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2. 7. 23:43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부처님 당시에는 부처님이라는 칭호가 없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위대한 스승님! 또는 스승님, 이라 불리셨다고 합니다.
헌데, 결집이 끝나고 세월이 흘러 대승불교사상이 활발해지면서 후대사람들이 석가세존께서 살아오신 발자취를 더듬다보니 당신의 살아오신 삶 속에서 저절로 이와 타당하고 합당한 명칭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이를 논리 정연하게 나열하다보니 이러한 칭호가 생겨난 것입니다.
우리가 관음시식이라는 제를 지낼 때 제의 중심부에 다달으면 “여래십호”라 하여 여래의 열가지 명호를 부르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열가지 명호에 대해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 열가지 명호를 꼭 부처님의 명호라 여기지 마시고 우리 어릴 적에 우리 눈에 비쳤던 어머님의 모습이 관세음의 모습이었으며 여래의 열가지 명호, 역시나 어린 우리 눈에 비친 우리 부모님의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저의 해석을 잘들으시면 아! 그렇구나 하실 것입니다.
부처님의 열 가지 다른 이름 : 많은 불교 경전에서 부처님은 불(佛), 붓다 등 이외에도 다른 많은 이름으로 불려집니다.
그 중 대표적인 호칭 열 가지를 여래십호(如來十號)라고 한다. 여기서는 부처님의 열가지 다른 이름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음미함으로써 부처님이 어떤 분인가를 다른 각도에서 정리해 보고자 하겠습니다.
첫번째인 여래란 뜻은 산스크리트어 타타가타를 번역한 말로 직역하면 타타란 진실, 진리라는 뜻으로 여실, 또는 여시라는 뜻이고 가타 또는 아가타라는 말은 가타는 가다라는 뜻이고 아가타는 도달, 오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플어보면, “그와 같이 오는 것,
“있는 그대로 오는 사람이라 하였다.
그래서 과거 칠불처럼 같은 길을 따라 열반의 피안에 가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이것은 시방삼세에 상주불변하는 부처님의 법이 중생제도를 목적으로 다른 명칭이나 다른 몸의 부처님들로도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흔히 우리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석가여래, 아미타 부처님을 아미타여래라고도 부른다.
그러므로 여래란 부처님이라는 호칭과 함께 가장 중요한 부처님의 이름인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의 열 가지 이름을 여래십호라 하는 것이다.
여래십호란 여래(如來), 응공(應供), 정변지(正遍知), 명행족(明行足), 선서(善逝), 세간해(世間解), 무상사(無上士), 조어장부(調御丈夫), 천인사(天人師), 불세존(佛世尊) 등 이상 열 가지를 말합니다.
응공은 응수공양(應受供養)에서 온 말로 깨달음을 얻었기에 마땅히 공양을 받아야 될 분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응공은 산스크리트어 아르하뜨(Arhat)를 번역한 말로 아라한(阿羅漢) 등의 말의 유래와 같습니다.
정변지란 산스크리트어인 삼먁삼보리
(Samyaksambodhi)로 등정각자(等正覺
者)와 같은 말로 우주만물의 모든 이치를 완전하고 바르게 깨달은 분이라는 뜻입니다.
명행족이란 깨달음의 지혜와 그 실천을 함께 갖추신 분이라는 뜻이며,
선서는 인으로부터 과에 가기를 잘하여 생사고해바다에 빠지지 않고 고통스런 생사윤회의 강을 건너가신 분이라는 뜻이고,
세간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이치를 완전하게 이해하신 분의 의미입니다.
무상사는 산스크리트어로 아뇩다라
(Anuttara)인데 그 어떤 것보다 위에 계시는 분,
조어장부는 사람다루기를 잘하시어 대자대비의 마음으로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분,
천인사는 하늘의 신과 중생의 스승을 의미합니다.
불세존은 불과 세존이라는 두 가지 명칭이 함께 쓰인 경우로 불은 붓다 깨달은 사람 그리고 세존은 중생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분이란 뜻으로 불세존은 말 그대로 부처님이라는 뜻입니다.
“석가모니불”의 의미 ?
반야심경 중에는 아뇩다라 삼먁삼보리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곧 부처님의 다른 두 가지 이름, 즉 무상사와 정변지를 말하는 것으로 이 때는 부처님이 얻은 최상의 절대적인 깨달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부처님을 아뇩다라 삼먁삼보리 타타가타[無上正等覺如來]라고도 하는데 이
것은 최상의 절대적인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이라는 뜻으로 부처님에 대한 최고의 존경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도움되셨기를 바랍니다.
대저, 우리는 태어나서 살다 세월이 가면 죽는 것으로 알고들 있고, 잘 먹어주고 열심히 운동해주면 되는 것으로 알고 살아갑니다.
방송에서도 요즘 웰빙이라하여 온갖 좋은 음식들을 선보이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마, 진시황이 지금의 우리를 본다면 나보다 더 한 놈들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래도 그 시대의 도사나 술사들은 숨쉬는 것에 중요성을 알고 토납법이라 하여 숨쉬는 것을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를 연구하고 실천했던 흔적들을 볼 수 있답니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들은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없이 잘 먹고 열심히 에어로빅도 하고 온갖 운동으로 건강장수의 전부로 알고 있습니다.
숨 한번 들여 마셨다가 못 내쉬면 저 세상이요. 내쉬고 못들여 마시면 이웃과 하직인사인 것을 말입니다.
방송 매체들도 이렇게 숨쉬는 것에는 전혀 소개조차도 못하고 안하고 있답니다.
왜냐? 숨쉬는데 세금 안 붙기 때문이지요.
국세청장이 이 도리를 알아야하는데 말입니다.
우리 살아가는 것이 백년을 산다한들 삼만 육천오백일이 될 것이고, 우리들은 자기 자신이 오래 살 것 같이 생각하나 백세를 넘길 수 없으며, 또한 많은 재산을 모으기 위하여 남에게 악한 행동하기를 서슴치 않는 인간들을 보십시오.
사는 동안 욕심은 욕심을 낳고 살아가는데 다만 편리할 뿐인 재산을 늘리고 지키기 위하여 또 얼마나 못된 짓들을 하고 있는지 주변을 둘러보면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본래 인간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간다고 하지만 갈 때는 그 빈손마저도 두고 가는 것을, 이른 아침 꽃잎에 맺힌 이술 방울이나, 하얗게 내렸던 서리가 얼마나 가는지 보십시오. 한낮이 되면 다 없어져 버리고 맙니다.
그토록 매섭던 추위와 쌓였던 눈들도 때가 되면 다 녹아버리고 응달의 잔설들만 추하게 남았다 사라지고 맙니다. 이것은 허무주의가 아닙니다.
자연의 현상인 것이며 인간 역시나 자연의 일부에 지나지않는 것입니다.
“칠불통계에 나오듯이” 살아 있는 동안 善의 씨를 뿌리며 선한인연을 짓고 산다면 이 또한, 삶을 마감할 때, 행복한 삶을 살다가 가는 것이고 “자작자수”가 아닐런지, 매일매일 살아있는 삶 속에서 자기 삶을 되돌아 봐야합니다.
청호 휴정의 선가귀감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知安卽榮 知足卽富, 人無 百世人 枉作 千年計,
大夏千間 夜臥八尺, 糧田萬頃 日食二升.
“편안한 줄 알면 영화롭고, 만족할 줄 알면 부자이건만, 인간은 백세를 사는 사람이 없는데 헛되이 천년의 계획을 세운다. 천간의 큰집에 살아도 밤에 눕는 자리는 여덟 자요, 한없이 넓고 좋은 밭을 가졌어도 날마다 먹는 것은 두 되일 뿐이다.” 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앞으로 닥쳐올 고통스러운 상황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닥쳐올 고통스러운 상황을 피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사람들은 온갖 궁리들을 하게됩니다. 허나, 오늘 밤 깊은 잠에 빠진다고 해서 내일이 오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잠자리에 들기 전 낮 동안에 최선을 다해 내일을 위한 준비를 해둔다면 해둔만큼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걱정스러운 망상에 의한 욕심과 번뇌에 의한 고통을 다 잊어버리고 잠에 들기 때문에 편안한 잠자리에 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넉넉한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항상 준비된 마음일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행복을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교경에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욕심이 적은 사람은 남의 비위를 맞추는 일이 없고, 갖가지 욕망에 끌려가지도 않는다. 욕심이 적은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평탄하여 근심과 걱정과 두려움이 없으며, 어떤 일을 당해서도 항상 여유가 있게 마련이다.”
해탈은 욕심이 적은 사람에게 찾아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한때는 마음을 닦고 온갖 공덕을 짓다가도 어느 날 욕심과 번뇌라는 도둑을 만나면 그 동안 쌓았던 착한 가르침을 잃어버리게 되고 쌓았던 공덕도 다 잃어 버리게 됩니다.
또, 자신만 아니라 남의 공덕도 잃어버리게 합니다. 그리하여 몸이 허물어지고 목숨이 끝난 뒤에는 살아생전의 업식에 따라 천층만층으로 갈라지는 삼악도 윤회의 길에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요즈음 지혜 없이 사는 사람들, 자기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그런 생각조차도 못해보면서, 아직은 죽을 때가 아니라는 착각 속에서 탐욕에 노예가 되어 어두움을 헤매면서도 자기 자신은 아주 지혜롭고 나만은 광명 속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주위에 비일비재합니다.
자기와 주변을 둘러보지 못하고 앞 만보고 걷다 보니 자기 앞에 탐욕이라는 장애물이 자기 자신을 망치는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빈손으로 왔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권력과 재물, 명예, 이 모든 것들과 자신이 숨쉬며 살고 있는 시간까지도 빌려 쓰고 있다는 것을, 내 것이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고 살다 보니, 모든 것을 죽는 순간까지 영원히 내 것으로 알고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그것들을 지키기 위하여 애착심을 일으키고 집착하고 남을 모략하고, 욕하고, 미워하고, 없는 것을 날조하며, 기를 쓰고 지키기고자 하는 인간 중생들의 한심한 작태를 보면서 모순된 마음에 집착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명경대에 비춰 본다면 어떻게 보일런지요.
이 법회에 참석하신 여러분들께서는 이제로부터,
한 생의 모든 것들이 다만 빌려다 쓰고 있는 자신의 모든 삶의 순간들을 확연히 알아차리고, 나 아닌 다른 가족들이나 남들에게 당신은 나를 좀 위해 달라, 나를 위하여 희생해달라고 하지말고 자기 자신이 희생하면서 남에게 보탬이 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해 보면 어떨런지요.
그리하여 은은하게 인간다운 향기를 뿜어 주는 아름다움이 주변에 선한 인연이 되도록 우리는 노력하면서 지금의 나 자신을 뒤 돌아보며 참회와, 참회를 통하여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고 잠시 빌려 쓰고 있다는 지혜를 잊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지 싶습니다.
心生卽 從從法生이요, 心滅卽 從從法滅이라. 南無阿彌陀佛 ( 從=種 )
태전선사의 교훈지옥계의 나찰들이 중생들을 악도로 끌어들이는데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지어가는 열가지의 악업중에 다른 것들은 낚시 질하여 걷어올리는데 오로지 색업만은 수행자는 물론이고 종교성직자라는 자들마져도 그물로 건져올린다고 했다는 말이 있답니다.
그러나, 태전선사께서 남기신 시를 음미해보면 당당함을 재산으로 삼을 수 있을 것 입니다.
요즘 세상은 요지경이지만 말입니다.
중국 당나라 때 태전(太顚)선사라는 스님이 있었다. 한 때 이 스님이 축융봉(鷲融峯)이라는 산봉우리 아래 석굴에서 좌선 수행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당대의 시인 한퇴지가 인근 고을에 좌천되어 와 머물고 있었다. 한퇴지가 흥연이라는 기생을 시켜 태전선사를 시험하게 하였다. 세속을 등진 도승(道僧)이 정말 여색의 경계를 초월했는지 고의적으로 수작을 걸게했던 것이다.
태전의 석굴에 찾아간 흥연이 갖은 수단을 써서 스님을 파계시키려 해도 스님은 끝내 여자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할 수 없이 흥연이 사실은 태수 한퇴지의 명을 받고 스님을 시험하러 왔다고 자초지종을 말하자 태전선사가 흥연의 속치마에 한 수의 시를 지어 보냈는데 그 시가 전해진다.
십년불하축융봉(十年不下鷲融峯) 십년을 축융봉에서 내려가지 않고
관색관공색즉공(觀色觀空色卽空) 색을 관하고 공을 관하니 색이 곧 공이라
여하조계일적수(如何曹溪一滴水) 어떻게 조계의 한 방울의 물을
긍타홍련일엽중(肯墮紅蓮一葉中) 함부로 붉은 연꽃 이파리에 떨어뜨리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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