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처작주입처개진이라 !참다운 삶의 경영

2010. 2. 2. 20:2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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隨處作主 立處皆眞.

“가는 곳 마다 주인이 되어라. 서 있는 곳이 모두 진리이다.” 이런 뜻입니다만,

사량 분별심 모두 놓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참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다 저것이다 다 놓고 양변을 여윈 중도의 길에서 본질을 보고 그대로 사는 모습을 말하는 것이니, 중도란 허공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다 저것이다 가르지 않는다거나 치우침이 없는 것을 말함이 아니라, 모두를 포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저 허공은 칸을 나누지 않고 주관과 객관의 구별도 없이 그 자체가 바로 중도인 것입니다.


부처를 이룬다거나, 마음을 찾는다는 것은 바로 주관이 성성하게 살아서 객관을 찾는다는 것이니, 번뇌 즉 보리요, 심 불급중생이 시 삼무차별이다, 마음이 부처로다. 하는것은 바로 스스로 이 자기 마음 안에서 온갖 분별과 시시비비와 사량 분별하는 벽, 경계를 허물어버릴 때, 바로 그 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임제스님이 대중에게 설법하는데, 도를 수행하는 이들 이여! 

“불법은 특별한 수행과 공덕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평상시에 마음으로 조작하는 번뇌 망념없이 무사히 지내면서, 대소변을 보고, 옷을 갈아입고, 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누워서 쉬는 일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이렇게 주장하는 나를 비웃겠지만, 지혜있는 사람은 그러한 불법의 본질을 곧바로 알 것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자기 마음 밖에서 불법을 수행하는 것은 모두 어리석은 짓들이다."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있는 어느 곳이라도 자기가 참 주인이 될 수 있다면, 자기가 있는 그곳은 모두 진실한 깨달음의 경지가 될 것입니다. 순간순간 자기 안을 들여다보면서 아! 내가 지금 이런 생각에 떨어져 있구나. 연속극을 보면서도, 누굴 만나면서도, 항상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자기의 생각을 알아차릴 수 있을 때, 번뇌는 보리로 변해지고, 부처는 바로 중생인 것입니다.


어떠한 외부적인 조건도 그 진실된 장소를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번뇌 즉 보리라, 수행을 하거나 기도하는데 마장이 많습니다.

기도만 할라치면 온갖 생각이 쥐 잡듯이 일어납니다. 오늘날의 불자들이 불법의 안목을 제대로 체득하지 못하여 마치 눈먼 염소가 코에 닿은 물건을 모두 입안에 집어넣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과 감정이라는 하인과 주인을 구별하지 못하고 손님과 주인도 판단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삿된 마음으로 불문에 들어와 곳곳에서 법당의 문고리를 잡고 절 문턱을 드나든지 얼마나 되었느니, 무슨 절에 갔더니, 어떤 큰스님을 만나보았더니 이러더라는 둥, 온갖 말로 시끄럽게 하니 이들을 진정한 불제자라고 할 수 없으며 바로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정말 신심불출가 세속인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께서는 항상 마음에 번뇌가 들끓고 잡념이 소용돌이칠 때를 가장 공부의 좋은 기회로 여기시고 아, 내안에서 지금 손님이 주인노릇를 하려 하는구나, 하고 퍼뜩 알아차려 자기가 자기를 들여다보면서 주인자리를 뺏기시면 안 될 것입니다.


진실로 출가한 사람은 평상시에도 진정한 견해로 부처와 마구니를 판단하며 진실과 거짓을 판단하고 범부와 성인을 판단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만일 이와 같이 판단할 수 있는 정법의 안목을 갖추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지혜로운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마구니와 부처를 올바르게 판단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어떤 집에서 나와 다시 다른 집으로 들어가는 것과 똑같은 것이라 했습니다.

그것은 죄업을 짓고 육도 윤회를 돌고도는 중생이라고 하며 진실한 불제자라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육도를 돌고돌며 만나는 기막힌 인연의 실타래에서 과거전생의 부부가 자식이 되고 부모가 짝이 되는 일들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가는 곳 마다 주인이 되고 서 있는 곳이 모두 진리다는 의미를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부디 부디, 성불하십시요.

참다운 삶의 경영

오늘 부처님께서 남기셨던 말씀 중에 이런 말씀이 있어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우리가 법구경을 보면 노모품 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何喜何笑 命常熾然 深蔽幽冥 如不求錠

하회하소 명상치연 심폐유명 여불구정이라.

풀이를 하게되면 “그대여! 어찌하여 즐거워하는가, 어찌하여 웃고 있는가.

생명은 언제나 소모되고 있거늘, 깊고 그윽한 어두움에 가려진 채, 어찌하여 등불을 찾지 않는가.” 이런 뜻입니다만,


법구경에는 이와 유사한 구절이 몇 개 있는데, 예정되어 있는 죽음은 가까워 오는데, 하루하루 나는 정작 무엇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


언젠가는 닥쳐올, 잠시 후, 아니면 낼이나 모레, 며칠 후, 몇 시간 후, 내가 죽는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문득문득 자각이 일어날 때, 나는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그 사실을 떠 올리기 조차 싫고, 피하고 싶은 진실을 가슴아프도록 후비듯이, 삶과 죽음의 양면성을 질타하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이 주는 의미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喜怒哀樂 속에서도 늘 삶의 가치와 희로애락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며 그 속에서 당장 죽음에 임해도, 스스로 능히 초연히 당해낼 수 있는 ‘마음’을 키워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도리를 모르면 “깊은 어두움과 두려움과 공포와 삶에 대한 한없는 집착과 번뇌만이 주변을 휘감고 있게 되지만, 이 경계의 진실을 알게 되면 등불을 찾은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불법을 통한 크고 작은 깨달음은 등불을 찾은 첫 인연에서 시작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말세 중생들이 살아가는 데는 만년에 남기셨던 법화경의 세계에서 지혜로운 삶을 익혀가야 하겠지만, 세상을 살만큼 살았고 삶에 대한 통찰을 하실 수 있는 중년이 되면 삶에 대해 보림을 하고 갈무리할 시기인지라 여러분 들께서 금강경을 공부를 하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혹자는 절에 조금 다니고 법문을 들었다는 분들께서 하시는 말씀이 에~구! 금강경을 공부하다보니 모두가 다 공이라, 너무 허무해서 싫어,! 하는 참으로 가슴처지는 말들을 하시는 분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금강경을 공부하다보면 경의 첫 머리에 금강이라는 말도 나오고 반야도 나오고 또 여러 가지 사구게송도 나옵니다.


우리가 주로 독송하는 구마라즙 조사의 번역본인 금강반야바라밀 경전에서 금강이라는 뜻은 부처님의 말씀은 그 무엇보다도 순수하고 단단함이 다이아몬드처럼 견고하고 예리해서 무명을 잘라내고 밝게 빛나는 지혜의 완성을 설하는 경전으로 그 어떤 번뇌라도 능히 끊을 수 있다 해서 금강이라 합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과는 다른 해석도 있습니다.


구마라집과 함께 2대 역경승으로 불리는 현장법사의 해석이 그것입니다.

현장법사는 이 경의 이름을 “능단금강반야바라밀경(能斷金剛般若波羅密經)”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금강경을 이렇게 번역할 경우 구마라집의 해석과는 다른 의미를 나타내는데, 여기서는 금강을 지혜를 나타내는 반야의 형용사가 아니라 번뇌(煩惱)로 비유합니다.


즉, 인간에게서 번뇌란 금강석처럼 단단해서 그 무엇으로도 쉽게 끊을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끊기 어려운 중생의 집착과 오욕과 아집이라는 무명과 번뇌일지라도 금강경에서 설하는 무분별지(無分別智)는 금강석처럼 단단한 번뇌도 끊을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강조의 의미인 것입니다.


현장법사는 이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보살은 분별로써 번뇌를 삼는다. 그런데 분별이라는 번뇌의 견고함은 금강에 비유되므로 이 경에서 설하는 무분별 지혜는 능히 금강과 같이 견고한 번뇌를 모두 끊음(除斷)을 밝히고자 하기 때문에 “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能斷金剛般若波羅密經)”이라 하는 것이다.” 라고 밝힙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반야란 번뇌를 끊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반야란 지혜라고 해석하는데, 혜(慧)는 지(智)의 인(因)으로 진리를 깨달아 아는 것이고, 지(智)는 혜(慧)의 과(果)로 모든 것의 실상을 바르게 보고 판단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금강경을 공부하게 되면, 일체의 실상을 바로 보게 되면서 끝없는 윤회의 씨앗이 되고 악연의 에너지가 되는 네 가지의 사사오욕으로 인한 부질없는 집착과 헛된 무명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지금 이 순간의 존재하고 있는 자신과 더불어 주변의 가족들과 일체의 모든 것들에 대한 유한성을 철저히 깨닫고 거기서 허무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모든 것이 수없이 많은 모습으로 돌고 돌아 몸을 바꾸며 뿌려오고 심어온 과거 전생의 생각과 말과 행동의 신구의 삼업이 만들어 온 업의 결과요, 덩어리로 인함이라는 것을 깨닫고 지금 이 순간부터 부질없는 잠시 한 순간의 달콤한 업에 매이지 않고 지혜로운 신구의 삼업의 에너지를 만들어가는 삶을 찾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지, 허무에 빠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금강경을 공부하다 보면 네 가지 수의 사구게(四句偈 )를 접하게 됩니다.


금강경 제5품에 보면,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가 허망할지니, 만약 모든 형상을 형상이 아닌 것으로 보면, 곧 여래(진실)를 보리라.

하는 대목으로 사구계 내용을 보면, 첫째와 둘째 구절은 현실의 허망함을, 셋째와 네째 귀절은 허망한 내면에 허망치 않은 존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구게들은 경의 골수일 뿐만 아니라 불교의 교리 전체를 대표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 모든 사물을 관찰할 때에 공(空) · 가(假) · 중(中), 삼제(三諦)의 원칙에 의합니다만,


공(空)은 모든 현실을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는 것으로 눈앞의 모든 물건들을 부수거나 태워 버린 뒤의 허공의 상태를 말하는 것은 아니고, 그저 있는 그대로를 관찰하고 분석한 결과, 즉 모두가 잠시 일시적으로 인연에 따라 나타난 현상이요 절대적인 실체는 없다고 보는 것을 말합니다.

가(假)는 有라고도 하므로 空의 반대 현상으로, 모든 사물이 空한 자리에 나타나는 모든 사물의 현상을 그대로 인연이 존속하는 한, 존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空의 반대현상인 有라 하는 것이며 우리들이 흔히 ‘있다’고 말하는 따위의 완유(頑有)는 아닙니다.

중(中)은 중도(中道)로서 空인 동시에 有요, 有인 동시에 공(空)임을 바로 알아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진공묘유(眞空妙有)를 말합니다.


이러한 이치를 거울로써 예를 보면, 거울 속에 비친 그림자는 아무리 울긋불긋하여도 그 실체가 공합니다.

그것은 아무 것도 없는 거울에 일시적인 인연이 맞아서 사물이 비친 현상에 불과하기 때문이기에 空인 것입니다.

거울속의 그림자가 공하여 실체가 없는 것임을 알았으니, 인연이 비쳐진 그 그림자는 분명 다양하고, 그 다양한 그림자는 보는 이의 감정을 돋우기도 하고, 낮추기도 하며 자재자유(自在自由)하기에, 그러므로 아주 없다는 생각에 치우칠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있는 그림자의 상태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假라 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그렇다면 거울속의 그림자는 실재로는 없는 것이나 현실적으로는 없지 아니하니 없는 듯 하되 있고 있는 듯도 하되 없다고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이라 할 때에 공에 치우치지 않고 가유(假有)를 전제한 공이어야 하며, ‘있다’라고 할 때에 ‘있다’라는 사실에만 치우치지 말고 공을 전제한 가유(假有)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바로 다겁생을 윤회하는 우리의 삶을 비유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거울 앞에 선 모습은 우리의 업이요. 거울은 윤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존재의 실상과 의미를 바르게 보는 방법이 곧 중도(中道)인 것이며, 극단에 치우친다거나 자기의 알음알이에 떨어져 아견에서 옳다는 견해에 떨어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금강경 제10품에 “ 불응주색생심 불응주성향 미촉법생심 응무소주 이생기심”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 味觸 法生心 應無所住 以生其心 이라,

응당, 색(물질)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며 응당, 성향미촉법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 것이요. 응당, 머문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

(육조혜능대사 출가동기)


금강경 제 26품에 “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 행사도 불능견여래”라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만약 형상으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서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함이라, 능히 여래(진실)를 보지 못하리라. 하는 대목도 있으며,


금강경 제32품에는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하라.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일체 현상계의 모든 생멸 법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 같으며,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으니 응당 이렇게 관할 지어다.


이와 같이  금강경에서는 존재의 실상과 존재의유한과 무한을 가르쳐주며 지혜로운 삶의 본질을 보는 지혜로운 반야의 도리를 고구정녕히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백천간두의 반야일성은 바로 “대방광불화엄경 제일 사구게”로 함축하고자 합니다. 


“약인욕요지 삼세일체불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 若人慾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만약 사람들이 과거. 현재. 미래의 부처(진실)들을 알고 싶거든 마땅히 법계의 근원을 꿰뚫어 볼지니 그것은 다름아닌 그 모든 것이 그대 마음으로 지어졌음이라!

 

여러분 우리 지혜롭게 살아가십시다.

그래서 다음 생을 기약할 수 없다 해도, 출산율은 점점 떨어져 사람 몸 받기도 참으로 어려운 일인데 슬프게도 참으로 어리석은 부모 만나는 악연으로 태어나자마자 쓰레기통에 버려지고 화장실에 버려져 이 아까운 사람 몸 받아 불법은 만나보지도 못하고 죽는 신생아들 또한 얼마나 많습니까?


何喜何笑 命常熾然 深蔽幽冥 如不求錠

하회하소 명상치연 심폐유명 여불구정이라.

“그대여! 어찌하여 즐거워하는가, 어찌하여 웃고 있는가. 생명은 언제나 소모되고 있거늘, 깊고 그윽한 어두움에 가려진 채, 어찌하여 등불을 찾지 않는가.”


이제로부터 “능단 금강이라” 부질없는 것에 집착말고 허망한 순간적인 오욕의 번뇌에 떨어지지 마시고 반야의 금강도로 능히 끊어 우리 인연 잘 짓고 복덕선근 잘 쌓고 살아 갑시다. 


모두 모두 성불하십시오.

인연의 소중함 

얼마 전에 영등포 교도소에 지인이 있어 면회를 가게되었습니다.

그런데 주차장에 차를 막 세우고 문을 열고 차에서 나오는데 어느 분이 교도소 문을 나오면서 결제서류 파일을 옆구리에 끼고 나오다 마주치더니, 저를 보고 바로 합장하고 인사를 하시기에 저도 엉겁결에 합장을 하고 빙긋 웃었더니 그분이 제게 어디서 오셨느냐고 하더니 옆의 면회실로 저를 안내하여 간단히 인사를 하는데, 본인은 영등포교도소의 불교담당을 하는 소임자인데 철원소재의 심원사를 원찰로 하고 전 주지스님인 영도스님을 젤 존경하고 있다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더니 자신의 신행의 경험담을 전개하기 시작하는데, 교도 공무원의 박봉으로 살기도 어려울텐데 항상 합장주를 사서 수인들에게 나눠주고 불법을 전하다보니 총무원장의 표창과 각계의 표창경력도 화려했는데 그 모든 것을 부처님의 가피로 여기고 계셨습니다.

헌데, 그분의 신행경험을 듣다보니 그래, 중생은 스스로 느껴야 발심이 되고 간절하게 기도가 되는 것이다. 라는 사실을 재삼확인하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자신이 살던 아파트를 장만할 때도 간절하게 기도를 하는데 비몽사몽에 하늘에서 광명이 일더니 안방으로 서광이 쏟아져 내려 지금 사는 아파트의 호수번호가 벽에 씌여졌고, 그래서 당첨되고 보니 그 아파트였는데 부인은 네식구가 살기에 평수가 너무 좁아 그 집을 팔고 더 넓은데로 가자는데도 본인은 가피력으로 인연이 된 집을 팔기 싫어 미루고 있었는데 갑자기 평촌의 집값이 오르더니, 지금은 열배이상으로 치솟았다는 지난이야기와 근래에 군대에 입대한 아들이 훈련소 군 법당에 나가 평소 아버지를 따라 절에 가서 절하는 법을 배워둔지라 법회가 끝난 다음에도 평소대로 절을 했더니 군법사가 우연히 절하는 모습을 보고 이것저것을 묻더니 법당에 군종병이 필요한데 기다려보라더니 그곳에 남아 군종병이 됬다는 이야기 등 이었습니다.

중생은 이렇게 스스로 체험을 할 때 신심이 더욱 자라나고 간절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괴롭고 힘든 일이 어찌 없겠습니까?

살만한 집은 자식이 속을 썩이게 되고, 남편이 속을 썩이고, 딸이 속을 썩이게 되고, 그 속을 썩이는 것이 온갖 모습으로 나타나 몸이 아프거나, 사고를 치거나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 모든 것들이 원인 없는 결과가 없듯이 모든 게 다 이유가 있어 오는 것들이고 겪어야할 업이고 인과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인정하기 싫어하는게 중생의 속성입니다.

며칠 전 여주에 사는 신도 분이 집터를 보아달래서 갔다가 지인의 속사정을 이야기 하며 그곳에 갔으면 하기에  가서 만나보았더니 이제 21살의 아들이 대장암으로 대장을 모두 절제하고 소장에도 전이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집의 모든 방의 수맥을 조사했더니 두 부부의 침대에서 남편의 잠자리에서는 수맥이 전혀 없는데 부인의잠자리에는 수맥이 강하게 잡히더니 아들의 방으로 흘러가는 수맥이었습니다.

결국 부인도 7년 전에 직장암 수술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 집안의 방을 샅샅이 살펴 잠자리를 정해주고 왔더니 어제 아들이 너무나 잠을 잘 자고 대변 또한 잘 보았다고 감사하다고 전화가 왔었습니다.


인연이란 것은 이런 것입니다.

그동안 그래도 절을 다니면서 알게 된 인연으로 저를 아는 분과 인연이 되어 제가 그곳까지 가게되었던 것입니다.

앞에 말씀드렸던 영둥포 교도소의 포교활동을 하시는 분이나 방금 전의 불자가정이나 모두가 불자라는 선한인연으로 인연을 지었기에 살아가는데 서로 힘이 되고 의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흔히들 인연 따라 간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이 인연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저 막연한 어떠한 운명일까요... 인연은 다름아닌 생각의 결과입니다.

사람들의 인연은 사람들의 생각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생각이 바뀌면 나의 인연이 바뀝니다.
나의 생각이 사라지면 나의 인연 또한 사라집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이렇듯 수없이 많은 자신의 생각을 일으켜왔고, 그 생각을 바꾸어 왔으며, 그에 따라 수많은 인연들이 맺어지고 헤어짐을 되풀이 해왔던 것입니다.

좋은 생각을 통하여 좋은 인연이 맺어지기도 하고 ,
나쁜 생각을 통하여 나쁜 인연이 맺어 지기도 합니다.
이렇듯 나의 생각에 의해 인연은 맺어지고 있으며,
나의 생각의 패턴에 의해 인연의 패턴이 달라지고,
나의 생각이 다함에 의해 인연이 다하는 것입니다.


결국 다겁생래 나의 의업의 결과로 몸둥이는 신업을 만들고 구업을 짓고 박복의 결과를 갖게되지만, 이제 우리는 부처님의 품안에서 하루를 시작할 줄 알고 끝낼 줄 알 때 우리에게는 업으로 인한 장애는 줄어들고 항상 편안함이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성불하십시오.

 



★··힘들어도 웃고 살아요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 중에
사람만 웃고 살아간다.

웃음은 곧 행복을 표현하는 방법이다.
요즘 사람들은 웃음이 부족하다고 한다.

그러나 좀더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힘차게 웃을 수 있다면
모든 일에도 능률이 오를 것이다.

유쾌한 웃음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건강과 행복의 상징이라고 한다

여섯 살난 아이는 하루에 삼백 번 웃고
정상적인 성인은 하루에
겨우 열일곱 번 웃는다고 한다.

바로 체면을 차리려고 하기 때문이다.

유쾌한 웃음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
웃음은 좋은 화장이다.

웃음보다 우리의 얼굴 모습을
밝게 해주는 화장품은 없다.

그리고 웃음은 생리적으로도
피를 잘 순화시켜주니 소화도 잘되고
혈액순환도 물론 잘된다.

우리의 삶은 짧고도 짧다.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남에게 웃음을 주는 사람은 자신은 물론
남도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이다.

신나게 웃을 수 있는 일들이
많이 있으면 더욱 좋을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좋은 글 중에서

 

 

 

 

 

 

                                                  Romance sans Paroles, op.9 

                                               비에니아프스키, 침묵의 로망스

                                                              Henryk Wieniawski (1835-1880)

 

                                                      

 

                

 

                                                    

 

                                                                 

                                                 Wieniawski: Souvenir de Moscou
                                                  Composer: Henryk Wieniawski
                                                  Levon Ambartsumian, Violin  

                                                  Liana Embovica-Rivkin, Piano
                                                 (September 16, 1997)

                                                 

                                               Romance sans paroles

                                             

                                    Romance sans paroles et rondo elegant

                                            for violin & piano,Op.9


                             침묵의 로망스 (Romance sans paroles)는 '우아한 론도' 와 함께 1852년 작곡하여

                             지금 독일의 왕족이었던 "맥시밀리언(Maksymilian of Bavaria)" 에게 헌정되었으며

                             다음해인 1853년에 "Romance sans paroles et rondo elegant " 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자신이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자였던 비에니아프스키는 모든 작품에 고난도의

                             연주 기교를 요구하는 곡을 작곡했는데, 이 곡 또한 예외가 아니다. 

 

                             완숙의 경지에 도달하기엔 시기상조였음을 들어냄일까?

                             아니면 과하게 서정성을 이끌어내는데 치중하였음일까? 

                             어색한 흐름이 감지되지 않는 것은 아니나,

                             듣는 이의  귀를 즐겁게 만들어 주는 곡임에는 틀림이 없다.

 

 

                     비에니아프스키 (Henryk Wieniawski, 1835.7.10 - 1880.3.31)

                            헨리크 비에니아프스키(폴란드어: Henryk Wieniawski, 1835년 7월 10일 - 1880년 3월 31일)는

                            폴란드의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이다.

                            당시에 러시아가 지배하고 있었던 루블린 시에서 태어난 

                            그는 어렸을 때부터 재능이 있었다. 

 

                            1847년에 그는 《Grand Caprice Fantastique》 작품번호 1을 출판했다.

                            총 24개 작품이 출판되었다. 그는 이사벨라 햄프턴과 약혼했는데

                            부모가 반대하자 《Legende》 작품번호 17을 썼고 그것으로

                            부모의 마음을 돌려놓아 1860년 결혼하였다.

 

                            1860년 안톤 루빈슈타인의 초청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하여

                            1872년까지 살았다. 그곳에 있는 Russian Musical Society에서

                            그는 바이올린을 가르치면서 오케스트라와 현악 사중주 활동을 하였다.

 

                            1872년부터 1874년까지 비에니아프스키는 안톤 루빈슈타인과 함께 미국을 여행했다.

                            1875년에는 브뤼셀에 있는 콘소바토리에서 앙리 비외탕의 후임으로 바이올린 교수를 지냈다.

                            몇 해동안 건강이 악화되어 콘서트를 몇 년간 가지지 못했다.

 

                            1879년 4월 오데사에서 마지막 콘서트를 갖고 이듬해에 사망했다.

                            비에니아프스키는 천재적인 바이올린스트로 여겨지고 있다.

                            두 개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포함해서 그의 작품은 어려운 기교를

                            가지고 있어 바이올린 레퍼토리로서 많이 연주되고 있다.

 

                            그는 사후에 얻은 명성이 많다. 1952년과 1957년, 폴란드 우편

                            직인에는 그의 얼굴이 도안되었다.

                            1979년 주화된 100 즈워티 동전에는 그의 얼굴이 있다.

 

                            체코브카 강에 있는 한 도시에는 비에니아프스카라는 이름이 붙었다.

                            흔히 "Russian bow grip"이라고 불리는 기법은 "Wieniawski bow grip"이 적당한 이름이다.

 

                            이는 비에니아프스키는 그의 학생들에게 악마의 트릴을 연주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 지도했던 기법이기 때문이다. 비에니아프스키는 콘서트 순회 중 모스크바에서 숨졌다

                            그의 시신은 바르샤바의 포와즈키 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첫회의 비에니아프스키 바이올린 콩쿨이 1935년 바르샤바에서 열렸고,

                           1952년부터 5년마다 국제 콩쿨이 열리고 있다.

   

 

 

 

 

가냘픈 초록의 선을 그으며 봄이 기웃 기웃 

침묵의 로망스 (Romance sans paroles) 를 감상하며

봄을 기다려 보렵니다.--

 

 

 
 생명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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