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無心)의 땅

2010. 2. 2. 20:06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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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無心)의 땅 >>

 

불자님들~

생활속의 부처님의 가르침을

 어떻게 우리 생활에 적용할 것인가에 대하여

 차분히 살펴보도록 합니다.

 

 

[1] 로히니 강의 노래

 

우리 진정 행복하게 살아가자.

미움 속에서도 미워함이 없이

미운 사람 속에서도 미움 비우고

우리 진정 걸림 없이 살아가자.

 

우리 진정 행복하게 살아가자.

아픔 속에서도 아파함이 없이

앓는 이 속에서도 앓는 이 없이

우리 진정 푸르게 살아가자.

 

우리 진정 행복하게 살아가자.

욕심 속에서도 물듦 없이

성내는 사람 속에서도 성냄 없이

우리 진정 하하 웃으며 살아가자.

 

 

<이시는 로히니 강을 사이에 둔 샤카 족과 콜리아 족이

가뭄으로 서로 제 땅에 물을 대려고 전쟁을 바로 일으키기 전,

부처님께서 두 종족을 화해시키고 나서 하신 말씀입니다.>

 

 

[2] 걸림이 없는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위 시에서 “욕심 속에서도 욕심에 물들지 않고.”라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입니다.

 

 

(1) 무상(無常)이란

 

우주만물의 모든 것은 고정된 것이 없이 항상 변화한다는 것 입니다.

형체가 있는 것이든 없는 것이든 물질적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모두 변화 하는 것입니다.

그것의 모양은 생노병사, 성주괴공의 형태를 취합니다.

 

허공에서 어떤 원인에 의해 씨앗이 만들어지면,

 그것이 태어나고 자라서 나중에는  결국 부서져서 없어지고

또 다시 일어나는 사라지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욕심이나 고통도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항상 변화하는 무상(無常)할 뿐입니다.

 

 

(2) 무아(無我)란

 

나만이 중요하다는 생은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것을

확연히 깨우친 상태를 말합니다. 

 

이 세상에 그 어떤 존재도 홀로존재 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우주란 큰 집속에서 서로 의지하고 연관되어 존재할 뿐입니다.

부모가 있어야 자식이 있고, 국가가 있어야 국민이 있고,

국민이 있어야 국가가 있고, 태양이 있으니 지구가 있고,

 은하계가 있으니 태양계가 있고, 중생이 있어야 부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주상에 자기혼자 독립된 존재는 없는 것입니다.

또 바꾸어 만하면 그 어떤 존재도 다 존재할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풀한 포기, 나무 한 그루, 흘러가는 구름, 물방울, 바위, 별 등

그 어떤 존재도 다 귀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만이 유독 이 세상에서 가장 필요하고 존귀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두 각각이 존귀하므로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의 욕심을 위해 상대를 죽이거나,

상대의 것을 함부로 빼앗아 가는 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 그러므로 본래 욕심이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구름과 같이 일어났다 사라지고 마는 것인데,

그 영원하지도 않는 부질없는 욕심 때문에 전쟁을 하여

서로를 죽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인 것입니다.

 

◇ 그래서 일상생활에서 이기적인 욕심이 일어나면

이 무상성(無常性)을 생각하고

동시에 <누구나 존귀하므로 나만 존귀하다는 생각이 옳지 않다는 것>

즉 무아(無我)를 생각하면 저절로 그 이기심은 사라져 갈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로히니 강의 두 부족에게 바로

이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의 이치를 깨우쳐 주게 하신 것입니다.

 

 

[3] 수행(修行)이란?

 

이와 같이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가 행하고, 말하고, 생각하는 (身口意) 것이

 

모두 무상(無常)하고 무아(無我) 임을 관찰하고 지켜보면,

이런 사람에게는

온 하늘과 온 땅이 맑고 깨끗하여,

티끌만큼이라도 자신의 삶을 물들게 하거나,

걸리게 하는 것은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참 수행인 것입니다.

 

 

(1)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진리는

 

다름 아닌 참 행복의 길, 해탈의 길입니다.

그 해탈은 누구의 해탈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몫입니다.

 

이때 자신이란 생각의 대상이 아니라

지금 여기 있는 이 “몸”이며, “마음”입니다.

 

(2) 수행(修行)

 

이렇게 자신의 몸과 마음의 성품을 지켜보는 일입니다.

지켜봄을 혜(慧)라고 합니다.

이 지켜봄을 빈틈없이 지어가는 것을 정(定)이라 합니다.

이 혜(慧)와 정(定)을 닦는 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그런데 우리 몸과 마음이 본디 해탈한 모습인데,

이 해탈한 모습이 무엇인지를

늘 궁금해 하는 것이 바로 <이 무엇인가? = 이 뭣고?>입니다.

그래서 이 참모습을 깨닫는 것이 참 수행입니다.

 

 

(3) 몸과 마음의 성품을 지켜보는 것

 

◇ 보통 수행이 깊지 않는 일반 사람에게는

몸은 마음보다 지켜보는 것이 더 쉽습니다.

그래서 석존께서도 호흡법을 먼저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즉 들숨과 날숨의 상태를 고요히 관찰하는 것이 호흡법의 요체입니다.

들숨(마시는 호흡)보다 날숨(내 쉬는 호흡)만

고요히 해도 이내 마음이 고요하고 안정이 되는 것입니다.

 

◇ 그 다음 의식을 몸 구석구석에 집중하여

몸에서 일어나는 각종 느낌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지감(止感) 수행이라 합니다.

이 호흡법과 지감수행이 깊어지면 자동적으로 마음의 관찰이 쉬워집니다.

 

(4) 마음의 관찰

 

마음의 관찰은 가슴에서 느낌과 감정을 관찰하고,

머리(뇌)로부터 일어나는 생각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이 마음은 의식, 무의식, 잠재의식이 있는데

처음에는 의식으로 일어 나는 생각은 안, 의, 비, 설, 신, 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므로

어떤 생각이 일어남을 어떤 감각 기관으로부터 일어나는지를 알고,

 또 탐심이나 성냄도 주로 여섯 가지 감각 기관으로부터 시작하여

내부에 있는 무의식 잠재의식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생각이 일어나면

처음에는 그냥 그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짐을 무심히 지켜만 보면 됩니다.

그러다보면 어느 듯 점차 모든 분별 의식이

 다 사라지는 상태까지 이르게 됩니다.

 

[4] 일상생활이 수행

 

수행이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참선을 하든, 염불을 하든, 하늘 천 따지를 하든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데 있는 것입니다.>

흔히 수행을 움직이지 않고, 말하지 않는 것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것은 행위도 묶고, 말도 묶고, 생각도 묶는 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수행의 형상에 불과한 것이지

수행의 내용을 이야기 한 것은 아닙니다.

 

◇ 수행의 겉모습을 조금만 더 헤쳐 들어가면

즉 <오로지 마음을 하나로 모으게 되면 >

묶어야할 그 어떤 행위도, 말도, 생각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이 자리에 들면 움직이고, 말하고, 행하는 일들이

수행과 다른 세계일 수가 없습니다.

즉 일상생활 자체가 수행인 것입니다.

 

 

● 일상생활 속에서 분별의식이 없어진

“ 무심(無心)의 땅 ”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무심(無心)은 무아(無我)라는 뜻입니다.

 

● 아이티 대지진이 일어나 무수한 생명이 목숨을 잃고,

크나큰 환란 속에 신음하는 무수한 생명을 구해주는 일이 먼저입니다.

그것이 무아(無我)의 실천입니다.

그 구체적인 수행방법이 사무량심(四無量心)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5] 사무량심(四無量心)의 실천이 생활불교입니다.

사무량심(四無量心)은 무아(無我)를 실천하는 마음입니다.

 

● 사무량심(四無量心)은 부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 불제자는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행복의 길, 해탈의 길을 가기위해

부처님 같은 마음을 일으켜야 합니다.

비록 처음에는 부처님과 똑같은 마음을 낼 수 없지만,

부처님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살기를 원을 세우고,

끊임없이 부처님을 닮아가도록 노력하다 보면

어느 듯 부처님과 같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 우리는 누구나 본래 부처(本來佛)입니다.

이 생각을 한시도 놓지 말고 부처님처럼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처님의 마음인 사무량심(四無量心)을 실천해야 합니다.

 

● 사무량심입니다. [자비희사]인 것입니다.

부처님은 사무량심으로 평생 살아가며

중생을 제도하셨건만

자신의 마음속에 한 중생도 제도하였다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즉 걸림이 없었습니다.

 

자(慈)는 조건 없이 베푸는 마음이요, 사랑입니다.

비(悲)는 사람들의 고통을 기필코 해결해주려는 마음을 말합니다.

희(喜)는 사람들이 즐거운 것을 보고 함께 즐거워하는 동체대비의 마음입니다.

사(捨)는 탐심이나 이기심의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비우는 마음입니다.

 

 

위와 같이 우리도 부처님처럼 사무량심을 가지고 살기 위해서

노력하며 수행하는 것입니다.

 

나를 바라보는 관법은 바로 자신이

사무량심으로 살아가는지를 체크하는 것입니다.

그 바라봄이 선이요 삼매입니다.

 

 

◇ 우리 절에서는 일반 불자님들이 가장 쉽게 수행할 수 있는

염불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이 염불수행을 하면서 동시에

이제 이 사무량심(四無量心)을 실천하면

그야 말로 금상첨화입니다.

 

불자님들~

이제 우리 모두 부처님처럼

사무량심을 평생 실천하기를 맹세합시다.

 

그래서 우선 자신의 고통스러운 마음을

행복의 마음으로 바꾸시고

그다음 가족과 이웃

그리고 고통 받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벗어나는 길, 행복의 길을 알려줍시다.

 

입춘 맞이 100일 관음기도는

부처님처럼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한

첫 걸음이 될 것입니다.

 

법우님들 많은 동참바랍니다.

우리모두 행복합시다.

 

감사합니다.

 

나무 관세음보살

 

  
      * 평범한 삶의 비밀 * 명예와 지위를 얻으면 당장은 즐겁습니다 가진 것이 많으면 당장은 기쁩니다. 하지만 그 뿌리가 견고하지 못합니다. 진정한 삶의 기쁨은 마음에 있습니다. 명예와 지위,소유는 상대적이며 일시적입니다. 대신 어디에 있든, 어떻게 살든 일상의 평범함에서 자족과 기쁨을 발견하면 행복이 찾아 옵니다. 그 어떤 화려한 성공의 기쁨도 농부가 씨를 뿌리고 추수하는 기쁨에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다고 속상해하지 마십시오. 평범한 삶에 있는 즐거움을 만끽하십시오. 작은 일에 자족하며 기뻐하십니까? 평범한 삶에 기쁨의 뿌리를 두면 오래갑니다. - 사랑의 인사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