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듣는 이가 누구인가/임제스님

2010. 5. 9. 20:35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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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진주 황포냉면 꽃밭의 백일홍/진각화 님
    



       ◉ 보고 듣는 이가 누구인가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대장부가 또 무엇을 의심하는가?
    눈앞에서 작용하는 이가 다시 또 누구인가?

    잡히는 대로 쓰며 이름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심오한 뜻이다.
    이와 같이 볼 수 있다면 싫어할 것이 없는 도리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마음은 만 가지 경계를 따라 흘러가지만
    흘러가는 그 곳이 참으로 그윽하여라.

    마음이 흘러가는 그 곳을 따라 성품을 깨달으니 기쁨도 없고
    근심도 없도다.’라고 하였다.”


    【강설】

    사람들의 마음은 참으로 미묘한 것이다.
    매우 심오하고 불가사의한 것이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그 높이와 넓이에 미칠 수가 없다.
    그 헤아릴 수 없는 작용은 신묘불측(神妙不測)이다.
    그래서 언어로써 표현할 길이 없고 생각으로 따를 수 없다.

    그것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지금 이 순간 보아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보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가운데 들으며 작용하고 있는 그것이다.
    그러한 이치를 잘 알아서 추호의 의심도 없고 양변에 떨어지거나
    편견이 없으면 대장부다.

    옛 인도의 23조(祖)인 학륵나 존자가 아직 법을 깨닫기 전에
    학의 무리들이 항상 따라 다녔다.
    그래서 22조 마라나 존자를 만나 그 까닭을 물었더니,
    “그대가 옛날 제자들을 데리고 용궁에 가서 공양을 받았는데 그 제자들이
    박복하여 학의 몸을 받은 지 5겁이나 되었다. 바로 그들이다.”라고 하였다.

    그들이 해탈할 수 있는 길을 물으니 위와 같은 게송을 설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는 유명한 게송이다.

    ‘마음이 흘러가는 그 곳을 따라 성품을 깨닫는다’는 말은 수처작주(隨處作主),
    즉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그 상황의 주인이 된다는 뜻이다.


    텅 빈 마음자리를 잘 누리어 남이 나를 어떻게 취급하든 나는 나의 자리를
    잃지 않고,  동요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고, 끌려 다니지 않는다는 뜻이다.

    남이 나를 때렸다. 남이 나를 욕했다. 모함했다. 비방했다. 손해를 입혔다.
    망신을 주었다. 내 것을 빼앗아 갔다 등등에 흔들리지 않고 의연히 대처하는 것이다.

    나아가서 온갖 몹쓸 병들이 나를 괴롭게 한다.
    몸이 나를 고통스럽게 한다.
    세월이 나를 늙게 한다는 등등에도 소요자재(逍遙自在)하고 여여무심(如如無心)하면
    기쁨도 없고 근심도 없으리라.

    본래로 그런 것이 없는 텅 빈 마음의 세계에서 자유자재하게 노닐 뿐이다.
    그것은 그들의 일이고 나는 나이기 때문이다.

    이 금쪽같은 구절은 반드시 외워야 한다.

    심수만경전(心隨萬境轉) 전처실능유(轉處實能幽)
    수류인득성(隨流認得性) 무희역무우(無喜亦無憂)


    잘 이해하면 평생의 좋은 양식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