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안거 해제법어 / 법전종정

2010. 6. 6. 18:0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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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전 종정예하 동안거 해제법어

“해제후에도 ‘자가보장’을 제대로 챙겨라”

 

법전 종정예하가 기축년(불기2554년) 2월 28일(음력 1월15일) 동안거 해제를 앞두고 법어를 발표했다.

법전 종정예하는 “해제 이후에도 만행하면서 동안거 한 철 동안 챙겼던 ‘자가보장(自家寶藏)’을

제대로 챙기기만 한다면 그 해답을 바로 찾을 수 있을 것”이라면서 수좌들의 정진을 당부했다.

전국선원수좌회가 제작한 <선사방함록(禪社芳啣錄)>에 따르면 기축년 동안거에는 전국 97개

선원(총림 5곳, 비구선원 59곳, 비구니선원 33곳)에서 총 2244명(비구 1,196명, 비구니 844명,

총림 204명)이 정진한 것으로 나타났다.

 

군왕의 보물을 누가 흥정 하는가


흥화존장(興化存獎) 선사에게 후당(後唐)의 장종(莊宗)황제가 물었습니다,
“짐이 중원을 평정하고 보물을 한 개 얻었는데, 아무도 값을 매기지 못합니다.”
“폐하의 보물을 잠깐 보여 주소서.”
황제가 두 손으로 복두건(幞頭巾)의 끈을 들어 보였더니 선사가 말했습니다.
“군왕의 보물을 누가 감히 흥정하겠습니까?”

달마대사가 양나라 무제를 찾아간 것은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을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염관(鹽官)선사와 선종(宣宗)임금이 서로가 서로를 알아본 것은 함께 안목을 갖추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해와 달이 때를 맞추어 뜨고 진다면 광채가 있는 곳의 따스한

바람결은 꽃과 나무를 서로 감화시킵니다. 이처럼 인왕(人王)과 법왕(法王)이 서로 만날 때엔

서로의 위치에서 걸 맞는 문답이 있어야 제격인 법입니다. 어쨌거나 전륜성왕의 상투 속에 있는

구슬을 경솔하게 남에게 함부로 보여줄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숭산혜안(崇山慧安)선사는‘여하시조사서래의(如何是祖師西來意)’를 묻는 납자들에게

“자신의 서래의(西來意)는 묻지 않고 왜 남의 서래의(西來意)만 묻고 있느냐?”고

도리어 힐난했던 것입니다. 마조선사 역시 “자기 집에 있는 보물창고는 돌아보지도 않고서 더욱이

그 집마저 버리고서 밖으로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으니 도대체 뭐하는 짓이냐?”고 일갈했던 것입니다.

보물을 보여 달라는 흥화선사의 질문에 장종황제는 두 손으로 복두건(幞頭巾)의 끈을 들어보였을

뿐입니다.

그러자 선사는 ‘어느 누구도 군왕의 보물을 흥정할 수가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법문에서 흥화선사는 황제의 공부경지를 긍정한 것입니까? 긍정하지 않은 것입니까?
만일 인정했다면 흥화의 안목이 제대로 된 것입니까?
만약 인정하지 않았다면 흥화의 허물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해제 이후에도 만행하면서 동안거 한 철 동안 챙겼던 ‘자가보장(自家寶藏)’을 제대로 챙기기만 한다면 그 해답을 바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진불엄위(眞不揜僞)하고
곡불장직(曲不藏直)이라
참은 거짓을 가리지 않고
굽음은 곧음을 감추지 못한다.

 

2553(2009)년 동안거 해제일에

 

 

 

총림방장 동안거 해제 법어

 

해인총림 해인사를 비롯한 영축총림 통도사, 조계총림 송광사,

고불총림 백양사, 덕숭총림 수덕사 등 전국의 총림 방장스님들이

지난 2월28일 동안거 해제를 맞아 일제히 법어를 발표했다.

전국 97개 선원에서 기축년 동안거 결제에 든 대중은 총 2244명이다.

이들 결제대중을 향한 방장스님들의 법어 전문을 게재한다.



1 영축총림 통도사 방장 원명스님

“우주삼라가 온통 법의 산 일세”


 

설후시지송백조(雪後始知松栢操)요
사난방견장부심(事難方見丈夫心)이로다

눈이 내린 뒤라야 송백의 지조를 알 수 있고

어려운 일을 당해봐야 누가 장부인지 알 수 있다

 

벌써 구십일의 안거가 지나 해제 날을 맞았습니다.

과연 무엇을 위해 결제를 하고 해제를 합니까? 진정으로 마음이란 것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 대중들이 각자 한 입씩 생철을 씹었습니다.

얼마나 물러졌는지는 스스로가 잘 알 것입니다.

고인의 말을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혹독한 추위를 지내봐야 어느 것이

군자인지 알 수 있다고 말한 것처럼 대중들은 분명 마음속에 설산수도의

자세로 정진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해제하는 대중들은 수행자의

지조를 지녀야 합니다.

생철 같은 공부가 조금 물러졌다고 쉬어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순식간에 다시 단단하게 굳어져 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일하게 하라는

말을 간곡하게 하는 것입니다. 결제니 해제니 하는 말은 지혜롭게 완급을

잘 조절하라는 뜻이지 놓아 버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자아 다시금 다잡아 보세요.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고 분별력으로도

헤아릴 수 없는 그 맑은 눈앞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만 그것을 잡으려

하면 멀어져 버리는 그 신통한 물건이 무엇인지, 실체를 찾는 대중들은

각자 대력백우(大力白牛)가 되어서 허수아비에 속지 마십시오.

그 허수아비의 펄럭거림에 속아서 배고픔에 허덕이는 어리석음은

면해야 할 것입니다. 


 

 

   
고초폐의화작인(枯草弊衣化作人)한데
야금산수총의진(野禽山獸總疑眞)이라

가우유력겸명안(家牛有力兼明眼)하니
직입전중끽우신(直入田中喫偶身)이로다.

마른풀 헤진 옷으로 허수아비를 만들었더니
들새 산짐승들이 모두 긴가 민가 하네. 

우리 집에 힘세고 눈 밝은 소가 한 마리 있나니

성큼 성큼 밭으로 들어가 허수아비를 먹어버렸도다.

 

 

해제하고 나서는 대중들은 당당하게 본분을 향해 나가 보세요.

그랬다가 영축산으로 다시 돌아와 살찌고 맛난 향기로운 풀만

먹는다는 백우처럼 참 선지식이 되어 인천(人天)의 스승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허공강해개광취(虛空江海皆光翠)하고
우주삼라총법산(宇宙森羅總法山)이로다.

허공과 강 바다가 모두 푸르게 빛나니

우주삼라가 온통 법의 산 일세


2 고불총림 백양사 방장 수산스님

“가는 길 험난함이여 그대 다리 밑을 살펴보라” 


 

 
용이 노래하면 안개가 피어나고 호랑이가 소리를 지르면 찬바람 일어납니다.

출세간의 종지는 금옥(金玉) 소리가 서로 울려 퍼지는 것과 같고

사방으로 통달한 지략은 화살과 칼끝이 서로 버티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큰 세계 어디에서도 감추지 못하고 멀고 가까이에서 일제히 나타나며

고금을 밝게 분별합니다. ‘말해보십시오 이는 어떤 사람의 경계입니까?’

운문스님이 해제일에 이르러 대중 법문을 하였습니다.

고불(古佛)과 노주(露柱)가 사이좋게 지내는데 이는 몇 번째 등급입니까?

대중이 말이 없자 스스로 대신하여 말씀하였습니다.

“남산에서 구름이 일어나니 북산에 비가 내리도다.” 이 무슨 소식입니까?

이에 대해 출승(山僧)이 착어(着語)를 하겠습니다.

대중은 귀를 막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어린왕자의들꽃사랑마을

산고해심무측량 (山高海深無測量) 고왕금래전청벽 (古往今來轉靑碧)
천근경부막여교 (淺近輕浮莫如交) 지저습지생형극 (地底濕地生荊棘)

수도황금여토석 (誰道黃金如土石) 태고서산단소식 (太古西山斷消息)
행로난혜행로난 (行路難兮行路難) 군자간차각하저 (君自看且脚下底)

할(喝)

산 높고 바다 깊어 헤아릴 길 없는데
예나 이제나 더더욱 푸르기만 하여라

천박하고 경솔한 자와는 멀리 멀리 떠나고
땅이 낮고 습기 많으면 가시덤불만 나는 것이네

어느 누가 황금을 돌 같다고 말 하는가
고스님 서산스님 소식이 감감하다.

가는 길 험난하고 험난함이여
그대여 다리 밑을 살펴보라.  할!




3.  덕숭총림 수덕사 방장 설정스님

“自家의 참된 보배 어디에…”

오늘은 경인년 정월 십오일 동안거 해제일입니다.

결제(結制)에 결제(結制)가 없고 해제(解制)에 해제(解制)가 없어야

진정한 결제요 해제라 했는데, 금일 대중은 어떤 해제를 하였습니까?

해제(解制)란 견성성불(見性成佛)하여 생사영단(生死永斷)하는 대사

(大事)를 마쳐야 하는데 생사대사(生死大事)를 못 마쳤다하면 진정한

해제가 아닙니다.

해제란 견성(見性)하여 자가(自家)의 무진장보(無盡藏寶)를 찾아 미래제

(未來際)가 다하도록 사용하여 일체중생(一切衆生)을 향(向)해 감로법우

(甘露法雨)를 뿌려 영원(永遠)이 안락(安樂)케하고 영원(永遠)이 해탈

(解脫)케하는 공덕(功德)을 가지(加持)하는 것입니다.

군생(群生)들의 삶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정법(淨法)이요,

하나는 염법(染法)입니다 정법(淨法)은 열반적정(涅槃寂靜)의 길이요

염법(染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의 길입니다

정법(淨法)의 길은 밝고 깨끗하고 편탄하여 쉽고 아름다운 해탈의 길이요,

염법(染法)의 길은 어둡고 탁하여 험난하기 말할 수 없는 생사(生死)의

길이요 구속(拘束)의 길인데, 어리석은 중생들이 대부분 정법(淨法)의 길을

가지 아니하고 염법(染法)의 길을 가는 것은 광겁(曠劫)에 익힌 탐업(貪業)

때문입니다. 견성법(見性法)이 아무리 어렵다 해도 가장 편하고 좋은 길인데

탁업(濁業)이 많은 까닭에 마음으로 생사고(生死苦)를 싫어하면서도 도리어

생사업(生死業)을 짓고 있으니 참으로 업력(業力)의 무서움이 이토록 심할

수 있을까? 이래서 삼독(三毒)에 중독된 중생이라 했나봅니다.

정법(淨法)을 멀리하고 염법(染法)을 가까이 하는 것은 마치 구더기가

똥통에 처박혀 그것이 제일인줄 알고 삶을 즐기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아무리 불법(佛法)을 만나 중이 되었더라도 정법(淨法)을 익히지 않으면

그대로 속물(俗物)이요, 누구든지 진로(塵勞)에 살더라도 정법(淨法)을

수행(修行)하면 불제자(佛弟子)라 할 것입니다.

자가(自家)의 진보(珍寶)라. 자가의 참된 보배는 안에도 있지 않고,

밖에도 있지 아니하고, 중간에도 있지 않는데 그러면 자가진보 어디에 있는고?

주장일타후(柱杖一打後) 운(云) 


 


원래일점무심처(元來一點無尋處)
응물분명당현전(應物分明當現前)

영명고금상독영(靈明古今常獨映)
주야청광겁겁한(晝夜淸光劫劫寒)

원래 한 물건도 찾을 수가 없는데
사물에 응하면 분명 그 자리에 있도다.

밝고 신령스러움이 고금을 비쳐서
맑은 빛이 주야로 겹겹이 시리더라.



4 조계총림 송광사 방장 보성스님

“화두 끊임없이 들라”




지난 결제(結制) 구십일(九十日) 동안 정진(精進) 대중(大衆)은

나름대로 열심(熱心)히 공부(工夫)했다고 산승(山僧)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깨치는 것이 빠르고 더딘 것은 사람마다 인연(因緣) 시절(時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중국에 영운선사(靈運禪師)는 삼십년(三十年)을 공부(工夫)해서 깨치고

고봉선사(高峰禪師)는 칠일(七日)만에 깨쳤습니다. 영운선사(靈運禪師)의

오도송(悟道頌)을 소개(紹介)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삼십년래심검객(三十年來尋劒客)이여
기도락엽기추지(幾度落葉幾抽枝)요

자종일견도화후(自從一見桃花後)로
직지여금갱무의(直至如今更無疑)로다.

삼십년(三十年)동안 애써 정진(精進)하는 동안

새싹이 돋는 봄과 낙엽(落葉)이 지는 가을을 몇 번이나 겪었던고.

복숭아꽃이 활짝 핀 것을 한 번 보고 나서

이렇게 모든 의심이 한꺼번에 없어졌네

 

하였다.

봄은 공부가 잘 될 때요 가을은 공부가 안 될 때를 가르치는 말입니다.

공부(工夫)하는 사람은 화두(話頭)만 열심(熱心)히 할 뿐 빨리 깨치겠다는

욕심(欲心)은 없어야 된다. 속효심(速效心)을 가지고 공부(工夫)하는

병(病)만 생기고 사견(邪見)도 일어나서 바로 깨치기 어렵고 깨친다

하더라도 정력(定力) 없는 건혜(乾慧)일 뿐이니 건혜(乾慧)로써 어찌

생사를 해탈(解脫)하겠는가? 
 

 


부설거사송(浮雪居士頌)에

가사설법여운우(假使說法如雲雨)하야
감득천화석점두(感得天花石點頭)라도

건혜미능면생사(乾慧未能免生死)하니
사량야시처부부(思量也是處浮浮)로다

설사 법문을 구름 피듯 비 내리듯 잘 해서
하늘이 감동해서 꽃비가 내리고 돌이 고개를 끄덕인다 해도

건혜로는 생사(生死)를 면할 수 없으니
생각해 보면 허무하고 부질 없는 짓이로다 하였다.


금일(今日) 대중(大衆)은 남이 알아주기도 바라지 말고

깨치기도 바라지 말고 결제(結制) 해제(解制) 상관 없이 간단(間斷) 없는

화두(話頭)로 끊임없이 공부(工夫)하면 자연(自然)히 시절인연(時節因緣)

이 도래하여 얼음 녹듯 눈 녹듯 의심(疑心)이 사라지고 공안(公案)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송풍한(松風寒)하니 사면(四面) 청산(靑山)이요
추월명(秋月明)하니 일천여수(一天如水)로다

솔바람이 차니 사면이 모두 푸른 산이요
가을달이 밝으니 온 하늘이 물처럼 맑도다.


주장자(杖子)를 세 번 구르고 하좌(下座)하다.
 

 

[불교신문 2602호/ 3월3일자]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