 기도를 했건만, 이런 일들이 현실로 벌어진 다음에는 가슴이 찢어지고 가슴에 못이 박혀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위 유비무한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일상에서 인과법과 인연소치의 도리를 겸허하게 수용하여 자신과 더불어 가족 모두의 업장소멸을 위한 기도를 끊임없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중생에게 업이 남아있는데 어찌 그 업으로 인한 장애가 없겠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성경의 말씀대로 “구하라 얻을 것이요, 두드리라 열릴 것이니라.”입니다.


하지만, 머리 위에 안경을 올려둔 채, 두리번거리며 안경을 찾는 어리석음처럼 무조건 두드린다고, 무조건 구한다고 다 얻어지고 열리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적어도 기도를 한다면 기도를 하겠다면 우선 먼저 마음이 열려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마음은 꽉 닫혀진 채로 누군가를 미워하고 증오하면서, 주변의 조그만 대소사에 금방 짜증내고 화를 내면서 입으로는 기도를 한답시고 기도문을 중얼거리고, 마음 찾는다고 몸은 돌부처처럼 앉아있고, 무릎이 닳도록 절을 한다고 기도가 성취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게 하는 기도는 자기의 지구력과 끈기를 길러주는 것 외엔 아무런 기도의 가피도 생기지 않을뿐더러 머리 위에 안경 올려둔 채, 세월만 보내고 마는 것입니다.


천수경을 보십시오. 맨 처음 나오는 진언이 바로 정구업진언입니다.


바로 입으로 지은 모든 죄업들을 깨끗하게 씻어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만이 성스러운 기도문을 입에 올릴 수 있는 것이고 자신과 더불어 가족들의 모든 업장을 소멸한다는 기도문을 외울 자격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전에 교통이 좋지 않을 때는 제가 70년도에 살던 산중의 절에서는 기도 때가 되면 저 멀리 2~30리 되는 산 아래 마을의 보살님들과 처사님들이 머리에 향, 초 사들고 쌀 한 되, 콩 한 되들을 머리에 이고 지고 절에 올라와 부처님 전에 공양을 올렸습니다.


요즘엔 자가용이 마당까지, 법당 앞까지 쑥 쑥 들어옵니다.

그런데, 기도 영험은 예전 분들이 더 많았습니다.


왜냐? 그 분들은 절까지 이고지고 오시면서 힘들면 냇가에 쉬었다가 오시다 혼자서 중얼거리며 오는 길에 온갖 발원과 기도를 혼자서 다 해버리고 막상 절에 오면 할게 없었습니다.


그저 부처님 전에 두 손바닥 비비며 절만하다가 기도 끝에 밥만 먹고 내려갔지만, 이미 기도 성취는 오는 도중에 다 이루어져 버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이토록 편하게 오고가면서도 기도성취는 더디고 쉽지가 않습니다.

왜냐? 기도를 하려는 마음이 열리지 않고서 욕심의 기도만 앞서기 때문입니다.


육종공구(六種供具)라 부처님 전에 공양을 올리는 여섯가지 공양물이 있으니 물과 도향(塗香)이라 하여 바르는 향과 꽃, 소향(燒香)이라 하여 사루는 향과 음식과 등불이 있으니 이 여섯가지 공양물은 생사의 고해를 건너 열반의 언덕에 이르도록 해주는 여섯가지의 방편인 육바라밀을 뜻하는 것으로 차례대로 보시와 지계와 인욕과 정진과 선정과 지혜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공양물인 초를 공양하면서 밝은 촛불이 어둠을 물리치고 밝음이 오듯이 지금 어두운 내 마음 안에 밝음이 오기를 발원하면서 촛불을 켜야 하는 것이지, 촛불은 열심히도 켜대면서도 자기 내면에서 부정이 물러가고 긍정의 세계를 만들어 낼 수 없다면 그것은 그냥 작은 공덕에 머물고 마는 것이지 촛불공양을 통해 수행의 세계에 다가가지 못하고 마는 중생으로 머물고 마는 것입니다.


이처럼, 천수물을 올리면서 내 마음의 세계가 거울처럼 맑아지기를 발원해야하고, 불전에 향을 사루면서 내가 가는 곳마다, 내가 있는 곳마다 그곳이 가정이 되었던지, 직장이 되었던지, 계모임에 갔던지 고스톱 판에 있던지 그 어디에 있던지 향기로운 향처럼 주변을 편안하게 해주는 아로마 향처럼 자신의 분위기에서 자기만의 향이 나오기를발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계모임에는 혼자 쏘는 것이 젤이고, 고스톱 판에서는 도시락이 되어 주는 것이 주변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생활 속에서 기도를 생활화했을 때, 그러한 향이 나오는 것이고 그러한 일상을 행으로 실천할 때 마음은 열리고 자기만의 향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기도 날 만을 채우는 것은 지구력과 끈기의 훈련일 뿐으로 정작 달은 쳐다볼 생각도 못해보고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만 쳐다볼 뿐이란 말입니다.


그제 아침 일찍 전화를 먼저 하시고 노보살님이 다녀가셨습니다.

전번엔 아들이 술독에 빠져 중독자라면서 어찌 부적이라도 해달라고 하셔서 “이건 비법입니다” 하고 술 끓는 부적을 하나 해주고 어떻게 사용하시라고 해서 보냈더니 며느리에게 시켜서 했더니 아들이 병원에서 나왔는데 한 동안 술을 안 먹더니 또다시 술을 먹는다고 속상하다기에 왜 또 술을 먹게 됬느냐 물었더니 제 아들 하고 다투다 아들이 집나간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이젠 며느리까지 내외간에 다투고 집에 안 들어 오다보니 술을 먹게 됬다며 손자란 놈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전화도 없고 불안한 생각만 든다고 아침 일찍부터 와서 부적을 내 놓으라니 별 수 있습니까?


헌데, 제가 아까 비법이라고 말한 것은 무슨 신통한 부적쓰는 도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 가르침에는 없는 비법(非法)을 말하는 것입니다.

잘들 새겨들으세요.


그리고 보내드렸는데, 어제 오후에 노보살님이 전화가 왔어요. 

집나갔던 손자가 들어왔다고 며느리한테서 전화가 왔다면서 고맙다고 감사하다고 한동안 통화하고 끊었습니다만, 중생의 사는 삶은 이런 것입니다.


이 세상이 어찌 정도만 존재할 것이며, 어찌 맑음만 있고 밝음만 있겠습니까?


중생을 위해서라면 천수경에 나오는 대로 천수천안도 되어야하고 무수방편도 있어야 하는 것이고 관음경 보문품에도 있듯이 중생의 근기에 맞게 교화의 응신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정해년 정초 신중기도를 회향하는 날입니다.

전번 입춘에 삼재풀이라고 해서 삼재기도를 했습니다만,

정월 보름이 지나기 전까지는 세배를 하는 것이고 정초기도가 마무리되고 동안거가 끝나는 날입니다.


전번에 말씀드렸듯이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이 윤회에서 벗어나도록 가르침을 주시는 분이시지 중생들의 길흉화복을 위해서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을 것입니다.


불보살님들 또한 중생들의 괴로움을 함께 겪으며 동사섭으로 중생들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욕구로 인한 번뇌에서 벗어나도록 해주는 지혜를 주고자 할 뿐이지 중생들의 길흉화복을 어찌 해주시는 분들이 아니란 말입니다.


중생들이 원하는 길흉화복을 피하고 얻어지도록 하는 것은 중단이나 하단의 선신들이 하는 역할인 것입니다.


그래서 정초기도에 가족 중에 삼재에 드신 분들이나 모든 분들이 금년을 아무런 탈들이 없이 보내시라고 정초 신중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삼재란 무엇인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인도에서는 세월을 계산 할 적에 산수로 미칠 수 없는 긴 세월을 겁(劫)이라했고 그 겁말에 일어나는 세 가지의 재해를 대 삼재와 소삼재로 나누는데 소삼재는 도병재와 질병재 기근재를 말하고 대삼재는 화재와 수재와 풍재를 말합니다만, 삼재는 12년마다 누구에게나 한번 씩은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삼재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삼재(三災)가 들면 삼재팔난(三災八難)이 생긴다고들 합니다. 

세간에서 말하는 삼재는 대부분 소삼재인 화재(火災), 수재(水災), 풍재(風災)를 말합니다.


하지만, 삼재에 드신 분들의 가정이나 본인의 주변에 일어나는 좋지 않은 일들은 삼재로 인해서가 아니라 팔난으로 인해서 일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럼 팔난은 무엇인가하면, 손재, 주색, 질병, 부모, 형제, 부부, 관재, 학업 등에 있어 파생하는 재난이나 난관을 말하는데 이것을 합쳐서 바로 삼재팔난(三災八難)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삼재로 인해서 안 좋은 일들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은 삼재인데도 잘 만 풀리고 어떤 사람은 죽을 쑨다는 것은 바로 자신의 사주의 운이 기신의 운으로 흐르는가, 용신의 운으로 흐르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IMF때 돈만 잘 번 사람이 있는가하면 어떤 이는 쫄딱하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입니다.

비오는 날은 우산장수가 수지맞고 갠 날은 짚신장수가 수지맞는 이치란 말입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자신의 운명은 바꿀 수 있다고 했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요, 지천명이라 했듯이 우리는 부처님의 제자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비록 가족 중에 삼재든 이가 있다 해도 열린 마음으로 입부터 청정하게 하고 신업 또한 청정하게 하기 위해서는 의업, 바로 일상의 생각들을 열린 마음으로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열린 마음이 되었을 때, 손금에 삼지창이 없다 해도 관상이 별 볼일 없다 해도, 사주가 시원치 않다 해도 자신의 마음의 상인 心想이 열려진다면 자신의 운명은 삼재에도 관계없고 팔난에도 흔들림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배부르고 등 따뜻하고 아직은 여유롭다고 나태와 게으름과 방일과 안일함과 교만으로 조그만 일에도 분별심을 일으키고 주변을 불편하게 하는 일상을 만들어 간다면 항상 밑지는 장사에 주변에는 항상 힘들고 불편한 일들만 생기고 일마다 꼬이는 것입니다.


여기 삼재와 팔난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지가 짓고 지가 받는다는 자작자수라 스스로에게 달린 일입니다.


성불하십시오.

 


오늘날 처럼 남북이 분단되어 올림픽
단일팀이 하나의 國歌를 부르기 어려울
때에는 “아리랑"을 국가처럼 합창하여
한민족임을 확인한다.
 

그러면서도 우리국민 거의다가
“아리랑”이 무슨 뜻인가? 를 모르고 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경기도 아리랑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또는 사투리로
서리 서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밀양 아리랑, 진도 아리랑, 정선 아리랑)
에서 나오는
“아리랑",“쓰리랑”,“아라리,
“아리랑고개”
의 뜻을 알아본다.
 


 

첫째 “아리”의 뜻

"아리”가 고대 한국어에서 “고운”, ”곱다”
로 쓰인 흔적을 현대 한국어
(“아리다운”
=아리+다운)
에서 찾아 볼수 있고,
몽골에서 “아리”는 아직도
“고운”
“곱다”
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으므로
“아리”의 뜻은 “고운을 뜻한다.
 


 
둘째 “아리”의 뜻
현대 한국어에서 “아리다”(마음이)의 동사는
사랑에 빠져 상사병에 걸렸을 때나
마음의 상처를 받았을 때의 표현이다.
이것이 형용사가 되면 “아리”는 상사병이
나도록
“사무치게 그리움”을 표현하는
뜻이 되어
"아리“는 ”(사무치게)그리운”
의 뜻이 된다

 
 


“랑”의 뜻
“랑”은 한자로 삼국시대에는“낭(郞 )“
자를 써서 젊은 남녀를 모두 표현 했다.
통일 신라시대 이후 조선시대에는 남녀를
구분하여 남자는

 

 


*주로*
”郞“자, 여자는"娘“자로 표시했다.
발음은 모두 “랑”이며, 뜻은 “임”이다.
이는 신라향가(鄕歌)의 죽지랑(竹旨郞),
기파랑(耆婆郞) 등이 좋은 예이다.

 
 
“아라리”의 뜻
“아라리”는 근 현대에 뜻을 몰라
잃어버린 말인데, 이는 ‘상사병’의
고대 한국어 라고 판단 된다.
현대 한국어 에서는 상사병을 나타내는
‘가슴아리’ (가슴앓이)에서 그 흔적이
어렴풋이 보인다.
'쓰리다’를 강조할 때'쓰라리다
라고 강조사를 넣는 것처럼
’가슴아리‘는 ’가슴 아라리‘
’아라리‘
와 같다.

 

 


삼국유사’ 등에는 상사병에 걸린 사랑
이야기가 몇 개 나오는데, 상사병에 해당하는
순수 고대 한국어를 한자가 수입된 뒤 언젠가
그만 잃어버린 것이다.

*-민요-*
아리랑’에 들어있는 ‘아라리’가 바로
‘상사병’의 순수 인 것이다.

 


“쓰리랑”의 뜻
“쓰리랑”“아리랑” 둘째의 뜻과
동의어 또는 유사어(類似語) 이다.
마음이 “쓰리다”는 마음이 “아리다”
와 유사어 이다.
“쓰리랑”은 마음이 아리고 “쓰리도록
그리운 임“
을 뜻한다.
"아리랑”의 가사를 현대 한국어로 리듬을
접어두고 번역하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곱고 그리운 임/곱고 그리운 임/ 사무치게
그리워 상사병이 났네.)
의 뜻이 된다.
 
한국 전통사회에서 마을 공동체의 활동범위를
차단 하는 것은 “고개” 였다.
고개를 넘어가는 것은 다시 만나기 어려운
공간으로서‘이별“ 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리랑이 고개를 넘어 간다”
“곱고 그리운 임과의 이별“ 을 뜻하는 것이다.
위에서의 의미를 유추해 볼때"
 


"아리랑”이 뜻도 모른 채(알았더라도)
일천수백 년을 내려온 것은 이 고대어 속에
현대어로는 치환할 수 없는 절묘한 뜻과
멋이 담겨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옮긴 글-
 
 

 

 

 

 

 

 

우리 민족의 恨이 서린 이 아리랑을

우리 모두는 사랑한다

우린 민족은 얼마나 많은 질곡의 아리랑 고개를 구비구비 넘어 오며

살아 왔던가 이제는 이렇게 사무친 恨이 서린 아리랑은

더 이상 부르지 않으리라.

가슴에 님을 향한 그리움의 행복을 녹이며 부르리라.-이룻-

  생명의 마음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
‘아리랑(이)
고개를 넘어간다’
라는 표현을 운율에
맞추고자
“아리랑” 다음의 토씨 ‘이’를
생략 한 것으로서, 번역하면 
곱고 그리운
임이 고개를 넘어간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