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賢)의 의미-생명으로서의 보현

2010. 3. 1. 20:44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화엄경·보현행원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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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賢)의 의미-생명으로서의 보현

2-1 생명으로서의 보현

 

 

'현'은 한자로 '어질 현'인데,  우리가 보통 '어질다'고 할 때는 그 성품이 너그럽고 온유한 경우를 말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런 성품 아래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생명의 성장', '생명의 약동'입니다. 부드럽고 너그러운 사람을 만날 때 우리는 긴장하던 마음이 풀어지고  자신감을 회복하며 스스로의 능력을 마음껏 꽃피우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보면 보현에서 '현'의 뜻은 '생명의 탄생' 또는 '생명의 성장'을 의미하는 말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성품을 어질다, 또는 덕이 있다(德性)이라 말하며, 이러한 생명을 성장시키는 행을 덕행(德行)이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앞서 보현의 정통적 고찰을 할 때, 보현은 '부처님의 이(理)와 덕(德)'을 상징하며, 문수보살이 지혜의 덕(智德, 體德)을 맡는 반면 보현보살은 '행의 덕(行德, 실천의 덕, 중생 제도의 구원행)'을 뜻한다고 했습니다.

 

 

 

즉, 보현보살은 결국 생명을 성장시키는 보살인 것입니다. 보현보살이 생명을 연장시키는 능력이 있어 '연명보살'로 불리운다는 것도, 보현의 이런 뜻으로 보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입니다.

 

 

 

 

원효대사 역시 화엄경 이름을 풀이하실 때, 불화(佛華)의 뜻을 '행덕(行德)'으로 보고 대방광이란 '행덕의 무변(無邊)함'으로 말씀하였습니다.  '부처님 꽃'을 행덕으로 본 것입니다. 그리고 행덕이란 곧 '생명을 번성, 성장시키는 의미'입니다.

 

 

 

2-2 화엄에서 꽃 '화(華)'의 의미

 

 

여기서 한번 살펴 보고 갈 것은, 화엄경에서 꽃 '화'자가 의미하는 뜻입니다. 전통적으로 많은 학자들이 꽃의 의미를 '보살의 만행'으로 보았습니다. 즉, '보살의 만행이 꽃으로 피어난 것'을 꽃에 비유해 그 장엄한 보살행을 화엄이라 부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 의견은 다소 다릅니다.

 

 

 

 

제가 볼 때 화엄경 편찬자들이 경전 이름으로 굳이 꽃 '화'자를 넣은 것은, 바로 화엄이 '생명을 논하는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으로 가득한 자리가 우주 법계이며 그러한 생명을 꽃피우고 번성시키는 방법이 보현행원인 것입니다.

 

 

 

그러한 우주 법계와 그런 생명이 가득 찬 가르침을 일러 '화엄'이라 이름 붙인 것입니다. 생명의 발현장이 화엄 세계이며, 그 생명의 발현 방법이 보현행원입니다. 여기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화엄의 생명 사상을 논할 때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끝으로, 경의 이름을 ‘대방광 화엄경’이 아니라 ‘대방광 불화엄’이라 붙인 이유에 관해서입니다. ‘화’가 이렇듯 생명을 상징하는 단어라면 그냥 ‘대방광화엄경’이라 해도 될텐데 왜 굳이 ‘대방광’과 ‘화엄’ 사이에 ‘불’이란 글자를 넣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제가 보기에 화엄의 생명은 단순한 생명이 아니라 ‘진리 생명’이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세상을 이렇게 아름답게 장엄하는 낱낱의 생명들이 단순한 생명이 아니라 모두가 부처님의 나툼, 부처님 진리의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화엄경을 줄기차게 흐르는 가르침 중의 하나가 ‘세간의 경계가 여래의 경계’라는 것인데, 우리가 보기에 별볼일 없는, 초라하게 보이는 자연의 생명 하나 하나가 실지로는 모두가 부처님 진리의 나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없이 왔다가 이름없이 사라지는 들풀 한 송이, 허무하게 소멸하는 물고기 한 마리 벌레 하나 그 모두가, 우리가 생각하듯 그런 허망한 생명이 아니라 사실은 영원한 진리, 영원의 세계를 사는 ‘부처님 생명(佛華)’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가 고귀하고 모든 생명이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없는 진실 생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화엄 편찬자들은 경 이름에 굳이 ‘불’자를 넣어 생명 하나 하나가 진리 생명, 부처님 생명임을 알리고 싶어하셨던 게 아닌가 합니다. 이렇게 볼 때 광덕스님의 반야활구 ‘내 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이란 말씀도,  바로 가히 ‘불화엄’의 소식이라 할 것입니다.

      내가 살아가며 배운 것은 신뢰를 쌓는 데는 여러 해가 걸려도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라는 것. 인생은 무엇을 손에 쥐고 있는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믿을 만한 사람이 누구인가에 달렸음을. 우리의 매력이라는 것은 15분을 넘지 못하고 그다음은 무엇을 알고 있느냐가 문제임도 배웠고 또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나를 사랑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되는 것뿐이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선택이다. 내가 아무리 마음을 쏟아 다른 사람을 돌보아도 그들은 때로 보답도 반응도 하지 않는다는 것 다른 사람의 최대치에 나 자신을 비교하기 보다는 내 자신의 최대치에 나를 비교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또 나는 배웠다. 인생은 무슨 사건이 일어났는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일어난 사건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무엇이 아무리 얇게 배어난다 해도 거기에는 언제나 양면이 있으며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사랑의 말을 남겨 놓아야 한다는 것을 나는 배웠고 어느 한 순간이 우리의 마지막의 만남이 될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 해야 할 일을 하면서도 그 결과에 대해서는 마음을 비우는 자들이 진정한 영웅이며 사랑을 가슴속에 넘치게 담고 있으면서도 이를 나타낼 줄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음을 나에게도 분노할 권리는 있으나 타인에 대해 몰인정하고 잔인하게 대할 권리는 없다는 것도 나는 배웠다. 우리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진정한 우정은 끊임없이 두터워진다는 것을 배웠고, 그리고 사랑도 이와 같다는 것을... 내가 바라는 방식대로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해서 내 모든 것을 다해 다른 이를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는 것이 아님을 배웠다. 또 나는 배웠다. 좋은 친구가 때때로 나를 아프게 한다 해도 그들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타인으로부터 용서를 받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고 때론 내가 자신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 아무리 내 마음이 아프다 해도 이 세상은 내 슬픔 때문에 운행을 중단하지 않는다는 것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해도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는가는 오로지 나 자신의 책임인 것을 배웠다. 또 나는 배웠다. 우리 둘이 서로 다툰다 해서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님을... 밖으로 드러나는 행위보다 인간 자신이 먼저임을 두 사람이 한 가지 사물을 보더라도 보는 관점이 다르다는 것도 그리고 앞과 뒤를 계산하지 않고 자신에게 정직한 사람이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데서 앞선다는 것을... 내가 알지도 보지도 못한 사람에 의해 내 인생의 진로가 바뀔 수 있다는 것 이제는 더 이상 친구를 도울 힘이 없다고 생각할 때도 친구가 울면서 내게 매달린다면 여전히 그를 도울 힘이 내게 남아 있음을 배웠고 글을 쓰는 일이 대화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 마음의 아픔을 덜어 준다는 것 내가 너무 아끼는 사람이 먼저 이 세상을 빨리 떠난다는 것 타인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는 것과 나의 믿는바 입장을 분명히 한다는 것 이 두 가지 일은 엄격히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 또 사랑하는 것과 사랑받는 것의 모두를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 오마르 워싱턴 -

      오늘

       

       권수형          

       

              삼라만상이

              삼매에 들어

       

              꽃을 피웁니다.

       

              우주의 서원을 생각하며

              우리도

       

              형형색색의

              수행의 꽃을

              피우고자

       

              노력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