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연기의 고리가 느낌으로부터 회전을 시작하는가

2010. 4. 18. 18:2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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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어떻게 연기의 고리가 느낌으로부터 회전을 시작하는가

도표를 보기 바란다.

부분 2에서 식명색육입수의 다섯 가지를 볼 수가 있다.


감각기관과 감각대상 그리고 의식이 만날 때마다 접촉이 일어나고 이 접촉은 즐겁거나, 괴롭거나, 덤덤한 느낌주해1)을 일으킨다.

예를 들어 보자. 어떤 사람이 무척 아름다운 꽃을 본다. 그 꽃이 마음에 들 경우 즐거운 느낌을 가진다. 그 꽃을 갖고 싶은 욕망인 갈애가 일어나면 필연적으로 집착이 따라온다. 이것이 연기의 고리가 회전하기 시작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연기는 그 시점 그 자리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집착 다음에 업의 생성이 일어나면 필연적으로 생이 따라온다. 도표의 부분 3과 부분 4를 보면 업의 생성과 생 사이의 연결고리를 볼 수가 있다. 이 연결은 12연기에서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행위의 과정을 의미한다.


붓다께서 말씀하셨다.


“느낌에 이어 갈애가 일어나면 도(道)와 과(果)에 이르는 열반을 결코 실현할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느낌에 이어 화냄 또는 근심이 따라오면 도와 과에 이르는 열반을 실현할 수 없다.”


연기의 과정이 멈추지 않고 계속된다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오온이 끊임없이 윤회하는 과정을 겪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오온이라는 다섯 가지 무더기[]는 40~70킬로그램 정도 무게가 나가는 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의미의 오온(五蘊)인 정신과 물질의 무더기를 뜻한다.


무더기[]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어떤 대상(감각대상)이 감각기관에 들어올 때 의식의 무더기, 즉 식온(識蘊)이 일어난다.

접촉이 있을 때마다 느낌의 무더기인 수온(受蘊)이 일어난다.

접촉이 있을 때마다 지각의 무더기인 상온(想蘊)이 일어난다.

의도적 행위의 무더기는 행온(行蘊)으로 불리며, 물질의 무더기는 색온(色蘊)으로 불린다.


위의 색온수온상온행온식온은 어느 것이나 무더기로 모여서 일어나며 이 과정이 곧 연기이다. 사실상 오온과 관련된 연기는 빨리어 삼장이나 암송문에 거론되지 않았지만, 우리의 오온 안에서 분명하게 찾을 수 있다. 연기가 지속된다는 것은 오온이 연속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으로 ‘거기에는 근심과 고통의 덩어리가 있을 뿐’이다.


������상윳따니까야(Sayuttanikāya)������의 인연품(因緣品)에서 말하기를, “연기의 길을 따라가는 자는 그릇된 삶을 사는 자로 불린다. 위빠사나를 수행하는 자는 올바른 삶을 사는 자(올바른 성향을 지닌 正行者)로 불린다”라고 하였다.


올바른 길에 의한 청정행주해2)을 하면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자이며, 이런 수행자는 업의 힘[業力] 혹은 오온이 다시 연결되는 것을 끊으려는 자이다. 다시 말하자면 연기를 중단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여기에서 도표를 참조하기 바란다.

위빠사나 수행은 부분 3과 부분 4의 연결을 끊고 업의 힘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갈애를 없애는 작업이다.


또 위빠사나 수행은 ‘느낌이 갈애를 일으키는 것’을 ‘느낌이 지혜를 일으키는 것’으로 바꿔 가려는 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느낌 다음에 일어나는 갈애를 위빠사나 도(道)로 바꾸어가는 작업이다. 위빠사나 도는 바른 견해[正見]바른 사유[正思惟]바른 정진[正精進]바른 알아차림[正念]바른 집중[正定]을 의미한다.


위빠사나 도를 닦지 않는다면, 즉 위빠사나 수행을 하지 않는다면 갈애가 필연적으로 따라온다. 이 경우에 어떤 것으로도 갈애가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연기의 길을 가는 자는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에 맞닥뜨리게 될 뿐이다. 그는 윤회 속의 나그네와 같고, 이 세상에 붓다가 출현한다고 해도 영원히 나그네로서 떠돌게 될 것이다.


이제 독자는 어느 길을 선택할 것인가? 도과의 길인가? 아니면 윤회의 나그네로서 떠도는 길인가?


윤회의 소용돌이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도(道)의 길을 가야 한다. 즉,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만 하고, 다섯 가지 도지(道支)주해3)를 통해 느낌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통찰력을 가지고 알아차리려고 노력해야 한다.

여기서 하나 지적해 둘 것은, 느낌은 여기저기로 찾아다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 느낌을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 느낌은 부딪힘[]이 있을 때마다 일어난다. 즐거우나 괴로우나, 기분 좋거나 나쁘거나, 색다르거나 덤덤하거나 간에 어떠한 종류의 느낌이 항상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기 마련이다. 느낌은 우리의 여섯 가지 감각의 문[六門] 중 어딘가에 항상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의도적으로 찾을 필요가 없다.


느낌은 일어남과 사라짐을 통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수행자는 느낌이 무상한 것이며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통찰을 가지게 된다. 수행자가 느낌을 올바르게 이해하면 영원에 대한 그릇된 인식의 경계에서 빠져나올 수가 있다. 느낌의 무상함을 위빠사나의 통찰로 이해하였을 때, 그는 이제 올바른 길에 접어든 것이다.


“느낌이 소멸되면 갈애도 소멸된다. 갈애의 소멸은 열반이다.”1)

주해(註解)

<주해 1> 육근이 육경에 접촉하여 육식(六識)을 할 때 느낌이 일어나며, 안다는 것은 느낌으로 아는 것이다. 즉, 안다는 것은 느낀다는 것이다. 이처럼 느낌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의 문에서 모두 일어난다. 제일 처음에 일어나는 느낌은 맨 느낌이다. 이 맨 느낌에서 반응한 느낌이 육체적인 느낌이다. 여기서 다시 반응한 느낌이 정신적인 느낌이다.

맨 느낌에서 육체적인 느낌이 일어날 때 즐거운 느낌, 불쾌한 느낌, 덤덤한 느낌이 일어난다. 이때 덤덤한 느낌을 빨리어로 우뻬카 웨다나(Upekkhā Vedanā)라고 한다. 그러나 우뻬카(upekkhā)는 평정, 사(捨)를 말하기도 하나 무관심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이때의 덤덤한 느낌은 평등한 느낌이 아니고 알아차리지 못한 덤덤한 상태를 말하며, 이것을 무지한 느낌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주해 2> 올바른 길에 의한 청정행[道梵行. Magga Brahmacariya] : 도범행(道梵行)은 여덟 가지 청정한 길인 팔정도를 말한다. 팔정도에 의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소멸되는 것이 범행의 완성이다.


<주해 3> 다섯 가지 도지(道支) : 위빠사나의 도는 다섯 가지 도의 항목으로 구별된다. 다섯 가지 도(道)는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정진[正精進], 바른 알아차림[正念], 바른 집중[正定]이다. 이상 다섯 가지 도의 항목은 팔정도의 계를 제외한 정과 혜에 속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이상 다섯 가지 도에 이르면 알아차림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라는 계율을 지키게 된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을 팔정도라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