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종과 기신론학자와의 논쟁-불교신문에서

2010. 1. 29. 23:29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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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종과 기신론학자와의 논쟁-불교신문에서

불교신문 2월7일자 ‘수행법’ 글을 읽고

번뇌 망상 제거해야 ‘본래 부처’

깨달음으로 가는 수행은 중생자리서 출발

중생즉불은 차안 떠나 피안에서 보는 것

 

지난 2월7일자 불교신문 7면 간화선 관련 기사에서 “간화선과 다른 수행법과의 결정적인 차이점을 들라면 간화선은 내가 본래 부처의 자리에서 출발한다는 것이고 다른 수행법은 중생의 자리에서 출발하여 부처의 자리로 들어간다는데 있다”고 그 차이점을 부각시켰다.

 

 

 

이어서 “간화선의 입장에서는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수행할 필요가 전혀 없다’…”라고 전제하면서도, “다만 우리가 분별과 망상, 조작과 시비 때문에…이를 걷어내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이다”라고 하여 논리의 모순을 드러내고, “하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간화선은 부처의 자리에서 수행한다”고 하여 또다시 전후가 맞지 않는 논리의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불교가 설하는 ‘본래가 부처’라는 말은 중생즉블(衆生卽佛)의 의미이지만 ‘중생이 중생상태 그대로 바로 부처’라는 의미가 아니라, 위 기사에서 말한대로 ‘분별과 망상, 조작과 시비 때문에’ 중생이지만, 수행을 통하여 이러한 번뇌를 제거시켜야 본래의 부처가 나타난다는 의미이다.

 

 

아마도 이 기사는 수행을 통하여 부처가 만들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있는 제자리의 부처가 나타난다는 것을 말하려한 것 같다.

 

 

 

부처는 수행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분별과 망상, 조작과 시비를 제거하면, 본래의 정각자리가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금강경〉에서는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등 사상(四相)의 번뇌(생각)를 차단하면 바로 부처의 자리에 이른다고 설한다.

 

 

그러므로 ‘수행할 필요가 전혀 없다’거나 지금 그대로가 부처라는 말을 함부로 사용하여 범부들을 오도해서는 안 된다. 어느 수행이든 본래 간직하고 있는 부처의 자리에 돌아가기 위하여 중생의 자리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기신론은 위의 기사와 같은 중생즉불(衆生卽佛)의 논리를 “일체 중생은 본래 상주(常住)하여, 열반에 들고 있어, 보리(菩提)의 법은 닦을 수 있는 상이 아니며, 만들어내는 상도 아니며, 끝끝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大正藏) 라고 설하여 중생이 본래부터 부처이고 수행으로 얻는 것이 아님을 설하고 있다.

 

 

이 논리는 부처의 자리가 수행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본래 움직임 없이 있던 부처의 자리가 수행으로 나타난다는 의미이다.

 

 

 

 

〈화엄경〉의 교리를 요약한 ‘법성게’에서는 진성심심극미묘(眞性甚深極微妙)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을 설하여, 우리 중생의 시초가 진여로부터 연(緣) 따라 이루어지고, 수행을 통하여 마침내 돌아간 자리가 본래 움직임 없이 있던 제자리의 부처라고 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을 설하고 있다.

 

 

 

또한 이 기사에서는 ‘자기는 원래 구원되어 있고, 원래 부처이므로 극락과 천당은 꿈속의 잠꼬대”라고 성철스님의 말을 인용하고, ‘누구나 지금 그대로가 본래 부처의 모습’이라고 주장하여 우리가 바로 부처(衆生卽佛)임을 말하고 있으나, 불교가 설하는 ‘본래가 부처’라는 말은 ‘중생이 중생상태 그대로 바로 부처’라는 의미가 아니라, 현상의 세계에서는 ‘분별과 망상, 조작과 시비 때문에’ 바로 중생인 것이므로, 그러한 번뇌 망상이 수행을 통하여 제거된 상태에 이르러야 본래의 부처자리가 나타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증생즉불의 의미는 피안(彼岸)의 세계에서 보는 상즉(相卽)의 논리로서, 차안(此岸)의 세계에서는 중생은 중생이지 부처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자기는 원래 부처‘이다, ‘극락과 천당은 꿈속의 잠꼬대’라는 등 수행을 저해하는 논리를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중생즉불의 논리는 상즉의 논리로서 차안을 떠나 피안에서 보는 논리이다.

 

 

전 종 식

대승기신론연구회장

 

[불교신문 2306호/ 3월3일자]

2007-02-28 오전 11:30:06 / 송고

 

3월 3일자 전종식씨 글을 읽고

현실 활발하게 사는 길이 ‘조사선’

지금 괴롭고 아파 수행

본래 자리서 회광반조

 

불교신문 3월3일자에 게재된 ‘2월7일자 수행법을 읽고’에 대한 답변입니다.

전종식 선생님께서는 우리가 본래 부처라는 것은 믿음의 차원에서 그런 것이지 사실상 우리는 중생이기 때문에 수행한다면 중생의 자리에서 수행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습니다.

 

 

 

선에서 바라볼 때, 우리 모두는 깨닫고 있습니다. 완벽한 존재입니다. 그 활달자재하며 완성된 모습을 누구나 본래 구족하고 있습니다. 단지 착각과 망상, 시비와 조작이라는 분별심 때문에 스스로 부처임을 망각하고 중생놀음을 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부처 따로 중생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마음은 다 부처라는 것입니다.

 

 

이번 논쟁의 출발점은 우리가 수행한다고 할 때 그 수행하는 자리는 ‘중생의 자리냐, 부처의 자리냐’라는 것입니다.

 

 

피안 차안 나눌 것 없이, 지금 이 자리에서 부처의 생명이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냥 그대로 부처의 모습입니다. 자성(自性)이 하자는 대로 맡기면 됩니다. 달리 수행할 필요가 없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범부들은 이 밝게 빛나는 자성을 시비와 조작이라는 중생의 마음으로 가리고 있습니다. 이 시비 조작하는 마음을 멈추게 하는 것이 조사들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듣자마자 깨닫는 것을 언하변오(言下便悟)라고 합니다.

 

 

 

조사선에서는 이 말 끝에 깨닫는 언하변오를 강조합니다. 한 생각 돌리면 바로 부처의 자리입니다. 말끝에 깨닫지 못할 경우, 그것이 무슨 뜻일까 하고 의심해 들어갑니다. 바로 화두를 들고 내가 화두 자체가 되는 것입니다.

 

 

 

 

아울러 화두를 드는 것은 바로 이 몸이 부처의 모습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화두를 들고 좌선하고 앉아 있는 순간은 이미 부처가 부처의 행위를 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내가 중생의 자리에서 출발한다면, 차안에선 중생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출발한다면, 다음과 같은 사안이 발생될 수 있습니다.

 

 

내가 중생이라는 것을 인정하면 나는 언제나 중생일 수밖에 없으며 중생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또한 중생의 자리에서 부처의 자리로 간다고 하면, 그것은 점차로 하나하나, 단계별로 중생의 때를 벗겨나가기 때문에 지난한 시간이 소요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시시 때때로 때를 벗겨내는 것인데, 사실 혜능선사의 게송대로 닦을 틀(臺)마저 없는 것입니다.

 

 

 

또한 깨달음을 저 멀리 목표를 두고 닦아나간다면 깨달음을 대상화할 수밖에 없으며, 자칫하면 중생의 마음으로 채색된 깨달음을 얻기에, 그런 깨달음은 그야말로 착각심에서 벗어나기 힘듭니다. 그것은 조작적으로 부처의 모습을 만들어갈 우려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화두를 들고 수행하는 것은 깨닫지 못한 내가 깨닫기 위해 수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중생의 상태에서 출발하는 것은 아닌가 하며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현재 괴롭고 아프고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부처의 마음을 중생의 마음이 가리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부처의 마음이 어디로 간 것은 아닙니다.

 

 

 

또한 내가 본래 부처라는 사실을 믿고, 본래 내가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이 몸과 마음으로 분명하게 확인하기 위해서 출발하는 것과, 내가 중생이라고 여기고 출발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봅니다.

 

 

 

 

조사선은 내가 본래 부처의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을 조고각하, 회광반조하면서 부처의 자리에서 있는 그대로 보고, 진리에 계합하고, 공과 계합해서 현실을 활발발하게 살아나갈 것을 강조합니다.

 

 

 

 

저번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이 지점이지 다른 뜻이 아니었습니다.

 

고 명 석

포교연구실

선임연구원

 

[불교신문 2310호/ 3월17일자]

2007-03-13 오후 11:09:42 / 송고

 

 

기고 / 간화선에 관한 고명석씨 논평에 대한 재논평

고석진 선생의 간화선에 대한 2007. 3. 3.자 본인의 논평에 대하여 ‘본래 부처 자리에서 출발한다’는 논리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으나, 그 논리에 대하여 다시 논평합니다.

선생께서는 “선에서 바라볼 때, 우리 모두는 깨닫고 있다”고 전제하였습니다.
 
 
이것은 깨닫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대로의 본각(本覺)자리가 있다”고 해햐 맞습니다. 그래야 선생이 주장한 “완벽한 존재”로서 “누구나 본래 구족하고 있다”는 논리가 성립됩니다.
 
 
 
모두가 깨닫고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깨달으면 본래 구족하고 있는 본각자리와 합일하는 것입니다.
 
 
 
 
선생이 주장한대로 우리는 “착각과 망상, 시비와 조작이라는 분별심 때문에” 중생입니다. 그러한 번뇌 때문에 “스스로 부처임을 망각하고 중생놀음을 하고 있어” 그러한 사람을 이름 하여 중생이라 합니다.
 
 
 
 
“본래 부처요 그냥 그대로 다 갖추어져 있는데 여기에 연지 찍고 곤지 찍고 있는” 번뇌 때문에 중생입니다.
 
 
 
 
 
“차안이고 피안이고를 떠나 우리 존재의 실상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피안(彼岸)이 아닌 차안(此岸)에서 그러한 짓을 하고 있어 중생인 것입니다.
 
 
 
 
 
선생이 말한 대로 깨닫게 되면 “부처 따로 중생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마음 그대로가 다 부처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중생이 바로 부처라는 논리를 확실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선생의 논리는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의 논리를 무시한 논리입니다. 피안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마음속에 가장 가까이 있습니다. 한 말씀을 듣자마자 깨닫는 바로 그곳이 피안(彼岸)입니다.
 
 
 
 
 
그러나 피안(彼岸)에 들기 전에는 내 마음은 바로 차안(此岸)에 있습니다.
“착각과 망상, 시비와 조작이라는 분별심 때문에” 바로 차안입니다.

 
 
기신론과 여러 경론에서는 이 논리를 ‘바람과 파도와 바닷물’의 관계에서 설명합니다.
 
 
 
 
 
바람은 바로 우리의 무명(無明)이고 파도는 “착각과 망상, 시비와 조작이라는 분별심 때문에” 들끓는 우리 중생의 마음이며, 바닷물은 본래대로 움직임이 없는 부처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파도와 바닷물은 따로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무명의 바람이 멈추면 파도와 바닷물은 동일한 바닷물입니다. 바람이 멈추지 않으면 파도는 파도이고 물은 물입니다.
 
 
 
분별심이 있을 때는 중생은 중생이고 부처는 부처입니다. 분별심의 바람이 있으면 파도의 중생이고 분별의 바람이 멈추면 바로 고요한 무분별의 부처가 됩니다.
 
 
 
 
분별의 중생은 차안(此岸)의 것이며, 분별 바람이 멈추면 바로 피안(彼岸)의 부처가 됩니다. ‘중생이 바로 부처’라는 논리는 바로 이렇습니다. 그래서 중생즉불(衆生卽佛)은 피안의 논리입니다.
 
 
 
 
바람이 불고 있는 밖을 차안이라 하고, 바다 속을 피안이라 한다면, 바람이 불고 있는 바다 밖에서 보면 파도가 보이지만, 바다 속에서 보면 흔들리는 파도도 동일한 바닷물일 뿐입니다. 차안에서는 중생이지만 피안에서는 부처일 뿐입니다. ‘중생이 바로 부처’라는 논리는 바로 이렇습니다.

 
그러면 선생의 말대로 논쟁의 출발점인 우리가 수행한다고 할 때 그 수행하는 자리는 ‘중생의 자리냐, 부처의 자리냐’라는 것을 살펴봅시다.

 

 

선생께서는 “피안 차안 나눌 것 없이, 지금 이 자리에가···그냥 그대로 부처의 모습이고·· 달리 수행할 필요가 없다고”고 다시 모순된 논리를 드러내고 있으나, “범부들은 이 밝게 빛나는 자성을 시비와 조작이라는 중생의 마음으로 가리고 있다”, “이 시비와 조작하는 마음을 멈추게 하는 것이 조사들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맞는 말입니다. 한 생각 돌리면 바로 부처의 자리이지만, 시비 조작이 있으면 바로 중생의 자리입니다.

 

 

“깨닫지 못할 경우, 그것이 무슨 뜻일까 하고 의심해 들어가고 바로 화두를 들고 내가 화두 자체가 되는 것”이라고 한 그 화두가 바로 수행입니다. 깨닫지 못해 화두를 든 내가 바로 중생입니다. 그렇다고 부처의 자리가 어디로 달아난 것은 아닙니다. 부처의 자리를 갖고 있는 중생인 내가 화두를 들고, ‘한 미음 돌리면 바로 부처’라는 부처의 자리를 찾아 가는 것입니다.

 

선생께서는 “화두를 들고 좌선하고 앉아 있는 순간이 ‘이미 부처가 부처의 행위’를 하는 것”이라고 전제하고, “그러나 만약 내가 중생의 자리에서 출발한다면, 차안에선 중생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출발한다면, 나는 언제나 중생일 수밖에 없으며 중생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고 하셨는데. 나는 내가 중생이라고 인정해서 중생이 아니라 깨닫지 못해 화두를 들고 있기 때문에 중생입니다.

 

 

 

 

논쟁의 초점을 아셔야합니다. 이미 부처라면 왜 화두를 듭니까. 화두를 든 부처는 누구이고 찾아가는 부처는 누구입니까. 중생인 내가 화두를 들고 부처인 나를 찾는 것입니다. 파도치게 하던 이 중생 마음의 무명바람을 멈추어 고요한 본래의 바다 마음과 합일 하는 것이 수행의 완성입니다.

 

 

 

 

선생 말대로 한 생각 돌리면 그 중생심이 바로 부처의 마음”인 것입니다. 아상(我相)·인상(人相)·중생상(衆生相)·수자상(壽者相)을 항복시키면 불타가 됩니다.

 

 

선생께서는 지금 논쟁의 핵심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둘로 나누어 본다는 것이 아닙니다.

 

 

 

중생심과 불심이 둘이 아닌 하나라는 진리에서 출발하는 것이지만, 그 보는 입장이 피안(彼岸)이냐 차안(此岸)이냐는 것이 논쟁의 핵심입니다. 지금 선생께서 주장하는 근본적인 내용은 필자와 같습니다.

 

 

지금 필자는 ‘부처의 마음과 중생의 마음’, ‘본래심과 생멸심’을 나누어 보는 것이 아니고, 생멸심은 바로 본래심(眞如)을 들고 나온 것이므로 ‘생멸심(중생)이 바로 본래심(부처)’인 것입니다.

 

 

 

 

그러나 생멸심은 각(覺 부처)과 불각(不覺 중생)이 함께하고 있는 차안(此岸)의 자리이고, 본래심은 각(覺)만의 피안(彼岸)의 자리로서, 우리는 차안(此岸)의 생멸심 속에 자리하고 있는 불각(不覺)의 중생심(번뇌)을 몰아내어, 피안(彼岸)에 있는 각(覺)만의 본래심으로 화두를 들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든 화두는 차안(此岸) 즉 중생의 자리에서 출발하여 피안(彼岸) 즉 부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생이 바로 부처가 되는 자리는, 지금 바로 이 자리인 차안(此岸)이 아니라, 마하 반야바라밀이 완성된 피안(彼岸)인 것입니다.

 

또한 선생께서는 마조선사와 헤능선사의 말씀을 인용하기도 하고 돈오돈수(頓悟頓修)만을 강조하시는 것 같은데, 당나라의 규봉 종밀(圭峯 宗密)선사는 그의 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에서 돈(頓)과 점(漸)에 대하여, “돈오(頓悟)와 점수(漸修)에 대한 여러 견해가 있게 되어, 이것이 대립하여 모순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돈오와 점수의 의미를 정확히 모르기 때문이다.

 

 

 

 

돈(頓)과 점(漸)이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보완되어야, 완전한 수행이 처음부터 가능하게 되어 원만한 깨달음이 얻어지게 되는 것이다”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논쟁의 핵심이 아니므로 이만 줄입니다.

전종식
대승기신론연구회장

2007-04-05 오후 3:02:07 / 송고
 
 
*普賢코멘트-----------------------------
 
 
1.불자님들, 어느 분 말씀이 더 와 닿습니까?
우리는 모두 우리의 길을 가므로 내 길이 맞다 아니다를 시비를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단지 나의 길, 나의 소식을 보여드리기만 하면 되겠지요.

누가 맞는지는, 제한된 시공이 아니라,  무한 시공간에서야 들어날 테니까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바로 이거죠.

"모든 관찰자는 자기 입장에서 모두 옳다!"*^*^*)

 

2.그런데 두 분의 논쟁 속에 나오는 말씀 대부분이 우리 카페에 있는 말씀들이군요.

 

특히 전종식회장님의 종밀선사의 말씀,

'돈점은 대립이 아니라 서로 보완의 관계'라는 말씀은,

'왜 화엄경은 돈오를 말하는데 보현행원은 점수로 들어가는가?' 하는 글에

이미 말씀을 올렸습니다.

 

카페 벗님들께서는 다시한번 이곳 글들을 읽어 보시면 좋겠습니다...*^*^*_()_

 

 

3.출발 자리가 부처냐 중생이냐 하는 것은 별 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부처의 자리에서 출발하는 것과 중생의 자리에서 출발하는 것은 빅뱅만큼이나  엄청난 차이를 가져 오지요.

 

선과 화엄은 부처의 자리에서 출발하는 대표적 가르침입니다.

나의 무한 확대가 부처라는 것이지요.

다만 선은, 그 자리를 확인한 다음에야 나의 무한 확대를 다시 이루어나가지만(만행으로 나타나지요),

화엄은 처음부터 무한 확대를 이루어나가는 차잇점이 있습니다.

즉, 화엄은 내가 부처임을 알든 모르든 처음부터 부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방법이 보현행원이지요.

 

 

그러나 보현행원을 간과하신 분들은 이게 잘 안 됩니다.

그래서 꼭 부처 자리의 확신을 거치는 과정을 가게 됩니다.

보조스님의 신입문(信入門)도 그런 맹점이 있고,

전반적으로 선종도 그런 맹점이 있으며,

화엄의 종밀조사같은 분조차 그런 점을 간과하신 것으로 저는 봅니다.

그러니 돈오점수를 말씀하셨겠지요.

 

 

4.본래 성불 사상은 대승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초기 불교의 수기 사상도 바로 본래 성불 사상이라 합니다.

애당초 중생이 부처가 아니면 부처되지를 못하겠지요.

부처니까 부처된다고 부처님이 수기를 주신 거겠지요...*^*^*_()_

 

 

              

 

 ♣ 인생길 동행자 ♣ 

                             

 

인생길에 동행하는 이웃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힘들 때 서로 기댈 수 있고 아플 때 위로하고   

어려울 때  곁에 힘이 되어줄 수 있으니        

서로 많은 도음이 될 것입니다.                   

 

   
 

 여행을 떠나도 홀로면 고독할 터인데           

서로의 눈 맞추어 웃으며 동행하는 이 있으니

 참으로 기쁜 일 입니다.                            

 

 사랑은 홀로는 할 수가 없고                      

맛있는 음식도 홀로는 맛없고                    

멋진 영화도 홀로는 재미없고                    

 


 

아름다운 옷 도 보여줄 사람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무리 재미있는 이야기도 들어줄  사람이 없다면

독백이 되고 맙니다.                                      

인생 길에 동행하는 사람이 있다면                    

더 깊이 사랑해야 합니다.                                

 

 

 

그 사랑으로 인하여 오늘도 내일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아름답습니다.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당신은 아름답습니다.            

언제나 웃으며 친절하게 대하는                               

당신은 아름답습니다.                                            

 


 

베풀 줄 아는 마음을 가진 당신은 아름답습니다. 

아픔을 감싸주는 사랑이 있는                         

당신은 아름답습니다.                                   

 

  약한 자를 위해 봉사할 줄 아는                          

당신은 아름답습니다.                                    

 병든 자를 따뜻하게 보살피는                           

  당신은  아름답습니다.                                     

 


 

늘 겸손하게  섬길 줄 아는 당신은 아름답습니다

작은 약속도 지키는 당신은 아름답습니다.        

 

분주한 삶속에서도 여유가 있는                      

  당신은 참 아름답습니다.                                


 

 =  좋은글 중에서  =

 

 

 

 
 
 생명의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