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오온(五蘊)의 연기
고 대장로 모곡 사야도께서는 수행자의 이익을 위해 오온의 연기에 대해서 설하셨다. 이는 수행을 시작하려는 자에게 실수행으로 가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연기법이 작용하고 있는 현재의 측면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즉, 오온의 연기를 통해 수행자는 오온의 시작과 원인 그리고 사라짐을 이해할 수 있다.
“눈[眼. cakkhu]과 물질[色. rūpa]을 조건[緣]으로 하여 안식(眼識. cakkhuviññāṇa)이 일어난다. 이 세 가지의 화합이 촉(觸. phassa)이다. 촉을 원인으로 하여 느낌[受. vedanā]이 일어난다.
느낌을 원인으로 하여 갈애(渴愛. taṇhā)주해1)가 일어난다.
갈애를 원인으로 하여 집착(執着. upādāna)이 일어난다.
집착을 원인으로 하여 업의 생성(業의 生成. kamma bhāva)이 일어난다.
생성을 원인으로 하여 생(生. Jāti)이 일어난다.
태어남을 원인으로 하여 늙음, 죽음, 슬픔, 비탄, 고통, 비애, 절망이 일어난다.”
이와 같이 오직 고통스러운 오온의 집합이 될 뿐이다.
“귀[耳. Sota]와 소리[聲. Sadda]를 조건[緣]으로 하여 이식(耳識. Sota viññāṇa)이 일어난다.
코[鼻. ghāna]와 냄새[香. gandha]를 조건[緣]으로 하여 비식(鼻識. ghāna viññāṇa)이 일어난다.
혀[舌. jivhā]와 맛[味. rasa]을 조건[綠]으로 하여 설식(舌識. jivhā viññāṇa)이 일어난다.
몸[身. kāya]과 접촉(接觸. phoṭṭhabba)을 조건[緣]으로 하여 신식(身識. kāya viññāṇa)이 일어난다.
마음[意. mano]과 마음의 대상[法. dhamma]을 조건[緣]으로 의식(意識. mano viññāṇa)이 일어난다.
이렇게 세 가지가 접촉해서 육식(六識)주해2)이 일어난다.”
본다는 것은 눈으로서의 안근(眼根)과 보이는 대상으로서의 안경(眼境)이 있다. 이들 두 가지 현상이 부딪칠 때 안식(眼識)이 일어난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안식의 일어남이 있을 뿐 거기에는 보는 나, 그 혹은 그녀는 없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보는 자는 없다. 눈이나 보이는 대상 안에 나, 그 혹은 그녀는 없다. 안식 안에도 나, 그 혹은 그녀라고 할 존재는 없다. 안식은 다만 안식일 뿐이며, 이 안식은 나, 그 혹은 그녀 등으로 혼동되거나 인격화되어서는 안 된다.주해3)
눈, 보이는 대상인 물질 그리고 안식의 결합이 접촉을 일으키고, 그 접촉을 원인으로 하여 느낌이 일어난다. 이 느낌 안에는 나, 그, 그녀 혹은 너라고 불릴 만한 것이 없다.
느낌을 원인으로 하여 갈애(渴愛)가 일어나고, 갈애를 원인으로 집착이 일어나며, 집착을 원인으로 하여 업의 생성인 신업(身業), 구업(口業) 그리고 의업(意業)이 일어난다. 업의 생성을 원인으로 하여 생(生)이 일어난다. 생에는 사악도에 태어나는 것도 포함된다.주해4)
생을 원인으로 하여 노사(老死. 늙음, 죽음, 슬픔, 비탄, 고통, 비애, 절망)가 일어난다. 이러한 방식으로 고(苦)가 덩어리지어 일어난다.
귀와 들리는 대상인 소리는 이식(耳識)을 일으킨다. 이상 육입(六入)에 속한 다른 감각기관과 대상도 이와 마찬가지다.
이것이 바로 고 대장로 사야도께서 설하신 오온의 연기이다. 좀 더 분명하고 명확한 이해를 위하여 일상적인 말로 쉽게 설명해보기로 한다.
A가 아름다운 대상을 본다. 그는 그 대상을 바라고 집착하여 그것을 가지고자 애쓴다. 즉, 아름다운 대상을 볼 때 그것을 갖고 싶어 한다. 이것이 갈애다. 이는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이며, 이렇게 갖고자 하는 열망에 사로잡혀 그것에 집착한다. 이것이 집착이다. 다시 생각과 말과 행동을 통해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면, 이것이 바로 업의 생성이다.
업의 생성을 원인으로 하여 생이 일어난다. 생을 원인으로 하여 늙음, 죽음, 슬픔, 비탄, 고통, 비애, 절망이 일어난다. 이것이 바로 일련의 연기가 도는 과정, 즉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일 뿐인 연기의 한 궤도이다. 이들 오온은 괴로움[苦]일 뿐이며, 일련의 연속적인 고의 무리일 뿐이다.
사려 깊은 독자라면 우리가 하루 동안 갈애, 집착, 업의 생성이 일어나는 쉼 없는 과정을 수도 없이 겪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 명확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즉 우리는 보고, 바라며, 갈망과 집착에 사로잡혀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업을 짓는다.
같은 방식으로 어떤 소리를 들었을 때 우리는 좋아하거나 즐기는데, 이것이 갈애다. 이렇게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갈망에 사로잡힐 때, 이것은 집착이며, 이처럼 세 가지 종류의 업을 지을 때 이것이 업의 생성이다. 이 같은 원리가 냄새 맡음, 맛봄, 신체의 접촉, 생각에 적용된다. 의식하고 있든, 의식하지 않고 있든 우리는 일어나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이러한 과정을 반복한다.
이제 수행자는 연기는 바로 자신의 행위의 연속이라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오온에 의식을 집중해서 자신의 행위가 인과의 법칙 하에 있으며, 연기법의 사상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연기에 따른 연속적인 행위들을 멈추어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한다면 윤회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있다. 보통 때와 같이 연기의 순환을 계속한다면 가차 없는 슬픔, 고통, 비탄, 절망 등 한 무더기의 고(苦)를 끝없이 반복해야만 할 것이다.
‘눈’과 ‘보이는 대상’이 부딪칠 때 ‘안식’이 일어난다. 수행자는 이 ‘안식’을 대상으로 그것이 지속되는지 혹은 사라졌는지를 지켜보아야 한다. 이 ‘지켜보는 의식’으로 알아차렸을 때 이전의 안식은 이미 사라졌음을 알게 된다. 지켜보는 자에게 있어 명백한 사실은 안식이 찰나적으로 일어났다 사라졌기 때문에 그것을 더 이상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같은 방식으로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식이 일어날 때 이 일어남을 뒤에 오는 아는 마음(지켜보는 의식)으로 지켜보아야 한다. 아는 마음이 일어날 때에 이미 먼저 일어난 인식 혹은 다른 식이 사라졌다고 하는 것은 두 가지 의식이 병행하여 존재하지 않기 때문임을 명심해야 한다.
“마음은 다르게 일어난다.
마음은 다르게 소멸한다.”
이것은 한순간에 오로지 하나의 의식이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색․수․상․행․식의 어떠한 오온이 일어나든 간에 그 일어남은 바로 사라지는 찰나적인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오온에 관한 실상이다. 모든 일어남은 순간적이다. 이전에 일어난 오온의 사라짐은 새로운 오온을 일으키고 똑같은 과정이 끝없이 반복될 뿐이다.
수행자가 안식을 알아차리거나 숙고하지 못하면 갈애가 일어난다. 갈애를 알아차리거나 숙고하지 못한다면 결국 집착이 따라오게 될 것이다. 이때는 집착을 알아차리고 숙고해야 한다. 만약 이렇게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업의 생성이 따라오고 이에 따라 생과 노사가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연기의 회전은 끝없이 이어진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자. 어떤 사람이 학교에서 돌아오는 어린 아들이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아들의 목소리를 듣자 아들이 무척 보고 싶고, 더욱이 아들을 끌어안고 싶어져 달려가 귀여운 아들을 끌어안고 쓰다듬었다. 친아들을 사랑하는 것이 어떤 도덕적 규범을 어기는 것이 아니므로, 죄나 과실이 된다는 생각 없이 행동한다.
그러나 진실은, 냉혹한 연기의 과정이 여기에서도 진행되며 그 끝없는 회전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어린 아들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연기가 어떻게 돌기 시작하는지 밝혀 보기로 한다.
어린 아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아들을 보고 싶고, 안고 싶어 하는 갈애가 생긴다. 그 갈애로 인하여 아들을 포옹하고 귀여워해 주고 싶은 참을 수 없는 욕구가 일어난다. 이러한 포옹과 귀여워함이 업의 생성이다. 이제 업의 생성으로 인해 생(生)이 일어난다.
도표의 부분 3과 부분 4 사이의 연결을 참조하여 보자.
“업의 생성(업의 힘)이 일어날 때 생이 일어난다.”
“모든 것을 아시는 붓다께서도 업의 힘을 멈출 수는 없다.”
새벽에서 황혼까지 이 과정은 계속된다. 어떤 매력적인 대상을 보면 갈애가 일어난다. 갈애로 인해 집착이 일어난다. 집착으로 인해 업의 생성이 일어난다. 이러한 일련의 연기의 고리는 끊임없이 회전을 계속한다. 즐거운 소리가 들렸을 때 갈애가 일어난다. 이러한 갈애로 인해 집착, 업의 생성, 생, 노사가 일어나고 일련의 연기의 고리가 가차 없는 회전을 계속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좋은 냄새를 맡고, 좋은 맛을 느끼고, 좋은 대상에 닿고, 좋은 생각을 할 때 갈애, 집착, 업의 생성, 생, 노사 등 고(苦)의 무더기들이 따라 일어난다.
사실상 아름다운 대상, 좋은 소리, 좋은 냄새, 좋은 맛, 좋은 촉감, 좋은 생각이 육문(六門)을 통해 들어올 때마다 갈애와 다른 일련의 요소들이 반드시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연속 과정들이 바로 번뇌의 굴레주해5)이다. 이 번뇌의 굴레는 업의 굴레를 일으키고 여기에서 또한 과보의 굴레가 나와 세 가지 굴레라는 원을 이룬다.
도표를 보도록 하자.
무명․갈애․집착은 번뇌의 굴레인 반면 행․업의 생성은 업의 굴레이고 식․명색․육입․촉․수․생․노사는 과보의 굴레를 이룬다.
모든 오온의 연기는 이렇게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 알아차리고 숙고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고통과 슬픔이 끝없이 반복되는 윤회의 과정이 무한히 지속될 것이다.
주해(註解)
<주해 1> 갈애(渴愛. Taṇhā) : 바라는 마음, 욕망, 범부(凡夫)가 목마르게 다섯 가지 욕망(재산욕, 성욕, 음식욕, 명예욕, 수면욕)에 애착하는 것을 말한다.
느낌이 일어났을 때 초기 단계의 바라는 마음이 일어나는데 이것이 갈애이다. 다시 이 갈애가 지속되면 더 강한 갈망이 생겨 집착으로 발전한다.
갈애는 크게 좋아하는 것에 대한 갈애와 싫어하는 것에 대한 갈애가 있으며, 이는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1) 감각적 쾌락의 갈애 : 오근이 대상을 만나 쾌락을 즐기고 오욕을 즐기려는 마음이다.
(2) 존재에 대한 갈애 : 살고 싶다는 마음. 좋은 곳에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마음이다.
(3) 비존재에 대한 갈애 : 삶이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 죽고 싶다는 마음. 허무에 대한 갈망.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다.
<주해 2> 육식(六識) : 여섯 가지 감각기관인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 ․의(意)가 감각대상인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에 부딪쳐서 여섯 가지 의식인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이 일어난다. 이때의 식(識)은 아는 마음을 말한다.
<주해 3> 그 혹은 그녀 등으로 혼동되거나 인격화되어서는 안 된다 : 대상을 볼 때 보는 자라고 하는 인격체가 있어서 보는 것이 아니다. 눈․대상․빛․안식이라는 네 가지 조건에 의해 보이는 것이다. 여기에 나, 너, 우리라고 하는 인칭이 개입될 수 없다.
<주해 4> 생에는 사악도의 태어남이 포함되어 있다 : 윤회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인간으로 태어나거나 색계․무색계에 태어날 가능성은 매우 낮다. 태어남을 말할 때 거의 모든 생명은 사악도인 지옥․축생․아귀․아수라로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
<주해 5> 번뇌의 굴레는 세 가지인데 무명과 갈애와 집착이다. 부분 1의 무명은 부분 3의 갈애와 집착과 끈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하나의 무리를 형성한다. 처음에 번뇌의 굴레가 굴러가면 다음으로 업의 굴레로 연결된다. 이것이 원인과 결과이다. 업의 굴레는 두 가지로 행(業의 形成)과 업의 생성(業有)이다.
부분 1의 행은 부분 3의 업의 생성과 끈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하나의 무리를 이룬다. 업의 굴레가 굴러가면 과보의 굴레로 연결된다. 과보의 굴레는 여덟 가지인데 태에 들어가 생을 받는 존재․생․노사․식․명색․육입․촉․수이다. 이상 여덟 가지를 조건으로 하여 생긴 과보의 굴레는 이것이 한 일생의 시작이 된다. 다시 과보의 굴레는 번뇌의 굴레로 연결되고, 번뇌의 굴레는 업의 굴레로 연결되고, 업의 굴레는 과보의 굴레로 순환을 거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