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양게송에 대해서 말씀드립니다

2010. 2. 5. 22:25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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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집에서 식사할 때 외우는 공양게송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공양게라는 게송은 공양할 때 외우는 짧은 글입니다.

공양은 이바지하여 기른다, 베풀어 기른다는 뜻이 있습니다.

베풀고 나누는 사람은 공덕을 기르고, 베품을 받는 사람은 음식이나 물품, 혹은 지혜의 가르침을 통해 몸과 마음을 성숙하게 기르게 됩니다.

이렇게 베푸는 것을 공양이라 하지만, 또 한편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공양(식사)한다고도 합니다.

 

공양게는 음식을 공양할 때 외웁니다.

그런데 이 공양게송은 요즘 큰절의 대중처소에서도 이른 아침 큰방에서 대중들이 아침 발우공양을 할 때만 하고 점심과 저녁공양시간에는 생략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랍니다.


원래, 전통적인 불교의 공양은 식당작법이라고 하여 절차가 매우 복잡합니다. 

발우를 펴기 전에 하는 공양게송이 있고, 발우를 펴면서 하는 게송, 음식을 나누면서 하는 게송, 공양을 먹기 전에 발우를 이마 앞에 들고 하는 게송, 공양을 먹고 나서 하는 게송, 발우를 씻고 나서 하는 게송, 발우를 발우보자기에 다 싸고 나서 공양을 마치면서 하는 게송 등,  7개의 게송을 하게 됩니다만,

이 가운데 오관게라고 하는 게송(짧은 글)이 있습니다.

계공다소 양피래처(計功多小 量彼來處) 이 음식이 온 곳과 그

                            공덕의 많고 적음을 헤아려보니, 

촌기덕행 전결응공(忖己德行 全缺應供) 내 덕행으로는 떳떳하

                                 게 공양 받기가 부끄러워라

방심이과 탐등위종(防心離過 貪等爲宗) 마음을 다스려 허물을

                         벗어나는 것에는 탐욕 등이 으뜸이니

정사양약 위료형고(正思良藥 爲療形枯) 몸이 마르는 것을 막

                                       는 약으로 여겨

위성도업 응수차식(爲成道業 應受此食) 깨달음을 이루기 위하

                                     여 이 음식을 받습니다.

 

이렇게 공양할 때는 이 다섯 가지를 끊임없이 살피라는 뜻으로 오관(五觀)의 게송이 있는데 이 오관게가 공양게의 핵심 내용입니다.


그런데 곤지암 우리절에서는 회주스님의 한글역경에 뜻에 따라 알기쉽게 우리말로 공양게송을 합니다.

이 음식이 어디로부터 왔는가.

내 덕행으로 받기가 부끄럽네.

내 마음에 탐, 진, 치 온갖 어리석은 욕심

모두 버리고, 건강을 유지하는 약으로 알아

이 공양을 받습니다.

나무 마하반야바라밀.


이렇게 우리절에서는 목요대비주와 일요가족법회가 끝난 후, 위와 같은 게송을 모든 대중이 다함께 식탁에 앉은 후, 법사가 위 게송을 하고 나서 대중들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피안의 저 언덕에 이르는 큰 지혜에 귀의합니다.)라는 후렴만을 함께 하게 됩니다.


본듸, 게송을 모두가 다 함께 하면 좋으련만, 어쩔 수 없이 이렇게 한답니다.


한 톨의 쌀알이 한술 밥이 되어 내 앞에 오기 위해서 벌어지는 과정에는  온 우주가 함께 하게 됩니다.

태양은 빛을, 바람은 적당히 불어야 하고 흙은 벼를 지탱해야 하고, 농부들은 기르고, 기술자는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농구를 생산하고 상인은 유통하고, 주부는 음식을 만들기 위해 정성을 들이고, 한 톨의 쌀알에서조차 모든 이들의 수고로움을 발견할 줄 아는 사려 깊음과 온 우주의 노력을 발견한다면 보잘것 없는 나의 작은 공덕으로 이 음식을 헛되이 먹을 수 없겠죠.

그런데 식당에서 식사하는 이들의 뒷 자리를 볼라치면 남겨진 밥그릇에는 고추가루와 함께 남겨진 발복이 아닌 박복의 흔적들이 너무나 많이들 있답니다. 

 

옛 스님들은 쌀 한톨의 무게가 일곱 근(一米七斤)이라고 했답니다. 쌀 한톨에 담긴 시주의 은혜가 무겁기 3.5킬로그램이라는 것으로, 한 그릇의 밥은 실로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이니 한 순간도 헛되이 보내지 말고 열심히 수행 정진하여 시주의 은혜를 갚으라는 뜻이었고, 이런 깊은 속뜻을 새기고자, 중생의 아픔을 함께하고 뒷뜰의 텃밭만을 가꿀 줄 알 뿐이지 인과 연의 업력의 밭에 복 지을 기회가 없는 중생들에게 복 밭에 씨를 뿌릴 기회를 주기위해 예전에는 탁발이라는 수행을 한 가지 수행의 덕목으로 삼았으나, 요즘에는 조계종에서는 탁발을 금기하고 있으며 스님들의 가사(승가리.僧伽梨)가 “조(條)”라 하여 천이 덧대어져 있는 것은 밭의 이랑을 상징적으로 의미하며, 이렇게 된 데는 부처님께서 당시에는 사리라하여 그 옷감을 달리 시장에서 옷감을 사다가 옷을 지어 입으신게 아니라, 죽은 사람의 시신을 싸서 버린 천이나 남들이 입다 버린 옷의 천들을 주어다가 깨끗이 빨아 누더기로 기워 입으셨던 데서 유래한 것입니다.

 

그래서 법랍이 오래된 스님들은 가사의 기운조각(조라 부르는)이 5조에서 25조 까지 있습니다만, 이 가사가 주는 의미를 아는 절집의 사람들이 얼마나 될런지요. ^^


그래서 중생의 복 밭이 되고자 가사에도 그런 의미가 있으나 밭도 밭 나름이라, 성경의 말씀처럼 가시덤불에 씨를 뿌리면 가시덤불을 헤치고 추수하게 되고 자갈밭에 씨를 뿌리면 소출이 적을 것입니다.

이렇듯, 저부터 스스로가 기름진 복 밭이 되어 중생들이 뿌리는 공양이라는 한 톨의 씨앗이 옥수수처럼 많은 열매가 맺어 중생들에게 회향할 수 있도록 하는 기름진 福田이 되도록 수행에 힘쓰며 살겠습니다.


공양게송은 나태해지는 자기를 점검하기위해 이렇게 식사 때마다 제 일상생활 속의 수행의 밭을 일구는 호미가 되는 것이랍니다.

안심법문

오늘은 안심법문에 대해서 법문의 장을 열겠습니다.

안심법문이란 무엇인가하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자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나다, 내 마음대로, 내 생각이다. 라고 하는 그 주인공인 마음이라는 주체가 주변의 일상에 수시로 접하고 부딪치는 경계에서 번뇌와 괴로움과 흔들릴 때, 바로 편안함을 갖도록 해주는 가르침의 문이라는 뜻입니다.

일찌기 달마(Bodhidharma)대사는 인도의 향지국 왕자였는데, 인도의 법맥으로는 제27조(祖)인 반야다라(Prajnatara)존자를 스승으로 하여 진리를 깨닫고, 바른 불법(佛法)을 중국에 펴기 위하여 천신만고 끝에 중국 광동성 광주 땅에 도착했습니다.

당시, 중국불교는 경론(經論)의 교리에만 집착하고 정작 마음공부는 소홀히 하여 달마 대사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대사는 숭산 소림사 뒷산에 있는 석굴에 들어 앉아 걸식하러 나가는 외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벽을 향해 바위덩이처럼 깊은 선정(禪定)에 9년 세월동안 말 한마디 없는 벙어리로 일관하였습니다.

이때, 신광(神光)이라는 젊은 스님이 달마 대사의 범상치 않음을 전해 듣고 눈보라를 무릅쓰고 소림석굴을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신광은 달마 대사의 등뒤 석굴 어귀에 꿇어앉아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한 밤을 지새웠습니다.

눈발이 무릎을 덮고 온 몸이 얼어붙어 사뭇 저려왔으나, 죽음을 각오한 신광의 뜨거운 구도의 열기는 추호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이렇듯, 호젓한 침묵 가운데 하루해가 지나자, 그토록 목석마냥 앉아만 있었던 달마 대사는 넌지시 돌아앉아 신광을 굽어보았습니다. 신광은 반색하여 큰절을 올리고 나서, "스승님, 이 어리석은 제자가 법을 구하고자 왔습니다.

불쌍히 여기시어 거두어 주옵소서" 하자, 달마 대사는 오랜 침묵을 깨뜨리고 “위없는 대도(大道)는 엷은 지혜나 가벼운 덕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니라”  하자, 이에 신광은 비장한 마음으로 허리춤에 차고 있던 칼을 빼어 단숨에 왼팔을 잘라서 달마 대사께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솟음치는 선혈(鮮血)로 하얀 눈은 붉게 물들고 이내, 상처에서 희부연 젖이 솟아나와 상처를 아물게 하였습니다.

이때 달마 대사의 엄숙한 표정에도 깊은 감동의 빛이 역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신광의 지극한 구도의 정성은 받아들여졌습니다. 

사찰의 법당을 돌다보면 주로 그려진 벽화가 바로 이 대목입니다.

이렇게 달마스님의 제자가 된 신광이었으나 일상에서 마음이 좀체로 안정을 얻을 수가 없자, 스승 앞에 나아가 “스승님, 저의 마음은 편안하지 않사옵니다. 자비를 베푸시어 제 마음을 다스려 주옵소서” 하고 말하자, 달마대사는 “그래? 그러면 편안치 못한 그대 마음을 가져오라, 내가 편안케 하여 주리라”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신광의 마음은 당혹하여 어리둥절했습니다. 

“본시 마음이란 형체가 없거니, 불안한 마음이나 흐뭇한 마음이나 간에, 마음이란 아예 형상화 시킬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스승님, 마음이란 모양이 없기에 드러내 보일 수 도 얻을 수도 없지 않습니까” 하자, 달마대사는 “그렇다, 마음이란 필경 자취가 없는 것이니라. 그것을 분명히 깨달았으면 그대 마음은 이미 편안해졌느니라”

그러자, 자신의 생각에 사로잡혀 무명(無明)에 갇혔던 신광의 불안한 마음은 활짝 열리고, 일체의 착심이 끊어진 훤칠한 마음으로 정진을 거듭하여 마침내 대도를 성취하여 제2조(祖) 혜가(慧可)대사가 되었습니다.

그 뒤에, 혜가 대사의 회상(會上)에서 오랜 병마에 찌들어 몹시도 초췌한 젊은 수행자가 찾아와서 여쭙기를, “스승님, 저는 죄업이 무거워서 불치의 풍병으로 여러 해를 앓는 몸입니다. 아무쪼록 불쌍히 여기시어 저의 죄업을 소멸하여 주시고, 가엾은 목숨을 구제하여 주소서” 하더란 말입니다. 

그러자 혜가대사는 “정작 그렇다면 그대의 죄업을 이리내놔 보게, 내가 바로 소멸시켜 줄터이니”

이에, 말문이 막힌 젊은이는 이윽히 생각에 잠겼습니다.

“마음이란 본래 허공과 같이 텅 빈 것, 이미 마음이 그 자취가 없거니, 죄업인들 어디 흔적이나 있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젊은이는 여쭙기를 “죄업을 아무리 찾으려 하여도 도무지 그 형상이 없사옵니다”

그러자 혜가대사 또한, “진정, 그러하니라. 마음이란 본래 공(空)하여 형체가 없고 이름 붙일 수도 없는 것이니, 그대를 괴롭히는 죄업 또한 그 뿌리가 없느니라. 그대가 정녕, 그러한 도리를 깨달았으면 이미 그대는 죄업을 참회하여 소멸해 버렸느니라”

이 한 말씀에 총명한 젊은이의 마음 또한 활연대오로 열렸습니다. 

그래서 젊은이는 혜가 대사에게 “스승님, 저는 앞으로 스승님을 섬기려 하옵니다.” 하자, “그대 같은 풍병환자가 나를 따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고 거절하자, 젊은이는 말하기를 “몸은 비록 병이 있사오나, 제 마음은 스승님의 마음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고 한 경계를 표하자, 혜가 대사는 그를 대견하게 받아들이니, 젊은이는 차차 건강도 회복하고 더욱 정진에 노력하여 드디어 제3조 승찬(僧璨)대사가 되었던 것입니다.

몇십년의 세월이 흘러 승찬 대사가 환공산(晥公山)에 머무를 때, 아직 13세의 영특한 사미(沙彌)동자가 찾아왔습니다. 

동자는 큰절을 하고 대뜸 여쭙는 말이, “스승님, 자비를 베푸시어 저에게 번뇌를 해탈하는 길을 일러 주옵소서” 승찬 대사는 기특하게 여긴 나머지 “누가 너를 속박하였기에 풀어달라고 하는 것이냐” 동자는 불현듯 가슴이 막혀 잠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참으로 생각해 보니 스승님의 말씀대로 그 누가, 그 무엇이 내 마음을 구속했단 말인가? 그저 내 마음 안에서 공연스레 분별을 일으켜 일고 스러지는 번뇌 망상이 아닌가? 마음 자체가 형상이 없고 알 수 없으니, 대체 번뇌망상이 그 어디에 존재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스승님, 아무 것도 제 마음을 속박하는 것이 없사옵니다.” “속박하는 것이 없다면 다시 무슨 해탈을 구할 필요가 있겠느냐.”

이 한마디에 어린사미는 문득, 본래 비어있는 허공같이 장애 없는 마음자리를 훤히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 동자가 장차 대도를 성취하고 제4조 도신(道信:580∼651) 대사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출가한 도신대사는 60여 년 동안이나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진하여, 아예 자리에 눕는 일이 없이, 평소에 눈을 감은 듯 지냈으나 눈을 바로 뜨고 사람을 바라보면 그 위엄에 사람들이 움츠려졌다고 하는데, 그것은 깊은 삼매에서 우러나온 초인적인 도력(道力)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정통법맥(法脈)은 끊임없이 이어져 제 5조홍인(弘忍: 602∼675)대사를 거쳐 제6조 혜능(慧能: 638 ∼713)대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이후 의발전수는별전됨)

그래서 달마 대사로부터 혜능 대사까지는 오로지 순수하게 마음의 해탈만을 문제시 하였다고 하여 순선(純禪)시대라 하고, 이 때, 주로 제창(提唱)한 법문을 안심법문(安心法門)이라 하는 것입니다.

사실, 마음이란 허공과 같이 광대무변하고 무장무애(無障無碍)하여 그 무엇에도 걸림이 없고, 아무런 자취도 없는 것인데, 그렇다고 다만 허무하게 비어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실상(實相)은 무한한 능력을 원만히 갖춘 생명의 광명으로서, 바로 불성(佛性) 곧 부처님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마음이 바로 부처요, 부처가 곧 마음(則心是佛 佛則是心)”이라고들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미워하다가도 한 생각에 미움이 사그러들고 더 가까워지게도 되고, 한 생각에 함께 살던 부부가 서로 원수처럼 되는 일들이 왜? 일까요. (예: 로또 당첨된 부부)

이렇게, 인간을 비롯한 일체만유는 모두 한결같이 불성의 광명으로 이루어진 불종자를 가진 화신(化身)부처님이며, 우주의 실상은 바로 장엄 찬란한 연화장(蓮華藏)세계요 극락세계인 것인데, 그런데, 분별과 아집과 애욕과 착심으로 인한 어두운 번뇌에 가득찬 중생들이 그러한 자기 근원을 모르고 만유의 실상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지수화풍 사대가 잠시 인연 따라 이루어진 전변무상(轉變無常)한 가상

(假象)만을 집착하여 너요, 나요, 내 것이요, 하며 탐착하고 분노하고 아귀다툼하면서, 세월을 보내다 결국은 빈부귀천이 남녀노소가 차별없이 맞이하게 되는 윤회의 늪으로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사회에 만연한 비극적인 중생들의 아픔들이 널려진 이 시대의 위기를 극복하는 가장 근원적이고 유일한 길은, 일체만법은 바로 그대로 비어있는 공(空)한 도리 곧, 제법공상(諸法空相)을 번연히 깨달아서 주변의 일상으로부터 스스로 경계에 떨어져 일어나는 불안한 마음을 여의고 안심입명(安心立命)을 확립해야 하는 것입니다. 

법화경을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부처님께서 모든 경을 설하고 마치심에 이르러, 법화삼부경의 무량의경 설법품에서 말씀하시기를, 문사수일 이의각이(文辭雖一 而義各異)라고 하셨습니다.

비록 말과 글은 같을지라도, 뜻은 각각 다르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선남자야, 물은 다 같이 씻을 수 있다 할지라도 그러나 샘은 못이 아니요, 못(池)은 강하(江河)가 아니며, 시내는 바다가 아니니라. 하셨듯이, 여래 세웅(世雄)이 법에 자재함과 같이, 여래께서 설하신 일체경도 이와 같음이라. 

처음이나 중간이나 끝에 설함이 다 능히 중생의 번뇌를 씻어 끊어지게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처음은 중간이 아니요 중간은 끝이 아님이라.   

처음이나 중간이나 끝에 설한 것이 모두 말이나 문자가 비록 같을지라도 뜻은 각각 다름이 있느니라.

이 몸을 자세히 살펴보되, 그 더러운 것을 생각하여 탐하지 말라.

괴로운 일이든지 즐거운 일이든지 다 같이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것이라 생각하고 탐착하지 말라.

또 자기의 마음을 살펴보되, 그 마음이 정처 없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일어나는 무상(無常)한 것임을 생각하여 집착하지 말라.   

그리고 온갖 사물을 살펴보되, 그 가운데 실체(實體)가 없음을 생각하고 그 사물에 끌려서 미혹하지 말라.

이와 같이 공부하면 모든 고통을 끊을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일체가 유심조(一切唯心造)라 하셨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내가 마음 한 번 돌리어 생각하기에 따라 주처정토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자신의 의지대로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진정 나의 의지대로 살고 있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십시요.


나의 생각과 남들의 시선 때문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내 삶을 내 마음대로 산다고 자신있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깊이 관찰해보면 자신의 의지보다는 자신의 한 생각에 끄달리며 사는 자신을 보게 될 것입니다.


진정한 삶이란, 내가 생각하는 대로 내가 계획한 대로 내 맘대로 사는 것이 아닌 순간순간 자신의 일상을 놓치지 않고 부정을 긍정으로 어두움을 밝음으로 바꿔가고 있는가를 점검하며 스스로 자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십계호구(十界互具)라, 곧 ① 불타계 ② 보살계 ③ 연각계 ④ 성문계 ⑤ 천상계 ⑥ 인간계 ⑦ 아수라계 ⑧ 축생계 ⑨ 아귀계 ⑩ 지옥계가 각기 다른 구계(九界)의 성질을 모두 갖추었다 하여 십계호구라 

                                                     합니다.  

십계라는 것은 마음먹기에 따라 지옥ㆍ아귀ㆍ축생에 떨어질 수도 있고, 반대로 부처님이나 보살로 향상될 수 있는 성품, 곧 불성 구비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말하는 십계호구라는 것은 곧 구제를 전제로 합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우리의 마음속에는 부처님의 마음도 있고, 보살의 마음도ㆍ성문의 마음도ㆍ 아라한의 마음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지옥의 마음도, 아귀의 마음도, 축생의 마음도, 다 조금씩은 갖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경계에 머무는 시간이 짧고 긴 것의 차이 뿐이라는 것입니다.  

아라한도 선지식들도 어떤 좋지 않은 역경(逆境)에 부딪쳤을 때, 아주 짧은 찰나에 지옥의 마음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자각이 몸에 베인 아라한들은 즉시 부처님 자리로 돌아오시는 것이 범부 중생과 다른 점이고, 범부 중생은 환경이 좋은 순경(順境)에는 부처님과 같은 생각을 하고 관대한 척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잠시입니다.

다시 인연(因緣)이 작용하면 탐욕으로 빠지는 것이 선지식 들과는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십계 가운데 어디에 오래도록 머무는가에 따라 각 인연과보(因緣果報)가 다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자기의 마음을 내 생각이다 내 마음이다, 라고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안심법문에 따라 일상에서 부처님 가운데 토막처럼 지혜있게 살아가는 삶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불하십시오.

부처님 만나는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

증일아함경 19권 권청품에 있는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어느 때, 세존께서 500명의 비구들과 더불어 유행하시다가 비사리성 북쪽에 있는 암라파알리(A-mrapa-l1-) 동산에 이르셨을 때, 기생이었던 암라파알리라는 여인은 세존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부처님을 찾아가 설법을 청해듣고 감동하여 공양을청했습니다.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는 부처님께서 그 청을 받아들이자 그녀는 머리를 조아려 부처님의 발에 예를 올리고 왔던 길로 황급히 되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비사리성에 살고 있던 500명의 부잣집 귀공자들도 부처님이 5백 명의 비구들과 암라파알리 동산에 오셨다는 소식을 접하고 부처님께 공양을 청하기 위해 동산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화려한 장신구를 하고 오색찬란한 수레를 타고 있었기 때문에 귀공자들이 이동하는 모습은 마치 제왕이 행차하는 것처럼 위용이 있게 보였고, 귀공자들이 비사리성을 나와 세존이 계신 동산으로 가는 길에 도성으로 되돌아가는 암라파알리와 마주쳤습니다.

귀공자들은 그녀를 향해 왜 여자가 부끄러움도 모르고 소를 때리며 다급하게 수레를 몰아 성안으로 달려가냐고 꾸짖자, 이에 암라파알리는 내일 부처님과 비구들께 올릴 공양 준비를 위해 서둘러 돌

간다고 답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귀공자들은 자신들도 부처님께 공양을 청하러 가는 길인데 당신이 선약을 했으니 순금 천냥을 받고 공양 올릴 기회를 자신들에게 양보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기생인 암파알리는 자신의 신분을 가리지 않고 공양청을 받아주신 세존을 떠올리며,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공양 올릴 마음으로 고무된 암라파알리는 이들의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귀공자들은 만약 공양 기회를 양보한다면 10만 냥의 순금도 줄 수 있다며 거듭 양보를 부탁했으나, 이미 신심으로 환희에 차 있는 암라파알리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녀는 "저는 허락할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세존께서 늘 말씀하시기를 중생에게는 두 가지의 희망이 있는데 세상사람들은 그것을 버리지 못한다.

어떤 것이 그 두 가지인가?

 

하나는 재물에 대한 희망이고, 다른 하나는 목숨에 대한 희망이다"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내일까지 꼭 살아있을 것이라고 누가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먼저 여래를 청하였으니 지금 곧 가서 음식을 준비해야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귀공자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나타내는 황금으로도 여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음을 알고 우리들은 저 여인보다 못하다!고 탄식하며 헤어졌습니다.


이튿날 암라파알리는 부처님과 비구들을 초청하여 지극한 정성으로 공양을 올리고 나서 자신의 소유였던 암라파알리 동산마저 비구들의 수행처로 삼아 중생들의 의지처를 만들어주시기를 발원하며 부처님께 봉헌했습니다.


이것이 암라수원(菴羅樹園)인데 이곳은 유마거사의 고향과 가까워서 유마경전에 등장하게 됩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암라파알리는 당시 이름난 기생으로 알려져 있고, 엄격한 신분질서 아래서 자신을 평등하게 신분에 개의치 않고 공양청을 흔쾌히 수락하셨던 부처님의 태도는 이 여인에게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내면의 긍지와 가치를 찾아 주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부처님을 통해 자신이 받았던 사회적 불평등을 치유할 위안을 얻었고, 시대적 담론에 의해 부정되었던 자신의 가치를 회복할 수 있는 내면적 힘을 얻었던 것입니다.


이 내용은 요즘 우리사회가 사회적 신분과 경제적 배경에 따라 사람에 대한 대우를 다르게 하지는 않았는지 반문해 봐야 할 것입니다.

이런 상황은 절집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부처님은 불법(佛法) 앞에 누구나 평등하다는 사실을 일러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주목할 대목은 "내일까지 살아 있다고 누가 보장하겠는가?"라는 암라파알리의 반문입니다.


사람의 목숨이 내일을 기약할 수 없다면 부처님 만나는 일을 내일로 미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내일까지 살아 있을지 모른다면 지금 가장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부처님 뵙기를 내일로 미루고 있지나 않은지,  에이,~다음 주 법회나 가야지, 내일부터 좋은 일 하겠다고 선행을 보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추해 볼 일입니다.

좀 찔리는 구석들이 있을 것입니다.

빈부귀천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찾아오는 죽음이 언제 내게 저승사자를 보낼지 모르는 중생계에서 참다운 불법을 만나는 것은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으며, 내일로 미루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바로 이 순간 신심과 환희에 찬 암라파알리의 마음으로 불법을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모두들 성불하십시오.


 - 50년동안 불타는 불구덩이 !!

투르크메니스탄에 위치한 너비 60m, 깊이
20m의 이 불구덩이는 화산활동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 신비한 불구덩이는 화산 활동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니란다. 애초에는 1950년대에 가스를 얻기위해
굴착을 했으나 땅속에 거대 구덩이가 발견되었고, 그
안에서 가스가 분출되었다고 함니다.




 
어두운 밤이면 아름답고 신비한 분위기를 내며 뜨거운
열기 때문에 곁에 오래 있을 수 없다고 하는데, 이 불구덩이
는 해외 인터넷에서 “지옥으로 향하는 문”으로 불린다고.




 
압도적인 자연의 위력을 보여주는 이 불구덩이는 사진작가
존 브래들리의 사진, 유튜브의 동영상 등을 통해 소개되면서,
해외 네티즌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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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지대에 있는 나무화석

 
 

 

 
미국의 한 마른 호수에서 움직이는 돌 발견!
미국의 과학계에서 아직도 조사 연구중이라며 바람
이냐? 자력이냐? 또 다른 힘에 의해서이야?

-물이 없는 폭포

 

- 미,요세미테 국립공원의 수직바위


미국의 요세미테 국립공원에는 엄청
 나게 큰 바위(수직벽 높이 500m)가 칼로
자른 듯이 잘라져 있다.



 

Moon on 28th October morning 





In the Sand-s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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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at Sand-sea in Egy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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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ite Desert, Egy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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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ne Gra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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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ther Sossus Vl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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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ne in the Great Sand-sea of Egy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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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ne in the Great Sand-sea of Egy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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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iling Sanddu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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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th Alge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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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th Alge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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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th Alge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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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hroom R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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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mple Stone - For me a Diam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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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nderful Eros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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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ddune and Stone-need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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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tit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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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tit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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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hite Desert, Egy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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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ite Cave with Du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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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known Slot-canyon in Alge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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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lue Ho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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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ndow in White Des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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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ushroom-R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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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trail in White Des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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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ne in the Great Sand-sea of the Sah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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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d  In the Sand-sea of the Sah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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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rly morning light in the Namib Des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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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iba Des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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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ite Desert at Suns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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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at Sand-sea Egy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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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ite Des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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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at Sand-sea Egy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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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을 저에게 주심을 감사합니다.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알게 해주심도 감사합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모레도 아니 영원히

늘 당신에게 감사하며 살게 해주심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