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성원사 회주인 여강당 주경 큰스님께서 4월 26일 새벽 홀연히 입적했다. 한해 평균 50여회 이상 법석을 펼치셨던 주경 스님은 이 시대의 설법제일인 부루나 존자로 통한다. 이 법문은 다르마 법우회가 2005년 8월 24일 일산 사법연수원에서 주최한 주경 스님 초청법회에서 설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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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성원사 회주인 여강당 주경 큰스님이 4월 26일 새벽 홀연히 입적했다. 해마다 50회 이상의 법석을 펼쳤던 주경 스님의 미소가 평소 스님의 모습처럼 걸림없이 자유롭고 소탈해 보인다. |
북풍이 불면 북쪽에서 달려 온 말은 고향 생각이 난다고 합니다. 우리 중생도 고향을 떠난 나그네입니다. 그러기에 부처님 법을 바로 알고 행해야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불법을 두고 법이라 하기도 하고 반야라 하기도 하며 중용, 도라고도 합니다만 저는 불법이란 ‘다운 것’ 또는 ‘답게 사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남자는 남자답고, 아내는 아내답고, 스님은 스님다워야 합니다. 여러분은 앞으로 검사나 판사가 되실 분들입니다. 지금은 사법연수생으로서 공부하고 있지만 차후에는 검사, 판사, 변호사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불교도 발전하고 세상이 변합니다. 지금의 사회를 질타하기에 앞서 우리 불교계부터 돌아보아야만 합니다. 교계 안팎으로 고쳐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겠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는 진정한 불공과 불사가 무엇인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불공이란 마지 올리는 것만을 이르지 않습니다. 부처님께 꽃과 향을 올리는 것이 불공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진실한 의미의 불공에서 보면 100분의 1도 안 되는 불공입니다. 부처님을 복주는 신으로 알고 스님을 점쟁이로 알고 있는 게 지금의 우리 현실입니다. 잘못 되도 한참 잘못돼 있습니다.
부처라 하면 이 마이크도 부처요, 탁자도 부처이며, 냄새나는 이 법사의 몸뚱이도 부처로 되어 있습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이 세상의 모든 물질을 쪼개어 보십시오. 물질을 쪼개면 분자, 원자, 전자, 중성자, 소립자 등으로 쪼개집니다. 남는 것은 파동치는 에너지 뿐입니다. 우리 불교에서는 물질에 있어서 최소의 물체를 극미(極微), 가장 큰 물체를 기세간(器世間)이라 하는데 기세간이란 우주를 말합니다.
자신을 쪼개다 보면 佛性만 남아
‘대비바사론’에 의하면 단위에 대해 극미(極微), 미진(微塵), 동진(銅塵), 수진(水塵), 토모진(鬼毛塵), 양모진(羊毛塵), 우모진(牛毛塵), 향유진(向遊塵) 등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티끌보다 더 미세한 것이 우모진(牛毛塵)입니다. 마치 소터럭의 끄트머리 같은 그 정도로 작다는 말입니다. 양모진(羊毛塵)으로 양털 끄트머리 정도, 토모진(兎毛塵)은 토끼털 끄트머리 정도입니다. 제일 작은 단위를 가리켜 극미진이라 이릅니다.
중생이 너무 물질에 집착하니 ‘분석하면 모든 존재들이 다 허망하게 비어 버린다’는 진리를 알려주기 위한 방편입니다. 이를 일러 석공관(析空觀)이라 하는데 물질을 분석해서 공으로 돌아가는 관법(觀法)입니다. 극미진 단계에 이르면 빈 공간인데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그런 공간 개념이 아닙니다. 이 단계를 불교에서는 인허(隣虛)라 합니다. ‘빈 것과 이웃 한다’는 뜻에 유념해야 합니다. 결국 사람은 쪼개고 보면 마음 하나 남습니다. 바로 이 마음이 오염되면 팔과 다리, 눈, 코, 입이 오염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보면 선한 마음은 우리 자신을 정화해 준다는 것입니다.
인허는 묘유라 해 불가에서는 ‘진공묘유’라 이릅니다. 바로 우리 인간이라는 물질을 모두 쪼갠 후 들여다보면 다른 물질과 마찬가지로 순수한 에너지만 남는데 바로 그 순수한 에너지가 불성입니다. 이 우주 공간에는 그러한 순수한 에너지로 꽉 차 있습니다. 그러기에 부처 아닌 것이 없고 마음이 부처라 하는 것입니다. 불사(佛事)란 절 짓는 것만을 이르지 않습니다. 불사에서 사(事)는 모실사입니다. 부처님을 모시는 일이 불사인데 우리는 대웅전에 모셔진 부처님만 모시는 게 불사인줄만 알고 있습니다.
우리 몸뚱이 자체가 부처입니다. 여러분의 아내와 자식이 부처입니다. 그 분들을 어떻게 모셔야 하겠습니까? 간단합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며 모시면 됩니다. 자비에서 자(慈)는 즐거움과 더불어 하고 비(悲)는 고통을 뽑아냅니다. ‘고맙습니다’하는 것은 자와 함께하는 것입니다.
긍정하는 그 마음이 부처님 성품
타인의 고통을 나누려 하는 마음은 자비와 함께 합니다. 따라서 자비를 내는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서는 광채가 발산됩니다. 바로 그 광채가 불성광명입니다. 따라서 간절한 마음이 불공이요 불사입니다. 아미타불도 진실하게 염송해야 나옵니다. 다른데서 나투는 게 아니라 자기 몸에서 나투는 겁니다. 그러나 업장이 두터운 사람은 그리 쉽지만은 않습니다.
업장은 여러분들이 화를 내고 욕심 낼 때 더 쌓입니다. 화를 내면 몸에서 먹구름 같은 아지랑이가 생깁니다. 그 아지랑이 색깔은 화 낼 때, 욕심 낼 때, 남을 욕할 때 다 다릅니다. 하나만 말하면 한이 많은 사람의 아지랑이 색깔은 푸르스름하고 시커먼 냄새가 납니다.
우리 몸은 약 60조의 세포로 구성돼 있다고 합니다. 그 하나하나의 세포는 매일 순간순간 죽기도 하고 재생되기도 합니다. 한 찰나의 순간에도 세포는 죽고 삽니다. 여러분이 화를 낸 순간에 재생된 세포는 어떤 세포이겠습니까? 아주 부드럽고 온후한 세포일까요? 여러분이 자비심을 일으킨 그 순간 재생된 세포는 어떤 성질의 세포이겠습니까? 딱딱하고 탁한 세포일까요? 법문을 듣는 순간의 세포, 독송을 하는 순간의 세포, 아들과 대화를 나누는 순간의 세포, 욕을 하고 있는 순간의 세포, 도둑질 하는 순간의 세포 등 각각의 세포 성질은 모두 다릅니다. 그 세포가 결국 자신의 몸이요, 의식이요, 마음입니다.
법화경을 수지독송 하면 귀의 천이백 공덕을 받아 삼천대천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코의 팔백 공덕을 받아 세상의 모든 향기를 맡으며, 혀의 천이백 공덕을 받아 어떤 음식도 좋은 맛으로 느끼고, 몸의 팔백 공덕을 받아 청정한 몸을 받으며, 뜻의 천이백 공덕을 받아 한량없는 이치에 통달할 수 있습니다. 경전을 독송해도 이러할 진데 스스로 참회하며 자비심을 낸다면 그 공덕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여러분 복을 받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웃는 씨앗을 심으세요. 봄에 좋은 씨앗을 심어야 가을에 풍성한 열매를 얻듯이 지금 이 순간 좋은 씨앗을 심어야 미래와 내세에도 좋은 열매 즉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너무나 당연하지만 누구도 쉽게 실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에게서 나오는 자비의 광채가 우주를 정화시키기도 합니다. 나라는 울타리를 벗으면 자연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1 6월
2 황룡사 터
어느새 그토록 분주했던 오월이 가네요.
무진장 회원 여러분
더 멋진 유월 맞으시고
늘 행복하십시오.
2 보문단지 논 가운데 서있는 탑
경주 보문단지 옆에 있는
천군동사지에는 어느새 모내기가 끝이 났네요.
모내기는 윗지방에서 부터 밑으로 내려오면서
시작하는 것 같더군요.
아름다운 유월입니다.
4 유월의 하늘아래
경주 남산 보리사에서....
5 혹시 아시나요? - 용두석
많은 회원님들께서
순천 송광사를 다녀오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혹시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보시면
송광사 우화각이 서 있는 삼청교(능허교라고도 함) 아래
홍예에 삐죽이 튀어 나온 용두석을 보셨나요?
홍예교를 축조할 때 양쪽에서 쌓아 온 석재가 만나는
다리 중앙 마구리에 보통은 멍에석을 끼우는데
때론 장식의 의미를 주면서 벽사를 상징하는
용두석을 끼우기도 합니다.
홍예교엔 이 용두석 때문에
용두석을 빼면 다리가 무너진다는 전설이
늘 따라다니곤 하지요.
송광사 삼청교 홍예에도 용두석이 끼워져 있는데
이 용두석의 끝에 달려있는 정체을 알수 없는
동그란 물체는 무엇일까요?
정답을 맞추신 분께 상을 드릴까요? ^^*
2
송광사 능허교 용두석이 물고있는 것은
"엽전 석 냥"입니다
예로부터 불가에서는 ‘돈에도 생명이 있다’고 했습니다.
시주자의 생명과도 같은 정성이 담겨있기에 돈을 함부로 쓰지 않았습니다.
순천 송광사에는 옛 스님들이 속세의 돈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져 옵니다.
조선 숙종 33년(1707)경 송광사에 돌다리를 세울 때였습니다.
주지스님은 다리불사를 위해 예산을 세우고 화주를 시작했습니다.
무사히 불사를 회향하고 나니 동전이 세 냥이 남았다는군요.
돌다리 불사는 끝났는데 남은 돈이 문제였습니다.
시주 받은 금품을 다른 일에 쓰는 것은 호용죄(互用罪)에 속하는 것으로
율장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대중스님들은 돌다리 아래 손이 닿지 않는 용머리에 철사를 꿰어
남은 돈을 매달아 두기로 했습니다.
훗날 돌다리를 보수하거나 새로 건립할 때 보태 쓰도록 한 것입니다.
이처럼 시주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송광사 스님들의 마음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이지요.
몇 년 전에 송광사 능허교 아래 용두석 사진을 찍은 후
집에 돌아와서 사진을 확인하는데 참으로 우연히
사진 속 용두석에 엽전이 달려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후로 용두석 엽전의 내력과 홍교에서 용두석의 용도가 궁금하여
홍교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시엔 단시간에 엽전 석 냥의 사연을 알아내지 못하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 능허교에 엽전 석 냥이 걸린 사연을 알았지요.
홍교 용두석에 더러는 종(鐘)을 달기도 했다는 것도 아울러서요.
우리나라에서 돌로 만든 다리는 크게 두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형교(형橋-평석교, 널다리교)와 홍교(虹橋-홍예교, 무지개다리)로 나누고요.
형교는 교각을 세우고 그 위에 널을 깔듯 판돌을 건너질러 만든 다리이고,
홍교는 교각 대신 다듬은 돌로 무지개 모양의 홍예를 만들고 그 위를
돌이나 흙으로 메운 다리입니다.
< 형교 - 전남 함평군 고막천석교>
< 홍교 - 경남 창녕 만년교>
둘 중에 형교가 월등하게 많이 축조 되었습니다.
고도의 기술과 공력을 필요로 하는 홍교에 비해
형교는 상대적으로 축조가 수월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현존하는 다리는 단연 홍교가 앞섭니다.
홍교가 구조적으로 훨씬 안정성이 있고 내구성이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홍예교를 만드는 아치(arch) 기술은 로마에서 페르시아를 거쳐
중국에 전달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아치 기술을 이용하여 만들어진 홍예교는 신라시대에 당나라에서
처음으로 도입하여 다리 가설에 응용하였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우리나라 교량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평양주대교(平壤州大橋)(414)와 웅진교(熊津橋)(498) 가설에 관한 내용이지만
그러나 이 기록만으로는 다리의 재료와 형태를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현존하는 돌다리로서 오래된 것은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가설된
불국사의 청운교와 백운교, 그리고 연화교와 칠보교가 있지요.
비록 계곡을 건너는 홍예교는 아니지만 우리나라에서 승선교에 버금가는
유명한 돌다리로서 불국사의 청운교와 백운교를 빼고는 말할 수가 없겠지요.
홍교에는 외부로부터 잡귀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기위해
벽사시설을 설치하기도 하는데 각종 상서로운 돌짐승과 귀면 등을 조각하여
설치하고 있습니다.
그중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 마지막 마구리면에 끼우는 종석에
용머리를 조각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제 나름 용두석을 중심으로 알아본 우리나라 홍교는 대충 아래와 같습니다.
물론 비전문가의 조사이니 완전할 수는 없겠지요 ^^*
혹 오류나 누락된 것이 있으면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강진군 병영성 홍교 1417년 축조 전남유형문화재 제129호 (용두석 有)
광한루 오작교 1461년 축조 명승 제33호
서울시 창덕궁존덕정 홍교 1469년 축조
흥국사 홍교 1639년 축조 보물 제563호 (용두석 有)
건봉사 능파교 1704년 축조 보물 제1336호
고성군 육송정 홍교 1704년 추정 보물 제1337호
송광사 삼청교(능허교) 1707년 축조 전남유형문화재 제59호 (용두석 有)
선암사 승선교 1713년 축조 보물 제400호 (용두석 有)
선암사 하승선교 숙종 대 추정
서울시 홍지 수문교 1715년 축조 서울유형문화재 제33호
보성군 벌교 홍교 1729년 축조 보물 제 304호 (용두석 有)
논산시 원목다리(원항교) 1730년 축조 충남유형문화재 제10호 (용두석 有)
논산시 강경미내다리 1731년 축조 충남유형문화재 제11호 ( 형태미상 동물상 有)
창녕시 영산 만년교 1780년 축조 보물 제564호
수원시 화성 화홍문 1796년 축조
진도군 남동리 쌍운교 1870년 추정
고흥군 옥하리 홍교 1871년 축조 전남유형문화재 제73호 (용두석 有)
고흥군 서문리 홍교 1871년 축조 전남유형문화재 제73호 (용두,용미 有)
진도군 남동리 단운교 1930년 추정
<조만간 이 모두를 답사해야겠지만.>
얼마전 선암사를 다시 답사하면서 제 개인적 최고의 관심사는
선암사 승선교 용두석에도 과연 송광사 능허교와 같이 엽전 석 냥이
달려있는지 여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엽전 석 냥의 이야기는 오직 송광사만의 것인지
아니면 조계산을 가운데 두고 마주보고 있는 선암사에도
그 감동적 교훈이 미치고 있는지?
< 선암사 승선교>
선암사에 가면 늘 승선교에서 강선루 쪽을 바라보며
사진을 찍곤 했는데 이번에 좀 어려웠지만 강선루 쪽으로
건너가서 용두석의 정면을 보면서 가능한 한 크게 확대해서
사진을 찍어 보았습니다.
결과는 아래 사진과 같습니다.
용두의 모습은 승선교에 걸맞는 가히 일품의 조각이었습니다.
< 선암사 승선교 용두석 >
지난날 불교정화운동으로 태고종으로 종단을 바꾼 이래
사찰 재산을 가지고 조계종과 아직까지 지루한 법정싸움을 벌리고 있는
선암사의 승선교 용두에도 역시 엽전 석 냥이 달려 있었습니다.
조계종 승보종찰인 송광사에도 태고종 종단인 선암사에도
엽전 석냥의 교훈이 홍예교 용두석을 통해 서릿발 같이 전해지고 있건만
조계종과의 재산 싸움 때문에 선암사는 아직까지
순천시에서 재산 관리를 하는 웃지 못 할 수모를 당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저런 이유로 불사를 일으켜 옛 모습을 잃어가는
일부 고찰들과는 달리 옛스러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선암사를 본다는 것은
우리 같은 답사객에게는 오히려 다행스런(?) 일인지도 모릅니다.
엽전 석 냥의 교훈은 오직 불가의 이야기만은 아니겠지요?
좋은 그림 올려주신 이연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