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다운 자기참회로 거듭 태어남

2010. 1. 27. 21:08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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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도 덜도 말고 매일 매일이 초파일 하루처럼만 같기를 바라는 것도 욕심일 것입니다.


저희 중생이 다겁생래에 훈습된 습기로 벌어지는 생각과 말과 행위라는 신구의 삼업으로 벌어지는 몸으로 짓는 세 가지, 입으로 만들어내는 네 가지 업, 생각으로 만들어 가지게 되는 세 가지 업들이 밝고 선한 업 쪽으로 가지를 못하고 끝없는 윤회를 거듭하고 살아가면서 훈습된 오욕과 칠정으로 어둡고 탁한 기운으로 열 가지의 업을 만들고 살아왔기에 이 훈습된 악업을 소멸하고자 한가지 악업마다 참괴하고 소멸시키고자 백일 씩 끊어서 천 삼십일 기도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십악 중에 살생업장을 참회하고 소멸하는 첫 번째 백일기도 때는 못했지만,  남의 것을 욕심내고 훔치고 남의 물건을 아껴주지 못하고 쉽게 낭비해버린 업을 소멸하는 두 번째 백일기도인 투도업장소멸 기도 땐 매월 말일에 당일로 자비참법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백일 동안 세 번의 자비참법기도를 하는 셈입니다.


다른 사찰에서는 2박 3일로 하는 기도를 우리절에서는 당일치기로 하고 있습니다.

이번 참법기도는 5월 31일 오후 4시 경에 시작하여 6월 1일 새벽 4시에 마쳤습니다.


불확실의 미래를 살아가는 현대인으로서 자신에게 잠재된 무한한 가능성과 능력과 희망이 내 안에 감춰져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기 위해서는 당일치기로 밀어부처 해내는 실천수행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번 해보시고 나면 스스로 아! 하길 잘했구나, 하는 느낌이 들 것이고, 이런 실천 수행을 십악참회를 하는 기도기간에 해보고서 자신과 가족들 모두의 삶이 달라지고 있음을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십악을 참회하기 위해 매월 자비도량참법기도를 하고 있기에 이 기도의 유래에 대해서 간략하게 말씀드리고 6월 달은 참회라는 주제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떤 수행이든 철저한 자기반성이 전제돼야 수행이 제대로 이뤄지는 것이고 그럼으로 온갖 것에 대한 발원도 세울 수 있고 용맹정진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법회 때마다 독송하는 천수경에 “백겁적집죄 일념돈탕진 여화분고초 멸진무유여요, 죄무자성종심기 심약멸시 죄역망 죄망심멸양구공 시즉명위진참회라”했듯이 “죄든 업이든 이것들은 자성이 없습니다.”

다만 헛된 마음이 삼독심을 쫒아 일어나는 망상일 뿐이기에 아무리 오랫동안 쌓아온 죄라도 한 생각(一念)에 없어질 수 있다고 천수경에 있기에 우리는 독송하는 것입니다.


참회수행이 공성품의(空性品) 논리에 입각해 마음을 본래 자기 자리로 되돌리게 만들어 주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 일념은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잠시 정신을 집중하는 정도의 차원이 아니라 시공을 통과하고 삼천대천세계를 꿰뚫어버릴 수 있는 “삼매의 일념”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삼매는 꼭 참선을 해야만 성취하는 화두삼매만이 아니고 염불삼매를 통해서도 언제든 성취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육조 혜능 선사는 육조단경에서 “영원히 번뇌 망념을 짓지 않고 끊어버리는 것이 참회”라며 무상참회법문을 말씀하시며, 참(懺)이 자기 행위를 반성하는 것이라면, 회(悔)는 다시는 그와 같은 잘못을 범하지 않고 더 나은 삶을 살겠다는 다짐이라고 밝히셨습니다.

달리 말하면, 참회는 자기발원(發願)인 셈인 것입니다.


이 같은 참회수행법은 천태지의 대사가 제시한 이참(理懺)과 사참(事懺)의 수행법에 나타나는데, 사참은 신구의(身口意) 삼업으로 지은 죄업을 참회하기에 보통 수사분별(隨事分別)참회라 하고, 이참은 이치의 실상을 보고 죄를 멸하는 참회로 관찰실상(觀察實相)참회라고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이참은 제법의 실상을 꿰뚫어 보고 자성이 공임을 자각하는 것이고, 사참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업의 제거를 위한 참법인 셈인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참회한다’는 것은 이 사참에 해당한다고 할 것입니다.


진정한 참회는 단순한 기복차원의 자기 속죄가 아니라 죄의 실체가 없음을 바로 알아 우리의 자성을 밝히는 것이지만, 참회는 모든 수행의 기본이기에 먼저 사참을 통해 이참의 세계에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계속될 천일기도 중에 계속하게 될 자비참법 기도이기에 이 기도법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과 유래를 말씀드리자면, 중국의 양 무제가 황후 치씨의 천도를 위해 스님들께 청하여 만든 기도법으로, 치씨가 죽은 후 수개월이 되도록 무제는 슬퍼하여 낮에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밤에는 잠을 이루지 못했는데, 어느 날 큰 구렁이가 나타나 무제를 바라보고 있어 무제는 크게 놀랐으나 도망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뱀이 사람의 말로 임금에게 말하기를. “저는 옛날의 치씨옵니다. 신첩이 살았을 적에 육(六)궁들을 질투하며 성품이 혹독하여 한번 성을 내면 불이 이어나는 듯, 활로 쏘는듯, 물건을 부수고 사람을 해하였더니, 죽은 뒤에 그 과보로 구렁이가 되었습니다. 예전에 폐하께서 총애해 주신 은혜에 감격하여 이 누추한 몸으로 폐하의 어전에 나타나 간청하오니 무슨 공덕이든 지어서 제도하여 주시옵소서.”하자, 무제가 듣고 황망함에 흐느껴 울다가 구렁이를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고, 이튿날 무제는 이 일을 지공스님께 의론하자 지공스님이 말하기를 “모름지기 부처님께 예배하면서 참법(懺法)을 정성스럽게 행해야 합니다.”하자,무제는 그 말을 옳게 여기고 스님들에게 청하여 여러 불경을 열람해 명호를 기록하고 생각을 펴서 참회문을 지어 독송하자, 그러자 궁전에 향기가 진동하고 점점 주위가 아름다워지면서 용모가 단정한 천인이 나타나 무제에게 말하기를 “저는 구렁이의 후신입니다. 폐하의 공덕을 입어 이미 도리천에 왕생했사오며 이제 본신을 나타내어 영험을 보이나이다.” 하고 감사의 인사를 하고 사라지자 이 이후부터 무제는 불교를 극진히 옹호하면서 이 참회기도법을 널리 후세에 전하고자 해서 지금껏 존재하고 현재 우리가 실천 수행하는 참회기도법이 된 것입니다.


자비도량참법의 구성을 살펴보면,

제 1권에는 삼보께 귀의하는 귀의삼보, 의심을 끊는 단의, 참회의 힘을 서술한 참회가 이어지고, 제 2권에는 힘써 정진하자는 발보리심, 서원과 깨달음으로 모두 성취케 하기를 바라는 발원과 부처님께 귀의하는 발회향심, 제 3권에는 현세의 과보를 통해서 죄를 짓지 않겠다는 원을 세우고, 제 4권에는 보살도를 실천 행으로 지옥의 고를 면하는 출지옥, 제 5권과 제 6권에는 원결을 풀고 정각을 이루자는 해원석결, 제 7권에는 원결이 없어져서 스스로 기뻐하는 자경의 내용과, 모두가 큰 원을 세우자는 총발대원, 모든 하늘과 신선을 받들자는 봉위천도 예불, 제 8권에는 아수라, 용왕 등 다양한 경계의 신들이 부처님을 신봉하는 발원인 봉위 아수라도 일체 선신예불, 봉위용왕예불, 봉위 마왕예불 봉위 부모예불, 봉위 과거부모예불등이 이어지고 제 9권에는 천상과 수라, 인간과 지옥 아귀 축생의 육도 중생을 위한 예불과 발원, 그리고 마지막 제 10권에는 보살회향법과 부처님과 함께 불국토에 나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해달라는 발원인 촉루로 끝맺고 있습니다.


참회수행을 통해 참회란 자신의 허물을 드러내고 다시는 범하지 않으며 새로이 거듭 태어나겠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진정한 참회”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믿음과 감동을 주고 삶의 새로운 힘을 주며 거듭 태어날 수 있는 의지와 용기를 줄 수 있는 기도법은 바로 참회인 것이며 부처님께서는 이참과 사참의 길을 제시해주셨기에,현재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삶의 온갖 뒤안길을 되돌아볼때, 즐거움 보다는 괴로움이, 행복보다는 어려움이 더 많음을 인과의 도리를 통해 절실히 인정하고 이참과 사참으로 알게 모르게 다겁생래에 지어온 자신의 허물들에 대한 참회발로를 하고서 그런 다음에 말과 몸으로 사죄하고 참회하는 것을 진정한 참회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참과 사참이 동시적으로 실천될 때 자기 자신의 삶은 한층 업그레이드 될 것이고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이 사회도 도덕성을 성취하고 불자로서의 진정한 깨달음도 얻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실 때, 아난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대들은 다 함께 깊이 새겨들어라.

그대들이 의지할 수행법은 주로 사념처관(四念處觀)을 닦도록 하여라.

그것은 첫째로 신념처(身念處)로서, 이 육신은 살과 뼈와 피와 고름 등 여러 더러운 것들이 인연 따라 잠시 모인 것이니, 부정(不淨)하다고 관찰하고, 둘째는 수념처(受念處)로서, 중생들이 낙(樂)이라고 여기고 집착하는 재물이나 음행이나 권속이나 권세 등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고, 필경 고통의 결과를 맺는 근원으로 관찰하고, 셋째는 심념처(心念處)로서, 인간의 마음은 잠시도 쉬지않고 항시 전변(轉變)하여 마지않는 무상(無常)한 것이라고 관찰하며, 넷째는 법념처(法念處)로서, 일체 모든 것은 허망하고 무상하기 때문에 고정된 실체(實體)가 없고 자재(自在)로운 것도 아니니, 나(我)라고 할 것이 없는 무아(無我)이며, 나의 소유란 아예 없는 무소유(無所有)임을 관찰하도록 하여라”  하셨습니다.


사실 이 세상에 소유권이란 없습니다.

모두가 살아 있는 동안 “내 것이다” 하고 살지만 죽을 때 가져가지 못하는 일시 점유권이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가 물질과 돈이 없으면 못 살 것 같지만, 사실은 한시도 쉬지 않고 들여 마시는 이 공기는 누구의 소유도 아니고,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 그냥 공짜로 주는 것이고, 그냥 주는 물을 오염시켜가며 스스로 자멸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우리 인간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세존께서 남기신 사념처관을 새겨들어 일상에서 부질없는 것들에 대한 애착과 집착으로부터 해방되야 할 것이고 “나다, 내 것이다”라는 욕구로부터 자유로워 지셔야 할 것입니다.


성불하십시오.

생명이 있고 정식이 있는 모든 중생은 업보중생인지라 태어남도 윤회를 벗어나지 못했고 떠나감도 윤회를 빗겨가지 못하기에 우리네 살아가는 것은 인연과보의 싸이클 속에서 살아갈 뿐이지만 우리가 부처의 경지에 간다면 아미타경대로 윤회를 벗어나버린 극락세계에 갈 것입니다.


지금 밖에는 온갖 새들이 지저귀고 있습니다만, 아미타경을 잠시 보면, “그리고 사리불이여, 그 나라에는 항상 갖가지 기묘한 빛깔이 섞인 여러 새들이 있는데, 백학과 공작새와 앵무새, 사리새, 가릉빈가, 공명새 등 모든 새들이 밤낮 여섯 차례로 화창하고 우아한 소리로 지저귀는데, 그 소리는 오근과 오력, 칠보리분, 팔정도 등 이러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연설하는 소리이며 그 나라 중생들이 이새들의 지저귀는 소리를 듣고는 모두가 한결같이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스님네를 생각하게 되느니라.


사리불이여, 그대는 혹시라도 이 새들이 정말로 죄의 업보로 태어난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하지 말아라.

왜냐하면 저 부처님세계에는 삼악도가 없기 때문이니라.

사리불이여, 그 부처님 나라에는 아예 악도라는 이름조차도 없거늘 하물며 어떻게 축생이 있겠는가,

이 모든 새들은 다 아미타 부처님께서 법음을 널리 펴시기 위하여 무량공덕의 신통변화로 만든 것이니라.


사리불이여, 저 극락세계에서는 잔잔한 바람이 불어오면 모든 보배나무와 보배그물에서 미묘한 소리가 울려 퍼지는데 마치 백천가지의 온갖 악기로 동시에 연주하는 것 같아서 이 소리를 듣는 자도 모두가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스님네를 생각하는 마음이 저절로 일어나느니라.


사리불이여, 그 부처님세계는 이와 같은 공덕으로 장엄을 하였느니라.” 했습니다.


우리는 이 극락세계를 죽어야만 가는 세계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갈 왕자(往) 태어날 생(生)자, 해서 왕생정토로 알고 있지만, 정토삼부경 중에서 대경으로 불리우는 무량수경보다도 소경으로 부르는 아미타경 속에 서쪽으로 십만억 불토를 가면 극락세계가 있다는 거리 공간개념이 있을 뿐이지 시간개념은 없단 말씀입니다.


서쪽으로의 십만억이라는 거리공간의 개념은 다름아니라 우리가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지어온 열가지의 악업들이 점차 소멸되어 악업이 선업으로 바뀔 때마다 우리는 극락세계라는 정토가 일만억씩 줄어들어 결국에는 있는 그 자리가 극락이 되는 머무를 주자(住) 곳 처(處)자 주처정토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어서 가는 왕생정토가 아니라 살아서 일상이 주처정토가 됐을 때 우리는 밖에서 지저귀는 새소리와 온갖 꽃들이 “이 모든 새들은 다 아미타 부처님께서 법음을 널리 펴시기 위하여 무량공덕의 신통변화로 만든 것이니라.

사리불이여, 그 부처님세계는 이와 같은 공덕으로 장엄을 하였느니라.” 했습니다.” 하는 대목이 가슴에 와 닿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머무르는 이 세상이 사실은 부처님의 공덕으로 장엄된 세상일지라도 저부터도 어디를 갈라치면 차를 운전해야하고 후원에서는 프레온 가스가 있는 냉장고를 돌리고 세제를 쓰는 문명의 이기를 최대한 누림으로 우리와 더불어 미래를 살아가야할 어린세대들이 겪어야 할 지구촌의 미래가 걱정되는 현실입니다.


한자에 기우(杞憂)라는 말이 있는데 쓸데없는 근심걱정 하는 것을 지적하는 단어인데 이 말은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였던 열자가 쓴 천서편(天瑞篇)에 나오는 말로, “기(杞)나라 사람이 하늘이 내려앉지나 않나” 하고 걱정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입니다만,

이제 우리는 기우가 현실로 나타나는 일들이 비일비재한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아황산가스들로 인해 지구의 오존층이 파괴되면서 남극의 빙하가 녹아내리고 회주스님이 가계신다는 킬리만자로의 만년설이 앞으로 20~ 25년이 지나면 다 녹아 없어진다고 합니다.


지구의 온난화로 인한 자연재해들이 서서히 지구촌을 종말로 덮어가고 있으니 지금 나이 드신 분들은 살만큼 살아가니 그런 재앙과는 별 상관없다고 여기실지 모르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후손들의 미래를 생각해본다면 끔찍한 생각이 드실 것입니다.


저 삼풍백화점 사건이나 성수대교 붕괴사건처럼 우리는 이렇게 불확실한 현실 속에서 온갖 위험에 노출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저런 나약한 인간의 잠재의식 속에서 절대전능하다는 신이 탄생되게 되었고, 스스로 만든 신에 종속되어 종이라는 표현을 거침없이 사용하고들 있습니다.

인간의 지능이 발달하면서 물물교환이 불편하여 필요에 의해 돈을 만들고선 이제는 돈의 노예가 되어 살인도 불사하고 부모자식 간에도 부부간에도 등 돌리고 원수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이 현대인들의 자화상일 것입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옷깃을 잡고 그림자 따라 내 발자국을 따라 밟는다고 나와 같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해왔던 것처럼 팔정도와 육바라밀로 수행을 한다면 너희도 나와 같이 부처를 이룰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어느 종교의 교조가 일반인들에게 이렇게 큰 가능성을 주신 분이 계십니까?


서양종교로 말하면 우리는 참으로 하찮은 조물주의 피조물에 불과할 것입니다.

마치 찰흙 공예를 하는 조물주의 조물닥 거리는 손에 의해 만들어진 우리란 말입니다.


그런데 부처와 조사의 경지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우리가 익히 들어서 아는 “즉심시불, 심시즉불, 심외무법, 심불급중생 시 삼무차별” 하는 말들이 바로 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서양의 종교는 자기의 완전함과 무한한 가능성을 모른 채, 인간들 스스로 만든 돈신에 노예가 되어 살듯이 스스로 만든 “신”에 종속되어 스스로를 죄인이라 부르고 종이라 부르며 “오직 하나”라는 정신적인 편식증에 떨어져 살아가고들 있습니다.


이러한 편식증 환자들이 넘치는 이유는 자기 내면의 삶이 지극히 나약하기 때문에 그리고 인과는 무시한 채, 자기만이 구원받고 자신의 신구의 삼업은 모두 무시된 채, 믿기만하면 매달리기만 하면 구원된다는 참으로 어리석은 일부 이기적인 신앙관들이 이 시대를 환난으로 끌고 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세계 초강대국인 미국의 대통령이라는 부시의 발언은 이슬람 문화권과의 전쟁을 21세기의 종교전쟁으로 여기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는데,


여러분들도 가끔 경험을 하실 것입니다.

산에서 살다보니 등산을 오신 분들이 급하기는 하고 산중에 화장실은 없고 해서 똥을 한 무더기 싸놓고 간 자리를 지나다 우연히 볼라치면 산중의 똥파리들만이 아니라 저 아랫마을 쉬파리들까지 날라다니 것을 심심치 않게 보게 됩니다.


이처럼, 지구촌을 벗어난 또 다른 은하계에서 이 지구를 바라다보면 똥 무더기를 바쁘게 오가는 온갖 파리들과 하등 다르게 뵈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수족관의 고기들을 보면서 저 좁은데서 그래도 유유자적하게 헤엄친다고 할지 모르지만, 자유롭다는 우리도 자기 사는 데를 벗어나기 힘들고 대한민국을 벗어나기 힘들고, 지구촌을 벗어나기 힘들고 세월을 벗어나기는 더욱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게 잘 낫다는 우리 중생들이 살아가는 자화상입니다.


한 치 앞도 모른 채, 오늘 밤 자고나면 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떤 누구와 어깨를 부딪칠지도 모른 채, 심지어 밤 사이 일도 모르는 우리들이 온갖 교만을 떨고, 거드름을 피운다는 자체가 잠깐 삶을 관조하는 지혜로운 사람의 눈에는 그야말로 한편의 희극에 불과할 것입니다. 


사람중생만이 아니라 사생과 육도를 돌고 도는 모든 생류와 육도중생은 모두가 업보중생인지라 우리는 진지하게 그리고 겸허하게 불생불멸이요, 불구부정이자, 부증불감인  나라는 주인공이 다겁생을 온갖 모습으로 온갖 인과 연을 지어온 그 자체를 통감하고 오늘이 있다면 어제와 내일이 있고 금년이 있다면 작년과 내년이 있기에 금생이 있다면 어찌 과거생과 미래 생이 없을 것인가에 대한 자각을 통해 자신의 분별없는 미혹함을 인정하고 겸허하게 우리는 참회하면서 수없는 과거생으로부터 금생에 이르기까지 이어져온 신구의 삼업으로 인한 업보중생의 업을 인정하고 참회하면서 부처라는 집을 짓기 위해서는 참회의 땅에 토목공사부터 해야 하듯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팔정도와 육바라밀을 수행해가며 금생의 노후뿐만이 아니라 또 다른 모습 또 다른 이름을 지닐 다음 생까지도 우리는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이참과 사참이라는 참회기도인 것입니다.    


이참은 진리와 하나가 되거나 죄업의 실상이 무엇인가를 깨달아 참회를 하는 것이고, 사참은 과거와 현재에 지은 죄업과 미래에 짓게 될 죄업을 몸과 말과 마음을 쏟아 참회하는 것을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참회한다고 하는 것은 이 사참을 말하는 것입니다.


참회의 방법으로는 끝없는 절과 간절한 신심의 염불, 지극한 경전독송, 일자일배, 삼배의 사경 등의 수행법을 통해 참회하는 방법과 참회법(懺悔法)을 기록한 의식문을 읽으며 그 절차에 따라 참회하는 것이 있습니다.


전번 법회 때 말씀드린 대로 자비참법의 기원은 5~7세기 경, 중국에서 모든 경전의 설(說)을 기초로 해 그에 어긋나는 죄에 대해 참회하는 것이 널리 행해지고 이를 의식으로 발전시킨 양 나라 무제의 “자비도량참법”북위의 태자를 위해 만들어진 “금광명최승왕참의”도 있고, 천태종을 개창한 중국 수나라 지의스님이 제정한 “법화삼매참의” “방등참법” “청관세음참법” 등이 있고 원각경, 약사경, 지장경등에 의한 참법을 비롯해 “보현행원 참법”, “약사참법” 등 수많은 참법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참회법에 따른 참회기도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뉘우치고, 다시 같은 행위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참과 회의 발원과 더불어 참회 이후에 “선업 짓겠다는 발원”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며칠 전, 아침에 어느 거사분이 오셔서 자신의 기도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에 대한 점검을 받고 싶어 왔노라는 청에 잠시 말씀을 나누는 도중에 제가 보기에 열심히 기도는 하고 계시는데 거기에 한 가지가 빠져 있었습니다.


우선 다급한 당신의 주변 문제를 “해결해주십사” 하는 간절한 기도는 있는데, 해결되고 나서는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발원이 없더라는” 말입니다.


절에 가면 다들, “성불합시다, 동 성불합시다.” 하는데 성불한 다음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자기발원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해인율원 율원장 혜능 스님은 “진정한 참회는 진리에 대한 자각을 통해 작은 허물이라도 부끄러워 할 줄 아는 참괴심(慙愧心)을 바탕으로 자각하고 이를 통해 다시는 어기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는 것”이라며 “이는 기독교 등 다른 종교에서처럼 신에 의지해 잘못을 뉘우치는 타율적인 참회와는 엄격히 다른 것”이라고 강조하고 탐진치 삼독의 세 가지 독소로 인해 생긴 나쁜 업을 없애는 것이 바로 참회라고 합니다만,

참회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단순히 형식적인 뉘우침 보다 다시는 계율을 어기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우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참회를 통한 자기 발원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참회는 모든 신행과 수행의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인 프란츠 카프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진정한 길은 공중 드높은 어딘가로 나 있는 것이 아니라, 땅 바닥에 바싹 밀착해 나있고 오히려 수없이 걸려 넘어지게끔 되어 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닥쳐오는 온갖 시름과 번뇌에 휩싸이지 마시고 번뇌 즉 보리라, 이것들을 통해 자기의 교만함과 어리석음을 성찰하는 지혜를 찾으시기 바랍니다.

성불하십시오.

 


세월은 지는 노을처럼 붉기만 하다..
  
 
-장시하- 

 

 

 


세월은 지는 노을처럼 붉기만 하다.

과거는 언제나 외길

현재는 지체없는 선택이란 굴레일 뿐

내일은 언제나 양갈래 길일 뿐...

 

 

  

애태우며 사랑했던 날들도

되돌아보면 그저 이러한 추억일 뿐

눈물로 헤어지던 날 들도

작은 미소로 남는 것...

 

 

 

작은것에 기쁨을 느끼는 것을

깨달을 때 삶은 빛나는 것...

 

*

 

 
 
 
*
 
남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아파하고
남의 기쁨에 먼저 웃을 수 있는것
 
 
  
삶의 뒤안길에 잠시 바라 본 세월이
노을처럼 붉기만 한 것은
세월이 이젠 당신을 감싸 안는 것...
 
 
 
그때 노을에 물든 세월을 바라보라
붉게 물든 노을에 안긴 당신의 모습을
 
세월은 지는 노을 처럼 붉기만 하다.
 

*
 
 
 
 
 
걸어온 길, 걸어가야 할
어차피 노을 빛 외길인 것을..!
 
파아란 하늘, 작은 소망
내일은.. 아름다운 노을 빛 이어라.
 
- 초 립 -



생명의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