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종이 발생하게 된 동기와 배경

2010. 1. 28. 21:1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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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한 생각이 자기 스스로를 행복하게도 할 수 있고, 자신이 가장 불행하고 비참한 듯이 느껴지게도 만드는 것이니 이 한 생각의 오묘함을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다면 “내 마음 내키는 대로”의 주인공이 되실 것입니다.


오늘부터 4월 한 달 동안 해드릴 3조 승찬스님께서 남겨주신 신심명 법문에 앞서 인도에서 중국으로 참선법(參禪法)을 처음 들고 왔다는 초조(初祖)달마(達磨)대사, 선맥을 이어받은 2조 혜가(慧可), 3조 승찬(僧燦), 4조 도신(道信), 5조 홍인(弘忍), 그리고 선의 전성기를 꽃 피웠던 6조 혜능(慧能)대사, 동북아시아 불교의 역사에서 조사(祖師)선맥을 일궈낸 거대한 산맥들로 지금의 한반도와 일본 열도까지 흘러간 선불교의 법맥의 뿌리이기도한,초조 달마대사에서부터 6조 혜능대사까지의 선맥을 말씀드리면서 안심법문을 통해 승찬스님께서 팔만대장경보다 더 위대하신 법을 남길 수밖에 없었던 근본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봉우리만 72개나 되는 河北(하북)성의 嵩山(숭산)에서 1500여 년 전에달마대사는 며칠째 수행을 하다가 배가 고프면 산 아래 소림사라는 절에 내려가 밥을 먹기도 했다는 숭산의 소실봉이라는 봉우리 정상 바로 밑에 작은 달마굴이라는 바위동굴이 있는데,어른 서너 명이 앉을 만한 좁은 공간. 달마대사는 여기서 9년간 면벽 수행을 했다고 합니다.


달마대사가 보낸 9년의 치열함은 산 아래 소림사에 전설처럼 남아 있는데, 유리관 속에 보관된 달마대사가 마주 봤다는 동굴의 벽면 바윗돌에는 달마의 얼굴과 수염, 좌선하는 모습의 윤곽이 보이는데, 오랜 세월, 꿈쩍도 않던 달마의 그림자가 바위에 물든 것이라고 합니다.

(포르투갈 중부 산타렘 주 빌라노바데오렘에 있는 파티마라는 마을에서 로사리오 성모마리아가 나타났다는 천주교의 파티마의 비밀과 대등)


달마대사는 척박한 중국 땅에서 선의 싹을 틔우려면 제대로 된 제자가 필요했기 때문에 숱한 이들이 달마대사를 찾았으나 만나주지 않고 9년 동안의 면벽참선을 하면서 인연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느 해 겨울, 유교와 도교에 정통했으나, 삶의 밑바닥에 깔린 불안은 어쩌지 못한 마흔 살이나 된 신광이란 스님이 가파른 산을 타고 달마굴을 찾아와 제자가 되기를 청했습니다.


달마대사가 거들떠보지도 않자, 신광은 눈이 펄펄 날리는 동굴 밖에서 꼬박 사흘 밤을 샜고, 그의 열성에 마음이 움직인 달마대사가 그에게 묻습니다. “무엇을 구하느냐?” “뭇 중생을 건져주십시오.”

“만약 하늘에 붉은 눈이 내리면 법을 주겠다.”하고 거절하자, 신광은 칼을 뽑아 자신의 왼팔을 잘라버립니다.

사방으로 피가 튀고, 주위의 눈밭이 붉게 물들자, 이에 달마대사는 “부처나 보살은 몸으로 몸을 삼지 않는다. 목숨으로 목숨을 삼지 않으니 법을 구할만하다.” 하고 비로소 신광을 제자로 받아들입니다.    바로 2조 혜가대사입니다.

그래서 소림사 안에는 입설정(立雪亭)이 세워져 있다고 합니다.

눈 속에 서있던 혜가선사를 기리는 곳으로, 안에는 달마대사 곁에 소매사이로 팔을 넣은 혜가대사의 입상이 있는데 혜가대사의 왼팔은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스승과 함께 살던 혜가는 커다란 가르침이 있기를 기대하였으나 매일 매일이 똑같은 생활의 반복이 되자, 혜가는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스승님 “마음이 불안합니다.” 그래? “불안한 마음을 내놓아라.”

“찾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네 불안한 마음이 모두 없어졌느니라. 너는 보는가.” 이것이 바로 달마대사의 유명한 안심(安心)법문입니다.


하룻밤에 열두 번도 더 짓고 부수는 내 안의 숱한 마음망상이 본래 없는 것임을 알라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마음망상이 없어진 자리, 거길 보라는 뜻입니다.

빈 채로 차있고, 찬 채로 비어있는 나의 본질, 그 삼라만상의 바탕으로 들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달마굴의 맞은편 산에 혜가선사가 팔을 치료하고 머물렀다는 이조암(二祖庵)이 있다고 합니다.


이제 4월 한달 간 법문을 전해드릴 근본인 신심명의 주인공이신 3조 승찬대사의 이야기입니다.


중국의 배꼽이라는 우한(武漢)의 삼조사(三祖寺)에는 3조 승찬대사가 14년 간 머물던 동굴이 있는데, 출가 전 풍질(한센병)에 걸려 괴로워하던 승찬대사가 혜가선사를 찾게 됩니다.


어려서부터 이 거리 저 거리를 떠돌며 밥을 굶고 사람들로부터 멸시 받는 처참한 생활을 해 오던 바로 그 분이 사십대 중반에 혜가 스님을 만나 부처님의 정통 법맥을, 병든 몸 그대로 이어 받은 것입니다.


승찬 스님은 서기 600년경의 사람인데 지금부터 1400여 년 전에 사람같지 않은 사람의 형상을 한 이에 대한 대우가 어땠겠습니까.

그런 처참한 인생을 살며 스스로 자책하기를 “분명 큰 죄를 지어 이런 삶을 사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고는 세상에 큰 도인이라 알려져 있는 혜가스님을 찾아가 “나는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처참한 과보를 받고 삽니까. 도사께서 나의 죄를 참회 시켜 주셔서 병은 낫지 않아도 좋으니 죄만이라도 벗고 싶습니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러자 혜가 스님은 “그대가 천만근의 무게로 느끼고 있다는 그 죄를 드러내놓기만 하면 내가 참회시켜 주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승찬 스님은 그토록 무겁게 느껴지던 자신의 ‘죄업’을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었고 그런 승찬 스님에게 혜가 스님은 “그대가 스스로 찾아도 진정 찾을 수 없는 것이라면 그대의 죄업은 이미 다 참회가 된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혜가 스님의 이 말씀에 승찬 스님은 눈이 훤하게 밝아졌던 것입니다.


“그동안 죄업이라는 환상을 한 짐 짊어지고, 그것을 천만근의 무게로 지고 살았는데 알고 보니 환상이었습니다.

내가 수고로이 왜 그것을 찾으려고 했던가.” 승찬 스님은 그 자리에서 확연히 깨달았습니다.


그대는 이제 불법승, 삼보(三寶)에 의지하여 안주하고 살아가라.” 하자,

“지금 화상(和尙)을 뵈옵고 승보(僧寶)는 알았으나 어떤 것을 불보(佛寶), 법보(法寶)라 합니까?”


“마음이 부처며 마음이 법이니라. 법과 부처는 둘이 아니요, 승보도 또한 그러하니 그대는 알겠는가?”


“오늘에야 비로소 죄의 성품은 마음 안에도 밖에도 중간에도 있지 않음을 알았으며 마음이 그러하듯 불보와 법보도 둘이 아닌 줄 알았습니다.”

하자, 이에 혜가대사께서 그가 법기(法器)인 줄 아시고 “너는 나의 보배이다. 구슬 찬(璨)자를 써서 승찬(僧璨)이라 하라.”

그해 3월 18일 복광사(福光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그로부터 병이 차츰 나아져서 2년 동안 혜가스님을 시봉했다고 합니다.


전번 주에 “업보차별경”에서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대부분 “죄가 많아 고통을 받는다.”라고 다들 그렇게 생각합니다.

몹쓸 병으로 인해 일종의 원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승찬대사는 죄도 없고, 그걸 담는 마음도 본래 없음을 깨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조사선의 “공” 도리인 것입니다.

중생계를 벗어난 본질의 세계를 깨치신 것입니다.

( 전백장과 후백장의 불매인과와 불낙인과 이야기 )


승찬대사는 평생을 은거하여 지내다가 나중에 어린 나이의 도신선사(道信禪師)를 만나 법을 깨우쳐 주고 뒤에 구족계를 받게 한 후 법을 전하면서 “나에게서 법을 받았다고 절대로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셨다고 합니다.


돌아가실 때에는 법회를 열던 큰 나무 밑에서 합장한 채 서서 돌아가셨는데, 그때 사람들이 묘를 써서 스님을 모셨는데, 뒤에 이상(李常)이라는 사람이 신회선사(神會禪師)에게 물어서 산곡사(山谷寺)에 승찬대사의 묘가 있음을 알고는 가서 화장하여 사리(舍利) 삼백 과를 얻었다고 합니다.


승찬스님은 본래 문둥병을 앓았기 때문에 문둥병이 나은 후에도 머리카락이 하나도 나지 않았으므로, 대머리의 붉은 살뿐이라는 뜻으로 사람들은 스님을 적두찬(赤頭璨)이란 별명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우리가 공부하게 될 신심명에 있어서 신(信)은, 곧 믿음이 보통의 신(信), 믿음이 아니라 신, 해, 오, 증(信解悟證) 전체를 통하는 믿을 신(信)인 것입니다. 


글 전체는 4언절구(四言絶句)로 해서 146구 584자로 되어 있는 간단한 글이지만, 팔만대장경의 심오한 불법도리와 천칠백 공안의 격외도리(格外道理)전체가 이 글 속에 포함되어 있다고 모두들 평(評)하고 있습니다.


중국에 불법이 전해진 이후로 “문장으로서는 최고의 문장이라고 학자들이 격찬할 뿐만 아니라 3조 승찬대사의 신심명 같은 문장은 하나일 뿐, 둘은 없다고들 평합니다.

신심명의 근본 골자가 무엇인가 하면 글 전체가 모두 양변을 여읜 중도(中道)에 입각해 있다는 것입니다.


글 전체를 자세히 살펴보면 대대(對對)를 40대(四十對)로 갖추어 설명하고 있는데, 여기서 대대(對對)란 곧 미워함과 사랑함(憎愛). 거슬림과 다름(逆順), 옳고 그름(是非) 등등 일상생활에서 나타나고 있는 중생심의 상대개념, 즉 변견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심명은 간단한 법문이지만 대대(對對)를 떠난 중도법을 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심명은 일관된 논리로서 선(禪)이나 교(敎)를 막론하고 불교 전체를 통하여 양변을 여읜 중도(中道)가 불교의 근본 사상임을 표현한 총괄적인 중도총론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자, 이제 4조 도신스님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1400년 전, 어린 아이가 삼조 승찬대사(511~606년)를 찾아왔습니다.

“해탈할 수 있는 법을 주십시오.” 하자 “누가 너를 묶었더냐.”

“아무도 묶은 이가 없습니다.” “그럼 무슨 해탈을 구하는가.”하자,말끝에 아이는 느껴 깨친바가 있자, 승찬 대사를 9년간 모시게 됩니다.


결국 스승의 인가를 받아 달마로부터 내려오는 가사와 법을 받았는데, 그가 바로 4조 도신대사(580~651년)입니다.

( 이 대목을 잘들 들으세요)

나를 묶는 이는 나밖에 없으며, 그 나도 본래 없는 허상임을 깨친 것입니다. 결국 묶는 이도, 묶이는 이도 없음을 깨친 것입니다.


사찰 옆에 높은 언덕에는 4조 도신대사가 5조 홍인대사에게 가사와 법을 전한 곳이라는 ‘전법동(傳法洞)’이 있다고 합니다.

오조사 앞에는 오래된 돌다리에 마음을 내려놓고 다리를 건너란 뜻의 “방하착”이라 씌여져 있다고 합니다.(영취산 설법 시 수행자의 꽃다발)


오조 홍인대사(602~675년)에 얽힌 일화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탁발을 나섰던 한 스님이 마을의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네 성(姓)씨가 무엇이냐?” “성은 있지만, 일정치 않습니다.” 그래?“무슨 성인가?” “불성(佛性)입니다.” “그럼 성씨가 있네.” “이 불성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닙니다.” 하자 “고놈, 기특하다” 하고 그 스님은 절로 돌아가 대중스님들에게 말을 하자, 이 얘길 들은 도신대사가 아이의 어머니를 찾아가 아이를 출가시키게 됩니다.  그 아이가 바로 5조 홍인대사입니다.


홍인대사의 제자는 700여 명이었는데, 그중 신수화상이 으뜸이었습니다.

온갖 학문에도 능통하고, 인물도 좋았다고 합니다.

나중에 측천무후의 국사가 되었습니다만, 자신이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음을 안 홍인대사는 어느 날 대중들에게 “복도의 벽에다 게송을 써라. 그걸로 법맥을 이을 수제자를 가리겠다고 했습니다.”


신수화상은 밤에 벽에다 게송을 쓰기를, 신시보리수(身是菩提樹)요, 심여명경대(心如明鏡臺)라. 시시근불식(時時勤拂拭)하여 불사야진애(勿使惹塵埃)하라. 풀어본다면, 몸은 이 보리의 나무요, 마음은 밝은 거울이라.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티끌이 끼지 않도록 하라. 하는 뜻이었습니다.


후원에서 일을 하던 혜능은 대중들이 모여 웅성거리자 대중하나를 붙잡고 물으니 신수의 게송을 읽어주자, 이를 들은 젊은 혜능(628~713년)이 고개를 저었습니다.

“좋기는 하나 깨치진 못했소.”하자, 사람들이 비웃었습니다.

혜능은 글을 읽을 줄도 모르는 일자무식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밤에 혜능은 동자를 데리고 복도로 가서 자신의 게송을 써주기를 부탁하였는데, “보리본무수(菩提本無樹)요, 명경역비대(明鏡亦非臺)라.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니 하처진애(何處塵埃)라.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 또한 받침대 없네. 부처의 성품은 본래 깨끗하거니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가 있으리오.”

지금도 오조사의 복도에는 동자를 데리고 글을 쓰는 혜능과 신수화상의 모습이 글과 그림으로 걸려 있다고 합니다.

나이로 보나, 인물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혜능은 신수화상의 상대가 아닌데다, 혜능은 당시 스님이 아닌 행자신분이었습니다.

그러나 홍인대사는 혜능을 택했다.


육조혜능 이후에 중국에는 숱한 선사들이 출현하게 되고, 달마대사의 혜가라는 씨앗 한 톨이 비로소 중국 대륙을 휩쓸며 선종의 꽃을 피우게 되는 것입니다.

혜능선사가 머물렀던 광주(廣州) 조계산의 남화선사에는 글을 몰랐던 혜능선사의 가르침을 기록한 ‘육조단경”이 이곳에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남화선사에는 각별한 모습이 하나 있는데, 부처 곁의 나한상은 좌우 9명씩, 모두 18나한이 있게 되는데, 남화선사에만 20명의 나한상이 서있다고 합니다.

큰 불이 났을 때 '육조단경'을 구하려고 책을 안고 목숨을 버린 두 스님이 있었는데 그들이 지금은 나한상으로 서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혜능스님(638~713)의 속성은 노(盧)씨, 고아동성에서 정관 12년(서기 638년) 2월 8일에 태어났다고 합니다.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스무살까지 홀어머니를 모시고 신주용산에서 살았는데, 집안 살림이 어려워 땔나무를 팔고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금강경을 독송하는데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라는 구절의 독경하는 소리를 듣고 심지가 열리어 금강경 읽는 스님에게 무슨 경인지 물었습니다.

황매산의 홍인대사에게 받은 경전임도 알게 되자, 자신이 떠나더라도 어머님께서 지내시기에 불편함이 없도록 일년동안 부지런히 살림을 불리우고는 스님의 나이 스물네살 때에 오조홍인 대사를 찾아갑니다.


그때 홍인대사는 “너는 어디 사는 사람이며 무엇을 구하려 왔느냐”하고 묻자, “제자는 영남사람으로 멀리 온 것은 스님을 찾아뵙고 불법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자, “너는 영남사람이라 변방의 오랑캐는 불법을 구할 수 없다.” 하자, “사람에는 남북이 있으나 불성에는 어찌 남북이 있습니까?”하고 대답하자, 홍인대사는 법기임을 알고 문하에 있되 후원에서 디딜방아를 찢도록 했습니다.


혜능선사의 고향 신흥현(新興縣)에 있는 국은사는 혜능선사가 입적한 곳이기도 한데, 절 입구에는 '勅賜國恩寺(칙사국은사)'란 현판이 붙어 있는데, 스스로 “생불”이라 칭했던 당나라 측천무후가 내린 글씨로 측천무후의 국사가 신수화상이었는데, 측천무후가 “국사보다 뛰어난 사람이 누구입니까?"라고 묻자 신수화상은 ”혜능선사“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 측천무후가 신수대사를 국사로 정하게된 사연 )


측천무후는 세 번이나 혜능선사를 불렀으나 칭병을 이유로 거절당하자,결국 "대사가 못 오면 가사라도 가져오라"고 명을 내렸다고 합니다.


어느 날 한 비구니스님이 혜능대사에게 묻기를, “글도 모르면서 어찌 그대가 진리를 안단 말이오?”하자, 혜능은 한 마디로 “진리는 하늘의 달과 같다. 문자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달을 보는데 손가락을 거칠 필요는 없다.” 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선종의 유명한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말이 생기게 된 유래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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