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무는 곳마다 주인이 되어/혜국스님 (석종사 선원장)

2010. 2. 2. 21:06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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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무는 곳마다 주인이 되어/혜국스님 (석종사 선원장)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된다는 말은 깨어 있거나 잠들어 있거나 기쁜 일이 있거나

슬픈 일이 있거나 내 감정에 속지 않고 내가 내 주인이 된다는 얘기입니다.

내가 내 주인이 된다는 일은 쉽기로 말하면 참으로 쉬운 일일수 있고

어렵기로 말하면 참으로 어려운 일 중의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면 육신, 즉 감정의 덩어리로 된 몸뚱이가

먹을 것을 달라고 하면 넣어주고 성을 내달라고 하면 화를 불같이 내주는 등

감정이 해달라는 대로 감정의 노예가 되어 사는 시간이 많지, 참마음이 주인되어

행동을 하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팔만사천 번뇌 모든 욕심과 진심과 어리석은 망상번뇌가 우리의 주인 자리를

차지하고 내 마음의 주인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임제 스님은 가는 곳마다 주인 되는 세계를 “수행자가 부처를 구하면 부처를

잃게 되고 조사를 구하면 조사를 잃게 되고 도를 구하게 되면 도를 잃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어떻게 주인노릇을 해야 되고 내 주인이 어떠한 자세인가를

잘 표현한 세계입니다. 모양이 있거나 귀에 들리는 소리가 있거나 무슨

색깔이 있다면 그것은 주인자리가 아닙니다.

허공은 중생의 눈으로는 볼 수가 없습니다.

허공에는 아무런 모양도 없고 소리도 없기 때문에 이 조계사 법당은 물론 많은

대중들이 다니거나 소리를 질러도 아무런 탈이 생기지 않습니다.

만약 허공에 모양이 있거나 색깔이 있다면 우리가 마음 놓고 허공에 의지하고

살 수 없을 것입니다. 허공은 먹물을 끼얹어도 물들지 않고 침을 뱉어도 묻지 않습니다.

바로 이 오염되지 않는 자리를 주인된 자리라고 합니다.

여러분의 몸 안에서 몸이 썩지 않도록 지켜주는 주인공, 법문을 들을 줄 알고

눈을 뜰 줄 알도록 하는 소소영영한 그 기운이 내 마음의 주인공일진대

주인을 내버려두고 감정이 하자는대로, 도적놈이 주인노릇 하도록 가만두어서는

안 됩니다.

 

마음부처라고 하는 법당에 내 스스로 감정과 욕망과 도적놈을 불러들여

주인노릇을 하도록 내버려두는 일은 부처님을 믿는 제자라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주인공을 얼마나 믿고 있는지를 냉철하게 돌아보십시오.

얼마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山堂靜夜坐無言(산당정야좌무언)

산당의 고요한 밤에 말없이 앉았으니

寂寂寥寥本自然(적적요요본자연)

조용하고 조용하여 본래의 모습이다.

何事西風動林野(하사서풍동임야)

서풍은 어찌하여 수풀을 흔드는가

一聲寒雁唳長天(일성한안려장천)

기러기 한 소리가 장천을 울리도다.


여러분의 눈으로 자신의 눈이 보입니까, 안보입니까?

“안보입니다.”(대중)

그러면 마음을 갖고 마음을 보면 마음이 보입니까?

“안보입니다.”(대중)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찾으려고 하거든요. 찾으려고 한다는 것은

찾는 내가 있고 찾는 대상이 따로 있을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자신의 눈으로 자신의 눈을 보지 못하듯이 마음이라는 것은 찾는 주인과

찾는 대상이 나눠진 상태가 아니고 주와 객이 분리되기 이전 세계입니다.

찾으려고 하면 이미 잃어버리는 것이 되거든요.

그래서 부처를 구하면 부처를 잃게 되고 조사를 구하면 조사를 잃게 됩니다.

또 도를 구하면 도를 잃는 것입니다

요즘 참선을 하는 사람들은 너무 급합니다. 빨리 도를 이루려고 하거든요.

그런데 도를 그렇게 빨리 얻을 수 있으면 누가 얻지 못했겠습니까.

또 “요즘 참선을 하는데, 이러이러한 것들이 보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하고 묻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 것을 보길 원하는 마음이 아직 남았으니 보이는 겁니다.

그건 그림자지 실상이 아니에요.

보고 싶은 마음의 그림자가 밖에 나가서 황금색으로도 보이고 부처님으로도

보이고 그러는 것이니 절대로 현혹되지 마세요. 실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입니다.

 

화두가 무엇입니까?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라는 화두가 있는데, 화두가 정전백수자 이 다섯 글자입니까?

아니면 조주 스님이 ‘정전백수자’하기 전 그 마음 속에 숨겨진 의(意), 뜻입니까?

말 나온 다음의 것은 화두가 아닙니다.

그 말 나오기 전, 조주 스님이 우리에게 보여준, 여러분 마음과 내 마음이

둘이 아닌 상태를 화두라고 합니다.

이 화두는 들어가고 나오는 자리가 아니거든요.

‘공’하면 전해질 소리인데 이걸 알아듣는 사람이 흔치 않아요.

‘뜰앞에 잣나무’라는 소리가 나오기 이전 조사 스님의 그 뜻이 화두입니다.

의심을 하기 위한 의심이 아니라 조사 스님들이 이미 보여주었으니 마음의 눈을

떠야 할 것이 아닙니까. 눈 뜨는 방법이 의정이요 의심입니다.

 

화두라고 하는 것은 그 뜻이 나와 벽이 허물어져버린 상태를 보여준 것이니까

내가 찾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바로 내 자신입니다.

내 자신을 대상화시켜 버린 것이고 찾으려고 하는 놈과 찾아야할 대상을 둘로

나눠버린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뜻을 읽을 수가 없는거예요.

이 상태로는 백날이 가도 수행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몸뚱이를 내 것이라고 생각을 하죠?

“예.”(대중)

아니라면 내가 가져가서 밥도 짓게 하고 더러는 팔아서 불사에도 보태고 할테니까.

여러분 몸뚱이가 여러분 꺼라면 마음대로 되어야 하죠. 그런데 맘대로 됩니까?

안되죠?

“예.”(대중) 앞으로 여러분 꺼라고 하지를 말아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내 것이라고 하는 내 몸뚱이도 마음대로 안되는데 어떻게

가족들을 내 마음대로 하고 이 세상이 내 마음대로 되기를 바라겠느냐.

이 세상이 마음대로 되고 내 가족이 마음대로 되기를 바라거든 마음을 먼저

길들이라”고 했습니다. 네가 주인이 되면 진실되게 살게 된다고 하신 겁니다.

 

우리가 화두를 들고 싶어도 내 몸뚱이 속에 있는 번뇌욕망이 (화두가)들어오게

가만히 놔둡니까.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번뇌망상과 화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망상번뇌가 일어나면 번뇌망상을 화두로 바꾸는 것이로구나, 즉 번뇌망상이라는

지능을 가지고 화두라고 하는 부처를 조성하는 것이니까, 참선법이라고 하는

것은 이 번뇌망상을 부처로 만드는 작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

번뇌가 곧 보리’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게 할려면 화두를 정말로 믿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화두하는 그 시간 만큼은 내가 나와 같이 춤을 추는 시간이고 부처와 같이 있는

시간이구나.

일어나는 번뇌망상을 없애버리고 화두를 하는 것이 아니라 번뇌망상을 가지고

‘어째서’ ‘왜’하고 살피다가 조금 더 나아가면 어째서도 없어지고 왜도 없어지게 됩니다.

오로지 조주 스님의 의정만 남게 된다 이 말이에요.

이렇게 분명한 것이라면 화두 수행에 나를 바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화두 참선법은 일생을 바칠 가치가 있습니다. 자신의 인생문제는 나만이 해결할 수

있어요. 참나를 찾아 나서는데 무슨 하자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성인은 씨앗 심는 것을 중요시하지만 중생은 결과만 얻으려고 합니다.

씨앗을 심지 않으면 결과가 나오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어째서’하고 의심을 품을 때 그것이 씨앗 심는 것입니다.

그 시간은 부처가 된 것입니다. 이는 화두가 작용이 된 것이거든요.

거기에 의심이 가고 잘못될 것이 없는 것처럼 이유를 붙일 필요도 없습니다.

(컵을 들어보이며)이걸 뭐라고 합니까?

“컵이요.”(대중) 이 컵을 몸뚱이라고 합시다.

이 컵 안에는 물이 있습니다. 우리 몸 안에는 어떤 물이 있습니까.

망상번뇌라는 물이 있습니다.

망상번뇌는 흙탕물이 되어 우리 몸안을 계속 돌아가고 있습니다.

흙탕물이 돌아가듯이 돌아갈때는 그 안에 찌꺼기가 보입니까 안보입니까?

“안보입니다.”(대중)

여러분이 텔레비전을 보거나 다른 사람하고 말할 땐 그 안에 있는

망상번뇌가 보일 리가 없습니다.

점점 찌꺼기를 집어 넣고 있으니 오히려 더 커져갈 뿐이죠.

그런데 가만히 놔두면 안에 찌꺼기가 가라앉습니다.

이때는 지금까지 내 속에 있던 찌꺼기가 보입니까, 안보입니까?

“보여요.”(대중)

망상번뇌는 바깥에서 들어온게 아니라 내 속에 있으면서 주인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화두는 이 망상번뇌를 볼 수 있을 정도로 가라앉게 해주는데, 대단하지 않습니까?

내 속에 있는 이 망상번뇌를 화두로 바꾸는 이게 공부입니다.

이건 딱딱 맞아 떨어지는 일이라구요.

화두 드는 수행자는 왜 뜰앞에 잣나무라고 했는지 조사관을 타파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화두 조사관을 타파하고 도를 깨닫는 걸 목적으로 해야지,

하는 도중에 뭐가 나타나거나 뭐가 보이는 것에 현혹되지 마세요.

여러분도 오늘부터는 화두를 등불·스승으로 삼고 화두에 의지해서

망상번뇌에 속지 않고 살아가 보세요.

이 좋은 참선법을 만났으니 화두에 인생을 바칠 수 있는 씨앗 되기를 바랍니다.



 

내 사랑도 씨앗처럼 리필할 수 있다면...

 
본래 진정한 사랑에는 
이별이라는 이유로
슬퍼하거나 아파야해할 이유가 없습니다.

진정한 사랑에는 만남이 그러했듯이 필연적으로 이별이 동반한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이별이 한없이 슬프고 아픈 것은 사랑이나 만남은 영원해야 한다는 아집과 착각, 욕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떠한 감동적인 사랑도 가슴 뭉클한 만남도 결론을 먼저 말한다면 결국엔 이별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영원하거나 무한한 것이 아니고 덧없이 짧고 유한하기에 더욱 소중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짧은 인생사에서 만나고 사랑하는 기간이란 더욱 짧을 수 밖에 없기에 사랑의 소중함과 가치가 더욱 빛나는 것입니다.

만나는 순간, 헤어짐을 간파한 사람은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 최선을 다해야한다는 것을 압니다. 사랑만 하기에도 짧은 예정된 시간이 아깝기 때문입니다.

이해와 사랑 배려만이 나에게 주어진 예정된 사랑에 대한 책임이고 아낌이며 최선책이라는 것을 가슴에 늘 간직하고 실천하기가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먹을 것이 귀했던 어린 시절, 눈깔사탕 하나 입에 물면 어찌나 소중하던지 입안에서 살살 굴리며 빨리 녹아없어지면 어쩌나 한없이 아쉬워 했던 그때를 생각해보세요.

사랑은 한없이 달콤하기도 하지만 잠시만 방심하고 아끼고 배려하지 않으면 금방 녹아없어지고 결국 허무와 상실감만 남는답니다.

자신의 잘못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짧디짧은 사랑의 시간도 다채우지 못하고 일찍 마감해버리고 그리고 방황하거나 다른 사랑의 대상을 물색하는 분들...

사랑엔 리필이 없습니다. 잘못을 깨달았으면 그때부터 더욱 내 사랑하는 대상의 소중함을 알고 하나 하나에 최선을 다하여 공든탑을 쌓아가는 길이 있을 뿐...

오늘은 무한 리필이 가능한 그 커피숍에 가셔서 커피말고 사랑을 리필해 달라고해보셔요.

오늘은 씨앗이란 씨앗은 다판다는 그 흔한 종묘상에 가셔서 사랑의 씨앗 하나만 사와 보셔요.

사랑을 커피처럼 리필할 수는 없더라도 사랑의 씨앗을 꽂씨처럼 종묘상에서 되살수는 없더라도... 그래서 주어진 사랑의 시간이 너무나 유한하고 짧다라는 사실을 알수만 있었다면...

결국 사랑의 씨앗도 눈물의 씨앗도 환희나 희망도 또는 모진 절망, 슬픔과 아픔도 내 마음 밭에서 자라고 꽃피워 열매로 맺어진다는 사실을 아셨다면...

지금 나에게 주어진 대상에 대한 이 사랑의 소중함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진정한 보석임을 아셨다면 당신은 어느새 행복에 도달해 있을 것입니다.

사랑은 순간순간 매일매일 최선을 다하여 주어진 시간까지 가꾸고 꽃피워 가는 마음의 밭일 뿐, 언제든 쏟아버리고 리필할 수 있는 커피이거나 수시로 뽑아 버리고 다시 심는 씨앗일 수는 없답니다.

만나는 것은 반드시 헤어지는 것... 생자는 필멸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고보면 만남과 이별, 사랑과 미움이 둘일 수 없습니다. 만남의 시간이 다하면 바로 이별이고 사랑이 곤궁해지면 미움이 되며 이 육신 취합의 인연이 허물어지면 죽음이라합니다. 그러기에 현제의 삶과 인연이 더욱 소중한 것입니다. 가슴 미어터지도록 뜨거운 가슴 나누우고 서로 볼 부비우며 사랑하고 또 사랑하며 살고 볼 일입니다.


 -까치의 글-
 
까치 소리에 가슴이 미어집니다.
백번 맞는 말씀입니다. 사랑할 수 있을 때 
그 인연 소중하게 아끼고 사랑하며 살아야지요 
아무리 발버둥 치어도 이별의 자리는 마련이 되어있고
다시 리필할 수도 없는 것이 사랑임을 알지요.
그러기에 후회없이 사랑하며 살으렵니다,--


 

  생명의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