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7. 8. 20:08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80. 부처님 가르침은 다 반야심경(般若心經) 정도는 아시는 바와 같이 제법(諸法)이 공(空)이라, 제법은 일체(一切) 만유(萬有)를 다 가리키고 있습니다. 일체 만유가 다 공입니다.
우리 지구 땅덩어리라든가, 또는 그 은하(銀河) 세계의 - 은하세계도 끝도 갓도 없는 것인데 - 모두 무수 백억의 그런 각 별들이 모두가 다 텅텅 비어있단 말입니다. 그런 것들이 생겨날 때도 역시 그것도 물질이 물질을 낳은 것이 아니라, 『원래는 물질이 아닌 것인데 다만 우리 무명심(無明心)이 동(動)해서 잘 못 보아서 현상으로 봅니다.』
여러분 가운데서는 철학(哲學)도 공부를 하신 분들이 많이 계시리라고 믿습니다마는, 이른바 칸트 철학은 그야말로 굉장히 천재적(天才的)인 동시(同時)에 위대한 철학 아닙니까. 칸트 철학이 위대한 것은 무엇인고 하면은 우리 인식(認識)이 - 인식은 좋다, 궂다 느끼는 즉, 말하자면 마음의 관념(觀念) 작용(作用)아 아니겠습니까.
우리 인식이 객관적(客觀的)인 것이 아니고 우리 인식이라는 것이 저 밖에 있는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식주(認識主)인 내 주관(主觀)을 떠나서 인식이 성립(成立)될 수가 없단 말입니다. "모든 인식은 우리 주관에 의존해 있다." 이것이 칸트의 이른바 인식론(認識論)의 대요란 말입니다.
모든 인식(認識)은 자기(自己) 주관(主觀)에 의존(依存)해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우리는 생각할 적에 '미운 놈 저놈 곧 죽이고 싶다.' 이럴 때가 더러 있겠습니다마는 이런 때도 그 대상(對象)이 내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관념(觀念)입니다. 물론 행동이 좋지 않아서 그런 나쁜 행동(行動)도 있겠습니다마는 아무튼 그런 나쁜 사람이라 하더라도 부처님께서 보시고 성자(聖者)가 보신다고 생각할 때 어떻게 볼 것인가? 이런 때는 그렇게 안봅니다. 곧 죽일 놈이라 하더라도 미울 수가 없습니다.
다만 본래는 부처님인데, 본래는 부처와 똑같은 하나의 그야말로 생명(生命) 존재인데, 다만 그 잘못 생각해서 그 버릇 때문에 나쁜 행동을 나한테 보이는구나, 이렇게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부처님 은혜(恩惠) 가운데도, 저는 가끔 이야기 합니다마는 은승창열(隱勝暢劣)이라! 숨을 은(隱)자, 수승할 승(勝)자, 좋은 점은 숨겨놓고서, 창열이라! 나타날 창(暢)자, 용열할 열(劣)자 말입니다. 좋은 것은 -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 하는 그야말로 참 조금도 간격도 없는 그러한 진여불성을 숨겨놓고서 그냥 나쁜 상(相)만, 못된 그런 현상(現象)만 우리한테 보인 은혜란 말입니다.
똑같은 부처는 부처인데 어느 것 하나도 부처 아닌 것이 있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불법(佛法)이 성립(成立)이 못됩니다. 나도, 너도 어느 티끌 하나도 모두가 다 불법 가운데 다 포함되어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나쁜 사람도 지금 곧 죽일 듯이 미운 사람도 역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도 부처님 은혜란 말입니다.
즉, 말하자면 무슨 은혜인가?
그 불성이라 하는 그 소중한 영원(永遠)히 변치 않는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불구부정(不垢不淨)한 그러한 생명 자체는 숨겨 놓고서 우리한테 겉만, 겉의 상만 나쁘게 보인단 말입니다. 그런 은혜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世上)에 감사(感謝)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바르게 판단하면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실상을, 실존을 우리가 느낀다고 생각할 때는 사실은 감사할 뿐입니다. 누구한테 따귀를 얻어맞아도 감사하고, 그러기에 정말로 참, 겸허한 사람들은 누가 얼굴에 침을 뱉어도 말입니다. 자기 손으로나 손수건으로나 침을 닦으려고 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어째서 그러는 것인가? 그 사람이 무안할까 보아서, 까닭 없이 애매하게 침을 뱉어도 말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그냥 참기도 어렵겠지요. 그러나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닦지도 않는단 말입니다. 그 사람이 무안(無顔)할까 보아서, 그런 것도 역시 그렇게 하라고 시키면 쉽게 할 수가 없습니다.
현상만 생각할 때는 근본(根本) 뿌리를 생각하지 않고, 본래 성품(性品)을 생각하지 않고 현상만 생각할 때는, 곧 매 깨나 들고 - 한 대 맞으면 - 두, 세대를 때리고 싶겠지요. 부처님 제자라는 것은 어째서 부처님 제자인 것인가? 그런 형상만 밉고 곱고 그런 상만 안보고서 본 성품을 본단 말입니다. 성품을 볼 때는 우리 불자(佛子)가 일반 중생과 차이가 있습니다.
현대인의 불행은
모자람이 아니라 오히려 넘침에 있다.
모자람이 채워지면 고마움과 만족함을 알지만
넘침에는 고마움과 만족이 따르지 않는다.
우리가 불행한 것은 가진 것이 적어서가 아니라
따뜻한 가슴을 잃어 가기 때문이다.
따뜻한 가슴을 잃지 않으려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동물이나 식물등 살아 있는 생물과도
교감할 줄 알아야 한다.
자기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마찬가지로 자기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하다.
그러므로 행복과 불행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고 찾는 것이다.
행복은 이웃과 함께 누려야 하고
불행은 딛고 일어서야 한다.
우리는 마땅히 행복해야 한다.
자신의 생각이 곧 자신의 운명임을 기억하라.
우주의 법칙은 자력과 같아서,
어두운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 어두운 기운이 몰려온다.
그러나 밝은 마음을 지니고 긍정적이고 낙관적으로 살면,
밝은 기운이 밀려와 우리의 삶을 밝게 비춘다.
밝은 삶과 어두운 삶은 자신의 마음이
밝은가 어두운가에 달려 있다.
그것이 우주의 법칙이다.
사람은 저마다 홀로 자기 세계를 가꾸면서
공유하는 만남이 있어야 한다.
어느 시인의 표현처럼
'한 가락에 떨면서도 따로따로 떨어져 있는 거문고 줄처럼'
그런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거문고 줄은 서로 떨어져 있기 때문에 울리는 것이지,
함께 붙어 있으면 소리를 낼 수 없다.
공유하는 영역이 너무 넓으면 다시 범속에 떨어진다.
어떤 사람이 불안과 슬픔에 빠져 있다면
그는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시간에
아직도 매달려 있는 것이다.
또 누가 미래를 두려워하며 잠 못 이룬다면
그는 아직 오지도 않을 시간을
가불해서 쓰고 있는 것이다.
빗방울이 연잎에 고이면
연잎은 한동안 물방울의 유동으로 일렁이다가
어느 만큼 고이면
수정처럼 투명한 물을 미련 없이 쏟아 버린다.
그 물이 아래 연잎에 떨어지면
거기에서 또 일렁이다가
도르르 연못으로 비워 버린다.
이런 광경을 무심히 지켜보면서,
'연잎은 자신이 감당할 만한 무게만을 싣고 있다가
그 이상이 되면 비워버리는구나' 하고
그 지혜에 감탄했었다.
그렇지 않고 욕심대로 받아들이면
마침내 잎이 찢기거나 줄기가 꺾이고 말 것이다.
세상사는 이치도 이와 마찬가지다.
오늘날 인간의 말이 소음으로 전락한 것은
침묵을 배경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이 소음과 다름없이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말을 안 해서 후회되는 일보다도
말을 해버렸기 때문에
후회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입에 말이 적으면 어리석음이 지혜로 바뀐다.
말하고 싶은 충동을 참을 수 있어야 한다.
생각을 전부 말해 버리면 말의 의미가
말의 무게가 여물지 않는다.
말의 무게가 없는 언어는
상대방에게 메아리가 없다.
말의 의미가 안에서 여물도록
침묵의 여과기에서 걸러 받을 수 있어야 한다.
- 법정스님의 " 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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