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다운 신심이란 무엇인가?

2010. 2. 7. 23:36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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信心, 믿는마음. 무엇을 믿을 것인가?


우리는 신심이 있다거나 없다거나, 신심이 깊어졌다거나 떨어졌다는 말을 종종 합니다.

그렇다면 신심은 무엇이며, 무엇을 믿는다는 것인가.?


믿음이란, 그 무엇인가를 결정적으로 그렇다고 여기는 말입니다.

이른바, 대승기신론소별기 제1권에 의하면, 이치가 실로 있음을 믿으며, 닦으면 얻을 수 있음을 믿으며, 닦아서 얻을 때에는 무궁무진한 덕이 있음을 믿는 것이다. 했습니다


신심이란 진리가 실로 있음을 믿고, 수행으로 얻을 수 있음을 믿는 것인데, 이러한 믿음은 어떻게 생기는 것인가.

그것은 삼보에 의해 생긴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을 우러러 보며 그 위대한 덕을 믿고, (예시하면) 그도 우리와 같은 범부에서 부처가 되었다는 것을 믿고, 따라서 나도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아함경에 성불의 가능성을 제시)


이를 위한 방도와 이러한 이치에 대한 설명이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 모두 있으며, 위대한 수행자들에 의해 그 일이 현재에도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심이란 삼보에 귀의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최무차경에 이르기를, 이제 저는 사람 중에서 가장 존귀하신 부처님께 귀의하나이다.

욕망을 떠난 것 중에서 가장 존귀한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하나이다.

온갖 집단 중에서 가장 존귀한 승가에 귀의하나이다.


우리가 법회 때마다 맨 처음 삼귀의라는 게송을 합니다.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것은,

첫째는 역사적 부처님으로서 석가모니 부처님께 귀의하여 그 분이 삶 속에서 보여주신 교훈을 몸으로 받아 실천하고자 하는 것이다.


둘째는 나고 감도 없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법신불께 귀의하는 것입니다.

(즉심시불, 심외무법이라 했듯이)

그것은 우리의 자성불에 귀의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가르침에 귀의한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셋째, 승가에 귀의한다는 것은 부처님의 족적을 밟으며 부처님의 삶에 닮아가고자 그렇게 살고 있는 분들께 귀의한다는 것으로 그분들을 의지하여 불법을 배우겠다는 것입니다.

 

그럼 승가란 무엇인가? 승가란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의 4부 대중을 말하며 불법을 따라 배우고 실천하는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불교인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자비심과 보리심이 뛰어나 열심히 수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마리아 테레사수녀님처럼, 진실로 왼손의 일을 오른손이 모르도록 봉사를 실천하는 분들)


이러한 분들을 진정으로 존경하고 찬탄할 것이며,

우리가 속해 있는 가정이라는, 직장이라는, 소속된 모임이나 단체라는 수행공동체에 화목과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자세로 임하는 것이 바로 몸에 베인 삼귀의인 것 입니다.


이러한 삶에 지혜를 가지고 살아가며, 이러한 지혜로움이 가정 안에서 실천이 되고 몸에 베었더라면, 엊그제 연천의 총기사고 따위도 없었을 것입니다. 

진실로 진실한 진리가 있으며 이 진리는 당시에 실존하셨던 부처님께서 역사적으로 실천수행을 통해 보여주셨던 것처럼 우리도 수행을 통해 도달할 수 있음을 믿는 것이 신심인데 이것은 삼보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마치 끝없는 언덕길을 오르며 가쁜 숨을 쉼 없이 몰아쉬면서도 주저않고 싶고 그만두고 싶은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의지로

나의 근기가 나약함과 하열함을 스스로 알아차리며 수행정진을 게을리 하지 않을 때 다겁생래 알게 모르게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지어온 업들이 소멸되며 업으로 인한 그림자 같은 업장들도, 업이라는 본체가 사라짐에 따라 업장이라는 그림자 또한 사라질 것입니다.

이렇게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또한 자신의 의지에 의한 것일 뿐이며 이를 가능하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의지에뿌리를 둔 신심인 것입니다.


일본의 유명한 불교학자인 마쓰다니후미오란 교수가 한말이 떠오릅니다.

쥐꼬리만한 신심도 없으니 기도가 되질 않고, 기도를 하지 않으니 그나마 남아있던 쥐꼬리신심이 없어지더라, 여러분들의 현주소는 지금 어디일런가 싶습니다

지금 실물경제는 바닥이라고 하면서도 휴가를 안 가고는 배겨나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그만큼 우리네 삶의 질이 높아진 면도 있겠으나, 남들 다가는 휴가에 우리는 왜 안가냐는 가족들의 등쌀도 있었을 것이고, 복잡한 일상을 벗어나 재충전을 위한 시도도 있었을 것입니다.


허나, 이렇게 산사에 오시어 시원한 계곡에 발도 담궈보시고 법당에 참배와 더불어 법회에 참석하시어 보심도 좋을 거라 싶습니다.


각설하고, 우리가 적어도 불교라는 한 종교를 선택하여 신앙행위를 함으로써 자신의 삶에 의지처가 되고자 한다면 먼저 부처님께서 살아생전에 우리에게 남기셨던 말씀들을 정리해보고 말세 중생인 우리들에게 전해주려 하셨던 참다운 가르침을 찾아가보는 여행도 의미와 보람이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인간의 몸을 빌어,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 몸으로 수행을 이루어 완전한 인격자가 되셨으며, 그 삶은 길에서 태어나, 길에서 살다, 길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인간으로서 생멸의 길을 보여주셨고, “너희도 내가 행한 수행을 실천한다면 부처를 이루리라” 하셨던 가르침, 이 세상 종교의 어느 교조가 일반 범부중생들에게 동등한 자격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주신분이 계시겠습니까?


우리는 부처님께서 일생동안 남기셨던 말씀들을 요약하여 골수만을 신앙심의 뼈대로 정리하여 두었을 때, 불자로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며, 혼탁한 현실의 오탁악세에서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 까지도 무명에 빠져 떠밀려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삶으로부터 지혜로운 광명의 빛을 찾아 살아갈 수 있는 참다운 정신적인 의지처이자 불교라는 신앙행위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여, 부처님께서 남기셨던 일대사의 가르침들을 다섯단락으로 나누어보면,


첫째로 화엄시라 하여, 세존께서 성도하신 후, 그동안의 힘겨웠던 수행의 완성을 사흘 동안 홀로 즐기시다 홀연히 밤하늘을 올려다보시고 우주법계의 대 파노라마를 관하시고 21일 동안 중중무진의 화엄법계를 노래하신 게송이 바로 화엄경이셨던 것입니다.


둘째로아함시라 하여, 세존께서 우주법계에 대한 말씀을 홀로 설하시다, 이를 중생들이 알아들을 수 없음을 깨닫고 중생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12년간을 녹야원에서 법을 설하셨으니 이때 설해진 아함부가 후대에는 남전 북전으로 나뉘어져 현재 우리가 아는 장아함과 잡아함, 증아함과 증일아함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화엄경, 반야경, 법화경, 열반경등의 4부 경전을 제외한 모든 경전을 방등부경 이라하며 이때를 방등시라 하여, 녹야원에서 아함을 설하신 후, 8년 동안 지금의 우리가 아는 유마경, 금광명경, 능가경, 승만경, 무량수경 등의 방등부의 여러경전을 설하셨던 것입니다.


네 번째로 반야시라 하여, 22년 동안 600부가 되는 반야부의 경전을 설하시어 아집과 집착과 애욕과 질투와 증오와 미움과 신기루 같은 허상과 욕구에 휘둘리며 온갖 번뇌와 무명 속에 허덕이는 중생들에게 참답고 지혜롭게 살아가는 무상의 아뇩다라 샴먁삼보리의 길을 일러주셨던 것입니다.


다섯 번째로 법화열반시라 하여, 최후의 8년간을 당신의 삶을 마무리하고자 하셨던지, 말세 중생들에게 참다운 보살은 오탁악세에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위해 법화경을 설하시고 입멸을 앞두시고 열반경을 설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조계종의 소의경전이자,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지혜로운 삶의 비젼을 제시해주고 있는 금강경은 어떠한 경인가? 알아보겠습니다.


금강경은 반야부에 속해있는 경으로 대반야경중 제577부 째 해당되는 능단금강분, 분량 300송 32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금강경의 한역본은 6가지가 있는데 가장 먼저 번역된 번역본은 경, 율, 론의 삼장에 통달하신 구마라습(鳩摩羅什, 343~413)이라는 법사님의 번역본을 위주합니다.  


또, 금강경의 대의를 두 가지로 나누어 보면 집착을 깨뜨리고 세가지 공의 이치를 나타내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파이집 현삼공(破二執 現三空)이라하여 아공, 법공(我空, 法空)이라하여 두 가지의 집착을 여의고, 삼륜체공, 삼륜청정이라는 주는 자와 받는 자, 주고받는 시물조차도 존재함이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금강경의 주된 구성은 수보리의 물음에 의해 부처님이 대답하신 질문과 대화의 형식으로 전개되며, 수보리가 부처님께 두 가지의 질문을 한 것은,

“응운하주 운하항복기심(應云何住 云何降伏其心)이러니, 보살은 세존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자 하는 보리심을 일으켰으되 초발심시 변정각이요, 작심삼일이 되지 않도록 즉, 그 마음이 시간이 가도 변하지 않도록 하려면 그 마음을 어디에 머무르도록 하며, 또 일상에 일어나는 온갖 번뇌와 나를 괴롭히는 주변의 번뇌의 씨앗들로부터 어떻게 하면 그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그러한 온갖 번뇌를 이겨나갈 수 있겠습니까?” 하는 질문인 것입니다.


이 질문은 현실을 어지럽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삶에서 어떻게 하면 삶의 질곡에서도 흔들림 없는 신앙심과 삶의 올바름을 지켜나갈 수 있는가라는 의미이자, 금강경의 실마리를 푸는 말로 어떤 자세로 수행에 임하느냐하는 주(住)와 수(修)가 합해진 물음으로 보살의 생활과 수행과 마음가짐에 대해 묻는 것인 것입니다. 


이에 대한 부처님 말씀은 딱 한마디로 요약됩니다.   바로 “ 무 집착 ”


그러나, 없는 것은 무능력이지 무소유는 아닌 것입니다.

진정한 무소유는 재력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나, 자신의 재력에 대해 일체의 집착이나 애착이 없이 고통받고 힘든 이들에게 베풀어 줄 수 있고 나눌 수 있는 마음이 진정한 무소유인 것이지 없는 것은 무소유가 아니라 무능력일 것입니다.

허나, 그 소유에도 삼륜청정의 원칙은 존재하는 것입니다.


금강경은 중국선종의 5조홍인과 6조혜능 대사가 중요시 했던 경으로, 금강경의 사구게 중에 가장 유명한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 비상 즉견여래”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 하여, “무릇 존재하는 일체의 모든 것은 영원함이 없이 모두가 잠시 존재하다 사라지는 허망한 것이다. 만약 이렇게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가치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곧 여래를 보리라.” 하셨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소유권이라는 것. 소위 등기문서이니 내 것이니 네 것이니 하는 삶에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그 모든 것들이 죽을 때는 다 놓아두고 가야하는 것이니  어찌 소유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이 모든 것들은 살아생전에 일시 점유하다 갈 뿐이니 선인들이 들려주는 말은 이 모든 것들을 잠시 빌려 쓰다 가는 것 뿐 이라는 가르침들을 해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삶의 정곡을 깨닫게 된 사람에게 어찌 착심으로 인한 괴로움으로 농락당함이 있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부처님께서 남겨두셨던 佛說의 다섯단락을 새겨 아! 이 경은 부처님께서 언제 남기셨던 경이로구나.

하는 경전에 대한 근거를 알아둠도 신행생활에 더욱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성불하십시오.

 








66장 -[마음을 비워야 진정 행복할 수 있다] 
人知名位爲樂 不知無名無位之樂爲最眞
인지명위위락 부지무명무위지락위최진
人知饑寒之憂 不知不饑不寒之憂爲更甚 
인지기한지우 부지불기불한지우위갱심
사람들은 명예가 있고 지위가 있음이 
즐거움이 되는 줄만 알 뿐, 
이름이 없고 지위가 없는 사람의 
즐거움이 참 즐거움인 줄은 모른다. 

사람들은 굶주리고 추운 것이 근심이 
되는 줄은 알고 있으면서도 
굶주리지 않고 춥지 않은 
사람의 근심이 더욱 심한 줄은 모른다.


  
[해설]
명예와 지위, 물질적인 풍요 등은 
인간이 갈구하는 목표요 이상이다. 
그러나 그런 것들의 노예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그보다는 궁극적으로 생각해 볼 때, 
그런 것들이 과연 
인간에게 행복만을 가져다 주는 것일까? 
역사를 되돌아보고 현실을 직시 할 때 
꼭 그렇다고 자신있게 대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의 행복이란 담담한 생활 가운데 
순회巡廻에 따라 살아가며 만족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남포(南褒)는 중종 때 권신으로 유명한 
남곤(南袞)의 동생이었다. 
그는 형이 권력에 눈이 어두워 날뛰는 것을 보다 못하여 
거짓 눈이 멀었다 핑계하고는 
벼슬에서 물러나 무명 옷과 해진 갓을 쓰고 
전국 산천을 유람하며 일생을 마쳐 
형은 더러운 이름을 남긴 반면 
그는 깨끗한 이름을 역사에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